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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9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6 ✦
“로마에 전해진 복음: 세상과 인간을 바꾸는 유일한 해답”
(로마서 1장 1~17절)
1.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요즘 우리는 문화나 문명이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새로 나온 것들이 참 많습니다. 폰으로도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번 월요일에 교회협의회의 올해 마지막 모임으로 어느 목사님 댁에서 저녁 때 모였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요즘은 실제로 여행지에 굳이 갈 필요가 없고 VR을 끼고 보면 유명한 곳을 실제처럼 다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었느냐? 굳이 다 갈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그런데, 그래도 현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음식이 중요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문명은 무엇이었는가 할 때, 그것은 로마입니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15권이 나왔는데, 아직도 전 세계에 스테디셀러로 팔리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다고 느껴집니다.
로마가 건국된 BC 753년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AD 476년까지, 그리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543년까지 계산하면, 무려 2천 년 이상의 시간 동안 세상에 존재하며 로마 문명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는 정복하는 곳마다 새 도로를 깔고 새 다리를 놓았습니다. 또 수로 시설과 공공 목욕탕을 건설했으며, 원형극장을 만들어서 식민지 사람들도 로마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했습니다.
로마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모든 문명의 장점을 수용하면서 로마 문명은 중세와 근대의 서양 문명뿐 아니라 지금 현대 문명의 모든 뼈대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법률, 정치, 문학, 예술, 철학, 종교, 건축, 공학, 군사, 과학 등 모든 분야는 로마 문명을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그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와 같은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로마의 전성기에 로마가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이 모든 로마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로마의 전성기에 살았던 한 사람, 그것도 한 식민지 출신의 사람 유대인 바울은, 로마가 결코 할 수 없는 한 가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구원이었습니다. 로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지만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소망했습니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해답인 복음을 당시 세계의 수도라고 하는 로마에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0-11절)
모든 것이 가능했고 모든 것이 풍족했던 로마였지만, 여전히 로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복음이라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저번 안식월 때 로마를 가보았는데, 지금도 유적이 대단합니다. 관광객들이 아주 많습니다. 가서 보기만 해도 압도를 당하는 콜로세움 같은 곳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약간 무너져 있지만, 당시 무너지지 않았을 때 봤으면 더욱 압도를 당할 만큼의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입니다.
그러한 로마였지만 그 로마에도 복음이 필요하다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기 전 먼저 그는 로마를 향해, 그리고 로마에 사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를 읽고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인 성 어거스틴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또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레의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책이 로마서인데, 그렇다면 로마에 전해진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2. 로마에 전해진 복음
1)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2절)
여기에 사도 바울이 정의하는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에 대해, 이사야는 그분이 실제로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미리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그분이 이 땅에 태어나시기 약 700년 전에 예언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가능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미가 선지자는 그분의 출생지를 예언합니다. 미가도 BC 8세기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 5:2, 새)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나귀새끼를 티고 예루살렘에 왕 되신 메시아로 입성하실 것도 미리 예언되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스가랴는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로서, BC 5세기(520-470)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이 은 30냥으로 배반당하실 것 역시 미리 예언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슥 11:12)
무엇보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찔리실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회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그분이 악인들과 함께 처형되시고 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실 것도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 53:12)
그분이 죽음 후에 부자의 무덤에 묻히실 것도 예언되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 53:9)
이 예언은 예수님이 부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묻히심으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전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분이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면 이런 예언들의 성취는 결코 가능한 일일 수가 없습니다. 확률적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만약에 메시야가 되어 보겠다고 하면서 구약에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 살펴보고 ‘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말이 안 됩니다. 어디서 태어나는 것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주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에 전한 복음입니다.
2) 예수님은 참 사람과 참 신으로 오셨다
성경은 그분이 참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존경받는 가문인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합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3절)
그러나 아무리 존경받는 가문에서 나셨다곤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 아기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성품을 소유한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이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신성을 가진 분이십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4절)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이겨낼 수 없는 한 가지 인간의 숙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안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공평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죽음은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죽음을 이긴 능력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이며, 그 능력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인간 이상의 존재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그가 단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훌륭하셨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우리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어떻게 100% 인간이며 100% 하나님이신가? 그러나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교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첫 번째 편지를 쓸 1세기 후반에 이미 그런 이단들이 나와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을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세상에 벌써 와 있습니다.” (요일 4:1-3, 새)
그런데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라는 사실이 왜 복음이며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정과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분이십니다. 그와 동시에 그분은 참으로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사정과 마음도 가장 잘 아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주실 수 있는 분,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번 주부터 어떤 미국분이 자꾸 전화를 해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신이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버지니아에 사는 어떤 한 미국인 가정이 한국 이단에 빠져서 그들을 돕고 싶다고 하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단 교주의 묘비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번역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단은 안상홍의 ‘하나님의교회’입니다.
