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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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4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9 ✦
“복음 전파의 열매와 억울한 투옥”
(사도행전 16장 11~24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종종 간절히 소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문은 우리가 아무리 두드려도 자꾸 닫힙니다. 기도를 안 하거나 금식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고 주님 뜻대로 잘 따라가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못 가게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이 그쪽으로 가는 문을 닫으셔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문이 닫힙니까? 내가 무슨 실수를 하거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데도 문이 닫혔다면 그것은 다른 쪽 문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다른 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한 문이 닫혔다면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지금 보고 있지 못하는 다른 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닫힌 문만 바라보며 ‘이게 왜 닫혔나? 왜 안 되나? 나는 이리로 가고 싶은데 왜 안 되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인생을 돌아보면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인도하셨구나!’라고 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그것을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서쪽인 무시아까지 왔다가 비두니아(터키 중북부 지역)로 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하여 문이 막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그것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인내하는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열린 길이 보입니다. 문을 두드릴 때 열릴 것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는데, 두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 그것은 내가 열심히 뭔가를 노력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바울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 전도를 막으셨을까요? 1차 전도여행 때는 터키 중부인 갈라디아를 돌게 하셨는데 2차 때는 왜 막으셨을까요? 그곳은 전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길을 막으신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시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서 이제 유럽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아시아 밖에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바울의 눈을 넓혀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안 좋은 의미가 아니더라도, 자기 일, 자기 가족, 자기 신앙생활을 주로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밖에 못 봅니다. 자기가 사는 곳, 자기가 다니는 교회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지, 이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들을 우리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겠습니까? 그런 세계를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생각을 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틀을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갇혀 있는 그 좁은 틀을 깨고 더 멀리, 더 넓게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만 보던 것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눈을 넓히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콜럼버스를 벗어나 보라는 것입니다. 눈을 떠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람 중심을 벗어나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소아시아로 가는 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다.
1. 빌립보에서 일어난 복음의 역사
1) 빌립보에 도착하다
우여곡절 끝에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유럽으로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1절)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이어 주는 에게 해 북동쪽에 위치한 사모드라게 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습니다. 바울 일행이 출발한 아시아 대륙의 드로아(고대 트로이)에서 유럽 대륙 발칸반도까지는 2000년 전 당시의 범선으로 5일이 걸리는 항해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쪽 바다를 동서로 횡단하는 선박들은 대개의 경우 사모드라게 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습니다.
사모드라게 섬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그 섬 한가운데 에게 해의 섬들에 있는 산들 중에 가장 높은 해발 1,600미터의 펜가리 산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북에게 해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그 산으로 인해 사모드라게 섬은 예로부터 해상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사모드라게 섬은 별명이 있었는데 바로 ‘포세이돈 섬’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전까지 그 높은 산에 있기 때문에,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들은 다 그 신전을 보게 되는 그런 섬이었습니다.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의 거리는 170마일이 넘습니다. 그 당시 이 뱃길은 5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나중에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때 똑같은 뱃길을 한 번 더 가게 되는데 그때는 5일이 걸립니다(행 20장). 그때는 정상적으로 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며칠이 걸렸습니까? 이틀밖에 안 걸렸습니다. 바람이 아주 강력하게 불어줘서 드로아로부터 네압볼리에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직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황급히 갈 때 쓰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똑바로 갔다는 말이 아니라, 뭔가 급해서 쫓기듯 아주 황급히 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급했던 겁니까? 바울이 급했던 게 아니고 하나님이 급하셨습니다. 빨리 복음이 유럽에도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직행’이라는 단어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5일 걸리는 길을 이틀 만에 가도록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유럽 대륙에 지금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로마제국의 황제의 길과 욕망의 길만 따라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데,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그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닷새 길을 이틀 만에 도착하도록 바람을 불게 해주신 것입니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2절)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순서적으로 첫 번째로 가장 동쪽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또 가장 큰 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가 더 컸습니다. 그런데 이 ‘첫 성’은 관용적 표현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상징적인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왜 중요했습니까? 빌립보는 마게도냐(그리스 북부)에 위치했지만, 로마의 식민지였고 황제의 직할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게도냐 주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고, 위치는 거기에 있으면서도 로마 황제의 직접 통치를 받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첫 성입니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필리포이’이고 영어로는 Philippi입니다. 필립 2세가 이 마게도냐 지역을 점령하고 이름을 빌립보로 고쳤습니다. 알렉산더가 위대한 정복자였지만 그가 금방 죽고 나서 그리스가 쇠퇴기에 접어듭니다. 그때 알렉산더의 부하들 가운데 다툼이 일어나고, 시대가 지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나왔으며 그가 죽고 나서 또 그의 부하들이 서로 다툽니다.
