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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고장 등의 사정으로 녹음 파일이 제대로 저장되지 못하여, 이번 주 말씀은 음성설교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201742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5

빌라도의 안타까운 선택

(마가복음 151~15)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가장 운이 없는 비운의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몇 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사울 왕도 있고, 또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가장 운이 나쁜 사람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본디오 빌라도라고 생각됩니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읽을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을 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쓴 것을 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경을 읽어야 했던 저는, 중학교 시절(중등부)부터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사도신경에 나와 있을까?’ 사실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유대 백성들에게서 고난을 받아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의아해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여라든가, ‘시몬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하여라고 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다들 그런 생각을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항상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을 살펴보기에 앞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빌라도는 운이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 아니라, 아주 잘못된 최악의 결정을 스스로 내린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   빌라도 앞에 끌려가신 예수 (1-5)

 

14장에서 예수님의 사형을 공회에서 확정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 앞으로 옵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1)

 

사실 그들이 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해서 공회로 모여 사형을 확정한 것은 처음부터 다 불법입니다. 1절에서 새벽에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는데, 그 몇 시간 전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공회로 모여서 사형을 확정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를 다루도록 허락해준 공회는 우리의 국회와 비슷한데, 7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제사장이 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회는 개인의 집에서 모일 수 없었고, 또 밤에 모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그 밤에 모였습니다. 특히 사형과 같이 중대한 사건은 절대로 밤에 모여 결정할 수 없는데도, 그들은 그때 예수에 대한 사형을 확정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불법적으로 한 것입니다.

 

당시는 유대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죄인이라 하더라도 유대인들 스스로는 사형을 시킬 수가 없고 로마 정부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18:31).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2)

 

사실 빌라도는 궁금했습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이 기적도 많이 행하고 놀라운 가르침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는 정보를 이미 다 갖고 있었기에,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더 이상 숨기지 않으시고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고소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안 하십니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3-5)

 

지금 이 앞에서 대제사장들은 최선을 다해 예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3).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이 로마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예수가 정치적으로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부각시켜 죽이려고 합니다(2). 왕은 로마 황제인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를 붙여서 사형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은 굉장히 크고 위험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에게 따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2).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곧 예수가 이 모든 죄목으로부터 결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누구입니까? 험한 로마 정치계에서 지금까지 버텨온, 닳고 닳은 정치인입니다.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경험했고, 여러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온갖 정치적 음모, 뇌물 수수, 청부 살인, 고소, 고발, 권력 암투 등을 겪고도 이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정치 9단입니다.

 

그렇게 험한 정글 같은 세계에서, 빌라도는 지금까지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조금만 시간을 같이 보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재빨리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약삭빠르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그러한 빌라도는 예수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아주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아무 말이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이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입니다. 자신을 변호해서 결백을 밝혀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2)라는 한 마디 외에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죄목이 다 거짓이지만 그것에 대해 변호하지 않고 그냥 침묵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7)

 

제가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너무 화가 나서 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 고발을 당하는 사람들이 취하던 태도였습니다. 마구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며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에 힘썼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하나하나씩 폭로하고 드러내며 도리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왜 이렇게 답답하게 가만히 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고난과 또 죽음까지도 겪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과 죽음 뒤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해봐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결백한 사람은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사실이 아닌 것으로 억울하게 비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억울하지만 잠잠해보십시오. 언젠가 결백이 밝혀지게 됩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12).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비록 지금은 너무 힘들지만, 너무 괴롭고 화도 나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옳게 판단하시고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잘못된 지적들로부터 결백하다면, 어느 날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진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참 소망과 신뢰를 두고 사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침묵하고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언젠가 주께서 진실을 드러내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한다고 고발을 합니다. 그때 갈릴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간교하고 비열한 정치인인 빌라도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자기는 이 일에서 슬쩍 빠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종교적인 것이며 또 시기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0)

 

빌라도는 이것이 종교 문제인 줄 알았고, 종교지도자들이 예수가 자기들보다 더 뛰어나게 되니까 시기해서 고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런 어떤 일에도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갈릴리"라는 말이 그의 주의를 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에게로 예수를 즉시 보냅니다. 이 헤롯은 바로 세례 요한을 죽인 사람이고, 그 동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며 두려워하면서도 예수를 보기를 원했던 인물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귀찮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예수는 헤롯에게로부터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그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만듭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율법에 의하면 옳지 않다고 한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지 않고 고민하다 그를 가두었습니다. 그러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춰서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기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딸은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여, 결국 어쩔 수 없는 척하면서 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도 진리를 알면서 계속 미루다가 결국 결정적인 순간이 오니까 악한 길을 택하고 맙니다.

