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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6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7 ✦
“다윗의 인구 조사와 그 참혹한 결과”
(사무엘하 24장 1~15절)
0. 정말 위험한 순간은 성공할 때다
여러분, 사람이 힘들 때 위험할까요, 아니면 잘 나갈 때 위험할까요? 어려움이 왔을 때가 위험할까요, 아니면 성공을 거둘 때가 위험할까요? 우리는 모두 성공을 원합니다. 누가 실패를 원합니까? 실패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직장을 찾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다 성공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참 신기하게도 사람은 성공할 때, 잘 나갈 때 위험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잘 나갈 때는 모든 권력과 권한이 자기 손에 있어서 그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과시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명언도 있습니다. “실패를 견디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성공을 견디는 사람은 적다.” 실패했을 때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오히려 잘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 더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서 더 잘되는 경우는 참 적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고 도망 다닐 때, 광야 굴속에 있을 때, 이리저리 도망갈 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영혼이 순수하고 맑았습니다. 하나님과 아주 가깝고 밀착된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험난한 자기의 삶이 오히려 자기를 맑게 만들고 별처럼 빛나게 만드는 놀라운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시들을 썼는데 우리 시편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정말 주옥같은 시들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성공하고 넘어집니다. 이미 한 번 넘어졌던 것을 봤고, 오늘 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사무엘하 24장의 이야기로 다윗의 삶이 끝납니다. 열왕기상에도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조금 나오지만, 의미 있는 삶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24장의 마지막 이야기가 정말 이상합니다. 여러분이 전기작가라면 위대한 사람의 전기를 어떻게 마무리하시겠습니까?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훌륭했다고 하면서 끝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추했다. 이렇게 오류를 범했다.’ 하며 끝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약간 좋게 끝내기는 하지만, 그렇게 안 좋은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드러내려면 진작 드러냈다가 마지막은 잘 마무리하지, 왜 마지막에 다시 드러내면서 마무리합니까?
밧세바 사건 이후에 다윗이 또 하나의 큰 죄를 하나님 앞에 범한 것을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힘이 있을 때, 성공할 때,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가지고 있으면 막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게 없으면 남을 해치려고 휘두를 게 없는데, 자기 손에 뭔가가 쥐어져 있으면 그냥 휘두르며 해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것이 복되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가난한 것이 복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난다 긴다 하는 뛰어난 용사들이 다 다윗 앞으로 왔습니다. 사울은 죽었고 다윗이 왕이 되어 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점점 나이는 들어가지만, 다윗의 위치는 점점 더 견고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더 위험할 때였다는 겁니다. 이전에 자기를 견제하는 세력이 있을 때는 늘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견제하는 세력도 없고 절대군주처럼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가 되니까 더 위험해진 겁니다.
교회에서 목사를 비롯하여 직분자들이나 교회에 오래 다니는 사람일수록 공로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눅 17:10)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내가 뭔가가 되었나 보다.’라고 자꾸 으스대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뭔가를 잘했는데 문제가 생기거나 알아주지 않을 때 ‘내가 한 게 얼마인데, 내가 헌신한 세월이 얼마인데 이럴 수 있는가?’ 하며 자꾸 섭섭해지고 서운해지는 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 전체를 봐도 그렇고 미국 교계도 그렇지만, 교회가 바로 선 것은 우리 몇 명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공로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이 가끔 들려오는데, 큰 교회 목사들이 죄에 빠졌다는 뉴스를 종종 접합니다. 물론 작은 교회라고 안 그런 건 아니지만, 큰 교회는 더 잘 드러납니다. 제가 존경하는 교회 선배가 있는데, 미국에 이민을 와서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도 다녀왔는데, 서부에서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로 갔습니다. 한국에서도 가장 큰 교회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내려놓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 위험을 알았던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내가 망가지겠다.’라는 것을 안 겁니다. 소위 목회자로서 이룰 건 다 이루지 않았습니까? 엄청난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니, 이룰 건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다 털어버리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감사한 것은,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 여기까지 와서 저를 만나고 좋은 말들을 많이 해주고 갔습니다. 참 감사한 선배입니다.
