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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6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3

한마음과 한 뜻이 된 결과

(사도행전 432~37)

 

[들어가는 말]

 

우리 교회에서 <새가족반><생명의 삶> 공부를 하기 전에 꼭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에 오늘 밤 세상을 떠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세 가지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아니오, 모르겠음. “라고 답하신 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고, “아니오라고 하신 분들은 구원을 못 받은 확신이 있는 것이고, “모르겠음이라고 하신 분들은 구원의 확신도 구원을 못 받은 확신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밤 세상을 떠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결과로 영생, 즉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그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분들 중에서도 천국에 들어갈지 모르겠다고 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자기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교회도 자주 빠지고,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고, 술 담배도 계속 하고 그래서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그 말을 거꾸로 하면,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성경을 많이 보고, 기도를 많이 하고, 술 담배 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말이 됩니다. 내가 안 하면 구원을 못 받고 내가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구원이 나에게 달린 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성경의 약속을 가지고 설명을 잘 드립니다.

 

우리 교회 활동교인이거나 새로 온지 얼마 안 되는데 아직 확신이 없는 분들이 계시면, 다음 번 예수영접모임에 꼭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생명의 삶>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확실히 하고 가셔야 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풍성한 삶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주 위험한 케이스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도 전혀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는 경우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내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변화를 받고 그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들이 가끔 합병을 하거나 누군가가 회사를 사서 주인이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회사의 정책이나 방향이나 소소한 것들까지도 다 새 주인의 방침을 따르게 됩니다. 일반 회사도 그런데, 우리 인생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는데도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옛날 나의 방식으로 살고 내가 주인으로 산다면, 그것이 정말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믿은 사람이라면 그 삶이 믿기 전과는 달라지는 게 정상입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천사 같이 되고 완벽한 삶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때부터 자기 인생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하자고 하시는 대로 따라가기에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도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안 바뀝니까? 믿고도 안 바뀔 때 그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구세주(Savior)로 믿기는 믿었지만 여전히 주인(Lord)은 자기인 경우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구주로 믿어 죄에서 구원받고 그 이후의 삶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예수님을 전혀 주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이 복잡하고 꼬이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고 삶이 행복해지며 이 땅에서 주신 사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아주 무서운 경우인데, 자기는 믿은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믿지 않은 경우입니다. 머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고 동의하는 것이 믿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영접한 사람에게는 성령님을 부어주셔서 성령님이 늘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신 분들은 다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사람은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되고 싶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데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잘 안 된다고 해서, 변화가 별로 없다고 해서, 함부로 나는 구원을 못 받았다.’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이끄셔서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 마음을 받아서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뭘 원하시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뭔지 관심도 없고,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전혀 관심도 없고 그냥 자기가 알아서 산다고 한다면, 그런 상태가 5, 10, 20년 지속된다면, 정말 믿은 것인지를 잘 점검하고 체크해보아야 합니다.

 

 

1.   한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

 

지금까지 살펴본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하며 여러 나라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가 있었고, 그날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고 교회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은 기쁨과 감격이 가득 차서 매일 성전에 모여 예배했고, 집집마다 소그룹으로 우리의 목장처럼 모여 사랑을 나누며 진정한 교제를 했고, 주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해주시는 놀라운 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고, 그날 그것을 본 사람들 중 남자만 5천 명이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기적과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그 공권력의 위협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담대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모여 합심해서 소리 높여 기도했고, 모두가 다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이후 일어난 일들입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전에 이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니까 이런 역사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놀라운 변화들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엄청난 변화가 교회 공동체 안에 일어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2)

 

성령이 임하실 때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는데,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변화될 뿐 아니라 물질관도 바뀝니다.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나 강제로가 아닙니다. 이상하게 돈에 대해 자유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 교회를 통해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래서 전도를 하게 되고, 선교가 일어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섬기는 사역과 구제가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 특히 물질로 섬기는 것은 결코 강요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물이 가득 차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를 가득 채우시고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고 넘쳐서 이웃에게로 그 사랑이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찰 때 그것이 흘러넘쳐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진정으로 성령이 임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지만, 특히 자기가 가진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한 모습이 어떻게 나옵니까? 다른 말로, 소위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에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 말씀, 예배 등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자기를 차고 넘쳐서 이웃 사랑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종교적 열심은 가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위선을 늘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는다고 하고,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거룩하게 기도하고, 거룩한 옷을 입고, 너무 멋지고, 너무 종교적인데, 이웃 사랑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돈만 안다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이 좋다는 것은 따뜻함입니다. 이웃을 향해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1)  믿는 무리가

 