그 중 카이사르가 자기 후계자로 점찍었던 아주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신성으로 젊은 장군이었는데, B.C. 42년에 그가 이곳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성경에서는 아구스도로 나오는데, 장군이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그 부모임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해서 유대인들에게 자기 고향에 가서 호적하라는 명을 내린 그 황제 아구스도가 바로 이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가 이 빌립보를 정복했는데, 빌립보는 전쟁을 통해서 뺏고, 뺏기는 군사적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바다 쪽으로 나오면 그 외항이 네압볼리인데 지금은 카발라(Kavala)라는 도시입니다. 여기가 바로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 해(이탈리아 동쪽 바다)까지, 그러니까 그리스 북부에서 지금의 크로아티아나 구유고 지역까지 길이 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 에그나티나 대로)’인데, 그것이 바로 네압볼리에서 시작하여 서쪽까지 가는 길입니다. 로마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또 정치, 경제, 문화가 아주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이 지역은 세계 최고의 금광도 있어서 매일 채굴되는 금의 양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도시 국가들이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많이 흘리며 쟁탈전을 벌였던 곳입니다. 그런 와중에 결국 알렉산더 대제의 아버지 필립이 이곳을 점령하게 되었고, 그 후 그리스를 통일하며 잘 나가다가 알렉산더가 죽은 다음 그리스가 쇠퇴했습니다. 그 후에 로마가 들어와 이곳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 주의 밑에 두지 않고, 로마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황제의 직할시를 군인들이 운영했고, 또 로마에 충성하고 은퇴한 군인들에게 집을 주어서 정착하게 한 곳도 이 빌립보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지만 ‘상관들’이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그 ‘릭토르’입니다. 이곳을 로마 군인들이 다스리도록 하면서, 특히 로마에 충성하여 전쟁에서 싸우고 돌아와 은퇴한 군인들에게 집을 주어 정착하게 한 곳도 빌립보였기 때문에, 빌립보에는 엄청나게 많은 로마 군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 군인들이 질서를 잡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직할시답게 도시를 정비하여 깨끗했고, 웅장한 건물들도 많았으며,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한 모든 남자들을 추방시켰습니다. 그런데 추방 대상 1호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전통 로마의 시민만 귀족의 기풍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아주 질서정연하고 깨끗한 도시가 바로 이 빌립보였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작은 로마’였습니다. 문화, 철학, 경제, 질서, 법률까지 다 로마를 직접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은 황제의 도시로 불리는 로마의 직할시이니까 자부심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아니고 로마 시민이다.’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황제의 직할시 시민답게, 또 군인답게 아주 철저히 법을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사도 바울을 로마제국의 심장인 로마로 들여보내시기 전에, 로마의 축소판 격인 빌립보를 먼저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놀라운 만남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12절에 나오는 ‘유하다’라는 단어는 아주 독특한 단어로서 ‘배회하다’라는 말입니다. 어디를 가야 되는지 몰랐다는 말입니다. 특히 이들의 행색이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로마의 직할시인 빌립보 사람들은 옷차림도 앞서가는 패션이었는데, 바울 일행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이리저리 배회하며 다녔던 것입니다. 위풍당당한 도시에서 엄청난 빌립보의 위용 앞에 ‘와!’ 하고 감탄하며 며칠 동안 돌아다닌 것입니다.
2) 루디아와 만나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3절)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의사인데, 원래 출신은 안디옥이고 의학 공부를 이 빌립보에서 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다른 동역자들에게 빌립보는 생소한 곳이었습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습니다. 유럽 대륙의 네압볼리에 상륙하자마자 그곳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빌립보를 걸어서 찾아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도착하자마자 끼니를 해결하고, 장기 체류할 숙소를 구하고, 또 여장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 일행은 기도할 곳을 찾아서 함께 성 밖으로 나가 강가로 갑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환상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울 일행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바다 건너 마게도냐의 빌립보를 단숨에 찾아왔지만, 그 큰 대도시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또 누구에게서부터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온갖 이방 신전들이 압도적으로 서 있고 웅장한 빌립보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이곳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기도할 곳으로 찾아 강가로 나간 것입니다.
