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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9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0

무엇을 믿고 살 것인지 결정하라

(사도행전 1326~43)

 

[들어가는 말]

 

이 세상에는 고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생명까지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러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입니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한 이후 독일국가교회(German Christian Church)가 히틀러 정권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를 비롯한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결성했습니다. 우리 미국장로교가 그러한 분들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인 것이 바르멘 신학선언(The Theological Declaration of Barmen)입니다. 미국장로교 헌법 1부인 신앙고백서(Book of Confessions)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백교회는 나치의 선전 도구로 전락한 국가교회에 맞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부흥과 교회회복 운동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백교회를 히틀러가 가만히 둘 리가 없었습니다. 히틀러의 탄압 속에서 고백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당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고백교회는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를 비롯하여 체포를 간신히 면한 지도자들은 지하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39년 본회퍼 목사는 자신이 이전에 유학했던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방문했습니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위험하니까 독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 망명하라.’ 하고 권했습니다. 그 중에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미 망명한 그 유명한 신학자였으며 지금까지도 아주 위대한 신학자라고 존경받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도 있었습니다그들의 권유에 본회퍼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라인홀드 니버 교수에게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생지옥과 같은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만일 지금 내 동포와 함께 시련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독일로 되돌아간 본회퍼 목사는, 1943년에 체포되었다가 2년 후인 194549일에 히틀러의 특명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애인인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동반자살을 하기 불과 3주 전의 일이었습니다. 3주만 더 버텼으면 그 후에 더 살아서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입니다.

 

그때 본회퍼 목사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죽었으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해보겠다고 한 그의 소망이 다 무산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고난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로 인하여 무너졌던 독일 교회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의 능력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지금까지도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존경을 받으며, 그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도 이어질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회퍼 목사에게 그처럼 고귀한 인생을 살게끔 해준 원천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26-37)

 

오늘 본문은 바울의 설교의 본론 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가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와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전하는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이 설교는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그 메시야(그리스도/구세주)인 것을 증거하는 것인데, 서론에서는 먼저 다윗을 언급하면서 다윗에게 허락한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며 또 대조합니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6)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말씀하시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보면 그 말씀은 전능하신 창조의 말씀, 영원한 생명의 말씀, 곧 그 말씀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을 만난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7)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큰 소리로 낭독했습니다. 그 소리는 회당을 가득 채울 뿐 아니라 회당에 참석한 모든 유대인들의 귀에 크게 울렸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낭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땅에 오신 구원의 말씀, 다시 말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읽으면서도 말씀이신 예수님을 정죄하며 죽이고 말았습니다.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심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이 응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28-29)

 

진리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몰았고, 그것 가지고는 사형이 안 되니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며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그들은 백성들을 선동해서, 만약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경우 민란을 일으킬 것처럼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빌라도가 자꾸 내가 보니까 이 사람은 죄가 없다.’ 하며 풀어주려고 하니까, ‘그러면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며 민란을 일으킬 것처럼 압박했습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던 것은 예수가 너무 착하고 위대하신 분이라 놓아주어야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놓아주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 잡혀 있던 두 사람 중 바라바를 놓아주었다가는 다시 사람들을 죽이며 로마 군인들을 칠 수 있고, 그러면 자기 통치에 지장이 가니까 평화주의자인 예수를 놓아주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자꾸 예수를 놓아주려 하니까 막 선동을 하면서 민란이 일어날 것처럼 뒤에서 부추겨서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마구 악한 일을 저질러서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놀랍게도 사실은 그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주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할 고난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많이 말씀해주셨는데, 특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중에도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 내용이 너무 잘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모르고 그 부분을 따로 프린트해서 읽어보면, 이건 누가 봐도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언제 쓰였는가?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쓰였다는 것입니다. 70년이나 7년도 아니고 700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에 말한 것이 오늘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700년 전에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헤롯과 빌라도에게 차례로 끌려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갈보리)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는, 비참한 십자가 죽음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00년 전에 그런 내용이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700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무고하게 정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인간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역사가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악한 일을 해도 하나님께 쓰임 받으니까 괜찮다고 합리화해도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아무리 악하게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참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악인의 삶을 통해서도 의인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도구입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자기들을 위해서 비겁하게 예수님을 정죄하고 못 박아 죽인 악한 도구가 되느냐,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이루는 선한 도구가 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눌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되고, 말씀을 묵상하며 읽어야 되고, 말씀대로 행해야 되고, 때가 되면 나와서 예배해야 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하는가? 우리가 한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내가 알아서 살아가며 내 욕망을 앞세우고 살아갈 때, 나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본문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못 박는 악한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늘 깨어 있을 때, 늘 주님과 동행하고, 늘 기도와 말씀으로 교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며 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하며, 복음을 나누면서 나아갈 때, 혹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예수님의 어머니였지만 빈민촌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처녀였던 마리아처럼, 한때 교회를 짓밟고 잔멸하는 박해자이자 폭도였던 바울처럼, 우리는 그렇게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몇 년입니까? 요즘은 100세 시대이고 더 젊은 사람들은 120세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7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150년을 살든, 사실 그게 뭐 그렇게 오랜 기간이겠습니까? 영원에 비하면 너무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년 살지도 못하는 이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도구로 쓰임을 받겠는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선한 도구로 쓰임을 받겠는가, 우리는 매일매일 결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

