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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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4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 ✦
“바람 같이 불 같이 오신 성령님”
(사도행전 2장 1~13절)
[들어가는 말]
이전에 제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5공화국 시절에는 학교에 들어갈 때 가방 검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위를 벌이는 운동권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전경들이 무작위로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의 가방을 뒤졌고, 혹시라도 소위 ‘불온서적’ 같은 게 나오면 압수하면서 전경 버스(소위 닭장차)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한 번은 같은 과의 친구가 갑자기 저에게 오더니 자기 책을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야, 이걸 나에게 주면 어떡하니?”라고 했더니 “너는 운동권처럼 안 생겼으니까 괜찮아.”라고 해서 괜히 기분이 좋아져 맡아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습니까? 그 후 민주화 물결이 일어나고, 요즘 영화도 나왔지만 1987년 이후에 그래도 많이 민주화가 되면서 개인의 자유가 존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게 되었는지, 요즘은 조금만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되면 바로 고소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미국이 변호사 천국이라고 하지만 한국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성추행을 한 사람이 있을 때 그의 실명을 거론하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이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것이 없이는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자유가 없이는 더 이상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과 같은 것은 인간의 자유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권도 그렇지만,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은 질병에서도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죽을병들인데 요즘은 고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파스퇴르가 병균을 이길 수 있는 백신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은 인류의 병 치료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신의 저주나 심판으로 생각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파스퇴르가 개발한 백신으로 인해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의학기술로 살아난다 할지라도 결국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가장 위대한 일, 즉 영혼까지 구원하는 일이 2000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오순절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부어진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결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은 하늘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땅에 건강이나 장수 등 많은 복이 있지만, 그런 복이 아무리 많아도 죽으면 다 끝나는 것들입니다. 죽고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고 나서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해주실 수 있는 주님을 믿고 성령을 받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가장 큰 복입니다.
1. 성도들에게 임하신 성령님 (1-4절)
1) 한마음으로 모인 성도들 (1절)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께서 드디어 기도하던 성도들에게 내려오십니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결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사건(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 완성을 향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지금 우리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오신 사건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구원과 똑같이 중요한 하나님의 사건이며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곳은 화려한 왕궁이나 유명한 곳이 아니라,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1절)
교회에 다니면 ‘오순절’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교파 중에도 오순절 계통이 있습니다. 순복음이 그 계통입니다. 우리가 ‘오순절’이라는 단어를 많이 말하고 듣지만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순절’은 헬라어로 ‘펜테코스테(Pentekoste)’ 또는 ‘펜테코스토스(Pentekostos)’인데, 이 말은 50번째라는 뜻입니다. ‘오순’이라는 말은 한자로 ‘다섯 오’, ‘열흘 순’ 자로서, 다섯 번의 열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BC 1500년경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Passover)입니다. 그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던(유월했던)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바로 그 유월절 후 안식일 다음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곡물 추수가 시작되는 유월절이 지난 지 7주 혹은 50일 후에 지켜졌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했고 ‘오순절’이라고도 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보리 추수를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맥추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우리 식으로 추수감사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칠칠절, 오순절, 맥추절이 다 같은 절기입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나온 지 50일 후에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이라고 하여 기념일로 지켜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농업적인 의미도 있고 역사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이 오순절은 유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의 3대 명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3:17을 보면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반드시 1년에 3번씩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세 번이 바로 이스라엘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세 절기마다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사는 남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서 예루살렘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데, 1세기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 수가 200만 명 이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무리들로 가득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던 예루살렘의 어느 한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드디어 성령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고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같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한마음을 품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성도들이 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모두 같은 장소에서 한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품었던 한마음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다 같이 그런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명절인 오순절을 맞이하여 전 세계에서 온 유대인들로 예루살렘 거리가 차고 넘쳤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던 사람들은 120명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화려한 사람들,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하던 그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 집회 등 예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교회당이 얼마나 멋진가, 얼마나 장식이 화려한가, 얼마나 우리가 옷을 잘 입고 왔나, 건물이 얼마나 튼튼하게 잘 지어졌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합니까? 모인 우리가 한마음을 품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2백만 명이 밖에서 바글바글한 곳에 성령이 임하신 게 아니고, 2백만 명에 비하면 아주 소수인 120명이 모여서 전심으로 한마음으로 기도하던 곳에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아무리 화려한 모습을 갖추어 있더라도, 한마음으로 간절히 주님을 바라며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와서 같은 장소에 있지만, 우리 마음이 다 뿔뿔이 흩어져 있고 각자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다른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면, 이 모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한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며 성령님의 역사를 늘 체험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듣고 볼 수 있게 임하신 성령님 (2-3절)
그런데 성령님은 너무나 놀랍고 특이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성령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3절)
원래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도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성령 충만한 현상을 통해서 성령님이 임하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소위 ‘은사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아도,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7절)이라고 은사를 표현했습니다. 성령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실 때는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령님이 이런 식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같은 사도행전에도 이런 식으로 성령님이 오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처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보혜사 성령”께서 확실히 오신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청각적으로 또 시각적으로 듣고 볼 수 있게 임하셨습니다.