 

이처럼 진리를 알면서도 미루다가 최악의 결정을 한 두 사람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은 원래 원수였던 이 두 사람이 그 날에 예수님 때문에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최악의 결정을 한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론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 그 상황으로부터, 그 일로부터 벗어나 보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때때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들을 직면하지 않고 피하게 되면, 그 일들이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곧 더 가깝게 다가와서 더 큰 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1990년대에 천하무적이었던 권투선수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입니다. 그 당시 그의 펀치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상대 선수들은 도망만 다녔고, 그러다 한 방만 맞으면 다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바로 이곳 콜럼버스 출신의 무명 선수였던 버스터 더글러스(Buster Douglas)에게 도쿄에서 무참히 KO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하라는 연습은 잘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될 것만 많이 하고 다녔더니, 아무리 천하무적이었더라도 비참한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코치가 연습시킬 때 그것이 힘들고 싫어서 살짝 도망가 모면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시합 날 아주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닥친 어떤 일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많은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담대하고 용기 있게 그것을 직면하면, 언젠가 큰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2.   빌라도의 사형 언도 (6-15)

 

당시에는 유대인의 유월절 때 총독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었고,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6-8)

 

그래서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놓아주자는 뜻을 비칩니다.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9)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1)

 

바라바는 강도였고(18:40), 살인자였으며, 민란을 일으킨 자였습니다(23:19). 그는 당시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운동을 벌이던 유대인 열심당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놓아달라는 겁니다. 바라바는 폭력으로 로마 정부에 대항해 싸운 사람입니다. 그는 강합니다. 투사입니다. 반란을 일으키며 싸운 민족의 영웅입니다.

 

반면, 예수는 너무 부드럽습니다. 예수는 가르치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될 줄 알았는데 너무나 무기력하게 체포되어 있는 나약한 예수보다, 강하고 투쟁적인 바라바가 더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빌라도는 곤란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백성을 설득하려 합니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2-14)

 

이처럼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가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굉장히 애쓴 모습이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사도신경에서 매주 고백해야 합니까? 이 정도로 열심히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빌라도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항상 고백하는 것은 너무 억지이고 그에게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 힘썼는지를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는 왜 예수를 놓아주려고 애썼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까?? 진리에 따라 행동하려고 그런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바라바를 놓아주면 자기에게 큰 일이 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라바가 풀려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다른 폭동이나 요인 암살이나 로마 군인 습격이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빌라도 자신의 총독 자리가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렇게 위험한 바라바 대신, 전혀 위험하지 않은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마구 흥분해서 큰 소리로 외치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만약 지금 민란이 일어나면 그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의 총독 자리가 위태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180도 바꾸면서, 이제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노력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5)

 

그는 예수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아무런 죄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를 그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려 하는 아주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에게는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18:37-38)

 

그는 진리가 뭐냐고 질문을 해놓고는 그냥 나가 버립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로 옆에 두고도 빌라도는 진리를 아는데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출세와 성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빌라도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했고, 예수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매주마다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3.   빌라도의 길과 예수의 길,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좁은 길

 

빌라도는 아주 복잡한 인물입니다. 이중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도록 명령하고, 또 죽는 데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고 그의 대답을 들으며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또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진리의 말씀이 그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옳은 것보다는 인기를 원했습니다. 바른 성품보다는 높은 명성을 추구했습니다. 유대 총독의 자리를 지키고자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빌라도는 철저히 진리를 외면하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의 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권력을 과연 잘 지키고 안락하게 살았을까요?

 

