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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일 주일예배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7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돌아보실 때

(창세기 81~12)

 

[들어가는 말]

 

지난 2009115일 오후에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이륙한 US Airways 항공기가 이륙 5분 만에 맨해튼 옆의 허드슨 강에 불시작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고 비행기에는 승객 150명과 조종사 2, 승무원 3명 등 모두 155명이 탑승하고 있었지만, 경찰과 소방국, 그리고 인근을 지나던 선박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신속한 구조로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모두가 구출되던 기적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기장이었던 설렌버거(Sully Sullenberger)라는 사람이 유명해졌고 심지어 그를 소재로 한 영화로까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비행기는 아주 편리한 교통수단입니다. 비행기가 없으면 지금 어떻게 여행을 할지 상상이 안 갑니다. 특히 해외여행이 그렇습니다. 요즘 한국에 자주 가는 편인데, 비행기가 없이 어떻게 한국에 가겠습니까? 그러나 비행기에게 필수적인 사항은, 반드시 땅으로 도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무사히 땅에 착륙합니다. 하지만 조금 전 말씀드린 그런 사고의 경우처럼, 가끔씩 제대로 착륙하지 못하고 불시착하는 경우들을 뉴스에서 종종 접하게 됩니다. 심지어 최근 몇 년 사이에 비행기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추락해서, 지금도 잔해를 찾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바퀴가 잘 펴지지 않거나, 엔진에 이상이 생기거나, 새 떼와 부딪칠 때 문제가 발생하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착륙하는 것이 불시착입니다. 그때는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상당히 위태로워집니다.

 

우리가 죽 살펴보고 있는 노아와 그 가족들과 동물들은 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땅으로 되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마치 불시작하는 비행기처럼, 굉장히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홍수에서 구원받았지만, 에녹처럼 영원한 하늘나라로 옮겨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목숨만 건졌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 일행이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지구가 물로 가득 차 있었고, 모든 것이 다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땅에서 사람이나 동물이 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노아의 방주는 구원을 보여주기는 보여주지만, 구원의 전체적인 측면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를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착하든 아니든, 잘났든 못났든) 상관없이 방주에 들어가야 사는 겁니다. 방주 밖에 있으면 죽습니다. 구원은 은혜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둘째는 방주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방주 안에서 사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짐승들도 있고,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답답하며, 언제 이것이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곳이 행복한 장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방주 안은 정말 복 받은 장소로 변했습니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 소위 말하는 구원이라면, 방주 안에서 사는 것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같은 것을 놓고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약간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로마서가 강조하는 것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를 강조하는 책이 로마서입니다. 야고보서는 방주에 들어간 사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강조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주에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방주의 삶은 결국 끝이 있습니다. 물이 다 빠지면 방주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때까지의 삶이 구원의 삶입니다.

 

 

1.   구원받은 자의 삶

 

우리가 앞의 7장에서는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구원받은 자의 방주 안에서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1)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심판 뒤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1)  “기억하사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아와 모든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셨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났다는 말이 아니라 돌보셨다는 말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보다 방주에 들어가서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평안하고 안전하게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이 방주 안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잊혀진다 것이 참 외로운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가을을 탄다.”라고 하며 외로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뭔가 잊힌 것 같아서 외로운 겁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돌봐준다는 것은 굉장히 복된 일입니다. 누군가가 만나주고, 자꾸 말을 걸어주고, 전화도 해주고, 카톡이나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내준다는 것은 복 받은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외로운 삶입니까?

 

