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SdC1Oi4DWh8?feature=share&t=98
2023년 5월 14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8 ✦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장 9절)
0. 들어가는 말: 평화가 필요한 존재
제가 지금 말씀드릴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십시오.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알베르트 슈바이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헨리 키신저, 마더 테레사, 데즈먼드 투투,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아웅산 수찌, 넬슨 만델라, 김대중, 지미 카터, 앨 고어, 버락 오바마. 모두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노벨평화상은 세계 평화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노벨 재단이 주는 상으로서, 상금은 대략 100만 달러 정도 됩니다.
이처럼 인류는 평화를 중요시하며 상까지 주고 있지만, 사실 평화는 깨져 있습니다. 평화는 에덴동산에서부터 깨져 있습니다. 유엔(UN)이 1945년 2차 세계 대전을 교훈 삼아 세워졌는데,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만들었지만 유엔이 생긴 이후에 단 하루도 평화가 있던 적이 없습니다. 계속 평화가 깨진 상태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세상을 보면 온통 깨진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성경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400회 가량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평강(평화)의 하나님’이라 부르시지만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사탄의 방해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평화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의해 파괴된 평화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매일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도 평화로 가득한 천국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잘 살면 이 땅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천국의 주요 조건이 바로 평화입니다. 천국을 생각해보십시오. 평화가 깨진 천국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지옥이라는 곳은 평화가 없는 곳입니다. 평화로 가득한 지옥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정치적 평화, 경제적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종 간, 계층 간, 종교 간의 벽이 존재합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고 말은 하지만, 서로 계층을 나누고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요즘 ‘갑질’이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행동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속으로 남들을 경멸하며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우월하다고 느껴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이 땅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관심 있는 게 뭡니까? 힘의 크기입니다. ‘얼마나 힘이 크냐? 얼마나 강하냐? 얼마나 가진 게 많으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을 키우고 힘을 기르려 합니다. 사회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선거 때 선거운동을 보면 유권자들에게 ‘우리 당이 이번에 압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자기 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최대한 많은 의석을 확보하려 합니다. 최대한 많은 힘을 가지려고 하고, 힘이 주어질 때 그 힘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지배하며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이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이 가졌냐에는 정말 관심이 없으십니다. 힘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데, 작은 힘이든 큰 힘이든 ‘그 힘으로 무엇을 할래?’ 하고 물으십니다. 가진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보십니다. 그것으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힘이 크냐 적으냐가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상관없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가지고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을 섬기고 살리는 데 자기 힘을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짓밟는 데 그 힘을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화평(평화)인데, 평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성결함(거룩함)입니다. 평화와 성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순서가 중요합니다. 성결해질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는 성결과 거룩함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 땅은 온통 갈등과 싸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 사는 것은 아주 귀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평화를 이룬다고 해서 불의를 용납해서는 곤란합니다. 구약 예언서에서 계속 말씀하는 것과 같이, 정의가 없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에 초점을 맞추면서 진리로 갈등과 다툼을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 평화를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무엇보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불의와 거짓입니다.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악한 마음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이사야 48:22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높은 데서 군림하고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며 떵떵거리더라도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다고 말하고, 이사야는 그 때문에 인간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맞서야 할 것은 내적으로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 속에서 악이 나오는 것을 경계하며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런 마음을 제거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가도록 늘 싸워야 합니다. 악한 마음에서는 결코 평화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거룩과 의의 결과입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갈등 관계에 있으며 싸우고 있다면, 결국 그 근본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죄를 제거하면 싸움도 없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계속 다툼과 갈등과 싸움이 있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외교관, 정치인, 대사, 대통령, 왕도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평화가 끼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팔복의 일곱 번째 복을 다루는데, 처음 여섯 복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평하는 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팔복을 전체적으로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고 하나는 안 하는 게 아니라, 팔복의 전체가 다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파산한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고 마치 거지와 같은 태도로 시작하는 겁니다(3).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구석 어두운 곳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님께 손을 내밀며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나아갑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울고 애통하며 슬퍼합니다(4), 자기 죄악으로 마음이 쓰리고 아픕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기에, 울고 슬퍼합니다. 거기에서 온유함이 나와 온유한 자가 됩니다(5). 그 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외치게 되고(6), 그러한 상태로 나아가다 보니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게 됩니다(7).