작다고 겸손하고 크다고 교만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지, 특히 어떤 성공을 이루었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다윗은 노년에 자기의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인데, 큰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내 세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고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크기의 우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 다윗의 어리석은 인구 조사 (1~9절)
사무엘하의 마지막 장인 24장은 다윗 왕조의 영광스러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실수와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사건으로 마무리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다윗이 위대하고 훌륭한 왕이며 굉장한 신앙인이지만, 다윗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을 그렇게 세우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난 것인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21~24장은 나중에 뒤에다 붙인 것이기 때문에 정확히 연대별로 되어 있지 않아서 언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다윗의 영광이 크게 높아진 때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 다윗은 범죄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1절)
여기 보면 말이 좀 이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시키셨고 인구 조사를 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막 격동시켜서 인구 조사를 하라고 해놓고는 그다음에 ‘네가 잘못한 거다.’라며 모든 죄를 다윗에게 뒤집어씌우시는 겁니까?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윗이 이렇게 된 건 하나님이 시키신 게 아니냐고 하면 오해입니다. 이것은 수사적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막지 않으시고 놓아두셨다는 겁니다. 지켜보셨다는 말입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은 유혹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래? 너는 그런 마음 갖고 있구나? 그럼 한 번 해봐.’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생명의 삶> 때도 이것을 다루지만, 로마서 1장에도 나옵니다. 죄인이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면서 ‘하나님? 하나님 필요 없어. 내가 주인이야.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라고 하며 막 나가면 죄를 범하며 인생이 부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이 번개가 치며 다 태워죽이시고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너 그렇게 살고 싶니? 그럼 그렇게 살아 봐. 어떻게 되나 보자.’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엄청난 범죄자, 테러범, 극악무도한 살인자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저런 사람을 그냥 놓아두나?’라고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영원히 놓아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죄를 짓겠다고 하면 놓아두시는 겁니다. ‘그래? 너, 나 없이 살고 싶어? 마음껏 죄를 짓고 살고 싶어? 그럼 한 번 해봐.’ 하고 놓아두시는 겁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이것을 여기서 ‘격동’시키셨다고 표현합니다.
다윗의 범죄의 본질은 사실 인구 조사를 한 게 아닙니다. 인구 조사는 이전에도 했었는데 그게 왜 죄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교만이 생긴 것이 그의 죄의 핵심입니다.
지금 나라가 든든히 서고, 왕으로서 찬란한 영광을 맛보고, 나라가 부강하고, 싸울 때마다 승리하고, 주변 나라들을 다 평정합니다. 그랬을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잘했으니 이 정도가 됐지.’라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특히 사울과 비교를 통해 ‘사울은 이렇게 못 했는데, 봐라.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라는 교만이 싹트게 된 겁니다.
누가 그러지 않겠습니까? 다윗 같은 사람도 그렇게 되는데, 우리 중 누가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그와 같은 교만을 정리하시고 다시 정결하게 하셔서 나라를 바로잡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계속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을 하나님은 두고 보실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바로잡으시기 위하여 오늘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다가온 부귀와 명예와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만족해했습니다. ‘야, 내가 이룬 나라를 보아라. 사울이 망가뜨렸는데 내가 이렇게 일으켜 세웠다. 뿌듯핟가.’ 하며 만족해하고 대견해하며 스스로 위로하고 자기를 높인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룬 것을 점검하고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인구 조사를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인구 조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지 않았고 모든 인구를 조사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인구 조사는 전체를 한 게 아니고, 군인 숫자만 세었습니다.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용사의 수만 세도록 했습니다.