먼저,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성령님이 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2)였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 때 쉬이익 하고 나는 소리가 난 겁니다. 이 바람은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진짜 바람이 분 게 아닙니다. 바람 같은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방 안에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을 텐데 어떻게 바람이 밖에서 들어오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나면서, 그 소리가 점점 더 강해지며 온 방 안이 바람 소리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에도 ‘루아흐’라는 단어가 바람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령님이 바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만들어낼 수도 없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불게 할 수도 없습니다. 또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바람이 불 때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바람은 그냥 불고 싶을 때 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파였고 공회원이었던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요 3:8, 새)
바람이 분 것은 알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성령의 바람을 피하느냐, 아니면 이 성령의 바람에 돛을 달고 훨훨 날아가느냐 하는 두 가지 중에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바람과 같이 오셨을 뿐 아니라 또한 불 같이 오셨습니다. 성도들 위에 불이 임하는 것이 보였는데, 먼저 큰 불덩어리가 내려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120개로 갈라지면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무는 모습으로 갈라진 겁니다. 마치 불의 혀와 같은 모습으로 길쭉하게 “각 사람 위에” 임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성도들 중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불이 임했습니다. 이 불은 각각 120개가 다르게 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불에서 120개로 갈라져서 임했던 서로 연결된 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셨는데, 그때는 비둘기의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비둘기가 아니라 불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불의 속성이 뭡니까?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불은 쇠도 녹여버립니다. 불은 계속 가하면 물질의 본성도 바꾸어버립니다. 그와 같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 태우시고, 또 죄로 인하여 변질된 우리의 속사람을 다 치유하시며, 강퍅한 우리 마음을 녹여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순절에 바람 같이 불 같이 성도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불이 같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산불이 됩니다. 지금도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많이 나는데, 정말 무서운 것이 산불입니다. 한국에도 가끔씩 산불이 나는 것을 보는데, 산불이 한 번 나면 모든 것을 다 집어 삼킵니다. 어떻게 막을 수가 없고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소방관들이 물을 뿌리고 헬리콥터에서 물을 뿌려도 안 될 정도로 정말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은 바로 성령의 산불이었던 것입니다. 한 번 타면 꺼뜨릴 수가 없는 엄청난 성령의 산불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제 이 산불이 붙었고, 120명으로부터 퍼져 나가서 앞으로 예루살렘을 다 휩쓸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휩쓸고, 마침내 땅 끝까지 퍼져 나가 다 태우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산불은 파괴하고 멸망시키지만 이 불은 구원의 불이고 축복의 불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령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신 것은 앞으로도 계속 역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오신 것은 한 번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임하여 주십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은 일종의 개통식과 비슷합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성령께서 임하시고 온 세상을 휩쓰는 것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류가 죄의 세력과 마귀의 유혹에서 해방되어 진정으로 복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링컨의 노예해방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3) 성령을 받고 변화된 성도들 (4절)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해 잘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것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어느 정도 인격의 수양과 머리로는 성경의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변화가 다릅니다.
성령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며 맞아들일 때 성령을 받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4절)
여기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현상을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람 같은 소리로 임하시고 불 같이 임하셨을 때 그것을 성령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겁니다. 성령 세례는 일회성입니다. 한 번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후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현상으로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의 인격도 감정도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의 지배를 받았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고 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술을 마시고 취하면 사람이 알코올의 지배를 받아서 비틀비틀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며 정신도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 즉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각과 감정과 인격 속에 성령이 가득 차셔서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다른 염려나 걱정이나 인간적인 미움이나 시기나 질투나 의심이나 두려움 같은 것들이 있을 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 대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이 주시는 감동으로 가득하고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일만 하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 것,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신 것이 여기서는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제 친구들이 제가 처음 미국에 올 때 영어의 은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즉 성령이 시키셔야 되는 것이지 자기가 원한다고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게 은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은 방언이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듣고서 중국말이 아닌가 해서 중국말을 하는 사람에게 녹음해서 들려주었지만 전혀 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가 아니고 ‘기도방언’이라고 하는데 통역의 은사를 주셔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신 것은 ‘언어방언’이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실제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한국어와 영어 밖에 못하는데, 갑자기 현지인들을 만나게 되어 떠듬떠듬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어와 영어를 모르는 현지인들이 놀랍게도 다 알아 듣더라는 겁니다. 정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급한 경우에는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 자기가 모르는 경우로 하는 경우가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방언이 우리가 하는 방언인데, 이때만큼은 언어방언으로 했습니다.
이들이 성령 충만하게 되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고, 여기서 여러 언어로 그것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방언이 성령 충만한 120명의 성도들에게 언어방언이 나타났고, 그러함으로써 거기에 모여 있던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지는 놀라운 역사가 이때 일어난 것입니다.
