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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8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 13-17)

 

[들어가는 말]

 

지난 안식월 기간 동안에 이곳저곳을 많이 다녔습니다. 지난 6월 중순에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저희가 이태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르네상스의 중심지라고 하는 플로렌스(Florence / 이태리 말로는 피렌체 Firenze)를 방문했습니다.

 

1500년대 초 바로 그 플로렌스에 도나텔리라고 하는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대리석으로 대단한 조각품을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고, 특별한 대리석들을 주문했습니다. 굉장히 비싼 대리석들을 주문해서 들여왔는데, 보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것들로는 못하겠다고 하며 그냥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어떤 사람이 이렇게 좋은 걸 왜 버리느냐고 하면서 그 대리석들을 가지고 깎고 다듬고 해서,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 1월 25일, 바로 그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아 박물관 안에 지금 있는 “다비드(David)”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미켈란젤로였습니다.

 

그냥 봐서는 알 수 없는 원석 안에 담겨 있는 대단한 작품을 볼 줄 아는 눈, 바로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눈이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별 것 아닌 것 같고 다들 배척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고 아름다움을 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격려에 힘입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1.   레위를 찾아가 부르시는 예수님 (13-14절)

 

지난 주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그 후에 또 가르치시고 그 다음에 지나가시다가 레위라는 사람을 보시게 됩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3-14절)

 

예수님은 계속되는 사역으로 바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셨는데, 그러니까 레위는 세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레위가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는 말은, 그저 우연히 거기를 지나다가 ‘이 사람이 왜 여기 앉아 있나? 저런 나쁜 사람이 여기 있구나.’ 하시며 발견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제자로 부르기 위해 주목하여 보셨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눈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보신 것이 뭐가 대수인가, 뭐가 어려운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가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 사람이 저기 있으면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눈으로 쳐다보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세리라는 직업은 보통 유대인들에게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아주 악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식민지로부터 세금을 걷을 때 현지인들을, 즉 여기는 유대 땅이니까 유대인들을 세리로 고용하여 세금을 걷었습니다. 레위도 세리였고,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을 세리로 써서 세금을 걷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세리들은 로마정부에 바치는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걷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이 걷어서 재산을 부정 축재하는 타락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세리들입니다.

 

당시 로마의 세금이 여러 가지였는데, 크게 세 가지로 세금과 정세와 관세가 있습니다. 세금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금이고, 정세에는 인두세, 토지세, 소득세가 있습니다. 인두세는 머리 숫자대로 또 걷는 세금이고, 토지세는 땅에 대한 세금, 소득세는 12세부터 65세까지 또 걷습니다. 관세라는 것은 로마 정부보다 세리들이 걷은 것입니다. 통과세는 어디를 통과할 때 내고, 마차세는 마차로 통과할 때 또 내고, 바퀴세가 있어서 마차 바퀴마다 또 냅니다. 또 물고기세가 있어서 물고기를 잡을 때마다 또 냅니다.

 

세리들이 이렇게 악랄하게 했는데도 왜 백성들이 세리들에게 저항을 못했는가 하면, 세리들은 대개 살인청부업자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의 조직폭력배를 넘어서 살인청부업자입니다. 그러니 괜히 가서 뭐라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꼼짝 할 수도 없었고, 게다가 그 뒤에는 로마가 버티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세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볼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민족의 원수인 로마 정부를 도와 자기 백성을 압제하고 돈을 빼앗았기 때문에 세리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옛날 일제시대 때 친일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조선 사람들이 더 악랄하게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멀리 돌아가는 세관에 앉은 그를 보셨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보시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도 오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를 따르라.”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초청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세리들과 마찬가지로 마태도 역시 부자였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5절)

 

