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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12일 주일예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7

헌신된 성도의 봉사로 세워지는 교회

(에베소서 47~16)

 

[들어가는 말]

 

1953529, 마침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이 정복되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문드 힐러리(Edmund Hillary) 경이었고, 그가 무사히 산을 내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힐러리 경은 자기 옆에 서 있는 네팔 사람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를 가리키며 모두 이 사람 덕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힐러리 경이 벼랑을 타고 내려오던 중 몸을 맨 밧줄이 끊어지고 비상 로프마저 놓쳤는데, 그 순간 노르게이가 자신의 비상 로프를 던져 둘이 함께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듣고 있던 기자들이 노르게이에게 힐러리 경을 구한 소감을 묻자 그는 지체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등산하는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돕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운명의 끈으로 함께 묶여 있으니까요.”

 

한 사람이 떨어져 죽으면 한 사람만 떨어져 죽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죽는 것이고, 한 사람이 올라가면 다 같이 올라가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 의식입니다. 목장이나 셀이나 구역이나 어떤 소그룹으로 모이든, 그 모임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이 핵심입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공동체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읽어보면 초대 교인들이 함께 지내며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고, 내 것 네 것 없이 다 공동으로 물건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정신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교회,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사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실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교회가 핍박 가운데 있다가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된 이후, 교회의 원래 모습 중 전체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큰 모임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가정에서 모이는 작은 모임은 잊어버렸습니다. 가정에서 모이는 사랑의 공동체가 원래 예수님이 원하시던 교회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option)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개인주의 정신 때문입니다. , ‘나 혼자 있는 게 편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핍박이 있을 때는 정말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 두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 붙들어줄 수 있는 공동체가 정말 필요했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간절히 서로 기도해주는 공동체가 필수였는데, 국교가 되고 보니까 재산이 생기고 건물이 생기고 명예도 생기고 또 높아지게 되니까, 결국 자신의 편안함 위주로 신앙이 변질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서 주님의 지상명령(“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만들어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 답을 바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4장 앞부분에서 하나 됨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되는 방법은 겸손과 온유와 인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또 우리가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처럼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은사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7-10)

 

이 점에 있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한 가지 전제를 하고 들어갑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며 나아가는 데 있어서 놀랍게도 다른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라는 말씀은, 우리의 다양성을 무시한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입니다. 영어로도 uniformity가 아니라 unity in diversity(다양성 속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7)

 

여기에 보면,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각 사람에게 알맞은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8-10)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그 아래인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을 말합니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10)라는 것은, 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래인 땅으로 내려오셔서 사시다가 위에 있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것, 즉 예수님의 승천(ascension)을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그 후에 하늘로 다시 승천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원사역의 결과로 만물을 충만하게하시기 위함입니다(10). 이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8절에 인용된 말씀은 시편 6818절입니다. 이 말씀은 정복과 승리의 결과 조공과 전리품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고향인 하늘나라로 금의환향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시대 때 장군들이 전쟁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오며 화려하게 개선을 합니다. 로마에 가면 아피아 가도가 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환영하며 군대는 그 길로 화려하게 개선을 합니다. 그때 백성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주던 장면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일로서 각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7). 그것이 바로 영적 은사,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는 우리가 잘났거나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승리하고 올 때 전리품을 장군이 나누어주듯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선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지금 70억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류의 수가 600억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DNA를 조사해보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목소리가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기계는 똑같이 만들어지는데, 인간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사람을 하나 이상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실 뿐 아니라 은사도 다르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모습도 다르고 은사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각자 독특하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즉 예수님을 내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며 믿고 영접한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은사가 뭐냐고 물으면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은사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없다고 한다면 나는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없다고 하지 말고 은사가 뭔지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찾아서 그 은사를 왜 주셨는지를 생각하며,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공동체(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잘못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왜 그런 은사를 주셨겠습니까? 방언을 주신 것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며 교회를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항상 비교하도록 부추깁니다. ‘너는 왜 저런 게 없니? 하나님이 차별하시는 게 아니니?’ 하고 부추깁니다. 그런 것은 다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2.  성경적 사역 분담의 원칙 (11-12)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눠주시는 은사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몇 가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1)

 

