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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3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1

최후의 만찬

(마가복음 14 12~26)

 

[들어가는 ]


작년 안식월을 가졌을 이태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위스와 이태리의 국경 가까운 곳인 이태리 북쪽에 있는 밀라노(Milan)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요즘에 상업도시로도 유명한 도시이지만, 도시가 특히 유명한 것은 바로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어느 성당의 카페테리아 벽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이 하도 유명하니까 가볼까 하고 알아보았는데, 그림을 보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예약해서 들어가면 진공 상태에서 먼지를 빼고, 다음에 잠깐 보고 나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도 없고 해서 갔습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장면이 오늘의 본문을 근거로 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신 장면입니다.


오늘이 제가 미국에 이민 온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때 우리 가족이 이민을 간다고 하니까, 친척 아저씨뻘 되는 분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사주셨는가 하면, 잠실 어딘가에 있는 유명한 장어구이 집이었습니다. 미국에는 이런 없다고 하시면서 사주셨는데, 저는 입에 맞아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식사를 한다면 대접하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싸구려 음식을 대접할 리가 없습니다. 같이 식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좋은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나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깊은 이야기가 것입니다. 정말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유월절 준비 (12-16)


제자들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자리에 오기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과 권능의 말씀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을 있겠다고 생각하며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죽겠다고 하시니(사실은 부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특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대단한 알았는데 죽는다고 하니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깨달았는데 유다는 금방 간파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실망한 이유는 그가 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심각성을 몰랐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면 조직을 만들고 군사력을 키우고 행사 계획을 세워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자꾸 고난 받고 죽는다고 하시니까, 죽을 사람을 붙들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죽는다는 사람을 붙들고 무슨 세상을 뒤엎겠습니까? 결국 가룟 유다는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30 팔았습니다. 30 노예 명의 가격이었습니다.


이때는 유대인들에게 유월절 잡는 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잡는 식사를 반드시 했는데,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에서 왔기에 예루살렘에 유월절 만찬 장소가 없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유월절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2)


제자들의 질문을 들으면, 예수님 당시로부터 2 살았던 아브라함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제물로 바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죽여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삭이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사실 이삭이 제물인데 그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번쩍 드는 생각이 “주님께서 준비하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유월절 양을 어디서 준비하면 좋겠습니까? 어디서 식사를 해야 합니까?”라고 합니다. 사실은 유월절 양이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사실은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죽이는 것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잡아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그 양이 바로 나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식사를 그들과 같이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조금은 특이한 지시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3-15)


제자 명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자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남자가 동이를 들고 간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보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거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객실 내놔라.”라고 하시며 마치 자기 것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억지로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 친분이 있던 집이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모신다는 것은 굉장한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누군가 하면, 성경에는 나오지만 전승에 의해서, 바로 다락방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성지순례를 갔을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진짜 거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인 곳인지 100% 수는 없어도, 여기가 거기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입니다. 그곳은 사도행전 2장에서 120명이 기도하고 있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미리 언제 테니 준비해놓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락방의 주인이 마가의 어머니라고 여겨지는데, 이상하게 이번 유월절에는 방을 비워두고 싶었던 겁니다. 사실 이때 대목이기 때문에 이럴 빌려주면 얼마나 돈을 많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렌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다락방을 자신에게 내어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오기 때문에 이런 방을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돈을 많이 있었는데도 그냥 비워두었고 예수님께 공짜로 빌려드렸습니다. 거기서 유월절 만찬도 하시고, 인류 역사상 성령이 처음으로 임하셔서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는 놀라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우리 삶에도 바로 이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고리들이 연결되어 기가 막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이 객실을 달라고 하셨을 거부했다면 당연히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감동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별로 생각을 하던 일이 생각나거나, 누구를 만나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들거나, 누군가를 돌봐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을 주실 , 그냥 해보는 겁니다. ‘이게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겁니까?’라고 하며 해보는 겁니다.


언제든지 주님께서 쓰고자 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봐야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도 ‘네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 하며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가? 믿음으로 정말 하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기회를 주실 해야 합니다. 기회는 영원하지 않을 있습니다.

