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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19

성금요일 메시지

베드로의 실패와 통곡

(누가복음 2254~62)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특히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액션영화를 보면, 대개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서로 대결하면서, 손에 땀을 쥐는 액션 장면들이 나오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좋은 사람들이 승리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게 느끼는 것은, 아무리 갱이나 조폭이나 테러리스트처럼 나쁜 사람들이라도 자기 두목이나 상관에게는 충성을 다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 그렇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베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생각하기 전에 먼저 행동부터 하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는 기질상 다혈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강하고 거칠고 폭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좋게 말하면, 아주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아주 크게 실패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 (54)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0을 보면,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든 사람이 다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1절에서 이미 베드로에게 경고하신바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22:31, 새번역)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3)

 

베드로는 자기가 했던 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의리 때문이었는지,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갑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4)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체포되어 가실 때 따라가긴 따라갔지만, ‘멀찍이따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던 베드로는,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따라가는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갑니다. 이 거리는 예수님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운 거리인 동시에, 자신이 체포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먼 거리이기도 합니다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베드로에게 편리함과 안전함을 동시에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지금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정도의 거리가 편리한 동시에 안전하며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혀 괜찮지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때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볼 때, 우리 신앙생활이 바로 이것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적당히 한 쪽 다리는 세상에, 한 쪽 다리는 주님께 두고 양다리 걸친 채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점점 시대가 지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적당히 주님을 따르면서 분명히 주님의 말씀도 듣고 예배도 드리며 할 건 다 하면서,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주님을 따르면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당장 그 자리를 떠서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금요일, 황금 같은 주말 시간에 여기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르기는 따르지만 어디서 따르고 있는지 점검해야겠습니다. 아주 가까이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멀찍이 따라가고 있습니까? 만약 멀찍이 따라가고 있다면 왜 그렇게 합니까? 편리하니까, 그리고 안전하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 주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3:15-16)

 

이것은 교회에게, 즉 믿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입에서 토하여 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순간 정말 솔직하게 나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완전히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믿는 것도 아닌,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하는 신앙생활이 당장은 편리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며 좋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 반드시 무너집니다. 평소에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 무너집니다. 아주 무섭고 엄청나게 무너집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정도의 철저한 순종은 하지 않으면서도, 대담하게 악한 사람들과 어울려 즐길 정도로 사악하지도 않은, 아주 최선을 다해 열심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하게 사는 것도 아닌, 정작 이것이 더 문제입니다차라리 믿지 않았으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있으니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도 없고 세상의 악에 빠지지도 않으니까, 자기는 악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러다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떡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이이 더 위험하고 더 힘듭니다. 지금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적당히 해보십시오. 그것이 좋습니까? 사업하시는 분들도 적당히 해보십시오. 돈이 잘 벌리겠습니까? 사실 재미없게 마지못해 직장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면 얼마나 힘듭니까?

 

직장생활도 보람 있고 의미 있고 행복하게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재미가 없고 의미를 못 느끼면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여지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완전히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신앙생활이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무너집니다. 아주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 (55~60)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5)

 

멀찍이 따르던 베드로는 밤에 쌀쌀해서 불을 피운 사람들 옆에 앉아 같이 불을 쬡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6-57)

 

베드로가 불빛을 향해 앉은 것을 보고 한 여종이 그를 빤히 노려보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황급히 부인합니다(57). 또 다른 사람이 조금 후에 또 말합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8)

 

이제 좀 지나갔겠나 하는데 세 번째 사람이 또 말합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59-60)

 

아마 베드로의 옷차림이나 특히 말할 때 갈릴리 억양이 나와서 그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이 짐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표준말을 쓰려고 해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이북 분들은 사투리가 나오지 않습니까? 지방 출신이라도 여자 분들이 표준말을 더 잘하는데, 평소에 표준말을 잘 쓰던 분도 갑자기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고향 사투리가 툭 튀어나옵니다.

 

오래 전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장로님이 표준말을 잘하셨는데 갑자기 당황스러운 일이 탁 벌어지니까 뭐유? 해보겠다는 거유? 해 봐유, 그럼!” 그때 그분이 어디 출신이신지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당황하니까 예루살렘 표준어로 쓰다가 갑자기 갈릴리 사투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갈릴리 사람이다하고 지적을 받습니다. 매번 지적을 받을 때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합니다.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57).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58).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60).

 

바로 조금 전까지 베드로가 한 말들을 보십시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습니다”(33).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14:29). 심지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4:30, )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31)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자신만만한 말입니까?

