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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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일 주일예배
✦ 신년 메시지 ✦
“말씀 위에 굳게 세워지는 한 해”
(베드로전서 1장 23절 ~ 2장 3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인 1992년 8월, 저는 한국의 장로회신학대학원에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학교와 제가 다니던 학교가 자매결연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침, 지난여름 저의 안식월 기간 동안 설교목사로 오셨던 김제은 목사님이 수석부목사로 사역하시던 서울 온누리교회에 인턴 전도사로 10개월 정도 사역을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는 학생이었기에 파트타임 교역자였는데, 그래도 연말에 있었던 교역자 수련회에 저까지 불러주셔서 참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온누리교회 담임이셨던 하용조 목사님이 강의를 하시면서, 특히 새로 들어온 교역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지금까지도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장로교 학교를 나와 장로교 목사이고, 여러분도 장로교 출신이며, 우리 교회도 장로교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 온누리교회를 생각하실 때 겉은 장로교회이고 속은 순복음교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나가 있던 시기는 하용조 목사님께서 안식년 동안 하와이 국제예수전도단의 제자훈련학교(DTS: Discipleship Training School)를 통해서 새롭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돌아오신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은 돌아오자마자 ‘온누리교회는 이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다.’라고 선포하셨고, 매주 성령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에 난리가 났습니다. 기도를 받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영적 은사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제가 조금 가서 돕고 있던 대학부 겨울수련회 때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식으로 나아가게 되니까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은사 위주로 가다가 잘못된 방향으로 빠진 교회들이 이전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단들은 1.5단을 거치는데 이게 바로 그런 거다.’ 하고 걱정하면서 부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함께 모여서 의논하다가 담임목사님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가다가 교회가 잘못되면 어떡합니까? 절제를 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 담임목사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주일 강단에서 강해설교를 하는 한 우리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정확히 그 뜻을 몰랐는데, 담임목회를 하다 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기만 한다면 교회는 절대 잘못될 수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제가 이민 오기 전까지 다녔던 교회도 목사님이 강해설교를 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그러한 모습이 저의 목회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가 되면서 결심한 게 있습니다. 아무리 지겹게 들리더라도 반드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한 설교를 하겠다는 다짐과, 말씀 훈련 중심의 목회를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성경을 봐도 그렇고 교회 역사를 봐도 그렇고, 하나님의 사람 중에서 말씀의 중요성과 능력을 무시하거나 적당히 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며 구약의 말씀을 외워 선포하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1. 썩지 아니할 씨 (1:23-25)
예수님 자신이 말씀의 사람이셨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도들과 1세기 교회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며 그 말씀을 신앙의 중심으로 붙들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의 저자인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1:23-25)
여기서 말씀을 뭐라고 합니까? 말씀을 씨라고 표현하는데, 그냥 씨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라고 표현합니다(23). 바로 그것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즉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할 때, 겉으로는 별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 안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이제는 그 썩지 않을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거듭나 말씀의 씨를 받은 성도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순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심겼다고 한다면, 그 심겨진 말씀이 잘 자라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회자들은 교회 사역이 잘 안 풀릴 때 뭔가 색다른 것을 해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어떤 교회들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소문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은사집회나 부흥회를 하다가 강사 목사님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니까 이빨이 금이빨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이는 안 바뀌고 때운 이만 바뀐다고 합니다. 원래 이빨인데도 누렇게 됐다면 이를 안 닦아서(?) 그런 것이고, 때운 이만 금으로 바뀝니다. 또 짧았던 한쪽 다리가 막 늘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나에게도 그런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면 어떨까?’를 상상하며 그런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이 막 들 때도 있습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위에서 금가루가 떨어지고, 손을 대고 기도하니까 병이 즉시 낫고, <생명의 삶> 성령 체험의 시간 때도 살짝 손을 대기만 해도 사람들이 막 넘어가고.... ‘남들은 된다는데 왜 나는 안 되나? 나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살짝 들다가도, ‘아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보다 말씀 중심으로 가는 게 더욱 중요하다.’라는 확신이 듭니다.
사실 그런 은사집회도 종종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은사 집회만 하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나타날까 하는 것에만 다들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면 예배 때 말씀은 안 들어오고 말씀 후에 있을 기도시간만 기다려지게 됩니다.
저도 그런 은사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교회는 너무 그런 신비로운 은사에 대해,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실제로 믿는 자들에게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방언이나 예언을 할 수도 있고, 병 고침이 일어날 수도 있고, 별의별 희한한 일들이 다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 어떻게 이어져 왔습니까? 방언이나 예언으로 이어져 오지 않았습니다. 병 고침이나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이어져 오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불교나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들도 일어납니다. 그런 것으로 교회가 이어져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이어져 내려 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들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들보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강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성경이 만주에서 번역되어 먼저 들어온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책을 읽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와 보니까 이미 성경도 있고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던 겁니다. 그 후 말씀을 배우는 사경회들이 많이 열렸는데, 성경말씀을 너무 사모해서 한 달이나 모여 성경을 아침, 오후, 저녁으로 하루 종일 공부했다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서를 배운다. 이 같은 대규모 사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소규모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북부 지역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1년 동안 이 같은 소규모 사경회를 192회 실시해서 연인원 1만여 명을 기록하였다.”