그 이단은 설립자 안상홍이라는 사람을 ‘재림 예수’, ‘재림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죽은 다음에는 전도사였던 장길자라는 여자를 ‘어머니 하나님’,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 ‘성령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라고 고백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을 ‘안상홍 님 지으신 모든 세계’로 바꾸어 부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상홍님’에게 기도하며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한다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이단 집단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친절과 사회봉사와 돈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설립자인 안상홍은 벌써 1985년에 죽었는데도 그렇게 잘되고 있다는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안상홍과 장길자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하나님의교회’ 실세는 김주철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총회장입니다. 김주철이 이끄는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에 대항해서, 안상홍의 아들이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를 세우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둘 다 안상홍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같은데, 교리가 변질됐다고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무슨 하나님입니까? 사실은 안상홍을 이용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있는 겁니다. 안상홍이 설립자인데 그의 묘는 그냥 방치되어 있습니다. 잘 관리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상홍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를 이용해서 자기들이 돈벌이를 하고 권력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의 사람을 이처럼 신격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이고, 또 그것은 이단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 이외의 누군가를 재림주라고 하고 신격화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로마에도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에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황제도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예수님 외에는 중보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경배해야 할 진정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셨습니다. “시저는 주님이시다.” 하고 외치는 사람 앞에서 로마 시민은 누구나 “예,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시저이십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특히 새해가 될 때마다 로마 사람들, 특히 공무원들은 만신전(Pantheon)에서 시저가 주님이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나서, 그 후 계속해서 자기가 원래 믿는 신을 섬기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로마는 포용적이었기 때문에 허용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시저는 나의 주님이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시저는 나의 주님이십니다...가 아니라 예수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저는 나의 주님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고백 때문에 콜로세움 경기장에 끌려가 맹수의 밥이 되고 검투사들에게 맞아 죽으면서까지 이 고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그들의 신앙고백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저도 그런 적이 많이 있었지만, 어디 가서 식사기도를 하는 것도 창피해서 뭔가를 떨어뜨리고 줍는 척하면서 속으로 기도를 합니다. 믿는 것이 창피해서 숨기려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할 때도 불을 꺼서 캄캄하게 해놓고는 “아무도 안 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실 분은 손을 살짝 들었다 내리세요. 아주 살짝 들었다 내리세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건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게 정말 죄송한 일입니다. 죽음이 그들의 신앙고백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나의 주님이시다!” 이 고백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복음이었습니다.
3)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복음은 또한 목숨을 걸며 모든 것을 걸고 전해야 할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5절)
왜 복음을 로마에도 전하기를 원했습니까? 다음 말씀이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절)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뒤나미스(dynamis)’인데, 이것은 ‘위대한 힘(mighty power)’을 뜻합니다. 여기서 ‘다이나마이트(dynamite)’가 나왔습니다.
로마는 당시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나라였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힘으로 눌러서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정복한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으로도 단 한 명의 인간을 바꾸거나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에 길을 놓던 과학기술을 가졌지만, 그런 힘으로도 단 한 명의 인간을 바꾸거나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키케로나 세네카를 비롯해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를 배출한 로마의 지식의 힘으로도 단 한 명의 영혼을 바꾸거나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마다 변화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가진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7절)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인간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표범의 반점도 변할 수 있고, 구스인의 피부도 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이전에 살펴보았습니다(렘 13:23, 3주차 누가복음을 다룰 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며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변화시켜주셔서 새 힘을 갖고 살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지만 하나님의 의가 입혀진 덕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의와 생명 가운데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들의 몸을 가리려 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문화의 역할은 이 무화과 잎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짐승의 희생의 가죽옷을 입고 아담과 하와는 제대로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신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자신을 가린 사람들만이 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문화나 문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묻은 복음만이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자녀로서 부모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 무엇인 것 같으십니까?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내 자녀에게 해준 가장 큰 칭찬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적을 잘 받아오면 ‘너무 잘했다.’라고 하거나 ‘너는 너무 예쁘다. 잘 생겼다.’입니까? 그런데 의외로 가장 큰 칭찬은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의 말을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너 같은 게 어쩌다 내 딸/아들로 태어나서...’ ‘너 같은 딸/아들 낳아봐라!’ 하고 저주의 말을 날립니다. 그러나 ‘내 딸/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들을 때 자녀로서 너무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너무 형편없어서 그 말에 근처도 못 갈만한 죄인이었던 우리를 향하여 바로 그렇게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내 딸로,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표시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9-10, 새)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 딸/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라고 하시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꺼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너는 내 딸이고 내 아들이라서 너무 고맙다.’하며 고백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인 되었던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에 전해진 복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21세기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계속 전해야 할 복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