먼저, 여기에 보면 성도들을 믿는 무리라고 부릅니다. 그냥 교회교인들이 아니라 믿는 무리입니다. 개개인뿐만 아니라 믿는 무리, 즉 한 공동체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개인적인 태도의 변화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개인적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첫 예루살렘 교회는 개인 차원에서 돕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동체 차원에서 돕는 데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가 함께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선교와 구제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그냥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 무리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믿게 되니까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이 자꾸 마음을 주시니까 함께 돌보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둘째로, 이들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사실 돈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부부간에도 갑자기 세금 보고(Tax Return) 후에 돈이 생겼을 때, 남편은 오디오나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소파가 낡았으니까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부부간에도 돈을 놓고도 한마음이 되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사용함에 있어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교회는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같이 모여 있는데 돈을 한 방향으로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는 무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니까 구제와 사역에 있어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마음과 한 뜻을 갖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일 것입니다. 오순절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를 할 때도, 전도를 할 때도, 구제를 할 때도, 전심으로 한마음과 한 뜻으로 했습니다.

 

 

3)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다 같이 나누고 다 같이 썼다는 겁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필요가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물건이 아깝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뭔가가 있는데 저 사람이 그것이 필요하니까 갖다 주고, 또 그 사람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갖다 주며, 서로 아끼거나 숨겨두지 않고 다 가져와 같이 썼다는 것입니다. 아깝지 않으니까 서로의 필요에 따라 공급해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자기 물건이 아깝고 자기 게 가장 소중한 법 아닙니까? 누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아끼는 것을 갖다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충 쓰다가 남은 것이나 별 필요 없는 것을 나누지,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니까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의 필요가 내 소유보다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저 사람은 이게 꼭 필요한데, 나에게 이게 있지만 저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라고 느끼며 그 형제자매에게 갖다 준 것입니다. 이런 것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통 성령이나 성령 충만이라고 하면 뭘 생각합니까?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하니까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등의 현상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은 성령 충만의 초보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의 깊은 단계는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같은 것은 이벤트 성입니다. 그냥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른 지체와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의 더 깊은 단계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지만 자기 것을 전혀 안 내놓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은 초보 단계입니다.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나오게 됩니다.

 

십여 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을 쓴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그 전에 또 다른 베스트셀러를 썼습니다. 그것은 <새들백교회 이야기>(The Purpose Drive Church)입니다. 거기에서 교회의 교인을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아직 교인이 아닌 상태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지역사회’(The Community)라고 부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이분들이 아직 믿지 않고 나오지 않는 VIP 분들입니다.

 

둘째로는 군중’(The Crowd)이 있습니다. 예배에만 참석하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등록교인’(The Congregation)입니다. 예배에 왔다 갔다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교회의 방침을 따르며 함께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등록한 교인들입니다.

 

넷째는 헌신된 자’(The Committed)입니다. 아주 성숙한 크리스천들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뿐 아니라, 함께 돕고 서로 섬기며 많은 일을 함께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핵심 멤버’(The Core)입니다. 평신도 사역자로서, 교회의 모든 결정들을 함께 내리는 핵심 리더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좋은 교회이거나 그런 게 부흥이 아니라, 핵심 멤버가 많은 교회, 헌신된 자가 많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만 헌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정과 생업에 나아가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라고 부릅니다.

 

군중만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이 많다고 꼭 좋은 교회도 아니고 꼭 나쁜 교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제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핵심멤버들이 중심을 잡고 있고 헌신된 자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하고 좋은 교회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스스로 보시기에 나는 아직 군중인 것 같다.’ 또는 나는 등록은 했지만 군중처럼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되시면, 조금 더 주님 앞에 나오시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여 함께 사역하고 함께 섬기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나아가는 방향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 믿음생활의 핵심입니다.

 

 