‘기도할 곳’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슈케’인데, 유대인의 회당이 없는 곳에서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도처를 말합니다. 유대교 법에 의하면 어느 곳이든 유대인 성인 남자가 최소한 10명 이상이 되면 유대인 회당을 만들 수 있었고 또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1차와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유대인 회당이 있는 도시에서는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회당을 그 도시를 위한 전도의 거점으로 삼곤 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도 거기 많았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에서 첫 안식일을 맞아 유대인 회당에 가지 않고 강가로 나갔다는 것은 빌립보에 유대인 회당이 없었다는 말이고, 또 빌립보에는 유대인 성인 남자가 열 명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거의 유대인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기도할 곳을 찾아 성문 밖 강가로 갔는데, 이 강가는 ‘간지테스 강’의 지류였고 아주 작은 시냇가였습니다. 저희도 이곳에 Olentangy River가 있지만, 서울에서 한강을 보고 오신 분들은 ‘이게 무슨 강인가?’라고 할 정도로 작은 시냇물 같은 느낌이 드는데, 바로 그런 정도였습니다.
이 시냇가에 마침 몇 명의 여자들이 앉아 있었고 바울은 그 여인들에게 말을 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말하다’라는 동사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한두 번 하고 끝낸 게 아니라 ‘계속 전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장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앞으로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4절)
그 시냇가에 모인 여인들 가운데 두아디라 출신의 직물 사업가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의 이방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처럼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지만 아직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이방인입니다. 이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역시 ‘듣다’라는 동사도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하는 말을 루디아가 계속 집중해서 들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그 긴 설교였는데, 가끔 여러분이 주일에 설교가 왜 이렇게 긴가 할 수도 있는데 바울의 설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아주 길게 설명을 죽 했습니다. 다른 여인들은 듣기도 하고 졸기도 했을 텐데, 루디아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계속 집중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습니다. 어떻게 루디아에게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따르게 하셨다’, 즉 말씀에 ‘집중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루디아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마치 루디아가 빌립보가 아닌 두아디라 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두아디라 시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두아디라 시 출신인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자주색으로 염색된 직물을 판매하는 여성 사업가였다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자기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여성 CEO였습니다. 그리고 루디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라는 것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믿는데 아직은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인,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루디아의 출생지인 두아디라는 오늘날 터키 대륙의 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던 고대 루디아(리디아) 왕국에 속한 성입니다. 그러니까 루디아가 진짜 자기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이 쉽게 기억하라고 루디아로 부르라고 한 별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국에 정복되는 리디아 왕국에 속한 도시가 두아디라였습니다. 예로부터 염색과 직물 제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두아디라에서 생산되는 자주색 염료는 당시 최상품이었습니다. 그 두아디라에서 자주색 직물 사업을 하던 루디아는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여 대도시인 빌립보까지 나와서 정착함으로 자기 사업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루디아는 사업 수완이 뛰어난 여성 사업가였던 것입니다.
