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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8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 ✦
“열두 사도의 수를 회복한 의미”
(사도행전 1장 15~26절)
[들어가는 말]
요즘은 100세 시대라 그런지, 20세기에 비하면 대략 20년 정도는 젊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수명이 짧아서 환갑잔치를 크게 했지만, 요즘 60세 된 분들을 보면 너무 젊으십니다. 70세도 이전의 50세와 비슷해 보이고, 80세가 되어야 이전의 환갑 정도로 되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 중에도 최신식 기기들을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으실 줄 압니다. 제 아버지도 90대 초반이시지만 컴퓨터로 신문을 보거나 이메일을 하시거나 문서를 작성하시고, 80대 초반이신 어머니도 스마트폰을 하셔서 카톡으로 뭔가를 많이 보내시며, 심지어 페이스북도 하십니다.
저도 50세가 넘었지만, 나름대로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통해 나오는 최신식 기기들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컴퓨터도 독학으로 이것저것 부품을 많이 교체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하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도 아니고, 4-5학년 어린아이들도 어떤 최신식 기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그 즉시로 척척 작동할 줄 아는데, 참 놀랍습니다. 더 어린아이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보며 자기 아이가 천재라고 느끼며 감탄하면 완전 착각입니다.
새로 스마트폰을 구입하거나 컴퓨터를 구입하게 되면 박스를 뜯어서 시작해야 하는데, 설명서를 잘 보고 그대로 따라해야지, 안 그러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신식 기기를 새로 산다는 것은 기분 좋고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골치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새로 다 배워서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품을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이 케이블은 어디에 꼽아야 하는지, 세심하게 보고 해야 합니다. 나와 있는대로 했는데 잘 안 되면 정말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 그런 것들을 잘하는 분들, 특히 젊은 분들은, 잘하지 못하는 친구나 이웃이나 배우자나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 특히 연로하신 부모님이 해달라고 부탁하실 때 바쁘다고 거절하거나 해주면서도 퉁명스럽게 하지 마시고,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면서 해드리시기 바랍니다. 저도 청년 시절에 처음 이민 와서 영어 문서를 번역하라고 부모님이 시키셨을 때 퉁명스럽게 했던 것이 죄송합니다. 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하고 막막하고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마음이 마치 그와 비슷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이제 예수님도 가셨는데 자기들끼리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잡아 죽였던 종교지도자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자기들까지 죽이려 드는 상황에서, 과연 자기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정말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을 하나로 꿰지 못하고 조각난 지식으로 갖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 성령님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죽고 11명이 되었는데, 그대로 가야 합니까 아니면 12명을 채워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바르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바로 이때 그들이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14).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열흘 후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들은 열흘 후에 그럴 줄 알고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냥 계속해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최신식 기기를 사서 조립하거나 작동시킬 때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이 매뉴얼입니다. 매뉴얼을 잘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안다고 하며 대충 보고 하면 틀릴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아주 자세히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태도,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붙들고 집중해서 나아갔던 것이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1. 가룟 유다의 죽음과 예언의 성취 (15-20절)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복을 이야기합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진짜 복, 참된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예배 때 항상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 축복해줍니다. 그냥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 복을 많이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제목을 잘 살펴보십시오. 하늘 복을 구하고 계십니까, 세상 복을 구하고 계십니까? 대다수의 기도제목을 보면 세상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잘되고, 성공하고, 돈 잘 벌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결혼하여 편안하게 잘사는 것 등. 그런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것만 구하면 문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세상에서 누리고 세상에서 끝나는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끝나는 건 진짜 복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건강의 복을 많이 받으라거나 만수무강이 아닙니다. 하늘 복입니다. 그 하늘 복이 어떻게 임합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통해 받는 것이 하늘 복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해주실 때가 바로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복이 아닙니다. 완성되지 않은 복입니다. 진짜 복을 보여주는 예표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돈 잘 벌고 성공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진짜 복을 보여주는 것, 아니면 진짜 복을 받을 때 따라오는 것이지, 그런 것들이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현혹되어서 그것을 따라가느라고 진짜 복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 진짜 복, 하늘의 복을 최종적으로 차지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중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는데 그냥 세상 복을 따라가는 육신적인 크리스천이 있고, 정말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순종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을 최종적으로 차지하는 사람은, 혹시 이 세상에서 세상 복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베드로였던 것 같습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5절)
우리말 번역에는 “백이십 명이나”라고 되어서 아주 많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어에는 ‘이나’라는 말이 없고 그냥 ‘120명 정도’였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여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갑자기 가룟 유다의 문제를 꺼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사람은 이때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지도 않은 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이기 때문에 아무도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이고 너무 수치스러우며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문제를 확실히 해야 진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16-19절)