지난여름 양화진 외국선교사 묘원 방문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자마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선교사님들도 있고, 특히 작년에 태어나서 올해 죽은 선교사의 자녀의 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선 땅에 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초기 성도들은 성경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배우기 위해 며칠씩 걸어오고 또 한두 주 이상 계속 성경공부와 집회를 가지며 말씀을 배웠습니다. 한국은 정말 올바른 경로로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Right track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일본 교회는 역사가 오래 되었는데도 왜 그렇게 지금도 복음화가 잘 안 됩니까? 처음 일본에 복음이 전해질 때는 성경 말씀 중심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권력층들 가운데 정치적인 이유로 가톨릭이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 장수가 이끄는 군대의 깃발에 십자가가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 정치적으로 신앙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성의 영주가 믿겠다고 하면 성의 백성들이 모두 다 믿고, 그 영주가 죽은 다음에는 백성들이 다시 옛날 미신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남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개신교 역시 일부 소수의 사람들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작업이었을 뿐입니다. 철학적이고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문화 활동으로 생각을 했지, 정말로 살아 있는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세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리핀도 조선보다 훨씬 더 일찍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멕시코나 중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왜 제대로 안 되는가? 잘못 들어간 겁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아주 제대로 된 통로로 들어갔습니다. 말씀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 중심으로 전파된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그러한 우리 조상들의 열정이 있습니까? 며칠씩 걸어와서 말씀을 들으며 배웠던 믿음의 조상들의 열정이 있는지를 돌아봐야겠습니다.
2. 순전하고 신령한 젖 (2:1-3)
사도 베드로는 1장 뒷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아니할 씨”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 안에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장에 와서는 씨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부릅니까?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1-2)
여기서 말씀을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합니다. 왜 갑자기 씨를 젖으로 바꾸었습니까? 그 뜻을 잘 봐야 됩니다. 물론 이 표현은 직접적으로 갓난아기들이 엄마 젖을 먹고 싶어 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씨와 젖을 서로 연결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심겨져 있는 말씀이 자란다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거듭나는 순간에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가 심겨졌는데, 이 말씀이 자란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심겨진 말씀을 자라게 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자란다는 의미이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라려고 한다면 그 말씀 안에 있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갑자기 표현이 씨에서 신령한 젖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 말씀을 먹는 두 가지 방법
그렇다면 젖으로서의 말씀을 사모하여 먹는다고 할 때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이것을 위해서는 베드로 사도가 그 젖을 꾸미는 두 개의 형용사 단어를 봐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결코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1) 순전한 젖을 먹으라
이 순전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는 'pure'입니다. ‘순수하다’, ‘정결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말씀의 정서, 분위기, 감정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감정과 정서와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쓸 때 편지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글에 담겨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1절에서는 인간의 말이 가지고 있는 악하고 잘못된 정서를 언급합니다.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의 감정들이 인간의 말에 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런 감정이 마음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그런 악한 정서가 우리의 글과 말을 통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순전한 젖’이라는 것은,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정말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정서를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끼리 왜 상처를 주고받습니까? 우리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대부분 말을 통해서입니다. 악한 정서가 담긴 말을 서로에게 내뱉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우리는 그 안의 순결한 정서를 먹게 됩니다.
실제로 말씀을 많이 듣고 읽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다 보면, 놀랍게도 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들어 있는 깨끗한 감정과 정서를 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으면. 이전에 걱정하던 마음, 근심하던 마음, 두려워하던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먹으면 추잡한 생각, 더러운 욕심, 음란한 마음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먹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여러분, 교회 오면 목사가 맨 날 ‘성경 읽으세요. 큐티하세요. 삶 공부 좀 하세요.’ 하며 귀찮게 하는 것 같습니까? 말씀 때문에 귀찮게 해드리는 게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멀리할수록 1절에 나오는 악한 정서들이 담긴 인간의 말만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정서와 감정과 분위기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왜 자주 침체되거나 분노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답답합니까? 말씀을 안 먹고 맨 쓸 데 없는 것이나 악한 것들을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혹시 지금도 어떤 일 때문에, 어떤 사람 때문에, 자녀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까? 답답합니까? 화가 납니까? 포기하고 싶습니까? 말씀을 붙드십시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외워보십시오. 내 마음이 바뀝니다. 정서가 바뀝니다. 내 삶의 분위기가 바뀌고 평화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순전하게 변화됩니다. 말씀 안에 담긴 거룩한 정서 때문에 말씀을 붙들면 아름다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기 전에 항상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주님, 제가 주님의 말씀을 접할 때 주님의 그 깨끗한 정서를 마음껏 먹게 하옵소서.”