2천 년 전 로마제국 내에서 자주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은 일반 대중용 옷이 아닙니다. 자주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겉옷은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 입는 값비싼 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루디아는 그냥 재래시장에서 옷을 파는 옷가게 주인 정도가 아니라, 부유층을 상대로 하여 제대로 사업을 하는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사업체의 사장들은 대개 자신들도 부유층입니다. 혹시 아직 부유층까지 이르지는 못했더라도, 부유층(부자, 귀족, 왕족)을 상대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루디아가 부유층을 상대하는 자주색 직물 사업가였다는 것은 대부분 학자들이 보는 것처럼 루디아 자신이 이미 부유층이었거나, 혹은 부유층에 편입되기를 삶의 목표로 삼은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면서 세상의 부요함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던 여인이 루디아였는데, 놀랍게도 바울이 거기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5절)
황제의 논리, 힘의 논리, 욕망의 논리, 성공의 논리가 판을 치는 로마제국의 빌립보에서 그 동안 루디아는 세상의 부유함을 목표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루디아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윤리나 도덕과는 거리가 먼 여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루디아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보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많이 박습니다. 루디아 때문에 눈물 흘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 멀리 있는 수리아 안디옥에 있던 바울을 이곳까지 부르셔서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던 루디아를 만나게 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구원의 은혜와 놀랍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체험하고 확인했을 때, 루디아는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자기만 세례받을 뿐 아니라 자기 집 식구들을 모두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믿도록 도와주고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강권적으로 설득해서 바울이 일행과 함께 자기 집에 체류하도록 부탁합니다. 돈만 보고 살아가던 헛된 인생이었는데, 그것을 추구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랬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너무 감사해서 그 사랑에 대해 빚진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마음으로 사명을 들고 나와 복음을 전한 바울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통로로 사용하셨는데, 이제 그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빚진 마음을 느끼게 된 루디아가 자기 집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 유명한 빌립보 교회의 기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그러한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 대해 바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있었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조금만 읽어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입증할 때에, 내가 받은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빌립보서 1:3-8, 새번역)
이렇게 조금만 읽어보아도 바울이 얼마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편지를 쓰던 바울은 당시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운 빌립보의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감사와 기쁨이 늘 넘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빌립보 성도들 가운데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은 루디아와 그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2. 투옥되는 바울과 실라
1)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다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또 다른 만남이 있습니다. 거기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6절)
이 점치는 여인은 귀신이 들렸는데 놀랍게도 이런 여인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가 ‘파이톤(python)’이라고 합니다. 이 ‘파이톤’은 큰 비단뱀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탁을 전하는 비단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서 헬라시대에 파이톤이라는 단어가 점쟁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여성명사도 따로 있어서 여자 점쟁이들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이 점치는 여종, 귀신 들린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인은 노예였고 누군가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점치는 여인으로 인해 주인은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돈벌이가 아주 잘됐습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7절)
귀신 들린 점치는 여종이 바울의 정체를 알아봤습니다. 영은 영을 알아봅니다. 예수님 때도 귀신 들린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귀신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몰랐는데 귀신들은 알았습니다. 여기서도 여종 안에 있는 귀신이 바울을 알아본 겁니다.
바울을 알아보고 소리 지르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해서 굉장히 칭찬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구원의 길에서 ‘길’이 헬라어로 ‘호도스(hodos)’인데, 구원의 길이 영어로는 ‘Way of life’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구원의 길이라는 ‘호도스’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그 구원의 길,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관사가 안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구원의 여러 길들 중 하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일반적인 삶의 방식,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조금 착하게 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악한 영들의 말장난입니다. 그냥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단이 결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약간 다릅니다. ‘이단(異端)’이라는 한자어 자체가 ‘끝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은 것 같은데 끝이 약간 다릅니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말하고, 하나님도 말하고, 성령님도 말하고, 천사도 말하고, 교회도 말하고, 복음도 말하고 다 하는데, 우리가 잘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면 살짝 트는 말장난에 휘말려들게 됩니다. 이단들이 살짝 트는 것이 특징입니다. 거기에 걸려들고 미혹되어 넘어집니다. 그래서 잘 분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8절)
이 귀신들린 여자가 바울의 정체를 드러내고 날이 갈수록 바울을 더 괴롭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괴로웠을까? 심히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귀신 들린 여자는 자유롭지 못한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에 아주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사도 바울을 알아보고 “저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는 사람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이 지역 사람들로서는 점치는 여인에게 들어와 있는 귀신과 주님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말과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말이 동등하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복음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되는데, 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자의 발언은 예수님과 복음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못하게 방해하고 자꾸 바울 일행에게 초점이 맞추어 지게 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빌립보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지, 자기가 유명해지고 자기가 인정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꾸 바울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구원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구원의 길이 선포되는 것을 막고 있고 바울이 자꾸만 부각되게 해서 예수님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랬더니 귀신이 즉시 쫓겨납니다.
2)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갇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19절)
점치던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 주는 귀신이 쫓겨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종 주인들의 돈벌이가 끊어졌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한 명이 아니라 “주인들” 즉 여러 명이었습니다. 무슨 회사 같이 차려놓고 고용하여 돈을 벌던 것입니다. 그런데 돈벌이가 끊어지니까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로 끌고 가면서 모함하고 고발한 겁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합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돈입니다.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만약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서 돈이 더 잘 벌렸다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돈이 안 벌리게 생기니까 이렇게 한 겁니다.
