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f_EDTo_EQ98

 

 

202311일 신년주일예배

신년 메시지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새해가 됩시다

(마태복음 2234~40)

 

[들어가는 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성경 말씀이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사람들이 별명을 붙인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18~20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래서 지상 대 명령또는 대 사명’(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오늘 본문도 별명이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The Greatest Commandment)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대 사명의 핵심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고, ‘가장 큰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하여 주보에 나온 것처럼 다섯 가지 목적이 나오는데, 예배, 교제, 양육, 사역, 선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나누어보면, ‘가서 제자를 만들라라고 하신 대 사명은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고, 오늘 본문인 가장 큰 계명은 각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를 만들라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자 혼자서 하지 말고 교회로서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믿은 다음에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대 사명입니다.

 

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각자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전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관계입니다.

 

 

1.   본문의 배경과 의미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북쪽의 갈릴리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시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때입니다. 얼마 있으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때입니다. 그때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난리 법석을 떨었기에 그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에 그 근처 베다니로 가셔서 주무시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이 지금의 주일(일요일)이고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입니다. 5일 동안 성전도 청결하게 하시고 많은 비유의 말씀도 주셨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도전하며 꼬투리를 잡기 위해 어려운 시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와서 도전한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마지막 도전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4)

 

그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큰 종파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주로 제사장들이 속해 있었는데, 그들의 특징은 부활도 없고 영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그것을 다 믿었고, 율법을 곧이곧대로 다 지키려고 하는 파였습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당시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사두개파가 예수님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다가 예수님에게 아주 크게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라이벌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후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예수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찾기 위해 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또 한 율법사, 어쩌면 가장 똑똑한 사람을 내세워서 질문을 합니다.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5-36)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모든 계명을 다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변화하는 역사적 환경으로 인해 문자적으로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율법이 주어졌을 때는 모세 때로 BC 1500년경이었는데, 1500년이 지난 AD 1세기에는 문화도 바뀌고 문화도 바뀌고 또 자기들은 로마제국 밑에 있으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기 때문에, 율법을 문자 그대로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현실적 문제와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서 그래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또 지키려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현실적 대안으로 찾아낸 것은 1500년 전에 주어진 율법을 그대로 다 지킬 수는 없으니까 다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지나면서 조상들이 율법을 연구하며 가르친 것이 쌓인 소위 장로들의 유전’(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구약 계명에 대한 상황적인 해석을 모아 놓은 겁니다.

 

구약성경에 나온 613개의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또 계명과 장로들의 유전(전통)의 가치를 구분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계명을 선택하면, 그것이 율법에 기록된 계명이든 아니면 장로들의 유전에 속하는 것이든, 다른 계명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공격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 어느 계명이 큽니까?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질문 같지만 무서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만약 ‘A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시면 아니, B는 왜 안 중요합니까? C는 왜 안 중요합니까?’라고 할 수 있고, ‘B가 중요하다.’라고 하면 ‘A는 왜 안 중요합니까?’라고 하며 꼬투리를 잡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이것만 중요하고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며 율법을 무시했다.’라고 꼬투리를 잡으며 고소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너무나 놀랍고도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대답을 하셨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40)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말씀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던 율법(토라/모세오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큰 계명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성경을 다 지킨 것과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시니까 말이 약간 어려운데, 이 두 계명을 지키면 성경을 다 지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20)인데,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5~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십계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두껍지 않습니까? 물론 요즘 성경 이름이 얇은 성경도 있고 슬림도 있지만 성경이 사실 두껍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성경을 우리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성경은 전부 관계에 대한 책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할 것이냐,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할 것이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당히 거리를 두는 관계, 안 좋은 관계, 갈등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해코지한 것도 없고 해를 끼친 게 없으니 괜찮다.’라고 하며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에서 실패하면 신앙인으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인데, 가장 중요한 것에 실패하면 아무리 다른 덜 중요한 것들을 잘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봉사나 기도나 선교나 헌금을 잘해도, 관계가 엉망이면 아무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성경 지식을 쌓아 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예배에 매주 참석하고 헌금을 많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집중해야 합니까? 사랑의 관계입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관계에서 실패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신앙인으로 자라가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하면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를 옭아매려고 이런 계명을 주신 게 아니고,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을 알려주신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행복해집니다.

 

신앙의 연륜이 늘수록, 신앙생활을 하는 햇수가 늘어날수록 사랑하는 관계가 더 좋아지고 있다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이웃과 더 가까워지면 성공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성경 공부를 하고 나서도, 기도하고 나서도 오히려 더 교만해지고 관계에 실패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2.   가장 큰 계명의 두 측면

 

1)  하나님을 사랑하라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37). 이것은 신명기 6장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쉐마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들으라쉐마라서 그렇게 부릅니다.