18-19절은 괄호가 쳐 있습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가 베드로의 말인데, 18절과 19절은 베드로가 한 말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설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 출신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아겔다마’라는 것이 아람어(시리아어)이므로 다 아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가 썼다는 것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대상이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관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독자들도 대부분 헬라와 로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다윗의 시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약 BC 1000년 정도, 이사야는 BC 700년 정도에 활동한 예언자이니까, 이때로부터 천 년 전과 700년 전에 이미 다 예언된 이야기라고 알려주신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시편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신 모든 과정이 이미 다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오해하고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줄 알았습니까?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에 대한 생각이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으로서의 메시야’이고 또 하나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시편과 예언자들을 통해 ‘내가 보낼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다.’라고 알려주셨는데도, 사람들이 원한 것은 자기들이 하도 이 나라, 저 나라의 압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강력한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우리도 왕을 원했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였구나.’라고 깨달은 겁니다. 고난을 통해 구원하신 분이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끔찍한 처형을 당하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고 악한 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과연 불의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죽었는데, 죽었어도 열두 번째 자리를 그냥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유다를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열둘이라는 숫자가 그냥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들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믿는 자들은 새 이스라엘로 세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불의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이 ‘12’라는 숫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완전수인 이 숫자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한 근거는 유다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0절)
대부분의 성경에는 이 부분에 주가 달려 있습니다. 앞부분(“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은 시편 69:25의 인용이고, 뒷부분(“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은 시편 109:8의 인용입니다. 약 천 년 전에 이미 다윗 시대의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천 년 전에 이미 하나님은 이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입니다. 이 시편들을 그냥 읽으면 예수님의 이야기인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 베드로는 그 많은 시편의 말씀 중에서 이 두 군데를 딱 집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2장이 되어야 성령을 받고 변화가 되는데, 그 전에 이미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가르치셨을 때 그것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겼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열두 명의 한 자리에 들어서 거의 천국 문턱까지 간 것이었는데, 자신의 더러운 욕심과 불신에 빠져서 이미 불의한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그의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황폐하고 그의 집에는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이 세상에서 잘 살았고 불의한 돈으로 땅을 샀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저버렸기 때문에 그 직분도 더 이상 차지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그 직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미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가룟 유다의 심판에 대해서는 이미 이 세상에서도 드러났는데, 마태복음과 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종합해서 보면 그가 결국 자살을 했고, 그 끈이 끊어져 시체가 땅에 떨어지면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가 후회하면서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던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샀기 때문에 그가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이름은 자기들 가운데서 빠져야 하고 새로운 살을 세워 열둘이라는 숫자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진정한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믿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저 중동 땅에 있는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유대인만 있는 게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도 많고 다른 인종도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나라가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속적인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럼 오늘 진정한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움을 받은 크리스천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10명도 할 수 있었고 13명이나 15명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왜 굳이 12명으로 하셨겠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 열두 지파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제자들을 통해 시작한다는 의미로 열두 명을 뽑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번째 사도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영적 이스라엘이고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인데, 이 땅에서 내가 별로 성공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엄청난 인물인 것도 아니고, 그냥 초라하고 평범한데, 내가 무슨 영적 이스라엘인가 하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영적인 이스라엘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돈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학벌이 좋고 그래서 성공한 것이라고 보여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영적인 이스라엘로 삼아주신 이유는, 이 땅에 진짜 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진짜 복, 하늘 복, 하나님의 복을 이 땅에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이야기하는데, 그 진짜 복을 이 땅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진짜 복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그냥 덮어놓고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정결함을 받고 완전히 해결하고서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의 시작은 성령님이 오시도록 자기들의 마음을 준비시킨 다음에 왔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적당히 덮어놓는 게 아니라 깨끗하게 해결하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회개하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 때 은근슬쩍 덮어놓고 가서 별 문제가 안 된다 생각하며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이렇게 열심히 와서 예배드리고,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모든 모임에 다 참여하고, 사역도 열심히 하고, 삶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다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죄의 문제,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 하나님 앞에 숨겨놓은 죄를 과거의 일이라고 슬쩍 덮어놓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결을 하고 그 다음에 나아가야 합니다. 