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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2일 주일예배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6

전 세계를 삼켜버린 대 홍수

(창세기 711~24)

 

[들어가는 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지난 8월 말 텍사스 휴스턴 지역에 허리케인 하비(Hurricane Harvey)가 덮치고 홍수가 나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을 생생히 뉴스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마침 우리 교회의 가정교회 집회 및 목자가족수련회를 위해 휴스턴에서 강사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어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회를 못할까 봐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오시게 하는 게 마음이 불편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럴수록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며 강사님이 오셔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후 우리 교회도 수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돕기 위한 헌금에 동참하여 이미 미국장로교 내 한인총회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보낸바 있습니다.

 

이번 홍수는 휴스턴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지난 2005년 뉴올리언스(New Orleans)를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미국 홍수 통제국 관계자가 말하기를, 4일간 휴스턴 인근 지역에 내린 물의 양은 1조 갤런(37900억 리터) 이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15일간 떨어진 물의 양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물에 잠긴 지역의 면적이 시카고와 뉴욕 시를 합친 면적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때 염려가 되어서 CNN 방송을 보고 있는데,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고 홍수에 대해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리포터가 방송을 하고 있는 뒤로 차 한 대가 떠내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카메라맨이 소리를 지르니까 리포터가 뒤를 돌아보았고, 방송 팀이 가서 로프를 던져 떠내려가던 차 안에 있던 사람을 구출해내었습니다. 60대 백인 남성이었는데, 얼굴이 벌개져서 당신이 내 생명을 살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라이브(live)로 중계되던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휴스턴 홍수는 피할 곳이 있고, 잠기지 않아서 갈 수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랬어도 이토록 무섭고 힘든데, 노아의 홍수 때는 어땠을지 상상이 안 갑니다. 그때는 모든 육지가 다 물에 잠기고 피할 곳이 없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고 생물이 없었습니다.

 

그 홍수는 우리가 경험하는 폭우처럼 엄청난 비가 내린 것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어떻게 전 지구가 물로 잠길 수가 있겠습니까? 비가 40일 내내 왔더라도 지구를 덮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되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가 물에 잠길 정도로 물이 쏟아졌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사건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홍수의 재앙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1-12)

 

여기서 두 가지 일이 벌어진 것을 봅니다. 하나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창문들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밑에서도 터지고 위에서도 쏟아졌습니다.

 

먼저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진 것을 살펴보면, 이것은 지하수가 올라온 것이라기보다는 지진이나 화산 폭발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하수 정도로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화산이 산에서도 터지고 바다에서도 터졌기 때문에 지구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생겼습니다. 산은 푹 꺼지고, 육지는 위로 솟아났습니다.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도 깨졌습니다. 바닷물이 땅으로 들어오고 모든 지하수들이 터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는 증거들이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물론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정하는 것이지만, 가장 좋은 예가 이스라엘의 사해입니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입니다. 그러니 홍수가 났을 때 그리로 물리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해는 내륙에 있는데 염분이 엄청납니다. 홍수 때 바닷물이 흘러들어갔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해발 1700미터인 터키의 반 호수가 짠 물입니다. 또 해발 1470미터인 이란의 우르미아 호수도 염분이 23%나 됩니다. 보통 바닷물의 염도 평균이 3.5%인데 20%가 넘으니 엄청나게 짠 물입니다. 바다가 없는 몽골 분지에 있는 우브스 호수 역시 염해입니다. 이처럼 내륙에 있는 호수들의 물이 짠 것에 대해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노아의 홍수를 생각하면 너무나 간단히 대답이 됩니다.

 

둘째,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는 말은, 엄청난 양의 비가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렸다는 말입니다. 땅이 꺼지고 갈라지면서 바닷물이 육지로 몰려 들어온 데다, 그 위에 40일 동안 역사상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노아 홍수는 허리케인이나 장마 때문에 오는 단순한 홍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홍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잠시 중단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있는 구름을 붙들고 계시다가 하나님이 그 붙들고 계시던 것을 잠시 거두시니까 하늘에 있던 물이 모두 땅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땅을 솟아오르게 하시고 육지가 드러나게 하셨는데, 그 말씀을 잠시 거두시니까 육지가 도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물이 땅 위로 몰려온 것입니다.

 