그런 다음 8절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이 청결할 때에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9). 그래서 나의 삶에 의와 청결함과 거룩함이 있는가를 먼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럴 때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결혼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싸움을 하는 것도 일종의 평화가 깨지는 것인데, 뭔가 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청결함, 깨끗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평화가 없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평화의 관계 속에 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화평하고, 인간과 화평하며, 자기 자신과 화평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에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도 그런 표현을 썼지만, 우리 가운데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미천하고 별 볼 일 없고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철저히 무명인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을 받아보지도, 신문에 이름이 올라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높여주십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주로 안 좋은 것으로 나옵니다. 뭘 잘못하거나 비리가 있어서 나옵니다. 가끔 훌륭하다고 하며 나오기도 합니다. 나쁜 쪽으로 뉴스에 안 나오는 건 감사한 일인데, 유명해져서 좋은 일로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하고 화제가 되는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제가 나온 건 아십니까? 제가 콜럼버스의 모든 방송에 다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났을 때 방송국에서 다 나와서 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그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진짜로 그렇게 다 잘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도 그렇게 뉴스를 타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뉴스를 누가 봤겠습니까? 관심 있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무명입니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조금 알아줄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절대다수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을 들어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쓰신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깨는 사람을 높이거나 그런 사람들이 유명해질 때가 많습니다. 요즘 권투나 UFC 격투기 하는 것을 좋다고 돈까지 내면서 보겠다고 합니다. 서로 때리고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평화를 깨는 행위인데 그것을 좋다고 하고 거기서 잘하는 사람을 높입니다.
세상의 나라들은 최고의 용사들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합니다. 훈장은 누가 받습니까? 잘 싸우고 상대방을 격퇴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적군을 많이 죽인 사람에게 훈장을 수여합니다.
대개 우리는 힘 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힘 있는 사람, 고집 센 사람, 거친 사람, 야성미 넘치는 사람, 자신만만한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습니다. 여성들도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을 주도하며 요구하는 여성들, 싸움과 대결을 부추기며 전통에 맞서는 여성들이 부각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렇게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영웅이 됩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우며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은 좋아하고 자기들에게 불리하면 나가서 싸우며 시위를 벌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행동과학자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라.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것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평화를 깨는 행위이지만 자기가 최고가 되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이루려 하고 평화를 심으려 할 때 저항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했던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투사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싸워주며 로마를 짓밟고 유대인들을 최고로 만들어줄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런 투사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듣던 사람들은 분명히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평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다는 사실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죄 문제가 해결되면 먼저 마음이 청결해집니다.
그래서 화평은 마음의 청결(깨끗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진정한 평화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능력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복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일곱 번째 복인 ‘화평하게 하는 자’의 전제 조건이 됩니다.
2. 평화란 무엇인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절)
아마도 세계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일 것 같습니다. 아랍 사람들도 많이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가 바로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은 샬롬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늘 샬롬을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평화, 평화’ 한다고 평화가 오겠습니까?
샬롬(평화)은 그저 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싸움이 없는 상태의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최고의 선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모든 행복한 상태가 완성되는 것이 샬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만 진짜 샬롬이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를 갈등이나 싸움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 어디입니까? 아무 갈등도, 아무 다툼도, 아무 분쟁도, 아무 싸움도 없는 곳... 그렇습니다. 공동묘지입니다. 죽은 사람은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묘지에서 하나님의 평화의 모델을 찾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평화는 뭔가가 부재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전쟁이 없고 싸움이 없고 갈등이 없는 것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바른 관계를 낳는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는 그저 전쟁을 그치는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하고 또 더 나아가 원수도 사랑하고 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다른 유대인에게 ‘샬롬’이라고 할 때, 이것은 ‘전쟁이 없으시기를, 갈등이 없으시기를’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의와 선을 가지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는데, 미국 교회는 Exchage of Peace(평화의 인사)로 “Peace by with you!”(평화가 함께하기를)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Peace be with you!)”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휴전과 평화는 아주 다릅니다. 휴전은 잠시 전투를 중단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남한과 북한이 휴전 상태입니다. 완전히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입니다. 평화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단된 전쟁은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평화는 결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때로 아주 힘듭니다. 고생해야 할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고, 굉장히 고민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경적 평화는 참된 평화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4에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도 ‘화평’과 ‘거룩’이 같이 나오지 않습니까? 평화와 청결함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Peace Child(평화의 아이)>가 있습니다. 단 리처드슨(Don Richardson) 선교사가 1960년대 초에 파푸아뉴기니 섬의 사위 부족에게 가서 전도했을 때의 내용입니다. 사위 부족은 원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호전적이였으며, 식인 습성도 있는 포악한 종족이었습니다. 과연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리처드슨 선교사는 의료 선교를 주로 수행하면서 부족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얻었습니다.
한 번은 다른 종족과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서로에게 큰 피해를 주고 휴전에 들어갔는데, 더 이상 전쟁을 계속했다가는 그들 모두 망하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전쟁을 멈춘 것입니다. 그런데 휴전하는 방식이 특이했습니다. 이쪽 추장은 자기 아들을 상대편 추장에게 보냈고, 상대편 추장도 자기 아들을 이쪽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아들을 맞바꾸었습니다. 서로 아들을 교환한 후 각자 상대방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돌보고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두 부족은 확실한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 아이를 ‘평화의 아이’(Peace Child)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는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착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보내신 평화의 아이라고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복음의 씨가 심긴 것입니다.