이 조사의 원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부강해진 것은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가야 하는데, 다윗은 ‘내가 이룬 것을 보라.’라고 한 겁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해 만족해하면서 스스로 높이게 된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넘어진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교만을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를 망가뜨리는 게 교만이기 때문에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감히 내 영광을 가로채?’ 하고 질투하시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면 그 삶이 망가지고 무너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망가지는 걸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마음에 품게 된 감동대로 인구 조사를 명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용사의 수를 세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모든 죄가 사실 그런 식입니다. 죄는 나쁜 것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무섭게 생기고 우리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이 와서 ‘너 빨리 가서 죄를 지어!’라고 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라는 건 아주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사탄이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굉장히 달콤하게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기도할 것은 ‘하나님, 눈 깜빡하는 순간에도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딴마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풍선에 바람을 분 다음에 묶지 않고 탁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리저리 방향 없이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 버리시면 우리 인생이 그 꼴이 된다는 겁니다. 콜라 같은 탄산수가 든 병을 막 흔들다가 뚜껑을 열면 어떻게 됩니까? 거품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 속에 있던 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막혀 있다가 열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특히 피가 끓는 청년들은 하나님께 꼭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마시고 꼭 붙들어 주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그냥 두면 잘못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손에서 놓아 버리시면, 그렇게 놓아 버린 풍선처럼 또 탄산수처럼 잘못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지막 이야기를 왜 이런 것으로 마무리하게 하십니까? 이게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윗도 인간이지, 추앙할 우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다윗은 인간 중에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지금까지도 존경받습니다. 그래도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그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끝에 남기를 바라시는 것은 ‘내가 이런 걸 이루었다.’라고 하는 업적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망가지지 않고 진짜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뭔가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세계적인 인물 몇 사람 외에는 전 세계에서 누가 기억해주겠습니까? 내가 여기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업체에서 뭔가를 열심히 해서 엄청난 것을 얻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보면 누가 그것을 압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인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겼어도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을 꼭 붙들고 나아가면 이 세상이 끝나도 계속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한 아주 작은 일도 하나님은 잘했다고 하시며 알아주십니다. 이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전 세계가 알아주면 영광인데,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참 못합니다. 특히 목사나 교회 지도자일수록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잘 못 합니다. 자꾸 머리를 쓰고 뭔가를 자기 능력으로 해보려 할 때 보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느릿느릿 가더라도 주님이 가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꾸 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금방 되는 게 아니라 평생이 걸립니다. 평생 걸리는 훈련을 쉬지 않고 해야 간신히 주님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데, ‘나는 오래 했으니 이제 쉬어야지.’라고 해서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알고 따라가겠습니까? 다윗도 실패하는데, 우리는 더욱더 그럴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매일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2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2-4절)
성경에 잘 나오는 표현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2). 단은 가장 북쪽에 있고 브엘세바는 최남단입니다. 저 북쪽에서 저 남쪽까지, 즉 한국식으로 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온 이스라엘 지역을 의미하는 표현이 바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인구 조사가 다윗의 교만에서 나왔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그래서 반대합니다. 이게 참 놀라운 것은, 어떻게 요압 같은 사람이 여기서는 이렇게 옳은 말을 합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배우는 것은, 나쁜 사람이라고 항상 나쁜 말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이 안 좋은 일을 했을 때 ‘안 좋은 일을 했으니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찍고 정죄해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일을 할 수 있고, 나쁜 사람도 가끔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더 많이 하느냐에 따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갈리는 것이지, 나쁜 사람은 100% 나쁜 일만 하고 좋은 사람은 100%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지, 행동을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못 박아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사 다른 사람들과 지낼 때도 그렇고 뉴스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도 그렇고, 그들이 뭔가를 할 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저 사람은 틀렸다.’라고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틀렸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저렇게 한 것은 잘못됐다.’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이 비슷해 보이지만 굉장히 다른 말입니다. ‘저 사람은 틀렸어’와 ‘저 사람이 한 저 행동은 틀렸어’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배신당했어.’