 

저주받은 예수님의 시신은 저주의 나무에서 내려져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시신이 안치된 무덤이면 당연히 그 무덤도 저주받은 무덤이 아니겠습니까? 죽음과 무덤이라는 것은 이제 그 인생이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사실 무덤 앞에서 인생에 무엇이 더 남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주의 나무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한 저주의 시체로 저주의 무덤에 안치된 예수님이 그럼 그것으로 다 끝난 것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0-31)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이 되면 부활을 축하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 살아나느냐? 말이 안 된다. 그런 건 빼고 믿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분들은 살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가지고...’라고 합니다. 전생을 믿으십니까? 크리스천들 중에도 설문조사를 해보면 전생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게 부활을 믿는 것보다 확률이 훨씬 더 낮습니다. 어떻게 그런 엉터리 같은 건 믿으면서 부활은 못 믿습니까? 그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확률도 따져봐도 부활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높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잠시 기절했던 예수님이 무덤의 싸늘한 기운 때문에 에취하고 일어나는 식으로 살리신 게 아닙니다. 의식불명의 가사상태(coma)에 있다가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시고 심장의 박동이 멈춘 시체, 무덤 속에 안치된 시신,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것을 뜻하는 시체였던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시신이 된 예수님께서 그 상태에서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2-34)

 

32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일컫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전에 예수님을 죽이던 데에 동조하던 사람이었는데 바뀌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33절에서는 시편 둘째 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편 27절의 인용입니다. 이것만 봐도 예수님과 바울 당시 구약은 정경으로 39권이 확정되어 유대인들이 읽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34절은 이사야 553절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700년 정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55:3)

 

이 말씀을 여기서 인용했는데,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다윗에게 확실한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영원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영원히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구주로 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 역시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오래 전에 이렇게 예언된 것이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어졌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5-37)

 

35절은 또 다른 시편”, 즉 시편 1610절 말씀으로, 이 말씀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 또한 하나님에 의한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신 당신의 모든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 때에 다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 이야기했던 독일의 본회퍼 목사와 동시대 인물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회퍼보다 다섯 살 위였는데, 독일의 천재적인 물리학자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발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6세에 그랬으니 얼마나 천재입니까. 그리고 31세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서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정말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반 나치와 친유대적인 성향을 가진 하이젠베르크 역시 나치의 탄압을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본회퍼 목사가 미국을 방문했던 1939년에 하이젠베르크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수개월 동안 특강을 했습니다. 그는 재능도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해서 거기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도 독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 남아 망명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 역시 망명 제의를 사양하고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떠났습니다. “독일을 엄습하고 있는 죽음의 폭풍 속에서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만 독일을 바르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국한 그는 바이츠제커(C. F. von Weizscker)라는 사람과 함께 우라늄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원자폭탄을 개발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당시 독일이 우라늄 프로젝트에 관해서 더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탄 개발이 미국에 뒤쳐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하이젠베르크가 원자탄 개발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것이 하루라도 더 빨리 독일을 살리는 길이고 또 세계를 살리는 길이라 믿고서, 자기 생명을 걸고 원자탄 개발을 지연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도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자기 생명을 건 사람이었기 때문에, 본회퍼처럼 독일을 살리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짜로 그 말씀을 믿었고 또 자신의 부활을 정말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2.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선택 (38-41)

 

이렇게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힌 바울은, 이제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38-39)

 

이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바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의롭지 않은 사람들인데 의롭다고 여겨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얻는 의롭다 함’(이신칭의/이신득의)이 곧 바울의 설교의 핵심이자 결론입니다. 사실 로마서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마치면서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0-41)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 앞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툭 치면 성경이 입에서 줄줄 나오는, 성경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맞는 말이 줄줄 나옵니다. ‘생명의 삶을 비롯해서 삶 공부 때 구절들을 외우는데, 힘들지만 외우고 있으면 우리도 어떤 상황이 될 때 외웠던 말씀이 줄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암송하는 데에도 힘을 써야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과 이 말씀이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박국 1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경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이겁니다. ‘너희 믿지 못하는 자들아, 깨닫지 못하는 자들아, 놀라고 망해라.' 이것은 굉장한 저주 아닙니까? ‘살아라가 아니라 망해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한 말이 아니라, 이미 하박국과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가져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너희는 놀라고 망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 망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하박국이 선포한 것인데, 하박국 선지자는 BC 6세기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유다는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며 예루살렘에 성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불의가 판을 치고 악행이 심해서 그 시회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워져서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한탄하는 내용이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나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2-4)

