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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19일 주일예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8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24)

 

[들어가는 말]

 

제가 안식월을 가졌던 게 벌써 2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한국을 갔는데, 목 주변에 사마귀 같은 것들이 자꾸 나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 병원은 성형외과였는데, 거기서 보니까 일하는 여성들도 그렇고 거기 있던 매거진도 그렇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성형수술을 받은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쌍거풀 수술 같은 것은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연예인들뿐 아니라 웬만한 젊은 여성들 중 성형수술을 안 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쌍꺼풀 뿐 아니라, 수술로 코를 높이거나 턱을 깎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외모를 고치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비만일 때와 날씬할 때 가지는 마음 상태나 말하는 것에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어떤 여성이 성형수술을 하러 의사를 찾아온 상황을 상각해 보십시오. “어디를 어떻게 고쳐드릴까요?” 하고 의사가 물을 때, 환자가 아무렇게나 해주세요.”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여배우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속으로 될 수 있는 걸 해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하는 말은, 교통사고로 심하게 얼굴이 망가지거나 타고나면서부터 얼굴에 흉터가 있어서 성형수술을 하는 환자들보다, 예뻐지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환자들의 경우에 불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코가 더 높아졌는데 환자의 눈에는 별로 높아진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수술만 하면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는 잘못된 기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형수술을 통해 얼굴이 더 예뻐졌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바뀐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감정이 변하고 가치관이 달라져야 사람이 바뀐 겁니다. 물론 외모가 나아짐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자신감과 만족감은 생겼을지 몰라도, 겉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속까지, 즉 성품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자기 얼굴이 어떤 유명한 여배우와 얼굴이 비슷해졌다고 해서 자기가 마치 그 배우인 줄 알고 행동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알려주는 것은, 믿음이란 사람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라는 사실입니다. 성형수술을 해서 몸의 일부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과정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형수술, 아니 대대적인 수술을 받음에 있어 누구를 모델로 해서 수술을 해야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조금 낫거나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 안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셔서 있었는데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   옛 사람의 방탕한 모습 (17-20)

 

오늘 본문은, 왜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면 안 되는지에 대해 말씀해주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가 뭔가 하면, 그저 약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우리 삶에서 빠져 있었던 부분이 채워졌기 때문에, 뻥 뚫렸던 공간이 채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처럼 방황하며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십니다. 회개와 죄의 용서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회개도 안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았는데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신분상으로 그렇게 해주신 것이지, 실제로 내 안에 있는 나쁜 습관이나 과거에 받은 상처들이 믿는 순간에 모두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남아 있는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옛 사람입니다(22).

 

옛 사람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내 마음을 지배하던 옛 인격을 말합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옛 모습이고 하나님 없이 살던 때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생활 방식은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산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남을 해치면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오는 겁니다.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며 이권을 챙기고 권력을 추구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한 가치관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삶의 방식은 결코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7-18)

 

여기에 보면, ‘옛 사람마음의 허망한 것”(17) 허망한 생각을 가지고 살고, 마음이 굳어짐”(18) 마음의 완고함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없습니다. ‘옛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허망하고 경직되어 있고 강퍅하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옛 사람은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도 올바른 것은 받아들이지 않도록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헛된 것에는 아주 부드럽고, 옳은 것에는 아주 완고해서 안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합니다(18). 그래서 마음이 공허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무지의 흑암 속에 갇혀서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습니다(18).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에베소서를 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방인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에베소 교인들 자신이 이방인이고, 이전에 바로 그런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는 에베소의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옛날 방식대로 살지 말라고 엄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옛 사람은 마음이 허망하고 경직된 채 무지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살기 때문에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19)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를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방탕과 탐욕에 빠지고 더러운 일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윤리적으로 사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양심에 비취는 주님의 빛을 고의적으로 거부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셔도 막으며 어둡게 하면서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니까, 손발의 행동도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 그가 말로는 '먹고 마셔라' 하여도,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 (23:7, )

 

내가 누구를 방문했는데 주인이 이거 드시고 마시세요.”라고 했지만 그것이 진짜 속마음과 사람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 드세요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빨리 사라져라일 때, ‘먹고 마셔라하는 말이 그 사람의 진짜 사람됨입니까, 아니면 빨리 사라져라입니까? 물론 빨리 사라져라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사람됨입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6:43-45)