그런데 인간의 불안과 외로움의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를 기억하시며 잊어버리지 않으셨는데,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고독과 불안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잊지 않으셨다는 것,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만 믿는다면, 어떤 어려운 환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는가 하면, 아무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인데 하나님이 자기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가족들과 동물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고 불안한지를 다 아시고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든 일이 닥치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무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말씀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주무시고 계신 게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내 사정을 안 돌아보시나? 하나님이 내 고통을 알기나 하실까?’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뭡니까? 내 감정입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실은 뭡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서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실까?’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내 감정일 뿐입니다. 내 감정을 의지하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뀝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아와 가족들과 동물들을 돌보아주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돌보고 계십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 교독문의 맨 앞부분이 시편 181-2절이었습니다. 그 시편은 다윗이 사울과 모든 대적들로부터 구원을 받은 날에 부른 찬양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다윗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피할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칭찬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고, 나의 반석이시고, 나의 요새이시고, 나를 건지시는 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시고, 피할 나의 바위이시고, 나의 방패이시고, 나의 구원의 뿔이시고, 나의 산성이시다!’라고 한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런 믿음이 생기면 살아납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살아납니다. 사실 우리 환경이 어렵다고 해도 다윗보다 어렵겠습니까? 다윗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고, 앞길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어렵고 답답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두 명 이상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둘 다 사랑하지만 하나는 건강한데 다른 하나는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며 열이 나서 누워 있다면, 그 순간에는 부모가 누구에게 더 신경을 쓰겠습니까? 당연히 건강한 아이도 사랑하지만, 그 병들어 아픈 아이를 돌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문제가 있고 상처가 있고 고난 중에 있는 자녀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간섭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안 보이고 잘 안 느껴집니까? 우리의 슬픔이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 나의 감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눈물이 고이면 앞이 잘 안 보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기 슬픔을 못 이겨서 눈물이 나다 보니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 잘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아이를 가지게 되면 엄마 뱃속에서 9개월 이상 있어야 합니다. 방주에서의 삶이 그것과 비슷합니다. 해산이 방주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임신은 한 번에 되는 것이지만, 태중에서 10개월 가까이 건강하게 있어야 한 생명이 태어나고 인간으로 잘 살게 됩니다. 태어났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20, 30, 40년 지나면서 계속 성숙해가야 합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단번에 구원을 받습니다.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니까 천국에 갈 확신이 있으시죠?”라고 물으면 제가 조금만 더 하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합니다. 조금 더 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더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단번에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제대로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생명의 삶> 공부를 할 때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말합니다. 먼저 받은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단번에 구원을 받습니다. 영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천국에 들어갈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받는 구원이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아가고 있는 과정, 즉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혼, 지정의의 영역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지금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기 전까지 겪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천국에 들어갈 때 받을 구원’, 즉 몸까지도 구원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처럼 새로운 몸이 되어서, 그때는 아무 죄도 없고, 저 영원한 천국에서 삽니다. 그것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BC 1500년경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모세를 통해 건져내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사실은 며칠 안 걸리는 거리인데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뺑뺑이(?) 돌리셨습니다. 그러니까 40년 동안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천국 백성, 정말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잠깐 고난을 허락하시며 훈련시키십니다.

 

 

2)  바람을 불게 하시매

 

1절에서 보는 두 번째는 하나님이 바람으로 땅 위에 불어 물이 줄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바람이 불어서 물이 줄어들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비가 40일 내내 쏟아졌고 물이 땅에 가득했습니다. 땅에서는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인해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서 땅이 꺼지고 바닷물이 몰려 들어왔고 위에서는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150일 동안 물이 넘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5개월 동안 노아와 가족들과 동물들은 방주 안에서 힘든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어도 고통은 있는 법입니다. 방주 안에서의 삶이 땅에서 살 때보다는 불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들과 동물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바람이 불게 하셔서 물을 빼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람이 물을 원위치로 가게 한 겁니다. 하늘에서 온 것은 하늘로, 땅에서 온 것은 땅으로 가게 하시고, 또 바다에서 온 것은 바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방주 안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뭔가를 계속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 같지만, 그 뒤에서 위대한 역사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잘못 계산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게 아닙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미국에서 어떤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아들을 낳으면 아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기 위해 맹수가 우글거리는 숲으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숲에 어린 아들을 그냥 두고 하루 밤을 견디게 하는 겁니다. 그럼 어린 아이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맹수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캄캄하고, 조금만 바스락 소리가 나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초긴장 상태에서 잠도 못 자고 눈을 뜬 채 밤을 새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빠를 원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나를 두었나?’

 

드디어 시간이 지나고 동이 틉니다. 해가 떠서 숲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 앞을 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빠가 바로 저 앞의 나무 뒤에서 창을 들고 자기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위험에 던져 넣으실 때, ‘네가 알아서 해라하고 내던지시는 게 아니라 지켜보고 계십니다.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일으키기도 하시지만, 물을 빼내고 땅을 마르게도 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이것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물이 물러간 것처럼 물러갑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막막하지만,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끝이 반드시 있습니다. 위기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스런 상황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도와 목적을 다 이루시면 물을 빼기 시작하십니다. 바람을 불게 하십니다. 우리 삶의 위기 속에 바람을 불게 하시고 물을 빼시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기다림을 통해 성숙해지는 신앙

 

1)  점점 물러가는 물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2-3)

 