2) 신령한 젖을 먹으라
여기서 사용된 ‘신령한(spiritual)’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로기코스(logiko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딱 두 번 쓰였는데, 한 번은 여기, 다른 한 번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여기서 “영적”이라는 단어가 바로 ‘로기코스’입니다. ‘영적이다, 신령하다’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로기코스’라는 단어는 원래 ‘로고스(Logos)’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로기코스’라는 말이 성경 외의 다른 헬라문학에서는 ‘합리적인, 이성적인, 논리적인’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합리적인 젖, 이성적인 젖, 논리적인 젖을 사모하라’ 하는 뜻이 됩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합리적인, 이성적인, 논리적인’이라는 단어가 왜 본문에는 ‘신령한’으로 번역되었습니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합리가, 그 논리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령한 젖’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합리나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논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령하다(spiritual)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젖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논리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이론, 하나님의 생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정서와 감정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논리와 지혜와 이론과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이론,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내 생각을 고집하며 살면 오는 것은 실망이고 절망이고 포기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붙들다 보니까 끝난 게 아닌 겁니다. 내 해석, 내 논리, 내 생각으로 보면 가망이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해석,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았더니, 거기에는 선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게 분명히 보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하나님의 해석과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논리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잘되면 기쁘고 안 되면 괴로운 겁니다. 잘되면 자기 탓이고, 안 되면 남의 탓, 환경 탓, 조상 탓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논리로 볼 때, 고통 가운데에도 기뻐할 수 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로기코스’이고, 하나님의 신령한 논리인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가다가 어려움을 당하여 건강을 잃고서 하나님의 논리로 자신의 상황을 보게 된 어떤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건강을 잃은 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제가 건강을 잃지 않았으면 저는 하나님 앞에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이 재산을 잃지 않았으면 저는 결코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그때 실패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못된 짓만 하고 있을 겁니다.”
이게 바로 ‘로기코스’, 신령함입니다. 하나님의 논리로 보니까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론으로 보니까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막으신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논리이고, 그분의 논리는 언제나 맞습니다. 항상 맞습니다. 100% 맞습니다. 왜 막으시나 했더니 조금 더 갔으면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눈과 다릅니다. 우리의 논리는 당장 편한 길, 죽 뻗은 길, 나에게 유리한 길을 택하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논리는 때때로 험한 길, 꾸불꾸불한 길, 내가 손해 보는 길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논리는 언제나 맞습니다. 내가 틀린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내가 하나님보다 똑똑하다고 착각을 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먹을 때 바로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 하나님의 이론, 하나님의 논리를 먹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여러분은 음식을 사모하십니까? ‘정말 음식을 사모한다.’라는 말을 쓸 때는 언제입니까? 아닌 척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솔직히 먹는 거 되게 좋아하지 않습니까? 너무 사모하지 않습니까? 정말 주님을 그렇게 사모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음식을 사모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몸이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몸에 힘이 빠지고 근육이 약해져서 에너지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몸이 음식을 통해 힘을 보충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음식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정확하게 뭘 원하는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내가 라면을 원하는 건지, 짬뽕을 원하는 건지, 짜장면을 원하는 건지, 치킨을 원하는 건지, 햄버거를 원하는 건지, 피자를 원하는 건지 헷갈립니다. 그냥 음식을 먹고 싶을 뿐이지 무엇을 먹겠다는 것이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밥을 기다리다가 과자나 다른 것을 먹어서 배가 불러 밥을 못 먹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음식을 사모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맛있게 음식을 먹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미국 수양관에서 수련회로 모여 미국 음식만 먹다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이야기를 하면 미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침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전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에 그럽니다. 그러나 보통 미국 사람은 아무리 된장찌개 이야기를 들어도 침이 전혀 안 고입니다. 왜?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고 오히려 이상하게 느낍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말씀이 자신에게 필요해서 먹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전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에 사모하여 먹어야 합니다. 이전의 은혜 받은 기억 때문에 말씀을 대하는 순간 기대가 있는 겁니다. 예배에 올 때 이전의 기억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오는 겁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오늘은 내게 어떤 은혜를 주실까?’ 하고 기대하며 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2:3)
‘네가 이전에 그런 은혜 받은 기억이 있다고 한다면 말씀을 사모하라!’ 여러분은 말씀으로 은혜 받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언제 그러셨습니까? 날마다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늘 이야기할 때 ‘왕년에’만 찾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맛본 기억이 너무 오래 됐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예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맛있게 먹게 되고, 그렇게 먹는 사람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자라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사모하여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순결한 정서와 신령한 지혜가 그대로 우리 안에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세워지며 성장해 나가는 이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