 

이처럼 옛 사람은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감각이 없습니다. 옛 사람에 끌려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가끔은 착하게 할 수도 있고, 마음에 선을 쌓았다고 100% 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 도덕적 감각이 없으니까 자기 몸을 방탕에 맡겨 버립니다. 또 방탕에 내맡기니까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요즘 얼마나 많이 봅니까? 사람이 욕심에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을 더 좋아합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부자라고 돈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부자라도 만족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부자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돈으로 채워도 안 채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억만금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원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으로 꽉 채웠기 때문에 부족함을 못 느낍니다.

 

우리가 부르는 곡들 중에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라는 찬양이 있는데 좋아하십니까? 아주 위험한(?) 찬양곡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라고 고백은 했는데 이것 달라고 하고 저것 달라고 합니다. 만족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다는 것은 진짜입니다.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만족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옛 사람으로 죄의 본성을 따라서만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런 옛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2)

 

옛 사람이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것입니다. 그런 경향이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는 것도 허망하고 욕정을 따라 살며 그 결과는 썩어 없어지는 것이 옛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만 그렇게 삽니까? 무슨 사건이 벌어져서 줄줄이 잡혀 들어가거나 몰리니까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 교회 직분자들이 많습니다. 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일 텐데 왜 그렇게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전혀 옛 사람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있다면, 바울이 뭐 하러 이미 생명을 얻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이전에는 그런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계속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0)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도 옛 사람이 사는 식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 죽으면 천당 가는데 뭐. 내 마음대로 산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정말 예수 믿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게 살지도 않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이단종파가 바로 구원파입니다. 자기는 구원받았으니까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분명히 신분상 새 사람이 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옛 사람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이 자유인이면서도 아직 자신 안에 남아 있는 노예근성 때문에 자기가 아직도 노예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한국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있다면 일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좋은데 나라로서 싫어합니다. 아마도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선진국인데도 일본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건 한국 사람들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일본이지만, 일제라고 하면 혹합니다.

 

요즘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러분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십니까? 제 차도 토요타인데, 다들 일제가 좋다고 하면서 토요타, 렉서스, 혼다, 아큐라, 닛산, 인피니티, 스바루, 미쓰비시, 마즈다 같은 일본 차를 탑니다. 일본은 싫어하는데 일본 차는 좋아합니다. TV는 몇 년 전부터 삼성이나 엘지(LG)가 많이 좋아졋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니가 최고였고, 파나소닉, 샤프, 산요, 도시바 등등 많습니다. 카메라는 다 일본 제품들입니다. 캐논, 니콘, 소니, 올림푸스, 후지 등등 다 일본 것입니다.

 

일본을 싫어하는데 일본제품은 좋아하는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노예가 바로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그것을 동경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430년을 살면서 노예가 되어 살았는데, 모세를 통해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 이집트로 돌아가면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데...”라고 하면서 먹는 것의 메뉴를 죽 읊으며 우리를 왜 이리로 데리고 나와서 죽게 하는가?”라고 불평합니다. 거기서 노예로 사는 게 여기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노예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싫어하는데 거기를 동경하고, 싫어하는데 거기에 종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지, 계속 붙들려 노예로 사는 게 어디 좋은 일입니까? 비록 힘들어도 광야에서 자유인이 되는 게 더 좋은 일입니다.

 

이처럼 새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옛 사람의 습관과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 그 옛날 그렇게 놀던 게 재미있었는데라고 하며, 새 사람이 새 사람답게 살지 않고 옛 사람처럼 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에서도 새 생명의 신분을 얻은 성도가 새 생명의 성도답게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6:1~11).

 

새 사람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사실이지만, 새 사람이 된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대로 살아야 할 명령이기도 합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주님의 명령대로 사는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계속 옛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이 좋다는 것은 새 사람으로 사는 게 더 많은 것입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2.   새 사람의 성결한 모습 (21-24)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새 사람이 된 우리에게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즉 옛 사람과 같이 행하지 말라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17).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는 새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이방인, 즉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2:1)이지만,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2:5).