 

그렇게 큰소리 떵떵 치던 베드로였는데, 결국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 중 하나인 자기 보호의 본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무서운 병사들이 와서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여종과 두 남자입니다. 여기 보면 베드로가 이 여자여”, “이 사람아”, “이 사람아하고 강하게 부인하며 물러간 걸 보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유력하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전혀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서워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위기에 닥칠 때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위기가 닥쳤는데 이웃 사랑, 헌신, 신실함, 자아실현, 세계 평화와 같은 고상한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질 때 본능적으로 이기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소에 아무리 멋진 말을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를 위하여 이기적인 인간으로 바뀝니다. 자기 앞가림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변명하고 둘러대고 말을 꾸며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내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으니까 자꾸 사람을 피하게 되고 복잡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왜 실패했습니까? 한마디로,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충성심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면 내가 정말 그럴까?’ 하고 돌아보면서 겸손하게 자기를 점검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어야 했는데, ‘절대로 내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죽을지언정 따르겠습니다.’ 하고 과대평가를 한 겁니다.

 

사실 요즘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만, 특히 TV에 나오는 많은 분들을 보면, 자기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자기 신념을 너무 믿다가 나중에 그것을 싹 바꾸면서 곤란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신앙고백을 했습니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5-16)

 

분명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메시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신 상황에서 사람들이 지적을 하니까 엉겁결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신 것을 진짜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완전히 배신하여 돈에 팔아 넘겨도 된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베드로가 분명히 믿었으면서도 나는 모른다하고 부인했다는 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식 부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 부인을 많이 한다는 겁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급하니까 아닌 척하며 부인하는 겁니다. 진짜 안 믿는 건 아니고 믿는데, 상황이 급하니까 아닌 척하는 겁니다.

 

자기 신변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예수 편에 서는 것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든지, 순간적으로 예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을 하거나 행동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적인 원인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닌 척, 상관이 없는 척하면서 사는 사람이 베드로 식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가끔 보면, 나라끼리 전쟁을 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이 함락될 때 보면 아주 많은 경우에 이리로는 적들이 절대 쳐들어오지 못한다. 우하하하!” 하고 장군이 마구 허풍을 떨 때 꼭 그리로 적들이 쳐들어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가장 자신 있다고 여기는 바로 그곳 가장 수비가 허술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있으니까 수비를 안 하는 겁니다. 사탄이 아주 교활합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고, 기도하신 후 오셨을 때 자고 있으니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 하셨습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큰소리치며 이것만큼은 내가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는 바로 그것 때문에 베드로가 넘어갔습니다.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했어야 하는데, 슬픔과 피곤 때문에 기도를 안 하고 자다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전문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다. 이건 내가 너무 잘 안다. 자신 있다.’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바로 그곳을 통해 오히려 사탄이 공격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의지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할 대상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의 통곡 (61-62)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니까 그때 닭이 곧 울었습니다(60). 그런데 바로 그때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1-62)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이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십니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세 가지 행동을 합니다. 첫째, 그는 주님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둘째, 그는 밖으로 나갑니다. 셋째, 그는 심히 통곡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극적인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을 때 예수님이 어떤 표정으로 베드로를 보셨겠습니까? 분노하고 쨰려보면서 , 베드로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하고 보셨겠습니까? 아니면 냉소적인 눈길로 . 뭐라고? 나와 함께 죽을지언정 나를 따른다고? 에라이,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보셨겠습니까? 아니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너무나 안타까운 눈길로, 용서와 사랑의 안타까운 눈길로 베드로를 보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슬픔에 찬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신 주님의 눈길은 베드로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충격과 후회와 슬픔 속에 나가서 통곡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눈물은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32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22:32, )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를 부인할 것이고 심히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돌이킨 후에, 회개한 후에 너는 너와 같이 이러한 시험을 겪게 될 다른 형제자매들을 잘 도와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실패할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신할 것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연약한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그냥 실패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3-14)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제대로 못하면 미워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잘하든 못하든 항상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봉사하면 많이 사랑하시고, 교회에 빠지고 예배를 안 드리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가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면 너무 슬퍼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 가면 붙들어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셔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미워하셔서가 아니라 사랑하셔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를 옮겨주시고 잊어버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0:17)

 

어느 교회의 어린이주일학교 선생님과 어린 학생이 대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말합니다. “지난밤에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지? 그럼, 이 선생님이 어제 지은 죄가 무엇인지 여쭤봐라. 그러면 네가 진짜 하나님을 만난 줄로 내가 믿어줄 게.” 그 다음 주일이 되어 아이 또 와서 이야기합니다. “어젯밤 하나님이 또 나타나셨어요.” “, 그래? 그럼 선생님이 지은 죄가 뭐였는지 여쭈어봤니?” “, 여쭈어봤는데요, 근데 하나님이 잊어버리셨대요.”