 

하박국은 시작인 1장부터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쏟아놓으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오늘 우리도 이와 비슷한 현실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와 우리 시대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평화가 없고, 억울한 일이나 속이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대가 좋아진다고 하는데 뉴스를 보면 안 좋은 소식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해서 이전 같으면 다 덮어지고 숨겨지던 일들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지금 옛날보다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더 많은 것은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런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우리 보고 해결하라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불의한 자들을 몰아내고, 악행하는 자들을 벌주고, 사회를 깨끗이 정회하고,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고, 국민 모두가 법을 따르며 질서를 지키며 화해해야 한다.’라는 원칙은 누가 모릅니까? 옳은 말입니다. 하박국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아닙니까? 저 종 되었던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불러내신 민족,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데려와 여러 시대를 거쳐서 하나님의 종을 세운 나라이며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망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그냥 이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외치는 것이 하박국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것과 같은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으로 호소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도를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올바로 하려고 하는데 악하게 하는 사람들은 더 잘되고 나는 더 안 되며, 그들은 나를 괴롭힙니다. 그럴 때 하나님,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호소를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고 해도 소용 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대상이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호소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해주셔서 평화를 주십시오.’라고 구하는데, 그 답을 해주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 41절 말씀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1:5)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한 가지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이 혼란스럽고 부패한 것으로 놀랐느냐? 더 놀라운 일을 볼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을 만한 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할 만한 일을 이제 내가 할 것이다.’ 이것이 41절에 인용된 하박국 말씀입니다. 16절 이하를 죽 읽어보면 한마디로 이겁니다.

 

너희 나라가 혼란스럽고 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악이 만연해서 죽겠느냐?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이제 밖에서 흉악한 침략자들이 몰려 올 것이다. 그들은 모든 나라를 사로잡고 굴복시키고 흉폭하게 다스릴 것이다. 남아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아주 잔인한 민족이다. 그들을 내가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것을 인용한 바울의 의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의 설교의 요점은,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종말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이라고 하면 이단이 아닌가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다가 다 끝장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마침내 이루신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종말이 아니고 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박국에게 하심으로써 네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꿔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저 한 민족의 신이냐? 내가 한 시대에만 역사할 수 있는 신이냐? 그게 아니다. 네 생각을 바꿔라. 네 생각은 너무 작다. 크게 생각을 해봐라. 바르게 생각을 해봐라. 내가 얼마나 큰 약속을 너희에게 주는지를 좀 생각해봐라.’ 하시면서 하박국을 깨우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똑같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다윗의 약속을 이야기하고, 그 약속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진짜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세상을 믿고 살 것인가, 아니면 정말 이 예수를 믿고 살 것인가를 결정하라!’ 하고 도전하는 것이 바로 이 바울 설교의 결론입니다.

 

 

3.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사람들의 반응 (42-43)

 

이러한 말씀을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나갈 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2-43)

 

그곳 사람들과 바울 일행은 서로 처음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 지역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회당에 처음 찾아간 그들 일행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울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또 오십시오. 또 설교를 해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것은 체면상 부탁한 게 아닙니다. 진짜 은혜를 받으니까 그 모임에 또 가고 싶은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을 또 만나보고 싶고 그 사람의 말을 또 들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 바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전해준 복음 때문입니다복음은 이렇게 감동을 줍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며,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서 , 내가 이제 살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들에게 몰려오니까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십시오.’라고 권면을 합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몰려와서 에워싸며 다음에도 또 와 달라고 한 것은 좋았다는 겁니다.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더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나가는 말]

 

유명한 음악경연대회 중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가 있습니다. 예선 때는 작은 곳에서 하는데, 본선 때는 1600명 이상 들어가는 대형 공연장인 빅토리아 홀(Victoria Hall)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관객들로 꽉 찬 대형 공연장의 대형 무대에서 대형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추어 참가자들이 노래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서 입상하는 사람들은 그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를 뚫고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단원이 70명도 넘는 대형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 소리를 어떻게 한 사람의 노랫소리가 이깁니까? 만약 우리 중에 누가 그 무대에 선다면 아무리 큰 소리를 질러도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묻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한 사람의 노랫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를 뚫고 나옵니까? 폭포가 막 떨어지고 시끄러운 데에서는 아무리 말을 해봐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소리도 잘 안 들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약한 인간의 목소리가 그 큰 홀에서 대형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뚫고 나옵니까?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리의 크기로 따지면 당연히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도 그보다 훨씬 작은 성악가의 노랫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의 파장이 달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파장이면 큰 소리가 작은 소리를 이기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소리와 구별되는 파장을 성악가가 가졌기 때문에 그 엄청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뚫고 목소리가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 연습을 엄청나게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상과는 다른 파장을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악가의 성공이 바로 다른 소리와 구별되는 파장을 가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파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또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가 많거나 우리의 소리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파장, 다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답게,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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