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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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17 ✦
“야고보가 전한 복음: 믿음과 행함의 관계”
(야고보서 1장 1~4절, 2장 14~26절)
1. 야고보서에 대하여
목사이자 유치원 교사였던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의 말 중에 명언으로 꼽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지혜는 대학원이라는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에 있다.”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배운 단순한 진리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당신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이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라.”
특히 제목 그 자체가 명언이 된 것이 있는데, 그가 1988년에 쓴 베스트셀러가 그렇습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사실 인생의 성숙이란 유치원에서 배운 삶의 기본을 적용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배운 것들이 사실은 중요한 기본입니다.
야고보서라는 편지의 수신인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1)였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시련을 만나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1)
그 박해는 그들이 소중히 여기던 지도자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박해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여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행 11:19-21, 새)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들 대부분이 아직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박해로 인하여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레바논, 키프로스, 시리아로 흩어져서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키프로스와 구레네(리비아) 출신 유대인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해서 크리스천들은 그때까지 아직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기초는 배웠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은 다음 제자로 성장해나가고 성숙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하나님은 야고보를 사용하십니다.
유대인들 중 야고보라는 이름은 한국 이름의 김 씨나 이 씨만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고보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의 형 야고보도 있고 또 다른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이 편지 내용을 검토해 보면 저자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는 이 편지를 흩어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쓴다고 말합니다. 또 2장에서 유대인 회당을 언급합니다. 야고보서의 교훈과 내용이 유사한 성경의 다른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인데, 그것으로 볼 때 이 편지의 저자는 산상설교를 가르치신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 편지에서 기도를 많이 강조합니다.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후에 ‘낙타의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은 기도의 사람이자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자신들의 형 예수에 대해 부모로부터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게 태어났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본인이 메시야라면 이제 시골인 갈릴리를 떠나 저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을 내어 보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은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7:3-5, 새)
이렇게 말하던 형제들 중 가장 위(즉,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가 야고보였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던 그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고전 15:3-7, 새)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한 번에 500여 형제자매들에게도 나타나셨고, 야고보도 따로 만나주셨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야고보는 자기가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과시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하게 주님을 증거하는 제자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편지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1)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야고보’라고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길을 가르칩니다. 실제로 그는 첫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 격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많이 흔들리고 있던 성도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믿음의 성숙을 도전할 필요를 느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이 믿음의 성숙을 가리켜 그는 이 편지에서 ‘온전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편지에서 복음 그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신자들의 진정한 믿음생활, 곧 믿음의 성숙을 다룹니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흩어진 유대인 신자들에게 편지하며 기대했던 믿음의 온전함, 즉 믿음의 성숙은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2. 야고보가 전한 복음
1) 우리 믿음은 시련으로 온전하게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2-3)
성경에는 ‘시험’이라는 단어가 몇 가지 경우로 쓰입니다. 첫째, 말 그대로 ‘테스트’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 ‘유혹’의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 그 경우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시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1장 2절에서는 ‘시련’ 또는 ‘연단’(trial)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1장 13-14절에서는 ‘유혹’(temptation)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2절에서 야고보는 교회를 향한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을 가리키는 단어로 ‘시험’을 언급하면서, 그래서 이 시험을 ‘믿음의 시련’(연단)이라고 부릅니다(1:3).
여기서 ‘시련’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데, 이것도 일종의 테스트의 성격이 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통한 믿음의 테스트인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과 비슷합니다. 학생이 아니면 테스트를 치르지 않아도 되지만, 학생이라면 테스트를 치러야 합니다. 시험을 잘 활용하는 학생들은 시험이 끝난 후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보완함으로써 실력을 키우고 이전보다 온전한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기뻐할 수 없지만, 기쁨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의 시련을 잘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서 온전함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생각하면 기쁨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4)
‘온전히’라는 말이 헬라어에서는 성숙을 의미하는 ‘텔레이오스(teleios)’라는 단어입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목적이 바로 성도들을 영적 성숙 곧 온전함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온전함과 성숙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당시 신앙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이 경험하는 고난이 바로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 주제를 야고보서 5장에서 다시 다루면서, 거기서도 다시 인내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7-11)
계속 반복해서 ‘길이 참으라’고 말하고 또 ‘인내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르지 않고 피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운동선수가 훈련을 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래 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미국 대학교에서 이스라엘 학생과 아랍 학생이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교수가 지난밤 중동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느냐고 물었고 두 학생은 모두 몰랐다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자네들은 전쟁에 개의치 말고, 후일 자신의 조국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하게.”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수업시간에 두 학생 모두 결석을 했습니다. 교수는 다른 학생들에게 두 학생의 소식을 물었고, 그는 이런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학생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곧장 이스라엘로 떠났고, 아랍 학생은 혹시 자기에게 전쟁에 나가라는 징집영장이 나올까 봐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의 결과가 어땠겠습니까? 지금까지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이 중동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반면 아랍 국가들은 항상 졌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경험하는 시험도 일종의 영적 전쟁입니다. 유혹이 오면 요셉처럼 피해야 할 때가 있지만, 테스트나 시련으로 오는 시험은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시험은 인내하며 마주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인내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야고보가 전하는 승리의 비결입니다.
