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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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3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11 ✦
“골로새에 전해진 복음: 값을 매길 수 없는 복음의 열매”
(골로새서 1장 1~8절)
1. 골로새 교회에 대하여
한국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지만 한국 초기 선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중국 만주로 파송된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입니다. 조선 후기의 조선인들 가운데 중국어와 만주어가 모두 가능한 진취적이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북한 땅 의주를 중심으로 중국에 국경 무역을 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려 인삼(홍삼)과 금, 납, 문종이 등을 들고 만주 통화현 고려문(지금의 단둥 지역)을 방문했다가, 중국에서 사역하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던 두 선교사들과 만나게 됩니다.
가장 첫 선교사로 알려진 미국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 항으로 들어온 것이 1885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11년 전인 1874년 존 로스 선교사는 국경무역상인들 중 이응찬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합니다.
사실은 존 로스가 북경에 있었는데, 보니까 조선이 저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선교를 하면 어떨까 해서 선교본부에 ‘조선에 선교를 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하는 것이나 잘하라!’ 그래도 계속 부담을 주셔서 압록강 근처의 단둥으로 옮겨서 성경 번역 사역을 먼저 해보겠다고 했고, 그것은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단둥 지역인 고려문에 가 있던 것인데, 거기서 이응찬을 만나 그와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한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상륜이라는 사람을 만나 누가복음도 번역합니다.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 장사를 위해 만주 영구에 왔다가 열병에 걸렸는데, 그때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전도를 받아 만주 우장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때가 1879년입니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열병에서 완쾌된 후 그는 존 로스 선교사의 한국어 선생이자 성경 번역자가 됩니다. 존 로스 선교사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영국 선교 본부에 보내는 문서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매킨타이어는 네 사람의 조선인 유생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장차 거두어들일 풍성한 수확의 첫 열매라고 확신합니다. 현재는 조선이 서방 세계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지만 곧 쇄국의 빗장이 풀릴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조선인은 중국인보다 덜 악하고 종교성이 깊어, 기독교가 전파되기만 하면 급속도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1883년 서상륜은 조선말로 번역된 성경을 들고 전도인이 되어 황해도 송천(솔내/소래)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의 시작이 됐습니다.
이렇게 한국 선교가 한국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은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골로새 교회도 골로새를 한 번도 빙문하지 않은 바울 사도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세기 당시 바울의 소아시아 선교의 핵심 거점은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때 2년 이상 에베소에 머물며 소아시아 각처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의 의의는 복음이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 갔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일까지 살펴본 본문에서 1차를 마쳤습니다. 구브로를 거쳐 갈라디아로 복음이 전해진 것이 1차 전도여행입니다. 2차 때는 안디옥에서 거꾸로 가면서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갔습니다. 2차 때는 더 넓은 지역을 다녔는데, 그 중 에베소에는 거의 3년 가까이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육하며 길러냈던 것입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9-10)
골로새는 우리가 주일에 살펴본 갈라디아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 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 에베소인데, 에베소에 와서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훈련받은 제자들 중에 골로새 사람 에바브라와 빌레몬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 나오는 “아시아에 사는 자” 가운데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라와 빌레몬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 골로새 교회가 세워지고 골로새 지역에 복음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6-7절)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 학생이 시험을 치르는데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 필요한 3대 영양소는 무엇인가?” 그 학생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은 생각났는데 세 번째 것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답을 적었습니다. “비계.” 정답은 지방이었습니다. 비슷하긴 합니다.
우리의 육체적 건강을 위해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도 3대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 요소가 복음을 들은 결과로 얻은 열매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4-5절)
2. 골로새에 전해진 복음의 열매
이렇게 골로새에 전해진 복음이 골로새 성도들 안에서 맺은 세 가지 열매를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골로새 교인들에게 영적 건강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그들 중 다수는 ‘영적 지식'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골로새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믿음을 흔드는 이단 사상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하고 신비한 영적 지식이 있어야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요즘 신천지 사람들이 비유 풀이를 아느냐고 하며 접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복음을 전해 받은 첫째 열매는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줍니다. 그 믿음은 정의되지 않고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신념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고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오직 그분만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신뢰하며 그분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던 시절,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이나 권력을 믿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신들의 믿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며 복음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2) 성도들에 대한 사랑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림들은 즉시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식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자매들의 영적 가족공동체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용납하고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확실한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후 자신의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새)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시면서 ‘이것을 너희가 실행하면 사람들이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서 ‘예배하라’, ‘기도하라’, ‘말씀을 읽으라’, ‘봉사하라’, ‘전도하라’, ‘선교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거나 봉사하거나 전도하거나 선교할 때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들은 그것을 보고 ‘아, 이 사람들은 정말 예수의 제자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사랑할 사람을 고르고 선택해서 사랑하는 반쪽짜리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그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희생의 사랑입니다. 또 자기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발을 씻겨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 체면이나 위신을 따지지 않습니다.