 

선생님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잊어버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정말로 기억을 안 하십니다.

 

 

4.   실패한 사람을 회복시키셔서 사용하시는 주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아니 더 많이 넘어지고 실패하지 않습니까? 사실 잘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나는 신앙생활에서 실패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자주 실패합니다.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좋은 결과를 꼭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크게 실패하고 나서 낙담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책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사냐?’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 실패할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베드로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것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를 했습니다.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회복이 되고 사도로서 크게 쓰임을 받게 되며, 주님을 위해 순교하게 됩니다.

 

수년 전에 나온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이상하게 기독교를 꼬아서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을 가리켜 사이비(?)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이비나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가룟 유다를 불쌍하다고 동정하면서, 심지어 영웅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것을 보면 베드로가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가룟 유다보다 더 심하고,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갔으니까 그들도 똑같이 잘못했든지 더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다는 그래도 은30을 도로 돌려주고 가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목을 매달아서 죽었으니, 유다가 훨씬 더 양심적인 사람이며 불쌍한 사람이라고 안타까워합니다. 심지어 유다가 없었으면 어떻게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구원을 이루셨겠냐고 하며 유다를 영웅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신학계에서도 그런 입장은 아주 소수이고 정통 신학이 아니라 비뚤어진 계통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 중 자신을 팔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빵을 주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유다에게 빵을 주시고 가서 네 할 일을 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21-22절을 보면 그러나 보아라, 나를 넘겨줄 사람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인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결코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위협하거나 저주하거나 창피를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에게 창피를 주려 하셨거나 그를 징계하려고 하셨다면 제자들 앞에서 왜 이름을 안 밝히셨겠습니까? ‘얘들아, 여기 유다가 나를 배신하려고 한다. 네 이 놈! 당장 꿇어 엎드려라! 어디 감히 네 스승을 팔아 넘겨?’라고 호통을 치셨을 겁니다. 그랬으면 제자들이 알아서 데려다가 구타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족식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를 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는 말은 유다야, 너는 어차피 죄인이니까 빨리 죄를 지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빨리 회개해라. 빨리 돌아와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유다가 자기 잘못을 뉘우친 다음에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고 나서 예수님께 돌아와 잘못했다고 회개했더라면, 예수님이 관둬. 너는 끝났어.’ 하며 그를 용서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긴 다음에라도 회개했다면 예수님은 기꺼이 그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존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예수님이 계속해서 주신 기회들을 모두 다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입니다. 베드로가 어쩌면 가룟 유다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나중에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만나 회복시켜 주십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며 회복시켜주십니다.

 

부활하신 저녁에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겠습니까?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봐야 믿겠다고 해서 일주일 후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도 베드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갈릴리로 갔는데 거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우고 계셨습니다.

 

그 불을 보는 순간 베드로가 뭐가 생각났겠습니까? 자기가 불을 쬐다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생각난 겁니다. ‘, 올 것이 왔구나. 드디어 내 죄를 문책하려 하시는 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고 식사 후에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만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하니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그에게 순교할 것을 예언하시고 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베드로가 이때 왜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싸움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것은 나는 안 돼.’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를 깨달으며 눈물로 통곡하고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잔치와도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 천국은 정말 잔치입니다. 파티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3-4)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즉 자신은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했고 주님 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고백하며 나오는 사람에게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또 애통하는 자, 즉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보며 눈물로 통곡하고 회개하는 사람, 상한 마음으로 우는 사람,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위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해지고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만이 참된 천국 잔치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파티와 같이 즐겁고 기쁜 곳입니다. Feast입니다.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수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주만 바라보면서, 진정으로 자기 죄를 보며 애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치고 상하고 쓰러지고 실패하고 죄를 짓고 넘어질 때,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바로 이것입니다. 상한 마음,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 왜 왔니?’ 하지 않으시고, 꾸짖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회복시켜주십니다. ‘잘 왔다!’ 하고 안아주시며 회복시켜주십니다.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나의 양을 치라.”

 

이 성금요일 저녁,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며 나아가는 이 시간,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회복시켜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이 시간 풍성하게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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