여기 네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사도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넓은 의미로 모든 성도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부활의 증인이며 초대 교회의 리더인 사도들을 말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 같은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이들은 한 군데 머물러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으로 또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은 한 군데 머물지 않고 옮겨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재 선교사들이 사도의 사명을 맡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선지자는 예언자라고도 하는데, 예언자라고 하면 미래 일을 점치듯이 예언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그런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변인(God’s spokesperson)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때 누군가를 부르십니다. “너는 가서 이 말을 전해라.” 그러면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전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든 설교자는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왕국 시대에 하나님을 떠나니까 예언자들이 많이 나와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잘못하고 있으면서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자기 마음대로 아무 말이나 하고, 화가 난다고 마구 분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대신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요즘도 직통 계시를 받아서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조심스러운 것이지만, 아직도 그런 경우는 있습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또한 교회에 복음 전하는 자를 주셨습니다. 영어로는 evangelist인데,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혹시 , 나는 그런 은사를 안 받았으니까 전도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할지 모르는데,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그런데 특히 전도에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빌리 그래햄(Billy Graham) 목사 같은 분이 복음 전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아주 단순합니다. 당연하고 기본적인 진리를 말씀하기 때문에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에게는 너무 단순하고 쉽고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단순한 설교를 마친 후 초청을 하면 구름 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걸어 나와서 결신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인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Unbroken>이라는 영화를 언급했는데, 그 주인공도 이 빌리 그래햄 집회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결심을 하도록 도와주는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 겸 교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목사와 교사가 두 직책이 아니라 한 직책, 즉 목사 겸 교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사는 반드시 목사가 아닐 수도 있지만, 목사라면 반드시 교사, 즉 가르치는 자이어야 하고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 떼를 먹일 수 있는 목사 겸 교사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곧 초대교회의 직분을 말하기도 합니다. 1세기 당시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의 직분들입니다. 1세기 당시의 직분과 지금의 직분은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 적용을 해보면 이 사람들은 한마디로 말씀 사역자, 즉 목회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왜 이런 말씀 사역자를 주셨습니까?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2)

 

하나님께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신 이유는 바로 성도를 온전하게하기 위함입니다. 요즘 평신도라고 해서 목회자와 구분을 하는데, 사실은 성경에 평신도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이지 평신도가 따로 있고 사제가 따로 있는 건 아닌데, 그런 말이 후대에 생겼기 때문에 하지만 편의상 성도는 평신도를 말한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훈련하고 준비시키는 것입니다(equip, train, prepare). 뭔가를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훈련시켜주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즉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보십시오. 목회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훈련하고 준비시켜서, 즉 온전하게 하여서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봉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봉사라는 말이 영어로 ministry입니다. 그러니까 사역또는 목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봉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집사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diakonia 또는 diskonos). 집사라는 말은 server(섬기는 사람, 도우미)를 말합니다. 레스토랑의 웨이터나 웨이트리스들이 섬기는 것 같이 일을 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것이 곧 봉사이고 사역이고 목회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사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게 돕고, 준비시키고, 훈련하고, 또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드리는 것이 목회자의 주된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사역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훈련 사역입니다. 목회자는 말씀과 기도로 성도를 훈련하며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고, 또 성도는 몸으로 뛰면서 봉사하고 목회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역의 역할 분담 원칙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일수록 이것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론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 목사가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난 경험이 있었을 때 그것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러한 사역 분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이 해야 할 일(훈련,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안 하고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을 빼앗아 할 때, 또 성도가 훈련(온전하게 됨)을 받으려 하지는 않고 봉사만 할 때, 반대로 성도가 훈련만 받고 봉사의 일을 감당하지 않을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성도를 훈련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성도는 훈련을 받아 봉사의 일을 감당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사역의 성경적 원리라는 것을 본문에서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집니다(12).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바로 세워지지 않고, 자꾸 삐거덕거리고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어떻게 생각해왔느냐 하면, 사역은 목사가 하는 것이고 성도는 목사를 돕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 말씀에 의하면 제가 여러분에게 제가 목회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러분이 목회를 잘하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생명의 삶> 공부 때도 이것을 강조했고 지금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아직도 성경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동안 해온 방식대로 전통을 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익숙한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 정신은 우리 생각이 성경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이 제자리를 찾을 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미국장로교에서는 목사를 ‘Minister of Word and Sacrament’라고 합니다. , 말씀을 전하고 성례전을 집례하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바로 ‘Minister of Everything Else’입니다. 나머지 다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의 현실을 보면, 대개 열심히 사역하고 봉사하는 교인들은 전체 가운데 약 20-25% 정도입니다. 나머지 75-80%의 교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의 사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교인 중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직분을 받은 사람만 사역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봉사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것은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왔다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교회를 장소나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건물이 있고 장소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훈련을 통해 확실한 그리스도인, 주님의 신실한 제자를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와 싸우고 악과 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그러한 성도를 온전하게 준비시키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가 목회자의 목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성도의 목회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돕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의 목회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여러분은 성도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신다면, 우리는 놀라운 역사를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 중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다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너는 뭐 하다 왔니?” 하시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저 편안하게 있다 왔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왔다 갔다 하다 왔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해서 사역을 잘 감당하다 왔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히 칭찬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내용 (13-16)

 

목회자가 성도들을 훈련할 때 훈련의 내용은 성숙과 봉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성숙)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도록(봉사)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와 직분은 섬기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런 직분이 있다하고 으스대거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게 아니라 섬기라고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3)

 

그런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이라는 것을 아는데 무슨 성장이 더 필요합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 같이 주님을 아는 일에 성숙한 사람도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자 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3:10-14).