몇 명인지는 몰라도 수백 명이 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그 많은 손님들을 대접할 수 있는 재력이 있는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레위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집을 가지고 있었고, 또 돈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특히 마가복음은 레위의 부르심에 대해 아주 간단합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가의 스타일입니다. 간단히 기록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때 그 당시 레위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공허함과 죄책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누가 쳐다봐주는 사람도 없지만 어쩌다 쳐다봐도 경멸의 눈초리로 쓱 쳐다보고 갑니다. 자기 민족을 등쳐먹는 사람인데 얼마나 죄책감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매일 밤마다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혹시 열심당원들에게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보디가드를 두고 자야 했을 것입니다. 하루도 편안하게 두 다리 뻗고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돈이 많으니 늘 불안합니다. 또 길을 가면서도 혹시 열심당원들이 칼을 품고 다가오지 않을까 항상 염려하면서 다녔을 겁니다. 어디를 갈 때 누구든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얼른 거리를 두고 가야 합니다. 여자나 아이가 와도 깜짝 놀라고, 조금만 소리가 나면 깜짝 놀랍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누구도 자기에게 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와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혀 오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고 멸시하며 자기를 민족의 반역자이며 배신자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으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남이 나를 싫어하면 대개는 그것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예 내놓고 수군거리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는 굽실굽실 거리며 한 번만 봐달라고 해도 뒤에서는 손가락질 하는 것을 레위가 몰랐겠습니까? 레위도 그런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누가 이런 삶을 계속 살고 싶겠습니까? 이런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없고, 다른 무엇을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돈도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은 뭐니뭐니 해도 ‘머니’입니다. 돈입니다. 돈이 정말 파워가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애씁니다. 크리스천도 예외가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돈이 많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돈만 많이 벌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즘 미국 프로야구 플레이오프가 진행되고 있고, 풋볼도 시즌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풋볼의 결승전인 수퍼보울(Super Bowl)과 야구의 결승전인 월드시리즈(World Series) 둘 다 뛴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안 샌더스(Deion Sanders)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성공도 했고, 명예도 얻었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허했다고 합니다. 십 몇 년 전인데 당시 12만 불짜리 람보기니(Lamborghini) 스포츠카를 사고 1분도 안 되어 공허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후에 그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가 완벽한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 평안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레위는 그렇게 지치고 상한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자기의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아 있다’는 말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그러한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에게 오셨습니다. 레위는 이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가진 분이심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적도 있을 것이고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도 보았거나 최소한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위대한 예수는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너무나 거룩하고 고귀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놀라운 분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저분이 지금 자기가 있는 쪽을 향해 오고 계시는 겁니다. 저기서 자기에게 오고 있는데 레위는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옵니다. 그때 레위는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그의 가슴은 덜컹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저분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텐데 내게 오는구나. 큰일 났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이제 이 세관을 엎어버리고 나를 야단치고 정죄하러 오시는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하지?’

 

예수님이 자기가 앉아 있는 세관을 향해 오고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그분이 자기가 있는 곳까지 오신 겁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며 레위는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습니다. ‘야, 이 매국노야, 민족의 반역자야, 당장 이리로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이런 말을 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한마디 말씀만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딱 이 한마디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이 말씀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죄의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너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또한 ‘너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는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나를 따르려면 지금까지와 같은 죄인의 삶을 살면서 따를 수는 없다. 나를 따르라.’ 그런 도전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시험을 하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시면 ‘이봐라, 사랑, 사랑하더니 이런다.’라고 하고, 용서해주라고 하면 ‘이봐라,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라고 하며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다 떠나갑니다. 그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끝나는데 그 다음을 보셔야 합니다. “이제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다시 죄를 짓지 말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레위에게도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러니 이전과 같은 죄인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나를 따르라!”

 

레위가 이때 분명히 주님의 그러한 말씀을 깨달았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물을 분명히 흘렸을 것입니다. 너무나 큰 감동, 용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다. 그는 그 동안 죄책감과 수치와 고집과 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자기도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떠날 수가 없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 자리를 떠나라. 나를 따라라.” 그래서 드디어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세리를 부르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레위를 보실 때 세리라는 직업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 마음속의 공허함, 채워지지 않는 갈증, 외로움, 상처, 또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고는 싶지만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직접 오셔서 그가 죄악 된 삶을 청산하도록 도와주시며 격려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고민도 아시고, 외로움도 아시고, 갈급함도 아시고, 상처도 아시고, 갈등하는 것도 아시고 다 이해해주십니다. 그리고 상한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성경에 보면 이런 장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를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받아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때 대화가 진행되면서 “네 남편을 데려와라.”라고 하시니까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네 말이 맞다. 남편이 많았는데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까 네 말이 맞다.” 그러니까 깜짝 놀랍니다. 그때 예수님이 만약 ‘너는 웬 남자관계가 그리도 복잡하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다 대봐라.’라고 하셨으면 그 여자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조금 전의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느냐? 한심하구나.’라고 하셨으면 그 여인은 또 어디로 가겠습니까?

 

베드로가 목숨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부인을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부활하신 후 만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야, 큰소리 뻥뻥 치더니 꼴좋다. 저기 가서 근신이나 하고 있어!’라고 하셨으면 베드로가 회복되었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했으니 세 번을 물어보시면서 회복시키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쳐라.”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이 상한 자를 만져주십니다. 이사야 42장에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3)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일주일 동안 사시다가 주일 아침에 여기 오시지 않습니까. 보통은 와서 기도를 합니다. 그때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이럽니다. 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며 “주여..... 죄송합니다...”라고 합니다. 너무 죄송한 겁니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산 게 없으니까 그럽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와서 똑같이 한숨 쉬며 또 죄송하다고 합니다. 어쩌다 오랜만에 교회를 나오면 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해 죄송하다고 느낍니다.

 

우리 그럴 때 보통 어떻게 생각됩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에이, 한심한 녀석아! 야, 또 죄 짓느냐, 또 지어? 너는 양심도 없느냐?’라고 하실 것 같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어릴 때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분들이 하나님을 그런 이미지로 갖고 있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막 야단치시고, 회초리 때리시고, 자백을 하라고 팔을 비틀고 고문하는 하나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이미지를 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아무리 잘못했어도,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마음, 정말 제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비록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짓고 ‘죄송합니다’라고 해도, 옆에 탁 오셔서 품에 안으시면서 ‘괜찮아. 잘 왔어. 괜찮아.’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이미 상한 갈대를 왜 또 꺾겠습니까? 꺼져가는 등불을 왜 일부러 더 끄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와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또 주변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상한 마음을 지닌 채, 공허와 답답함 속에서 힘없이 살아가며 변화를 갈구하지만 할 수 없는, 그런 수많은 레위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레위가 아니었습니까? 아니 혹시 지금 레위처럼 이런 마음 가운데 갈급한 심령으로 뭔가를 찾고 계십니까? 주님의 부르시는 초청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나를 따르라.”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따라가십시오.