 


2.  예수를 팔아넘길 (17-21)


저물매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사람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7-18)


지금 분위기가 좋은데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의 명이 나를 것이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까? 그런데 나중에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그런 모르셨을까?’라고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미리 알려주신 겁니다. 아셨지만 정죄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기로 했다 해도, 아직은 가룟 유다가 마음을 돌이킬 있는 상황입니다. 10절에서 이미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야기를 끝낸 상태입니다. 그러고는 유월절 만찬을 하는데 “너희 중의 사람이 나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유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대로 드러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유다야, 너는 나를 팔려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드러내시면서 매를 때리라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그런데 이때 정말 놀라운 것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19-20)


여기서 놀라운 것은, 모든 제자가 “저는 아니죠?”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 자신이 없었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만 아니라 나머지 열한 명에게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2인자인지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예수님이 그렇지 않으시면 빨리 차를 갈아타야 합니다.


유다처럼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한두 번은 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니까 그들은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지요?”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제자들을 보셨을 얼마나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슬프셨을 같습니다. 그래도 안타까이 여기며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했으니까 그릇이 여러 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만 아니라 제자들도 같이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둘 중의 하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20)라고 하셨는데, 제자들 모두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뜨끔했습니다.


특히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여러 그릇에 손을 넣고 먹었는데, 예수님이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자신을 판다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일을 꾸몄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먹고 있습니다. 이게 자포자기 상태였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유다가 회개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모르면 그냥 짐작할 뿐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있으면 사람을 보는 눈이 정상적일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유다도 사랑하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이때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같으면 유다 차례가 되었을 뭔가 뾰족한 것으로 쿡쿡 찔렀을 같습니다. 그때 유다가 “어, 이러세요?”라고 하면 “알면서 그래?”라고 하면서 괴롭혔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1)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다”라고 하시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조작하신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 알고 계셨는데, 유다를 태어나지 않게 하셨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100%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조작을 해서 유다로 하여금 이때 예수님을 팔도록 뒤에서 사주하신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인간이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선택을 것인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좋은 선택을 하든, 악한 선택을 하든,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일어납니다. 테러, 무참한 살해, 정치적으로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 ‘야, 이거 큰일 나겠다.’라고 걱정할 있지만, 여러 악과 불의가 있어서 세상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할 때조차, 나중에 조금만 살펴보면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결국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만 보기 때문에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그게 진짜가 아닙니다. 나는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유다가 정말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실 때도 느꼈겠습니까? 그때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는 자신의 선택을 고수했고, 결국 예수님을 파는 길로 스스로 선택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하시는 아니라, 그만큼 안타까운 인생이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강퍅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동안 잘못 살아왔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그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며 ‘아, 내가 이렇게 잘못 살았구나.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며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에 나오는 이집트의 바로 왕입니다. 재앙들을 내리시면서 하나님이 계속 “내 백성을 가게 하라”라고 하셨는데 바로는 끝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를 강퍅하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강퍅하게 하고 악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뤄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악한 사람, 최악의 커플은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합은 우유부단한 사람, 줏대가 없는 사람, 자기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 그런데 욕심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세벨이 부추겼습니다. 바알 제사장이자 왕의 딸로 두로에서 이스라엘에 시집을 와서 이스라엘을 바알 신앙으로 물들였습니다. 게다가 바알 신학교를 설립해서 850명에게 전액장학금을 줘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랍게도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나왔습니다. 엘리야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전했을 , 아합이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최고로 악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넘어가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대에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딸을 통해 다윗의 계보가 이어지고 성전이 있던 유다까지도 물들여 버립니다. 자기들의 딸을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아들과 결혼시켜서 사돈을 맺습니다. 아주 교묘한 방법입니다. 나중에 아달랴가 아예 여왕이 됩니다. 왕자들을 죽이고 자기가 여왕이 되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하다가, 결국 6 만에 진압이 됩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 얼마나 악합니까? 기회가 있을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악한 사람도 기회를 받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번도 아니고 계속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끝까지 참지는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결국 행한 일에 대해 합당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악이었다면 악에 걸맞은 심판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지금 죄를 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도 평안하다면, 그것은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나 보다 것이 아닙니다.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시간을 끌며 미루면 언젠가는 정말 기회가 없어질지 모릅니다. 기회가 있을 빨리 돌아와야만 합니다.