2. 난 곳 방언으로 (5-13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이런 놀라운 사건이 즉시 일어났는데, 매년 오순절이 되면 이처럼 수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유월절에도 오고 오순절에도 옵니다. 성전에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며 굉장히 복잡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여 언어방언을 하는 성도들이 큰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5-8절)
세계 각처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지만 외국에 나가서 산 역사가 길기 때문에 우리 영어권 2세, 3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거기서 정착하여 사는 현지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현지인이 아니라 유대인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는 곳의 언어를 하는데 히브리어는 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저곳에서 왔으니까 언어가 안 통하는 상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도, 히브리어로 하니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보고 경험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알아듣는 언어가 들리는 겁니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방 안에 있던 120명이 너무 성령 충만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으니까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 겁니다. 특히 사람이 많은 성전 쪽으로 가서 그런 언어로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그 내용은 자기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그토록 듣기 원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겁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이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이고 갈릴리 사람들이며 별로 배운 사람들도 아닌데 어떻게 자기들의 언어를 하는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세게 각처에서 온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듣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복음의 진리에 놀라고 또 방언에 놀라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언어가 시시한 세상의 잡담 같은 것을 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은 서로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드라마 얘기, 예능 얘기, 연예인 얘기, 스포츠 얘기, 정치 얘기 같은 것을 주로 하십니까? 그런 것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런 시시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낭비할 틈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하기에도 우리 인생이 짧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시시한 말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 모일 때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세상의 잡담이나 시시한 이야기, 연예계, 스포츠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에서 이렇게 역사해주셨다는 것, 즉 바로 그게 간증이고 그런 간증을 우리가 나누는 겁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9-11절)
이 지역들을 크게 다섯 군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는 지금의 이란, 이라크, 인도까지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유대는 그들이 지금 있는 지역이고, 거기를 중심으로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는 소아시아로 불리는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구레네, 리비야는 북아프리카이고, 로마와 그레데(크레타)는 유럽 쪽이고, 아라비아는 그야말로 아라비아 반도 지역입니다. 이것들은 그 당시 세계를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명들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증거 하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다고 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 사역을 말합니다. 갈릴리의 무식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 진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8)라고 했습니다.
제가 오래 전 고등부 시절에 전도사님이셨던 분이 지금은 유명한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분이 소속된 선교단체에서 발행하던 잡지의 제목이 “난 곳 방언으로”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고등학생이라 잘 몰라서 ‘이름도 해괴하다. 저런 게 뭔가?’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바로 여기 2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번역 선교회였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현지인이 “난 곳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말씀을 들려주겠다고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12-13절)
이들이 당황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성령으로 증거 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놀라며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말을 내 언어로 들을 수 있다니 놀랍다.’라고 했고, 놀라면서도 의심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새 술에 취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새 술’이라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이 술은 헬라어로 ‘글루쿠스’라고 해서, 지금 막 발효가 되고 있는 술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발효가 되어 상품이 된 술이 아니라, 집에서 술을 담았는데 발효가 될랑말랑 하는 싸구려 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로 치면 막걸리 정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증거 하는 제자들이 옷을 좋을 것을 입은 것도 아니고, 교육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며, 억센 갈릴리 사투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희들 주제에 비싸고 좋은 술을 마셨을 것 같진 않고, 싸구려 술이나 마시고 주정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조롱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일’인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똑같은 반응을 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네 가지 다른 토양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듣고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고, 약간 듣는 것 같더니 떠나는 사람이 있고, 조금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이 있고, 정말 열매를 맺는 좋은 땅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할 때 정말 놀라면서 ‘내가 듣고 싶었고 찾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동시에,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전할 때도 조롱하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이 주신 복음을 들고 나가서 전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던 성령께서 드디어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개통식이 이루어진 것과도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께서 바로 그 자리에도 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오순절 전까지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를 포함해서, 성령님이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영(신)으로 충만했다’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역사하시다 떠나시고 또 역사하시다 또 떠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 회개하면서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구약의 개념으로는 성령이 오셨다가 떠나시니까 다시 떠나지 마시라고 애원하는 마음이 나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그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긴 계시는데,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저 구석에 계시게 하고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성령이 오셨고 지금도 역사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가 일종의 성령의 고갈 시대입니다. 성령이 분명히 계시는데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지금 성령의 역사가 너무나 보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 상하고 정신적인 병이 생기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도, 믿는 자들도 타락하고 잘못되는 소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그런 것을 살리고 치료할 수 있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즉 우리가 그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삶,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의 마음대로 사는 삶, 성령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살 수 있도록 내어드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렇게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가장 먼저 우리를 변화시켜주십니다. 여기 아직 예수님을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은 분들이 계시면,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실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냥 겉으로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가 그때에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먼저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그래서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꼭 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큰일, 하나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바로 우리를 통해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또 불처럼 오셨습니다. 오늘 이 메마른 세계에 성령의 불길이 산불처럼 엄청나게 휩쓸고, 더러운 것들을 다 태우고, 그래서 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이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바로 우리를 통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