물이 어떻게 물러갔습니까? “점점물러갔습니다. 한꺼번에 확 물러간 게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물러갔다는 겁니다. 홍수는 갑자기 왔습니다. 그런데 물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일은 갑자기도 하시고, 또 어떤 때는 천천히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조급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빨리 가시면 빨리 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천천히 가시면 우리도 천천히 가는 겁니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믿고 따라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면 우리는 방주를 짓는 겁니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경험한 배, 내가 아는 상식과 지식과 경험에 의한 배를 지으려고 할 때 사고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시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시면 저렇게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봐도, 자기 욕심에 빠져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런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려고 하니까 어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여기서도 물이 천천히 빠지는데, 이것이 구원의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단번에 됩니다. 오늘 당장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평생 걸리는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금방 점프를 하고 뛰어다니지 못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너는 왜 이빨이 없어? 인간도 아니다.’라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기다리면 천천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신앙생활도 예수님을 믿고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어른이 하는 것을 똑같이 요구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갑자기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 단계적으로 성장시키시고 성숙하도록 하십니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4-5)

 

217일에 홍수가 시작되었고, 7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5개월 만입니다. 여기는 아라랏 산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라랏에 있는 산들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터키와 러시아와 이란 국경 사이에 위치한 큰 산줄기인데, 그 중의 어느 산에 배가 걸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터키 아라랏 산의 빙하 속에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것을 믿으십니까? 정확히 말씀드리는데,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이 진짜이면 크리스천들이 거기를 성지로 삼지 그냥 두겠습니까? 아무리 국경의 문제가 있다고 해도 외교적으로 잘 해결해서 가지, 그냥 두지 않습니다. 랜덜 프라이스(Randall Price)라는 사람이 탐사대를 이끌고 갔는데, 자기도 모르게 탐사대 중 어떤 사람들이 부서진 집을 가져다 거기에 조작을 해놓은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요즘 가짜 뉴스나 가짜 지식이 너무 많으니까 잘 분별해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알아본 상황

 

아라랏의 산들 중 한 곳에 방주가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날이 101일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6-7)

 

이제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노아는 물이 줄어들고 뭔가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날려 보냅니다. 왜 하필 까마귀인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에 너무 심취해서 까마귀가 영적으로 어떻고 신학적으로 어떻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보냅니다.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8-9)

 

비둘기는 뭔가 희고 순결한 상징, 성령을 상징하는 새니까 비둘기는 좋고 까마귀는 나쁘다고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다니다가 앉을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조금 기다리다가 비둘기를 다시 보냅니다.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0-11)

 

비둘기를 7일 후에 다시 내보냈을 때 비둘기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새 잎사귀라는 말은 새롭게 난 나무의 잎사귀라는 말입니다. 원래 물에 쓸려서 넘어져 죽은 감람나무에서 잎사귀를 따온 게 아니라, 새로 나서 자란 감람나무의 잎사귀를 따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물이 정말로 빠지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노아는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물론 사인도 있고 물은 빠지고 있으며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 위기는 떠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노아는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2)

 

다시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이번에는 안 돌아옵니다. 갈 곳이 많으니까 안 돌아온 겁니다. 이쯤 되면 뚜껑을 열고 배에서 나올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노아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노아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를 보면서도 나가지 않고 계속 기다립니다.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추측하지 않고 그대로 방주 안에서 기다립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결국 주님을 따라 생활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직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방주의 문을 닫으신 것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 이제 열어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는 겁니다.

 