 


3.  최후의 만찬의 의미 (22-25)


예수님은 이제 유월절 양을 잡은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를 원하셨는데, 유월절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잡았던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언약으로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2절)

 

양고기를 드셔보셨습니까? 양고기는 요리를 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노린내가 나서 아주 먹기가 힘듭니다. 오래 전 제 동생이 북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 있을 때, 간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부모님과 저희 가족이 방문을 갔습니다. 당시 아파트를 렌트해서 살았는데, 동생네는 4층이었고 맨 아래층에는 주인이 살았습니다. 그때 아랍어 선생님 가족이 초대를 했는데, 양고기 요리를 잘해서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떠난다고 아파트 주인 가족도 초청해서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그 집도 양고기를 했는데 거기서는 냄새가 나고 먹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곳 문화는 손님이 가면 잘 먹어줘야 합니다. 못 먹겠는데 자꾸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먹으라는 단어가 그곳 말고 ‘꿀’입니다. 그래서 생글생글 웃으며 ‘꿀, 꿀, 꿀’ 하는데, 그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예수님도 이때 양고기를 드셨는데, 양의 다리를 하나 쭉 찢으시면서 ‘받아라, 이게 내 몸이다.’라고 하셨으면 더 실감이 났을 텐데, 빵을 떼시면서 “이게 내 몸이다. 먹어라.”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구약의 율법이 완성된 것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양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더 이상 유월절에 양을 잡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양을 잡지 않고 끝난 겁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몸이 찢어졌고, 우리는 그분의 몸을 먹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몸을 먹는가? 실제로 로마시대 때 크리스천들이 “이것은 내 몸이니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라고 하며 성찬식을 할 때 숨어서 듣던 로마 스파이들이 식인종이라고 오해해서, 크리스천들을 잡아간 기록이 실제 역사에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정말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살을 먹는다는 표현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3-2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시내산에 왔을 때 피를 흘리는 의식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을 때 피를 뿌리게 하셨습니다.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지킬 때 정말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되는데, 사실은 그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목숨을 걸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버리게 되면 그들도 이 피를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흘려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출애굽을 할 때의 첫 번 유월절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하나님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월절(Passover)’라고 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집에는 그 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교회를 보면 여자 성도들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여성들이 신앙생활을 하기에 더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실 때마다 이걸 생각하는 겁니다.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빨갛게 바를 때마다 영적 의미를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피로 죽음이 나를 넘어갔다’라고 생각하면 화장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려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니까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떡과 잔을 구별하셨는가? 살이 찢어지면 피가 납니다. 그러니까 결국 피와 살은 같은 겁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구별하셔서 먼저 떡을 주시고 그 다음에 잔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의식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구약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먼저 짐승을 죽이고 피를 받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불에 태우고 피를 뿌립니다. 태우는 고기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피는 우리의 죄를 씻는 이중효과를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육신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만 하면 성령이 임하시고 부흥이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언약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5절)

 

우리가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이 포도주를 굉장히 좋아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이중부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때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난 것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큰 수술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하면 “내가 다시 식사를 하게 될 때는 새로운 세상에서 하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병이 난 다음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잠시 죽고 난 다음에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거기서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제자들을 만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가깝게는 부활을 의미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교리나 사상도 알아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몸을 통해 표현해주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다니며 재정까지 맡아 볼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고, 예수님과 가까이 앉아서 그릇에 손을 넣는 관계였으면서도, 이 예수님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죄의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에서 예배드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불신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우리는 강력한 성령의 불이 임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성만찬을 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성찬의 목적이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바로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아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자고 합니다.

 

성찬식을 하는데 아무 은혜가 없거나 아무 생각 없이 참여한다면, 그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빵 한 조각과 잔을 그냥 먹고 마신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면서 ‘나를 위해 주님이 이렇게 찢기셨구나. 나를 위해 이렇게 피를 흘리셨구나.’ 하는 감사와 감격이 넘치며 그래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리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것을 전하는 삶을 살리라’ 하는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한 사람이 어떻게 예배 끝나고 나가서 다른 사람과 싸우고, 욕하고, 사기 치고, 이상한 짓을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하고 예배드린 사람이라면 가슴 벅찬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성만찬을 먹고 마시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4.  누구의 뜻대로 것인가? (26)


이 최후의 만찬을 마친 뒤에 제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26절)

 

이들은 찬양을 부르며 감람산으로 가는데, 그곳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분위기가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입니다. 먹고 마시고 배도 부르고, 뭔가 될 것 같으니까 찬양도 부르며 굉장히 기분이 좋고 들떠 있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이제 한 자리 하나 보다’라고 하며 아직도 권력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금 이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속마음은 ‘드디어 내가 한자리 차지할 때가 되었다. 드디어 이 땅에서 내가 높아질 때가 되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기도하신 후 잡혀서 죽으실 텐데, 이들은 굉장히 들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이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십니까? 어디를 가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를 만나길 원하십니까? 어떤 생각을 하기를 주님이 원하십니까?

 

혹시라도 지금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신데도 주님의 뜻과는 엇박자로 나가고 있는 건 아닌가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성만찬을 할 때마다 주님의 뜻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나누어주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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