4)  자기 재물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건을 다 나누어 썼고, 자기 돈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정말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본 따서 공산주의가 나온 겁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보십시오. 정말 다 나누어서 똑같이 평등하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아주 소수의 권력 잡은 사람들은 떵떵 거리면서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런데 나머지 대다수는 아주 가난하게 삽니다. 평등하게(?) 가난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진짜 성경적인 원리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정말 평등하게 하며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내 물건이고 내 돈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 내 물건과 내가 가진 돈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라면 내가 당연히 쓸 수 있지.’라고 자발적으로 기뻐하며 한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2.   은혜를 받고 사랑을 실천한 공동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3-35)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교회가 은혜를 받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니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교회에서 잘 씁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분들이 슬픈 영화를 봐도 은혜를 받습니다. 요즘은 은혜 받았다는 것이 감동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보통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할 ㄸ는 뭔가 감동을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은혜 받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보셔도 됩니다. 그런 데서 은혜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은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혜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역시 사랑입니다. 정말 은혜 받은 사람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나옵니다. 이 구절을 보십시오. 은혜를 받으니까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나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은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교회가 그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행동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하시면 꼭 행동을 하셔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눈물을 조금 흘리고 끝이라면 진짜 은혜 받은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실천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러분, 지금 사업하시는 분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사업하는 게 쉽지 않은데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직장생활하시는 분들은 미국 직장에서 자기 언어도 아닌데 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학생들도 남의 나라 언어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돈 벌기가 참 어렵고 피땀 흘려 번 돈인데, 그런 돈으로 산 물건을 나눈다는 것, 그렇게 피땀 흘려 번 돈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들어오실 때 헌금함을 놓았는데, 거기에 헌금을 넣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피땀 흘려 번 피 같은 돈을 거기에 낼 수 있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첫 교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자기보다 힘든 이웃을 보면 바로 내놓았습니다. ‘내가 나의 가진 것으로 도와야겠다.’ 하는 마음이 막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를 해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놀라운 것은 부자 성도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다고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형편대로 모두가 했습니다.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 헌금을 했는데,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나누고 자기 재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동참한 것입니다. 그 중 특히 밭이나 집이 있는 사람들이 팔아서 같이 나누며 도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돈이 많은 부자라고 잘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더 잘 나눌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바로 얼마 전에 목회자 컨퍼런스를 했습니다. 주최를 결정하기 전에 많이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하겠는데 재정적으로 되겠는가?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넉넉한 것도 아닌데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서 일단 지정헌금을 해보자고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10개월 정도 지정헌금을 했고 등록금도 받아서 해보니까, 정말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4천 불 정도가 남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하신 헌금이 $12,600이 모였습니다. 저는 누가 하셨는지, 얼마를 하셨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매주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동참해주신 것입니다. 이게 누가 시켜서 한 것입니까, 누가 강제로 하거나 압박을 가해서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마음에 나도 동참을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오시는 선교사님들과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특히 어려운 형편에도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고자 애쓰고 있는 분들을 섬기는데 나도 동참을 하자.’ 하는 마음으로 모으신 것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바로 이겁니다!

 

한국 서울의 강남에 위치한 어느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강남에도 있고 너무 부자 교회입니다. 우리는 정말 부르주아 교회입니다. 우리도 가난한 사람들을 좀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가 교회 형편에 따라서 최선을 다해 가난한 분들을 도와야 하고, 이미 교회 창립 때부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목사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집사님은 개인적으로 매달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을 지금 돕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을 못 했다고 합니다.

 

이상주의적인 것은 좋은데, 그렇게 말하는 많은 분들이 의로운 것에 대해 말은 하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정의롭게 해야 하는데,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번에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기 밭과 집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의 헌금 집행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했다고 우리도 지금 집에 있는 것 다 가져오시고 돈 다 내놓으시고 다 같이 쓰자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원리, 처방(Prescription)이 아니라 묘사(description)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뭘 했다는 겁니까? 이웃 사랑을 그런 방법으로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것은 그들의 방법이 아니라 성경이 알려주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바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것을 실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한 가지 또 다른 원칙을 보여준 것이 바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말로 하면 교회에 헌금을 해서 교회가 집행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는 재정위원회도 있고 당회도 있고 회계도 있는데, 자신의 소유를 맡기고 교회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헌금하면, 교회에서는 책임을 지고 헌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만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낸 헌금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그것을 잘했는지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잘 사용해야 합니다.

 

 

3.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바나바

 

이렇게 성도들은 자기가 따로따로 개인적으로 하지 않고 교회를 신뢰하여 함께 모아서 했다는 것이 성도들의 원칙이었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놀라운 방법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으로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6)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구제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한편, 가장 인격적으로 나타난 모델을 한 명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바나바입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고 별명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라는 뜻이 위로의 아들로서, 너무 사람들에게 위로를 잘하고 격려를 잘해서 낙심한 사람들을 일으켜주는 은사가 뛰어나서 위로의 아들(바나바)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구브로(요즘의 사이프러스) 섬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는 또한 레위 족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하면 교역자 집안입니다. 열두 지파 중에 하나님이 레위 지파를 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아론과 그 후손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나머지 레위 사람들은 성전을 돌보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땅을 주지 않으시고 성전 일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레위 족 출신이니까 바나바가 돈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제사 등이 당시 로마 시대에 제대로 안 되니까 다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브로에서 태어났는데, 자기에게 조금 남아 있던 재산, 어쩌면 유일한 재산이었을지 모르는 땅을 조용히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여 그것이 잘 사용하도록 낸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랑의 행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발로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움직여서 손과 발로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서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바나바만 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바나바만 이름이 나오는가? 그것은 아마도 사도행전 전체로 볼 때 저자인 누가가 바나바를 미리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결국 바나바 때문에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여기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생이 될 것인가?