사실 기도하는 대로 즉시즉시 응답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금방 응답을 안 해주시나?’ 만약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기도를 즉시즉시 다 응답해주시면 세상이 천국이 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들이 많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금방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면 혹시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게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겠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으니까 이 약속을 붙들고 나가야지.’ 하고 인내로 기다리며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성화의 과정, 받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얼마나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사실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현실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급박한 상황에서 들어갈 때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감사하며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까 방주 안에서 산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겁니다.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예수님을 닮고 신뢰하고 따라가고 동행하는 신앙생활은 현실이며, 평생 걸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이 금방 이루어지고 내가 천사처럼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천국이 임하고 내가 완벽하게 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병이 있고, 고통이 있고, 죽음이 있고, 배우자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고, 자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고, 부모님 때문에 또 시부모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고, 같은 교회의 성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고, VIP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고,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흘리는 눈물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이 고통을 빨리 끝내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십니다. 고난을 조금 더 겪으라고 하십니다. 특히 매일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봐야 하고, 보기 싫은데 보고, 말하기 싫은데 말하고, 듣기 싫은데 듣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꾸준히 그런 것을 해나가는 것이 현실이고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싹 가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와서 하나님을 말씀(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배웠으면, 나가서 나를 너무 싫어하고 또 나도 너무 싫어하고 불편한 사람을 그래도 보고, 들어주고, 섬겨도 보고, 친절하게 대하고, 심지어 그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세상에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의 고난에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십니다. 배신도 당하고, 눈물도 흘리고, 힘든데도 섬겨주었는데 무시당하고, 그래도 또 할 때, 사실은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나 혼자 그냥 동떨어져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 교류도 없고 그러는데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닙니다. 부대끼면서 실패해서 눈물도 흘리고,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시도하고 그럴 때,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하기 싫으면 도망가고, 조금만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피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는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것은 내가 한 게 없습니다. 은혜로 선물을 주실 때 받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믿음으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배신당하시고, 보기 싫은 사람들을 늘 보시고, 들어주시고, 섬겨주시고, 고쳐주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삶을 우리도 사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은 물을 한꺼번에 뺄 수도 있으셨는데, 물이 빠지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계속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낸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나름대로 판단해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을 받은 것이지만, 구원의 삶을 살 때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면서,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을 사용해서 따라가는 겁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서 이런 것을 얼마 전 다뤘습니다. 내가 A를 선택할 것인가, B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형제라면 하나님, 제가 갑순이와 결혼해야 합니까, 을순이와 결혼해야 합니까?’ 자매라면 하나님, 제가 갑돌이와 결혼해야 합니까, 을돌이와 결혼해야 합니까?’라고 합니다. 사실 자기 마음속에는 이미 갑돌이로 정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을돌이와 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뭔가 잘못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끝까지 자기는 갑돌이를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면 삶이 피곤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AB냐 하는 순간에서 A를 선택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잘못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문제이지만,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그것이 혹시 잘못된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서부터 내 인생을 다시 써주십니다. 내가 B를 선택했으면 또 거기서부터 죽 써주십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결정을 해도 하나님은 인도를 해주십니다. 까마귀를 보내고 되고, 비둘기를 보내도 되고, 독수리를 보내고 되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인도해주십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정확한 인도하심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참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냥 보면 이것이 무슨 고대의 전설 같이 느껴지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쓰신 분들이 아주 뛰어난 분들입니다. 지적으로도 정말 뛰어난 분들입니다.

 

7:4에 보면 하나님이 7일 후에 홍수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7:10을 보면 7일 후에 진짜로 홍수가 났습니다. 7:17을 보면 홍수가 40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7:24을 보면 물이 150일 동안 땅에 넘쳤습니다. 그러니까 <7-7-40-150>입니다. 그런데 물이 물러나는 것도 보십시오. 8:3을 보면 물이 점점 물러가서 150일 후에 줄어들었습니다. 8:6에 보면 40일이 지나서 창문을 열었습니다. 8:10을 보면 또 7일을 기다렸습니다. 8:12을 보면 또 7일입니다. 그러니까 <150-40-7-7>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우리 삶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연히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정확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안 되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모르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7-7-40-150 / 150-40-7-7>로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어떤 선교사님이 간증을 하신 것을 인터넷에서 읽었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중간중간 방학기간에 미국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좀 더 저렴하게 여행하려고 항상 인터넷으로 호텔 중에 싸게 나온 곳을 미리 예약해서 하루 밤을 보내고 또 여행을 계속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정말 다른 호텔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싼 호텔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예약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해 보니 그곳의 상태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처럼 최악이었습니다. 어린 아들도 같이 있었는데, 호텔 로비에서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몸을 파는 매춘부들, 피어싱(piercing)을 한 사람들, 아주 거칠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호텔방에 올라가보니까 아주 허름했고, 벽이 얇아서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와 TV소리가 방까지 그대로 들렸습니다. 침대는 삐걱거리고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불편했고, 화장실 싱크대는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그곳이 너무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이중으로 잠그고는 당장 여기를 포기하고 다른 호텔로 옮겨야 하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을 보니까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망가진 가구를 보더니 만지고 누르면서 장난하고 있고, 꺼지고 기울어진 침대에서는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며 까르르 웃으면서 재미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얼마 안 되어 너무 평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아들에게는 아빠 엄마만 있으면 괜찮은 겁니다. 거기가 어떤 데든지 상관없이 아빠 엄마가 있으니까 괜찮은 겁니다. 그 자리에 아빠 엄마가 없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빠 엄마가 있으니까 자는 겁니다.

 

아이에게는 아빠 엄마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서 인도해주고 공급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만 계시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해주시고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결코 외롭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매일매일 한걸음씩 나아감으로, 언제나 평안과 기쁨이 가득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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