이것이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사람들, 자기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악한 일과 불의도 서슴지 않으면서도, 자기 몫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상대방을 그냥 짓밟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바울 일행이 몇 명입니까? 원래 출발한 바울과 실라 외에도 디모데가 루스드라에서 합류했고 그 다음에 누가까지 드로아에서 합류했습니다. 그러면 총 네 명입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낼 때 이들은 다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 들린 여인을 고용했던 주인들이 잡아가려면 바울과 실라 만이 아니고 전원을 다 끌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바울 이외에 남은 세 명 중에서 실라만 잡아서 바울과 실라 두 명만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아고라의 관리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고발한 내용 속에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0-21절)
귀신 들린 여인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가, 다시 빌립보의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들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집정관들에게 말한 첫마디가,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네 명의 바울 일행 중에 바울과 실라만 붙잡아 간 것은 그 두 사람이 순수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으로 반만 유대인입니다. 헬라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순수 헬라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만 끌고 간 겁니다.
로마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빌립보의 시민들은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충성하고, 또 수도 로마 시민들의 삶을 흉내 내는 것을 자기들의 취미로 삼으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후(AD) 50년경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가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다 추방시키는 영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 로마에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로마에 살던 2만여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로마 시민권이 없던 유대인들이 다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이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를 방문하기 약 1년 전쯤이었습니다. 1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충성하고 수도 로마의 시민들의 모습을 흉내 내기를 좋아했던 빌립보의 시민들도 당연히 로마에서 일어난 것과 같이 자기들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하며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빌립보에 유대인들도 없었고 회당도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 들린 여인을 고용했던 주인들이 네 명의 바울 일행 중에 순수 유대인인 바울과 실라만 붙잡아 간 것은 바로 이 배경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빌립보 시민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2-24절)
당시 로마 시대에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최고의 형벌에 속합니다. 여기서 매를 쳤는데 “많이 친 후에”라고 했는데, 한두 대 때리고 끝난 게 아니라 엄청나게 때린 겁니다. 등의 맨 살에 채찍질로 무자비하게 때려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튄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염증도 생기고 아주 심각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 버렸다고 하여 받는 형벌치고는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더군다나 일행 중에서 이방인이고 혼혈인 디모데와 그리스 사람인 누가는 체포하지 않고 정통 유대인인 바울과 실라만 잡아서 가두었는데, 결국 유대인을 싫어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 일행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귀신 쫓아낸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지역에 좋은 일이 아닙니까? 특히 빌립보 같은 데에는 법이 잘 집행되고 있었고 질서도 잘 잡혀 있었는데, 이 정도 일로 이렇게 심한 형벌을 주었다는 것은 아주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들도 뭔가에 눈이 씌워서 상식을 넘는 가혹한 형벌을 바울과 실라에게 가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선동해서 된 일입니다. 결국 그 선동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이전에 루스드라에서 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경배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돌변하여 바울이 죽게 될 지경까지 돌로 때렸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나중에 에베소에서도 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킵니까? 돈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인사건 나는 것을 잘 보십시오. 물론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그런 경우도 있지만, 계획살인인 경우 대부분 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들도 왜 테러를 합니까? 겉으로는 종교적인 이유를 대지만 사실은 돈입니다. 돈이 안 되면 테러도 하지 않습니다. 뭔가 돈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인격과 윤리도 돈에 의해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온 세상이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선동을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선동을 받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거기에 넘어가시겠습니까?
지금 돈 때문에 친구를 잃고, 돈 때문에 부부가 서로 등을 돌리고, 돈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원수가 되고, 형제자매와 형제자매가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인간성이 황폐화됩니다. 그런데도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세상은 줄기차게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가서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을 짓밟고라도 돈을 차지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선동에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배는 그렇게 채우면 채울수록 더 빨리 썩어져 없어질 뿐입니다. 아무리 돈을 채워도 우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돈을 다 합친 것보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을 안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는 성령님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성령님이 비추어주시는 빛 속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악행과 선동당하는 무지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벗어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인생을 선택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렇게 살 때, 언젠가 이 땅에서 우리의 호흡이 분명히 멈출 텐데 그 멈추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 후회함이 없이,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라고 고백하게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