 

3년 전 저희가 안식월을 얻어서 이곳저곳 좋은 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프랑스 파리에도 갔습니다. 거기에 유명한 박물관들이 많은데, 미술관 몇 군데를 갔더니 당시 12살이던 아들이 미술관은 더 가지 말고 그 대신 군사박물관을 가자고 했습니다. 군사박물관이 프랑스어로 앵발리드(Les Invalides)’입니다. 이것은 부상자라는 뜻입니다. 원래 루이 14세가 전쟁 부상자들을 위해서 병원으로 만든 건물입니다. 그곳이 유명한 것은 특별히 나폴레옹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옆의 성당에는 나폴레옹의 관이 있습니다. 관을 가보니까 아주 높게 해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라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 중에서 포병장교였던 나폴레옹이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1799년부터,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1804년을 거쳐,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웰링턴 장군에 의해 몰락했습니다. 그때까지 불과 16년 동안 나폴레옹 한 사람의 야심을 위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숫자가 1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사람들이 50만 명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300만 명이었는데 50만 명이 죽었으니 얼마나 많이 죽은 겁니까?

 

결국 나폴레옹이 잡혀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52세의 나이로 죽어 그곳에 매장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나고 그의 사면복권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의 추종자들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 화장한 다음에 남은 재를 파리로 가져와서 앵발리드 성당의 거대한 대리석 관 속에다 안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신이 있는 게 아니라 한 줌의 재만 들어 있는 겁니다. 그 거대한 관이야말로 자기 욕망에 눈먼 그의 인생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남들에게 자기가 높임을 받아야 한다고 관을 높게 하라고 했다니 참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그 앵발리드 기념관에 가보면 나폴레옹 군대의 온갖 깃발과 군복들, 말들, 각종 무기들, 특히 나폴레옹이 탔던 황금색 마차, 심지어 박제된 나폴레옹의 말, 그리고 그 말의 황금 갑옷까지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멋집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죽 보면, 결국 한 인간이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를 보여주는 전시물입니다.

 

나폴레옹이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서슴없이 희생시킨 것은 그가 세상 것들을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자기 머리 위에 모시고 살아가니까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 발아래 있는 하찮은 수단에 불과한 겁니다.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자기 손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쓰이게 된 겁니다.

 

앵발리드 기념관의 마지막 전시실에 가보면,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었을 때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손톱과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의 가구 등입니다. 그때 그게 뭔가 했었습니다. 황제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런데 그 마지막 전시실의 마지막 전시품이 뭔가 하면, 나폴레옹 추종자들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그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에 거기 남은 한 줌의 재를 담았던 검은색의 작은 유골상자입니다. 그 유골상자에 재를 넣어 그것을 파리로 옮겼던 것입니다.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기 원했던 그의 인생은 불과 52세의 나이에 유배지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생전에 나폴레옹이 자신의 생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날 줄 알았다면, 세상의 것들을 주인으로 섬기느라 그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것들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 마지막 전시실의 마지막 유골상자 앞을 지금 나폴레옹이 살아서 가본다면, 그는 깊은 탄식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거기에 가기 전에 미리 한국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자꾸 앵발리드라고 해서 이게 뭔가 했더니 불어로 앵발리드가 영어로 인밸리드(invalid)’입니다. 부상자라는 뜻도 있지만 무효라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인지 모릅니다. 세상 것들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주인으로 섬기느라고 100만 명을 죽인 나폴레옹 자신이 세상 것들에 짓눌려 살았던 앵발리드(invaild, 부상자)였고, 그와 같은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또 다른 invalid(무효)인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에 비하면 오늘 이렇게 성경에 나오고 앞으로도 살펴볼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섬기다가 잡혀서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처참하고 불쌍해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유효(valid)한 인생, 하나님이 유효하다고 인정해주시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 자체가 거대한 앵발리드 전시관처럼, 세상의 물질을 섬기느라고 물질 때문에 짓눌려 신음을 하고 있고 그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무효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통 물질에 병든 부상자들, 또 물질 때문에 거기에 노예가 되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무효인 인생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인생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또 말씀드리지만, 내가 지금 시간을 들이고 나의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꼭 필요해서 일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그 나머지 시간에 뭘 하고 있는가 보면, 이 세상에서 내가 떠나면 다 끝나는 것들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저 영원한 천국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내가 얼마나 하고 있는가 보면 거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네 인생은 무효다.’라고 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나 네 인생은 정말 유효하다. 너무 잘했다. 내가 준 사명을 너무 잘했다. 이리로 들어와라.’ 하시는 삶이어야겠습니다.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둔 삶,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즉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 나의 가진 것들까지 내놓고 사용해가면서, 나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다해 한마음으로 함께 섬길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네 인생은 유효하다. 참 잘했다.’ 칭찬받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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