 

첫 번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마음을 다해서, 혼을 다해서, 정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좀 너무하시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빼면 내게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실 때에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온 우주에 나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도 삶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한 분만 오셔서 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최소 3명은 되어야 개설하지, 1명으로는 안 된다고 원칙을 세워놓았습니다. 삶 공부를 하는 것에도 최소한 세 명은 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어떤 모임에 한 명만 오면 얼마나 힘이 빠집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한 명밖에 없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나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드셨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눈동자와 같이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그런 사랑을 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뭐겠습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여기 와서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드리는 것만 예배가 아닙니다. 공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이렇게 형식을 갖추어 함께 드리는 공 예배도 있고, 우리가 매일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며 사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기서만 주님의 뜻을 찾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삶 속에서는 내 맘대로 살겠다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지금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내게 무엇을 원하실까?’ 생각하며 그 길로 가는 게 예배입니다.

 

여러분, 오늘 새해 첫날 11일부터 이 시간 이곳에 왜 오셨습니까? 예배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왜 드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만,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의무감 때문에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일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하는 말 중에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아.’ 또는 나는 참 믿음이 부족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니면 믿음이 강하다.’라거나 믿음이 약하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 믿음이 좋은지 부족한지 어떻게 압니까? 믿음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특히 자신에 대해서 나는 믿음이 강한가? 나는 믿음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을 어떻게 측정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믿음을 측정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고 싶다면 나는 열심히 믿는가? 잘 믿는가?’라고 물을 게 아니라 다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이걸 물어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것은 내가 잘 믿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놀랍게도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믿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는 사랑이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정말입니다. 해보십시오. 정말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걸 모르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2)  이웃을 사랑하라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수평적()으로는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38)이라고 하셨는데, 39절에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라는 것은 첫째이니까 둘째가 첫째와 같다는 것, 즉 첫째와 둘째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별개가 아니라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중요하고 이웃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아닙니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도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어떤 이웃과의 관계가 나쁘다면,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과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과의 관계는 엉망이라면 예수님은 그거, 아니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도 요한(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은 요한일서에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한일서 4:20-21, 새번역)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면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아무리 예배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은혜를 받는다고 해도, 또 아무리 많이 새벽에 기도하고 철야도 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자꾸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아무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그 안에서 찔러주시기 때문에 그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바꿔보고자 애쓰며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정말 지옥입니다. 부귀와 명성과 권력과 학벌을 다 갖추고 있어도,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다른 교우들과 냉랭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삶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또한 인간관계가 빈약한 사람들은 고독에 시달립니다. 갈등이나 미워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인간관계가 빈약하고 별로 없으면 고독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는 고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동아일보, 코리아 리서치, 인제대 서울 백병원이 함께 직장인의 행복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뭔지 조사해봤더니, 그것은 다름 아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삼성전자 대리급 직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조직 내 인간관계 갈등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가정생활도 똑같고, 교회 생활도 똑같습니다. 가정에서 불행하다면 부부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 간에 관계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도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영적 가족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면 교회 생활이 행복해집니다. 다른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으면 교회 생활이 괴로워집니다. 별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관계가 좋으면 더 나가고 싶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우리들, 곧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삶 속에서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깁니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기보다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해서 그렇고, 서로 토론하다가 논쟁이 되어 버립니다. 특히 자기주장만 통과시키려 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미워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연습을 안 해도 너무 잘됩니다. 연습을 안 해도 미워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아무리 연습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 훈련을 하는 공동체로 주님이 주신 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법을 훈련하고 연습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곳입니다. 예배에 살짝 왔다 가는 식으로는 도움이 안 됩니다. 교회 내에서도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같이 지내다 보면 가끔 미워질 때가 있으면 그것도 용서하도록 해보는 겁니다.

 

그저 다른 사람과 별문제나 갈등 없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는 것은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 스케줄에 맞추어서 하고 싶을 때는 하고 하기 싫을 때는 안 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도 똑같지 않습니까?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 하면 자기 몸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자기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사랑의 연습도 꾸준히 해야 우리에게 영적으로 도움이 되지, 하고 싶을 때는 하고 하기 싫을 때는 안 하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어도 모이고 하기 싫어도 해보고 하는 연습을 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하다 보면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원하시니까.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게 자기 몸에 뱁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시고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사랑을 베푸십니다. 항상 용서해주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훈련하면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별개가 아니라고 하시면서도 첫째가 있고 둘째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순서를 말합니다.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가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먼저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 그다음에 이웃 사랑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사랑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키워보신 분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나는 사랑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고 그것이 넘칠 때 옆으로 흘러가는 겁니다. 채워야 넘치고, 그래야 옆으로 흘러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울 때 그 사랑이 차고 넘쳐서 이웃에게로 흘러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3. 관계를 우선순위에 두는 훈련

 

우리가 사랑의 관계를 잘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잘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려운 게 아니라 여유를 가지는 것, 유머 감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하루는 이웃집 우편물이 저희 메일함으로 잘못 배달된 적이 있습니다. 보니까 저 앞집 백인 아주머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으로 들고 가서 벨을 눌렀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나와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럴 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냥 고맙다고 하고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하는 말씀이 네가 좀 대신 내주지 그랬니?” 그때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말문이 막히는 겁니다. 그런 유머 감각을 기르면 좋겠습니다.