 

새 사람은 마음이 허망하거나 경직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에 대해 닫혀 있으므로 그 진리를 모르는 무지의 흑암에 빠진 자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옛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쓸 데 없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은 무지의 어두움이 아니라 지식의 빛에 이른 사람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1)

 

여기서 듣는다는 것과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듣는 것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신 일,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대수로 공사를 벌여 물이 나오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원래 물이 없는 사막에 물이 있는 데서 물을 끌어오는 공사와 같은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나오게 하는 것과 같이 굉장한 일입니다. 듣는 것은 일단 굉장한 일입니다.

 

그러나 물이 개통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물이 나온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수도 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만 끌어오면 뭐 합니까? 물이 나오게 하는 수도 시설이 있어야 합니다. 정수도 해야 합니다. 물을 사용해서 농사도 짓고, 사막을 옥토로 가꾸는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물을 끌어온 목적은 우리도 물이 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물이 나오게 함으로써 그 물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입니다. 물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마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들었으면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제가 요즘 깨달은 게 있습니다. 영어예배에서 이제 설교를 안 하게 되니까, 전도사님의 설교를 가만히 듣습니다. 매주 영어예배 때 말씀을 듣다 보니까 새롭게 와 닿는 게 있습니다. ‘,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못 듣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그냥 들리는 정도로 하면 안 되고 집중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듣는 게 아니라, 설교에 참여를 해야 합니다. 이게 진짜인가 하고 찾아보고, 영어 성경이 있으면 비교도 하면서, 열심히 들어야 안 졸립니다. 가만히 있으면 멀쩡하다가도 졸립니다. 그래서 설교는 그냥 듣는 시간이 아니라 참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늘 무슨 말씀을 주시는지 집중해서 들으며 말씀을 한 개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었으면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쓰셔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듣기만 하고 끝나면, 마치 사막에서 물이 나오도록 연결해놓고 그 콸콸 나오는 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놔두고 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낭비입니까?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도 읽고 묵상하며, 또 삶 공부 등을 통해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갖고 계신 목적은 그저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건 너무 시시한 일입니다. 시시한 인생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목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100% 예수님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방향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로 달려가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100% 모두 하나님 앞에 언젠가 서게 됩니다. 그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어떻게 살다 왔니?’라고 물으시면, 그때 , 아주 편안하게 살다 왔습니다. 잘 먹고 잘 살다 왔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는 무뇌충이나 복제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과 생각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이 말은 좋은데 감이 잘 안 오지 않습니까? 그게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오른뺨을 맞으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오른뺨을 맞으려면 왼손이나 오른쪽 손등으로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고, 5리를 가지고 하면 10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오늘 Steve Hong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큰 도전과 은혜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 오시기 전에 샌디에고의 월남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서 영어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있던 지역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홈리스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홈리스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월수금으로 오픈해서 샤워도 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중에는 드럭을 하는 사람도 있고 파는 사람도 있고, 마리화나를 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켜주던 경찰들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이것을 압니까? 당신들의 이웃들이 당신네 교회를 싫어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서 세상이 미워하는 교회가 됐구나.’라고 생각되어 감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겁니다. 우리가 보통 주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고, 새 사람을 입고,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제가 새 사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럼 너 집 다 팔아서 내놔.”라고 하시면 할 수 있습니까? 아이를 위해서 등록시키고 레슨도 받게 하는데 그 돈 내놔.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써.”라고 하십니다. 휴식할 시간이 되어서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려고 하는 순간 지금 나와. 나와서 저기 있는 저 불쌍한 사람을 도와.”라고 하십니다. 너무 피곤해서 쉬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을 초대해. 그리고 저 사람 잘 데 없으니 네 침대에서 자게 해.” 운동을 좋아해서 골프를 치려고 하는데 그 골프채 도네이션 해.”