2년 전 안식월을 얻었을 때 감사하게도 좋은 곳들을 참 많이 갈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도 갔었는데, 스위스에는 유명한 산들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융프라우(Jungfrau), 파라마운트(Paramount) 영화사의 로고에 나오는 산인 마테호른(Materhorn), 그 외에도 티틀리스(Titlis), 리기(Rigi), 필라투스(Pilatus)도 있습니다. 루체른(Luzern)이라는 도시 근처에 필라투스(Pilatus) 산이 있습니다. 필라투스라는 이름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한 바로 그 빌라도의 라틴어 이름(폰티우스 필라투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성경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 이후에 더 안 나오지만, 역사에는 조금 더 등장합니다. 그는 유대의 다섯 번째 로마 총독이었는데, AD 26~36년까지 10년 간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이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인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때에 활동하셨던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에 책에는 빌라도가 잔인한 총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 대한 지나친 아부와 충성으로 일관한 사람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는 빌라도는, 그래서인지 다른 총독들보다는 오랜 기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보통 5-6년이면 바뀌는데 빌라도는 10년을 총독으로 있었으니까, 그의 아부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AD 30년이나 31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데, 그 얼마 후 모세의 거룩한 그릇을 보겠다고 예루살렘으로 온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빌라도가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로마 정부에 보고되어 빌라도는 로마의 소환 명령을 받습니다. 로마에서 자신을 소환하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빌라도는 자살합니다. 그런데 황제가 그에게 자살하라고 권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지, 자살이 그의 최후였습니다. 너무 허무하고 너무 비참합니다. 겨우 그러려고 진리를 외면하면서 결백하신 예수님까지 죽게 내어준 것입니까?

 

전설에 의하면, 죽은 빌라도의 시신을 로마의 어느 강에 버렸는데 그 강이 해마다 범람하자, 빌라도의 유해를 수습해서 다시 묻은 곳이 바로 필라투스 산 정상의 호수라고 전해집니다. 그러자 필라투스 산은 수시로 천둥번개가 치는 공포의 산으로 바뀌었고, 스위스 사람들은 그것을 필라투스(빌라도)의 악령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6세기에 루체른의 성직자들이 그곳을 방문한 뒤 그 호수는 메워졌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이제 이렇게 전설로 밖에 전해지지 않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대 총독 자리를 지키고자 예수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았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비참함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왜 이 미국까지 와서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또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면서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르지만 그냥 바쁩니까? 우리의 인생이 무엇입니까? 요즘은 수명이 많이 늘었지만, 어쨌든 언젠가 한번은 다 떠나는 게 인생입니다. 이제 남은 날을 계수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짧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우리는 빌라도처럼 사람의 인기와 만족을 추구하며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빌라도처럼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 배를 위해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빌라도처럼 출세와 성공을 목표로 삼고 세상적 방법을 쓰며 살겠습니까?

 

바쁘고 힘든 유학이나 이민 생활 때문에 좁아진 우리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전 세계를 향해 우리 눈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전 세계를 내 집인 것처럼 품어 보십시오. 시야가 넓어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혹시 속으로 아니, 이 조그만 콜럼버스에 살면서 세계는 무슨 세계인가? 다른 데 가는 직항도 별로 없는 곳에서?’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계를 갑니다. 직항도 필요 없습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수많은 민족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할 때, 우리는 세계로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민자나 유학생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데, 솔직히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굉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잘 안 됩니까? 그것을 모르고 그저 매일 살기에 급급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그저 자신을 맡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다른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갈 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정말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도 물론 중요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향과는 다르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안식월 때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신 김제은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시애틀 온누리교회에서 오래 전 전도사로 섬겼습니다. 그때 제가 처음 부임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교역자 가정들이 함께 어디론가 무슨 구경을 하러 간다고 해서 같이 갔습니다. 어디를 가느냐고 했더니, 바로 연어 부화장(salmon hatchery)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살던 연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곳으로 오려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강한 물살과 싸워야 하고, 물이 얕은 곳에서는 온 몸이 찢어지고 상처를 입으며, 중간 중간에 많은 위험을 넘어야 합니다. 곰도 있고 다른 짐승들도 있는데, 가장 위험한 존재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못된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어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끈질기게 최선을 다해서 목적지를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점프를 해서 부화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이 그것입니다. 물에 있다가 점프를 해서 부화장 입구를 통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알을 낳고 삶을 마감합니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냥 물결대로 흘러가는 것이 편합니다. 세상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안전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그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빌라도 역시 넓은 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은 영광의 길이 되지만, 넓은 문은 결국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What is popular is not always right, and what is right is not always popular.” (인기 있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고, 옳은 것이 항상 인기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이 좁더라도, 힘들더라도, 인기가 없더라도, 고난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도, 그 길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되는 때가 우리에게 옵니다. 둘 다 택할 수는 없습니다.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계속 미루게 되면,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 악한 쪽을 택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무엇을 택해야 하는 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주님의 편에 서며, 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항상 좋은 선택을 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런 순간이 왔을 때 갑자기 옳은 선택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평소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주님의 길을 가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처럼 넓은 길을 가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 그것은 죽음의 길이며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비록 당장은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인기가 없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늘 동행하며 좁은 길로 나아갈 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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