 

또 커피를 사 마시러 가거나 fast food 점에 가보면 교육을 잘 받아서 친절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때도 저는 굉장히 경직되어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들은 웃으며 “Hi!” 하거나 “How was your day?”라고 하는데, 저는 굳은 얼굴로 그런 말은 관두고 커피만 달라는 식의 생각만 하니까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바른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좀 여유가 필요합니다. 넉넉함과 푸근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인간관계의 기술입니다.

 

결혼에 관한 책들에 많이 인용되는 말 중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결혼의 성공 여부는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결혼한 사람에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행복한 결혼이란 얼마나 완벽한 사람을 만났느냐, 얼마나 나에게 맞는 사람을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행복한 교회 생활도 똑같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맞는 교회, 나에게 맞는 목회자, 나에게 맞는 교인들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그들에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 교회가 얼마나 완벽하냐(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목사가 얼마나 훌륭하냐, 프로그램이 얼마나 좋으냐, 나와 잘 맞는 교인들이 얼마나 있느냐, 나와 비슷한 종류의 교인들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함께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좋았는데 이상한 점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이상한 면이 있구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 성도가 저런 사람이었나?’ 하고 놀랄 때도 있습니다. 가깝게 서로 지내다 보면 상대방의 이상한 면을 발견하고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하면서 슬쩍 피하거나 슬그머니 그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신앙도 인격도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피하거나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대방에 대해 내가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며 적응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저런 사람을 내 앞에 두셨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훈련하시기 위함입니다. 조금만 싫으면 피해버리거나 도망가면, 어떻게 믿음이 자라고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이 되겠습니까? 평생 이 땅에서 영적 어린아이 노릇만 하다가 결국 주님 앞에 가게 될 텐데, 그때 뭐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나가는 말]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대부분 사람들의 문제의 핵심은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제대로 안 되기 때문에 삶에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도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렇습니다.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우리가 이처럼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기술을 익히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섬김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10:45, 새번역)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싫으면 피하고 도망가고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가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을 정말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시해주는 것입니다. 내 필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섬김은 그들의 아픔을 만져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섬기는 사람들도 또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도록 세워주고 돕는 것입니다.

 

이제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왕이면 신앙생활에서 성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패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한 해 동안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1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9)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8 (05/14/2023) admin_p 2023.05.14 698
41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8)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7 (05/07/2023) admin_p 2023.05.07 829
417 성령의 임재 (행 2:1-13) - 김현철 목사 (04/30/2023) admin_p 2023.04.30 321
416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7)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6 (04/23/2023) admin_p 2023.04.23 519
41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6)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5 (04/16/2023) admin_p 2023.04.16 633
414 그냥 돌아간 두 제자, 우는 마리아 (요 20:1-11) - 부활절 메시지 (04/09/2023) admin_p 2023.04.09 569
413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5)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4 (04/02/2023) admin_p 2023.04.02 909
412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4)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3 (03/26/2023) admin_p 2023.03.26 568
41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3)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2 (03/19/2023) admin_p 2023.03.19 1699
410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 5:1-12) - 제자의 삶/산상수훈 1 (03/12/2023) admin_p 2023.03.12 3131
409 재앙을 그치게 한 예배 (삼하 24:16-25)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8 (03/05/2023) admin_p 2023.03.05 977
408 다윗의 인구조사와 그 참혹한 결과 (삼하 24:1-15)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7 (02/26/2023) admin_p 2023.02.26 3873
407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들 (삼하 23:8-23)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6 (02/19/2023) admin_p 2023.02.19 3763
406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삼하 23:1-7)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5 (02/12/2023) admin_p 2023.02.12 1379
405 블레셋의 거인들을 이긴 다윗의 용사들 (삼하 21:15-22)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4 (02/05/2023) admin_p 2023.02.05 1314
404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신 화해 (삼하 21:1-14)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3 (01/29/2023) admin_p 2023.01.29 1874
403 또 다른 반역과 또 다른 죽음 (삼하 20:1-13)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2 (01/22/2023) admin_p 2023.01.22 1377
40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4:7-12) - 신년 메시지 3 (01/15/2023) admin_p 2023.01.15 989
401 내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출 3:1-5) - 신년 메시지 2 (01/08/2023) admin_p 2023.01.08 1040
»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새해가 됩시다 (마 22:34-40) - 신년 메시지 (01/01/2023) admin_p 2023.01.01 836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