라고 합니다. 좋은 줄 알았는데 배신당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 게 아니고, 좋은 일을 하면 ‘저 사람이 저렇게 한 것은 참 좋다.’라고 하고, 잘못했으면 ‘저 일을 잘못했다.’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잘하면 좋은 사람이고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 행동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함부로 판단하면 그 기준으로 우리 자신도 비판과 판단을 받습니다. 정확히 볼 때는 그 사람을 매도해서는 안 되고, 행동을 가리켜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압은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굉장한 충신인데 또 다윗이 제일 곤란해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조카인데도 다윗을 제일 힘들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바른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case by case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강하게 재촉하며 요구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5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6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7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5-7절)
이렇게 하면 우리는 이게 뭔지 하나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동해안을 돌아 정동진에 갔다 남쪽으로 틀어 포항으로 해서 제주도로...’라고 하면 한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그게 뭔가?’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것을 보면 ‘이게 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기억할 필요 없이, 간단히 생각하면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죽 돌고 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로엘은 요단강 동쪽의 성읍으로 국경 지대에 속한 지역입니다. 인구 조사는 많은 인원과 작업이 들어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은 사람들은 성읍 주변에 장막을 치고 일을 수행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다냐안(6)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인 단입니다. 시돈은 북서쪽 해안 도시로, 본래 이방 땅이었지만 당시에는 이스라엘 영토에 속해 있었고, 두로(7)는 시돈에서 남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해안 도시로 페니키아의 주요 성읍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민족이 이스라엘에 계속해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갈릴리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는 군대를 위한 부역과 세금 징수를 위해 계수된 겁니다.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8절)
그렇게 동쪽에서 시작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죽 돌고 왔는데 그것이 10개월 가까이 걸렸다는 겁니다. 국내를 두루 돌았다는 것은, 요압과 사령관들이 모든 땅을 돌며 백성의 수를 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겨 레위 사람과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않았습니다(대상 21:6). 또 일부는 인구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서 그 수를 기록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대상 27:24).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9절)
역대상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110만 명이고 유다는 47만 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와 수의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이 수가 그 당시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다가 후일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대상 27:24).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9절에서 인구 조사의 동기가 분명히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숫자를 세었습니까?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 즉 군대 갈 수 있는 사람, 20대 이상의 군인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세었다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사들, 군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군인 숫자가 많을수록 ‘내가 이 정도다.’라고 세를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면 다윗이 숫자로 밀어붙여 전쟁에서 승리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의 대군이 밀려와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 이겼지, 자기들이 숫자가 더 많아서 이긴 적은 없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순수한 신앙인일 때 골리앗을 맞서 싸울 때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b)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
어마어마한 장수 앞에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어린 시절 하나님만 의지하던 목동으로서 담대히 믿음을 외쳤습니다.
여러분, 왕년에 신앙 좋을 때의 은혜가 평생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는 매일 새로 받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랬다는 것은 간증이 아닙니다. 물론 옛날에 그랬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매일 새로 받는 것이지, 몇십 년 전에 이랬다거나, 아니 몇 달이나 몇 주 전에 받은 것도 안 됩니다. 매일 새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 매주 모여서 감사한 일을 나누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감사의 제목이 별로 없습니다. 매일 삶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찾는 게 영적 실력입니다. 그게 신앙이 좋다는 겁니다. 늘 옛날 얘기만 한다면 오늘이 얼마나 가난합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고자 하는 명예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여러 욕구가 있는데, 물욕, 성욕, 식욕도 있습니다. 특히 이 명예욕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그런데 명예욕은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 더 다가온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위험한 순간은 어려움이 막 몰려올 때가 아닙니다. 실패할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도 제목을 나눌 때 보십시오. 치유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도 기도하지만, 뭔가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나 자신이 또 내 자녀가 잘 풀리도록 기도합니다. 잘 풀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그 전에 한 가지 더 기도할 게 있다는 겁니다. ‘성공했을 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것을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공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린다면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그것은 오히려 저주가 되는 겁니다. 축복이 아닙니다.