해결하지 않은 채 아무리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보고 사역을 하고 모두 다 해도, 기초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 아무리 쌓아도 밑이 모래이기 때문에 다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인 사람들은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지나갑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그냥 덮고 지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해결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통해 교회가 뭔지, 믿는다는 것이 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굉장히 성공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똑똑하기도 했고, 특히 다른 제자들은 다 가난했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엄청난 부를 챙겼습니다. 그냥 보면 아주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도 죽었으니까 나머지 열한 제자도 다 잡혀서 죽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완전히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 벌고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가룟 유다만 죽고, 나머지 열한 명은 다 살았습니다. 살았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 후에 이들은 놀랍게 변화가 되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생 역전입니까? 살려고 했던 사람은 죽었고, 이제 죽었구나 했던 사람들은 다 살아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렇게 세상의 논리와 주님의 논리가 다른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갑니까? 그래서 세상이 성공이라고 해주는 것들을 자꾸 따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힘과 권력에 의해서 뭔가가 되는 것 같은데,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도 두 종류입니다. 알고 쓰임 받는 것과 모르고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고 쓰임 받는 경우에는 악역을 맡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뜻대로 남을 해치고 떵떵거리고 남을 밟고 올라가는데, 나중에 보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것입니다. 악하게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쓰임을 받든 모르고 쓰임을 받든, 선한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겠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예수 믿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교회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가룟 유다의 문제를 정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2. 사도의 조건 (21-2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떠나시면서 분부하신 게 있는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4)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기다리며 모여서 첫째로 기도했고,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1-22절)
한 명을 뽑는데 크게 두 가지 자격이 주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열두 명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이때까지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함께 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늘 같이 먹고 자고 다니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보고 느끼고 듣고 지내며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도 알고, 가정생활도 알고, 인간관계도 알고, 같이 먹고 자고 입고 함께 살았던 사람,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히 요한의 세례, 즉 요한이 사역할 때부터 120명이 모인 이때까지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도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함께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야고보서의 저자)가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같이 다닌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형제인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믿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함께 해야 한다는 조건에 맞지 않았습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처음부터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지금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합니까?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중간까지는 잘 왔고 거의 다 왔는데, 결정적으로 끝에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안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120명이 있는데, 이전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 해도 남자만 5천 명이었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겠습니까? 그런데 남은 사람은 120명입니다. 열두 사도와 예수님의 가족들을 빼면 100명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끝까지 함께했던 사람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실함입니다. 신실함(Faithfulness)이란, 한 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약속을 했다가 사정이 생겨서, 능력이 안 되어서 못 지키는 것은 신실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처음에도 같이 했고, 그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지금도 같이 하는 사람들 중에 사도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이렇게 예수님을 잘 알고 함께 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자격요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증인은 부활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초창기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가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조건으로 해보니까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3절)
이들은 요셉과 맛디아인데, 요셉은 바사바와 유스도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도의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딱 이 두 사람만 거기에 해당이 되어서 이들을 추천한 것인지, 아니면 더 있었는데 이 두 명만 한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이 두 명이 된 걸 보면, 이 두 사람이 그 조건에 드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되어도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명을 놓고 추첨을 하는데(제비를 뽑는데), 그 경우에도 이렇게 기준을 정하고 엄격히 심사하여 내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봅니다. 아무나 다 후보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자격이 되는 사람들을 엄선해서 추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에도 공천위원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3. 열두 번째 사도 맛디아 (24-26절)
그래서 이렇게 두 사람을 추천하며 뭘 합니까?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4-25절)