 

여러분, 이런 일들을 정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며 베푸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구름 잡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지. 그리스도를 닮아야지.’ 그런데 그런 일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일들입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처럼 하지 못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남을 위해 포기하지 못합니다. 내가 바쁘니까 알면서도 안 하고, 내가 좀 돈에 여유가 있지만 알면서도 안 씁니다. 그냥 나를 위해서, 내 아이를 위해서만 씁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는데도 벌이 안 내리나? 왜 멀쩡하게 사나?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고 희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 번 살아보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안 사니? 그렇게 하려면 필요 없다. 당장 이리로 와라.” 하고 그냥 확 데려가시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라고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훈련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 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하는데, <생명의 삶>에서 받은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가리켜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받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체육관에 가서 근육 운동을 할 때 ‘body building’이라고 하지 ‘body creating’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몸의 근육을 일으키는 것이 근육 운동이지, 없는 근육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근육을 기르는 운동을 할 때 근육이 커지고 강해집니다. 바로 우리가 하는 게 그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감사하며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점점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여기 22-2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세 가지 책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2)

 

계속 벗어 버려야 합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2)  우리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3)

 

이것은 생각의 태도를 바꾸라는 겁니다. 영어성경 번역들 중 CEV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너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도록 하라.” <새번역>에는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새 사람의 심령이 새롭게 되지 않아서 새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된 사람답게 생각하며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이 바로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야 하는데,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하라고 합니다.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과도 통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새 사람답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어야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4)

 

이 말씀도 우리가 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 사람이 되었으니까 새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할 때의 새 사람은 앞으로 노력하면 지으심을 받을 새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이미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스스로를 낳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출생은 부모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출생(거듭남, born again)도 자기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새 사람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서 새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거지 왕자 이야기는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왕이 어느 날 자기 아들과 너무 비슷하게 생긴 거지 소년을 발견하고 너무 마음이 뜨거워져서 데려와 양자로 삼은 이야기입니다. 거지가 왕자가 되어서 왕궁 안으로 들어오니까 으리으리하고 대단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여전히 거지입니다. 화려한 방 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엄청난 음식이 있으며,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생각은 여전히 거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왕의 종이 와서 왕자님, 부족한 점은 없으십니까?”라고 할 때 자꾸 나으리, 한 푼 줍쇼.”를 외칩니다.

 

거지였던 자기를 왕자로 삼아주신 아버지 왕의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입니까? 계속 거지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빨리 왕자 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정말로 왕의 아들답게 살아야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왕이 원하는 것이고 왕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옛날 신분인 것처럼 살고 있으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왕이신 만왕의 왕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고 슬프시겠습니까?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은, 우리가 왕자답게, 공주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사람을 입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가는 말]

 

겉모습을 굉장히 바꾸려고 애쓰다가 외롭게 살았고 슬프게 죽은 사람이 있는데, 바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입니다. 그가 어디를 갈 때마다 모자를 쓰고 다녔습니다.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하도 성형수술을 많이 받으며 흑인인데도 얼굴을 자꾸 하얗게 바꾸다 보니까 햇빛을 쐬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원래 옛날 모습을 보면 씩씩하게 잘생겼는데, 그것을 자꾸 바꿔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얼굴이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얼굴을 조금 바꾸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1:26, )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대로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새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e)’을 말합니다. 새 사람은, 타락으로 깨어진 하나님이 형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이 바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입니다(24). 의와 진리의 거룩함참된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회복된 새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모양(style)대로만드셨습니다.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스타일이 바로 우리의 하나 됨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완벽하게 한 하나님을 이루시듯, 우리도 하나 됨을 이루라는 것이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은 즉각적이거나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점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과정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다듬는 데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doing)보다 어떤 사람인가(being)에 더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인격이 되도록 변화시키시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시고,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또 상황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와 기도도 해야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특히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며 하나가 되어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혹시 힘든 사람이 있어도, 인내하고 함께 부대끼고 교제하며 나아갈 때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하신 그 사랑, 배신자도 사랑하신 그 사랑,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신 그 사랑,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그 희생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배우는 것은 혼자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함께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며 연습해 나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바로 가정이고 교회입니다. 특히 교회는 바로 그런 것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가족은 그래도 내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이 참고 그럽니다. 그런데 교회도 영적 가족입니다. 내가 싫어도 함께 부대끼며 서로 용납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모여서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훈련이 되고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새 사람으로 가득한 교회는 거룩해지고 새로워지며 능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한 교회는 무슨 일을 해도 새 일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 각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또 함께 교회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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