2) 우리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
이미 1장에서 ‘온전하다’라는 단어를 몇 차례 보았는데, 2장에서도 그것을 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2)
야고보서를 피상적으로 읽게 되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선포하는 교훈과 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반복하여 선포하는 교훈은, 어떤 행함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롬3:26-28, 새)
이것을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자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강조한 성경의 핵심 교리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 개신교 학자들, 심지어 루터 계열의 학자들도 그러한 루터의 견해가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전혀 다른 배경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쓴 대상도 달랐고 목적도 달랐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행함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 곧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서 삶의 열매로 나오는 행함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1)
이것만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처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의롭다고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 15:5-6, 새)
그런데 야고보가 언급하는 사건,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려고 한 사건은 훨씬 더 시간이 지난 다음인 창세기 22장의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가나안 땅에 와서 산지 10년이 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85세 이전),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사건은 이삭이 십대 소년일 때였으니까,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해주신 때로부터 최소한 30년 이상 지난 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시험을 통해서 이삭의 출생 이후 온통 이삭에게만 집중하며 흐트러져 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함으로 바로 세워주려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이제는 행함으로도 나타나 정말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그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고 온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이 죽은 믿음, 곧 말만 있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7-20)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사랑의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의롭게 된 사람이라면, 그 삶 속에서 당연히 이웃 사랑이 실천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 사랑이 없고 냉랭하고 차갑다면, 정말 믿는 것인지 의심해봐야 합니다. ‘냉랭한 크리스천’이라는 두 단어는 같이 사용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안 됩니다, 주님’도 서로 같이 쓸 수 없는 말들입니다.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주님으로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이고, ‘주님’이라고 했다면 자기는 종이기 때문에 주인의 말에 감히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냉랭한 크리스천도’ 똑같습니다. 계속 ‘냉랭한’ 사람은 사랑의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일 수가 없고, 정말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냉랭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냉랭하고 차갑다면 정말 믿는 것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의 생전에는 믿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으며, 기도와 경건생활과 구제에 힘쓰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명예로운 별명 하나가 더 붙었는데, 바로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라는 칭호입니다. 그래서인지, 야고보서에는 유독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 1:27, 새)
5장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에 대해 신랄한 경고를 합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 5:3-4)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서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말과 더불어 그것을 나오게 하는 마음에 대해 아주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19-20)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6)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2, 6, 8)
[나가는 말]
야고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평생을 드려 추구한 것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곧 영적 성숙이었습니다.그렇게 살았던 그가 ‘의인 야고보’로 불린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야고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 교회와 더 나아가 세계 교회에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들은 그 많은 설교와 배운 그 많은 성경공부와 읽었던 그 많은 성경 말씀을 행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했는데 첫 주일 첫 설교에 ‘서로 사랑합시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를 이룹시다.’라는 설교를 했고,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주일이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첫 번째 주일과 똑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를 이룹시다.’ 그러자 교인들이 의아해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왜 지난주일 설교를 또 하시나? 혹시 치매 증상이 있으신가?” 그런데 그 다음 세 번째 주일에도 또 다시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교우들은 대표를 보내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우리 교회에서 제가 나눈 말씀이 실천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보인다면 다음 주일은 새로운 내용으로 설교하겠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바로 이것이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가 전한 복음이며,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제2, 제3의 야고보로 주님 앞에 서서 우리도 주님 앞에 칭찬받는 종들로 함께 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