3.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해야 할 일
그렇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3가지를 하면 됩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6:15에서 말했듯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들어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싸움은 끝났지만, 평화를 유지하는 게 필요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게 끝이 아니라고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때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 모든 것이 이루어졌지만, 계속 그런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매일 힘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고 ‘받는 구원’, ‘혼의 구원’의 과정입니다. 삶에서 죄를 범할 때마다 평화가 깨지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회개하고 돌아오고 빨리 평화를 회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일이 멋지고 훌륭한데, 하나님과 전쟁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순간, 그는 우리와도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또 우리의 형제자매가 됩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우리가 많이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섬기며 나아갔을 때, 주님을 믿지 않던 분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그분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된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도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된 겁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뿐 아니라 우리와도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화평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보다 삶으로 전하면 된다고 하며 본을 보이면 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서로 전혀 관계는 없이 무조건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해야 합니다. 말로도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전해야 하고, 삶으로도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말로도 삶으로도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삶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끼리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끼리 먼저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믿지 않는 분들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이고, 예수가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 말이 어떻게 통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 먼저 평화를 이루어야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예배드리러 오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한 게 생각나는데도 모른 체하고 그냥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말고, 가서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한 다음에 와서 예배를 드려라.’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관계가 나쁘면 무조건 예배를 드리러 오지 말고 그리로 가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예배한들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알고도 그것을 덮은 채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며 어떻게 매번 그 사람에게 가겠습니까? 그러나 시도해야 합니다. 일단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어떻게든 마음을 풀어보려고 애쓰는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지, 그것을 잊어버리고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뒤쪽에 가면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이용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때로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하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서로 화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즉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냥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정말 평화를 이루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이쪽에서는 그냥 하라는 겁니다. ‘내가 사과해도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처리해주시고, 혹시 그 사람이 안 받으면 그 복은 나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협력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같은 정당 내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서로 화목하라”(막 9:50)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인데, 먼저 가까운 데부터 실천해야겠습니다. 부부끼리, 부모와 자녀끼리 해야겠습니다. 싱글들은 친구들과 화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려면 희생이 따릅니다. 쉬운 게 아닙니다. 고난당할 수도 있습니다.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따라갑니다.
4.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
그렇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상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휘오스’인데, 이것은 존엄과 영예와 신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단순히 애정을 받는 자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엄과 영예와 신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엄청나게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 때 우리를 왕자로, 공으로, 왕처럼, 여왕처럼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미국 분과 이야기하다가 ‘요즘은 하나님을 어머니(God the Mother)라고 하자는 시도가 많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굳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아들이십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에 대한 것을 요즘 수요예배 때 사도신경을 다루면서 나누고 있습니다.
결국 아들과 아버지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항상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받으시던 날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고 하셨습니다(막 1: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실뿐 아니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하, 얘는 너무 형편없이 살지만 내가 사랑은 한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시면서도 ‘나는 얘를 너무 좋아한다. 나는 얘를 볼 때마다 너무 기쁘다.’라고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받는 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로 화평하게 하는 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화평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하지 못한 사람이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내가 나 자신과 화평하지 못하다는 것이 뭡니까? 염려, 불안, 초조, 걱정, 두려움을 갖고 사는 것이 자신과 화평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오래전 나온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윌 헌팅(Will Hunting)이 사람 이름입니다. MIT에서 일용직 청소부로 일하는 빈민가 청년 윌 헌팅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MIT의 수재들도 풀지 못하는 난제를 풀어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수학 교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지만, 그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주변 사람과 싸움을 하면서 세월을 허비합니다.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수학 교수는 그의 친구이자 심리상담 교수인 션을 만나게 합니다. 하지만 청년은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또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늘 비관적이고 냉소적입니다. 학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윌 헌팅은 늘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상담자 션은 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합니다. “너의 과거는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It was not your fault! It was not your fault).” “나도 알아요(I know).” “아니, 너는 아직 몰라.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No, you don’t know. It was not your fault.)” 윌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정말로 깨달은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인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 나 자신과의 화평을 먼저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깨지고, 망가지고,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많은 나 자신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 그런 나를 화평하게 하는 자로 만들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나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재로서 잘 가꾸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물을 주며 화초를 보살피듯 나를 잘 가꾸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며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나 자신을 주님 앞에서 바로 세우기 위해 계속 나 자신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존재입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은 It was not your fault!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주님 안에서 다 깨끗해졌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를 평화를 이루는 사람, 화평하게 하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기대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