 

그렇다면 우리도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성장하면 유혹을 이기고 풍조에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얼마나 힘쓰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아는 데 힘써야 합니다. , 말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세상의 풍파가 몰려오고 유혹이 와도 넘어가지 않지,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넘어가 버립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한 유혹과 요동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유혹과 요동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훈련의 내용은 어린아이의 신앙에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만 위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안 해주면 찡얼댑니다.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는 영어로 ‘No’입니다. 그 다음에 배우는 것이 뭔가 보니까 ‘me, mine, my’입니다. 엄마가 아무리 힘들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자기가 싫으면 그냥 ‘No’를 합니다. 뭐 좀 같이 하자고 하면 ‘No’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부 ‘me, mine, my’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런 것이 어린아이의 신앙입니다. 어린아이는 본능적이고 감정적이며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또 어린아이의 특징 중 하나는 유혹에 약하다는 점입니다. 뭔가를 들고 있다가도 사탕 하나 들고 흔들면 그냥 버리고 쫓아옵니다. 유혹에 약합니다.

 

우리의 사역이 진정한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팀 사역이 되려면 사역을 지탱하는 두 가지 방면에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진리와 사랑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아주 감상적인 사랑이 되고, 사랑 없는 진리는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예수님도 대제사장의 기도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17:17,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 위에 스스로 굳게 서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래야겠지만, 특히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분들과 목장 사역을 하는 분들은 말씀 위에 서기 위해 늘 애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이 진리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세워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보는데 나 자신도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사랑을 강조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5-16)

 

무슨 말입니까? 진리와 사랑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어떤 사역도 열매 맺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단사상이 좋아서 빠진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생활에서 사랑을 못 받은 경우입니다. 그들은 이단이 가르친 진리 때문에 그리로 간 것이 아니라, 이단 모임에 가보니까 자기들이 기존 교회에서 받지 못했던 사랑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 빠집니다.

 

실제로 성경을 잘 몰라도 사랑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물론 말씀이 들어가야 하지만, 일단은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이 열립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변화시킨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의 전기 작가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의 가르침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부족의 추장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어린이주일학교에 나가면서, 또 중고등부 시절을 보내면서, 수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매주 빠지지 않고 분반공부에도 참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제 선생님들이 저를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일은 헛될 뿐입니다.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사랑이 없으면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이웃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면, 이상하게 진리만 외칠 때는 안 들었는데 사랑을 하니까 자꾸 들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들을 치유할 것이고, 우리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며, 주님을 모르던 분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연설을 끝낼 때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사람들이 네 명에 의해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 데려온 것처럼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의 발을 씻겨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13:34-35, )

 

너희들이 온 인류를 사랑하면 비로소 내 제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들만이라도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며 목장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잠깐 와서 겉도는 이야기만 잠시 하고 가는 것으로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예배에는 참석해야 하지만, 그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어떻게 사랑을 실천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주 만나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가운데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요한복음 13) 그 중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사랑하기 힘든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유다는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사람이었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푼다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쓰디쓴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사람 때문에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법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원수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냥 예배만 왔다 가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또 어디서 실천을 하겠습니까? 사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예배당에서도 적당히 숨어서 얼굴을 피해 멀리 앉아서 왔가 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혼자 말씀 읽고 기도하고 QT하는 것은 어쩌면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싫어도 매주 만나서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런 사람에게 내 속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어도 같이 만나고, 인내하고, 참아주고, 교제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내가 자라고 성숙해집니다. 내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것이 진짜 제자훈련입니다.

 

제자훈련은 앉아서 성경공부하고 몇 주 지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삶 속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배우는 과정이 제자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는 나의 참 제자다. 내가 너에게 이 세상을 맡긴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라고, <목적이 이끄는 삶> 책을 써서 엄청난 돈을 번 분입니다. 그 돈으로 재단을 세워서 열심히 아프리카를 돕고 있습니다. 그 책 이전에 쓴 책이 있는데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입니다. 그분이 섬기는 새들백교회는 메가처치인데,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신실한 성도가 모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seating capacity, 즉 예배당에 몇 명이 앉아 있느냐보다, sending capacity, 즉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되어 견고한 사람으로 넘친다면 놀라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로서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훌륭한 사역자,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다 칭찬을 받는 것이 제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 저는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다 왔습니다.’하고 주님께 말씀드릴 때, 주님께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주시는 신실한 주님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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