 

또 우리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찾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겁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 그런 사람들을 다 초청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초청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2.   부르심에 대한 레위의 반응 (15절)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시자 레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14). 오랫동안 일해서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세관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결단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요한복음(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가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데 자기는 못 들어가서 낫지 못했다고 예수님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무슨 질문을 하시는지 아십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 싶으냐? 네가 정말 낫고 싶으냐?” 38년 동안 병에 걸렸으니 구걸하며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병이 나아서 멀쩡해지면 옛날과 같이 더 이상 구걸을 못합니다. 앉아서 살지 못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겠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정말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면 이전의 방식, 옛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만 따를 수 있습니다. 버려야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막았던 것들, 나를 죄악 된 길로 유혹하던 것들,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던 것들, 죄의 길로 이끌었던 것들, 나를 자꾸 괴롭게 만들던 것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계속 같이 살아왔던 것들, 그러한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는 놀랍게도 주님을 그냥 따라갔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것이 있습니까? 세상의 즐거움입니까? 친구입니까? 돈입니까? 가족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교육입니까? 아니면 어떤 나쁜 습관이나 중독입니까? 잘못된 인간관계입니까? 이런 것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보내느라고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과감히 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정말 갈망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따라가면서도 뒤를 돌아보고, 자꾸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갈까 말까 망설이고, 다시 돌아와 기웃거리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주님을 따라 살겠다고 한다면, 삶에는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하게 됩니다. 완전히 끊어야 합니다.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미련을 둡니까? 과감히 결단해야 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던 길을 멈추었다면, 이제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멈추고 또 다른 잘못된 길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악 된 삶을 버린 것까지는 좋은데, 따라가기는 가는데,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레위는 세리의 직업을 버린 다음에 어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사람을 마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태와 레위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표시로서, 레위는 주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고 많은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다 해서 레위가 이러한 잔치를 벌일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제자로 불러주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연 것입니다.

 

이런 잔치를 벌이려면 돈을 써야 합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왔으니까 많이 써야 합니다. 자기 집도 오픈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가면 집이 얼마나 어지러워지겠습니까? 그러나 이전에는 이렇게 자기 집에서 흥겨운 잔치가 열린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온 것도 아마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으니까,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감사하니까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감사하니까 그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아낌없이 집을 열고 아낌없이 돈을 써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이 잔치에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왔는데, 여기에서 “죄인”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에 율법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형편없이 살아서 회당 출입도 금지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런 죄인들을 초청했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잔치를 열어서 예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민족의 배신자이고 반역자이고 형편없는 죄인도 받아주신 이 사랑의 예수님을, 다른 죄인들도 만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회를 주길 원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기쁨이 넘치니까 그들도 자기처럼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는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자기 물질과 집을 사용한 것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자기의 가진 것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이렇게 남을 위해 돈을 써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오직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센트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 변화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는 매주 이렇게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황금 같은 시간입니까. 그러나 나와서 시간을 드립니다. 또 헌금을 통해 물질도 드립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의 일도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드리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리 드려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자기만 아니라 남들도 누리기를 원합니다. 방황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들도 내가 만난 이 주님을 만나면 변화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들을 주님께 초대하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라고 하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나게 해주는가? 내가 만난 예수님을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주님을 만나서 생명을 얻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것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3.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논쟁 (16-17절)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은 무슨 쇼(show)가 아닙니다. 가짜가 아닙니다. 진짜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먹는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였고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누구와 밥을 먹으면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더욱 엄격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6절)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는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이들의 비방에 대해서 예수님은 한 가지 격언을 인용하면서 대답을 하십니다. 또한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7절)

 

예수님은 여기에서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두 번을 각기 다른 표현을 써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의인과 죄인으로 표현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건강한 자인지 병든 자인지, 또 의인인지 죄인인지를 판단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굉장히 의로운데, 세리와 죄인들은 형편없다고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야말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요,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죽은 제사만 있고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과 사랑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고 말씀하십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의인이 있어서 그들은 관두고 오직 죄인들만 부르러 왔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없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3:10, 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래서 부르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병든 자라고,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애통해 하는 자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나가는 말]

 

세리였던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변화를 체험하기를 원해서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이처럼 예수님을 만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변화를 체험합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아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분을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이미 자신이 병자이며 죄인임을 겸손히 고백하고 주님께 나아가셨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변화시켜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기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나와 같은 이 기쁨을 모르고 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진정한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최고의 삶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주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러한 삶을 나 자신도 누리고, 주변 모든 사람도 누리도록 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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