성공을 위해 기도하지만, ‘성공할 때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이웃을 더 잘 섬기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해주십시오.’ 나 자신과 내 자녀가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이것만 되면 인생이 잘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길 텐데.’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 더 잘 섬긴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뭔가가 되면 하나님을 믿는 그 길을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성공했을 때 더 잘 하나님을 섬기고 더 잘 이웃을 섬길 수 있도록, 그것을 꼭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때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를 높여줄 때가 더 위험합니다.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소원이 성취되고 만족이 마음에 가득하고 스스로 대견해할 때가 위험합니다. 그럴수록 마음에 이 세상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이 가득하게 되어 하나님이 안 보이고, 이 모든 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그 모든 것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헛된 교만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영적 교만은 정말 심각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이러한 위험성이 더 커집니다. 교회에서도 큰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칠 때 이러한 교만이 올 수가 있는 겁니다. 뭔가를 아주 잘했을 때, 일이 잘되었을 때 그것을 잘 견디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십니까?’라는 겸손을 잊지 않는다면 잘못 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이렇게 복을 주셨다.’라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힘쓰며 나아가야겠습니다.
2. 다윗의 선택 (10~15절)
인구 조사를 마칠 때까지 10개월 가까이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구 조사를 다 마치고 부하들이 돌아와 보고할 때 보니까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겁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것을 못 깨달았을 겁니다. 사울 같은 사람은 이것을 못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사람인 겁니다. 죄를 안 지어서 위대한 게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즉시 나와 회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10개월 동안 다윗의 신앙은 여전히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채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임을 깨달은 다윗은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0절)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신 이유입니다. 왜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맞는) 자’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죄를 많이 짓고 실수도 많이 하고 엄청난 죄도 지었지만, 다윗은 언제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 바로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10절에서 다윗이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자책까지는 합니다. ‘내가 이러면 안 되었었는데.’ 그러나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달려가서 고백하고 회개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 합니다. 자책은 회개가 아닙니다. 자책했으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여 죄를 하나도 안 짓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바로 나아와 이렇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망가졌던 것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1절)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다윗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다윗이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갓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갓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모압 땅으로 피신했을 때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삼상 22:5).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세 가지 심판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고 명하십니다.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12-13절)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남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은혜를 완전히 거두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으로 징계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7년 동안의 기근, 3개월 동안의 도피 생활, 또는 3일 동안 전염병이라는 세 가지 옵션이 다윗에게 주어집니다. 이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보인 태도는 ‘아유, 너무하시네.’ 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세 가지 심판 중 하나를 택한 것입니다.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14-15절)
다윗은 3일 동안의 전염병을 택합니다. 어떤 사람은 7년과 3개월에 비해서 가장 짧으니까 짧은 것으로 택한 것이라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물론 7년 동안의 기근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3일 만에 7만 명이 죽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전염병으로는 3일 만에 7만 명이 죽습니다.
그가 이것을 택한 이유는, 나머지 둘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근은 자연재해이고 하나님의 손으로 하시는 것이지만, 7년은 사람의 손으로 뭔가를 대비하고 일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물론 7년 동안 괴로운 기간입니다.
그러나 3개월 도피 생활을 통해 사람은 봐주지 않습니다. 자연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상어나 맹수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다 씨를 말립니다. 3개월 동안 쫓아다니며 전혀 안 봐주는 인간의 손에 넘겨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맞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셔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며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을 통해 경험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말씀의 기초 위에 서게 되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를 밟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읽고 깨닫는 단계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경험하며 그 말씀을 더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둘째로, 그 말씀을 통해 내 삶의 상황을 새로운 통찰력으로 잘 해석하고 적용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제3자의 말이었던 것 같은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로, 그 적용한 말씀이 감사와 간구와 회개 같은 영적 반응을 일으키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주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아뢰며 나아가게 됩니다.
넷째로, 삶 가운데 내가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데 오히려 내게 어려움이 오고 시험이 오며 말씀이 그것을 통해 검증되는 단계입니다. 그런 시험 가운데에서 말씀을 정말 믿고 순종하며 나갈 때 그 말씀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계속 말씀 위에 서게 됩니다. ‘아,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틀림없구나.’ 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가장 핵심이 뭡니까? 결국 성경이 두껍지만 이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말씀을 읽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처럼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한 번영과 성공이 찾아올 때 교만해서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겸손하게 붙들고 나아감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