유다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자른 게 아니라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습니다. 자기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탈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한 내용을 보면 두 사람 중에 주님이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추첨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선출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도 모든 다른 성도들과 같이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속으로 ‘꼭 내가 되어야 하는데. 저 사람이 되면 안 되는데.’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누가 되어도 좋습니다. 자기가 되면 두렵고 떨리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것이고, 상대방이 되면 축하해주면서 전심으로 협력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형식적으로 잠깐 기도하고 하나의 순서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아주 진실하게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머리를 동원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다음, 무엇보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기도한 겁니다. 그런 준비는 하나도 안 하고 ‘오, 주여, 도와주십시오.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안 하고 열심히 일만 해서 자기들 나름대로 완벽한 준비를 갖추어놓고 이제 뽑자고 하는 것도 믿음의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맡기며 기도하는 동시에,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그 결과가 나왔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르는 겁니다. 속으로 ‘요셉이 되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맛디아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일단 되고 나서는 요셉파, 맛디아파가 있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성숙한 자세입니까?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26절)
저는 확신합니다.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에이 씨’ 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와’ 하며 박수를 쳤을 것이고, 분명히 믿기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이 가장 크게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후에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인지도 모르고 그 다음에 뭘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이렇게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누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고, 이름이 나와도 좋고 안 나와도 좋고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에는 내가 높으냐 네가 높으냐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이런 분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겁니다. 이들이 여기서 갈라져 싸웠으면 우리는 믿을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분들입니까? 우리도 이분들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참 미묘합니다. 이것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인데,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 더 강조하는 데가 우리 장로교이고, 인간의 책임을 조금 더 강조하는 데가 감리교입니다. 단순히 설명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또 침례교는 인간의 경험을 조금 더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기들은 자기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세례(침례)를 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세례(침례)는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받는 것인데 아기들은 그렇게 못 하니까, 그 대신 부모의 믿음으로 ‘헌아식’을 하며 주님께 바칩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교는, 물론 그것도 맞지만 이미 하나님의 주권이 이 가정에 임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 가정을 사랑하시고 이 아기가 이 믿는 가정에 태어나고 자라게 하셨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라고 보며 세례를 베풉니다. 물론 세례를 베풀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입으로 고백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이 아기를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하나님께 맡기면서 세례를 베풉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은 같이 가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만, 우리 인간의 책임과 최선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도, 우리 인간을 사용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번에 컨퍼런스도 하고 이것저것 사역과 봉사를 하면서 같이 하자고 하는데, 그것이 별 것 아닌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 없으십니다.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도 헌금함에 봉헌을 하면서 들어오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돈이 필요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헌금하라고 하시고 봉사와 사역을 하라고 하십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 밖에 모르고 남을 챙길 줄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 돈을 드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생명과 같은 돈 아닙니까? 특히 유학 생활과 이민 생활에서 돈은 생명 같습니다. 돈을 한 푼 벌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 돈을 드린다는 것은 생명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시입니다. 내 돈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것인데, 왜 그 엄청난 부자이신 하나님께 드립니까?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통 누구를 사랑하면 돈을 드리든지 선물을 사서 드립니다. 너무 사랑하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드리고 가만히 있습니까?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시간을 냅니다. 여기 와서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혼자도 드릴 수 있지만 왜 같이 드립니까?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같이 예배하며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가 왜 사역하고 봉사합니까? 내 봉사와 사역이 하나님은 하나도 필요가 없으십니다. 목사도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쓰십니까?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좀 되어 보라는 겁니다.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기회를! 이게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헌금하고 봉사하고 시간을 내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뭔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이며 은혜인가를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과 성도들의 모습은 성령이 임하시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굉장히 중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이, 부모가 없어진 자녀 같이 그런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다.’라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약속,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하셨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참 영생의 길이라는 것,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을 마쳤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마음을 모아 간절히 합심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실 때 주님의 증인이 되어 나아가는, 그래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의 역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