20세기 기독교 철학자이고 사상가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이퍼(Francis Schaeffer)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 큰 영향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분은 1955년 자기 아내와 함께 스위스의 후에모즈(Huemoz)라는 곳에 라브리(L’Abri) 공동체를 세우고, 방문 오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철학적, 종교적 대화를 나누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 사역을 하는 가운데 쉐이퍼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표지가 무엇인가 질문하면서,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실천한 사랑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책이 성경에 골로새서 외에도 한 권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짧지만 아주 감동적인 책인데,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뭐라고 시작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몬 1:1-2, 새)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가정교회로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골로새 교회와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중요한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일찍이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 재산의 피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빌레몬에게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 사도로부터 편지 한 통이 옵니다. 바로 그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바울 자신을 만나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이제 그를 돌려보내니까 자기를 봐서라도 용서하고 한 가족으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몬 1:10-12, 15-16, 새)
이 편지를 받은 빌레몬이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아니, 오네시모 이 녀석이 내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가더니 감히 바울 선생님을 꼬여서 나를 설득하려고 해?’라고 화가 났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빌레몬은 놀라운 섭리로 오네시모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오네시모가 돈을 훔쳐 도망갔든지 뭔가 재정에 큰 손해를 끼치고 갔으니까 얼마나 마음이 쓰렸겠습니까? 오네시모를 생각하면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 어디 가서 뭐 하고 있나?’
그렇게 오네시모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바울의 전도를 받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가 로마까지 가서 그것도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기적이 아닙니까? 확률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정말 놀랍습니다.
빌레몬서에는 그 결과까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사를 보면 오네시모는 나중에 에베소 주교까지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빌레몬이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의 능력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 바울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몬 1:17-18, 새)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해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용서와 희생과 포용과 섬김의 사랑을 실천해보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형제자매로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함에 있어 기꺼이 희생의 값을 치르는 연습을 하는 가운데 삶의 보람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교회야말로 참 복음을 소유한 교회이며 복음에 순종하는 교회라고 믿습니다. 복음의 열매는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 조직을 갖추고 있고, 훌륭한 말씀공부 체계가 세워져 있고, 뜨거운 예배가 있고, 전도나 선교를 많이 하더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보고 기뻐하며 감사한 것은, 그런 복음의 열매를 골로새 교회 가운데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3-4절)
3)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5절)
성경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땅에 보물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마 6:19-21, 새)
주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는 좀이나 녹이나 도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은 궁극적으로 이 땅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소망이지만, 동시에 그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기업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날부터 사실상 우리는 이 소망을 누려 왔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 복음을 위해 우리의 삶을 헌신할 때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적은 액수라도 목장에서 협력하는 선교사님을 위해 선교헌금을 내서 걷어 기도하고 보낼 때, 바로 그것이 하늘에 상급을 쌓아놓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며 봉사하는 것,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길을 내밀어 도운 것이 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는 것입니다.
가끔 천국 신앙을 비현실적인 신앙이나 기복신앙으로 비하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동기가 겨우 천국에 가기 위한 것 때문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끝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이기적이 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는 이유는 오히려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 다음에 올 영원한 나라를 참으로 믿는다면, 이 땅을 떠날 때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정말 믿는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이해관계에 그렇게 너무 민감하게 굴거나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왜 그렇게 남을 못 살게 굴고 괴롭히고 미워하고 으르렁거리고 속이고 그럽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정말 들어간다는 것, 저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닙니까?
순교자들의 당당함은 바로 이 천국 신앙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자기를 받아주셔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그들이 정말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정말 있으면 여기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대충 살라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에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조금 뭐가 안 좋아져도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요 14:1-3, 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 집, 즉 천국에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셔서 그들이 그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3년, 강남세브란스 암센터 원장이었고 국내 유방암 치료의 권위자였던 이희대 박사가 향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희대 박사는 2003년 대장암에 걸린 이후 무려 열두 번이나 암이 재발하는 암 4기의 인생을 살면서도 다른 암 환자들을 수술하고 환자들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강남 암 환자 기도회에는 힝장 맨 앞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가 그토록 힘든 투병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살며 <희대의 소망>이라는 책까지 펴냈는데, 그 이유를 그는 암 4기 건너편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5기를 준비해두고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안에 일하시던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가 쓴 책에 보면 이희대 박사는 암의 통증이 괴롭힐 때마다 그가 돌보던 한 환자를 기억해냈습니다. 자신보다 오히려 의사인 자신을 위로해주고 유난히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죽음을 너무나 평안히 맞이한 그분을 지켜보며, 결국 그 이유는 단 하나, 영생의 확신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희대 박사는 그를 지켜보며 자신 또한 의사의 사명과 복음에 빚진 자로서의 사명을 일깨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던 그도 이제 동일한 평화와 소망 가운데 그의 사명을 마치고 천국에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고 복음의 궁극적인 열매, 바로 하늘에 쌓아둔 소망입니다.
우리 삶이 이 땅에서 언제 끝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나이가 많다고 꼭 먼저 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젊다고 꼭 늦게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매순간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이 땅에 사는 매순간 이 세 가지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며 살아감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