세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 자연법칙인데, 사실은 자연법칙이 붙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자연법칙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너무 신기합니다. 유성이 쏟아진다든지, 일식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보십시오. 태양계만 해도 별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데, 1도 이하로 벗어나도 서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전혀 그렇지 않고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고 계시기 때문에 산이 있고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구름이 있고 별이 있습니다. 사실은 땅 속에 지구의 핵이 있는데 그것이 불이고 용암도 끓고 있습니다. 또 하늘에도 불이 있습니다. 하늘에 번개가 치는데 그게 불입니다. 그런데도 땅이나 하늘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주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오차가 있어도 지구는 다른 별과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자전과 공전을 하며 우리가 잘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이 우주에는 당연한 것이나 우연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그 질서를 잠시 거두어가시고 세상을 물로 심판하십니다.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3-15)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노아만 구원하신 게 아니라 그 아내와 세 아들들, 그리고 세 며느리들을 다 구원하셨습니다. 7절에 보면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이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는 셈, , 야벳의 이름이 나오고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를 다 말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8명의 사람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들 외에 모든 동물의 번식을 위하여 그들을 그 종류대로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셔서 보존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노아 한 사람만 아니라 가족들을 구원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동체적 신앙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라 우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100%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분명히 세 분이신데 세 분이 완벽한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세 분이 각각 독특하시면서도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셨을 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미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사실 가족들을 다 부르신 것입니다.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도 70명이 함께 갔고, 모세가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을 때도 모든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함께 떠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처음으로 각 성도에게 임하셔서 영원히 함께 해주시는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도 120명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20명이 전부 다 잘 믿는 사람이었을까요? 분명히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지만, 그냥 따라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옆에 있다가 엉겁결에 거기에 함께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어떻게 왔든지 상관없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로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고, 그때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디에 있는가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따로 있다가 성령을 받은 게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기도하다가 성령님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공부해보아도, 하나님은 이처럼 공동체에 관심이 크시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공동체로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입니다. 세상에서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같이 함께 삽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고 섬깁니다. 특히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힘을 모아서 나아가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동물들도 다 있는데 이것도 사실 설명이 다 안 됩니다. 정결한 짐승은 제사를 위해 일곱 쌍을 했지만, 보존을 위해서는 동물들을 한 쌍씩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약간의 불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방주 안에 1년 동안 있는데, 혹시 거기서 동물들이 전염병으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서 어떤 동물도 죽거나 병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지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맡겨놓고 딴 데 가서 별로 신경을 안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하라고 하시며 사명을 주실 때는, 이미 하나님이 다 해놓으신 것을 우리가 열매만 따도록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암수 한 쌍씩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방주 안의 기적이고, 순종하는 자가 경험하는 기적입니다.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16)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하니까, 죽거나 병들거나 다치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노아는 그 많은 동물들을 자기 힘으로 잡아서 일일이 데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오도록 해주셨습니다. 노아는 오는 동물들을 죽 들여보낸 것뿐입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없이 1년 동알 지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만 하면 하나님의 결과가 얻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순종만 하면 어떤 고통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데, 지배라기보다는 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자꾸 말한다면 그것은 합리화입니다. 자기가 환경의 지배를 받으니까 합리화하는 것이지, 사실은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저런 사람이 나왔나?’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좋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작년 수요예배 때 오랫동안 살펴보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 중 그 훌륭한 아버지 밑에 악한 왕이 나오고, 그 악한 아버지 밑에서 선한 왕이 나옵니다. 환경이 다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다고 꼭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때 행복한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인데, 성도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행복하게 됩니다.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어디 사느냐? 학군이 좋으냐? 환경이 좋으냐? 집안이 좋으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일단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이 소유의 순위라고 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난한 나라들이 행복지수가 아주 상위권입니다. 이상하게도 부자일수록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거기서 행복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감당할 때,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을 이룰 때,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감당할 때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습니다.

 

 

2.   구원받는 기준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17-20)

 

이 말씀을 보면서 홍수가 40일 동안 온 땅에 범람하며 땅이 다 덮였다는 것만 생각하면 중요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습니다. 17절에는 물이 많아져라고 되어 있고, 18절에는 물이 더 많아져”, 19절에는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점점 더 물이 많아지는 겁니다. 비가 40일 동안 왔는데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습니다. 화산이 계속 터지고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고 지각 변동 때문에 물이 막 이동하는 일들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40일 동안 비가 온 다음 지구의 물은 잔잔한 바다처럼 있던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요동하고 있었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서는 물이 많아지니까 방주가 떴고, 18절에서는 물이 더 많아지니까 방주가 떠다녔고, 19절에서는 물이 더욱 넘치니까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잠기게 되었습니다. 짧은 구절들이지만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고 많은 것들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산이 다 덮였고 20절에서 15규빗이 올랐다고 하는데, 15규빗은 지금의 7미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높은 산들의 7미터 정도만 올라간 것이니까 아주 큰 차이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모든 것을 다 잠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산까지 다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지구의 모든 높은 곳들이 다 물로 덮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1-22)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결국 다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방주 밖에 있던 동물과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방주 안에 있던 여덟 명의 사람들과 동물들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요즘 말로 팩트(fact)’입니다. 방주 밖에 있던 모든 생물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그 동물이 어떤 동물이었든 상관없이 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과 동물들은 살았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 살았습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3)

 

성경은 방주 밖에 있던 생물과 사람은 다 죽었고, 방주 안에 있던 사람과 생물은 다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때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사는 것이고 방주 밖에 있으면 죽는 것입니다. 딱 한 가지 기준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이야기는 우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신화적인 이야기나 전설이 아니라, 우리와도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후에도 나오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는 것과, 또 물로 그 때 세계가 홍수에 잠겨 망하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 (벧후 3:5-7)

 

여기에 보면 앞으로 불로 심판하신다고 나옵니다. 5절의 그들은 그 당시 1세기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조롱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지 뭐가 새롭냐? 하나님이 뭘 또 심판을 하시겠느냐?’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에 홍수로 심판을 받았던 것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고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불의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그 뒤를 계속 읽어보면 불의 심판이 임할 때 무엇을 가지고 견디며 남을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노아 시대에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방주에 못 들어간 사람들은 다 죽은 겁니다. 반면, 방주 안에 있던 노아와 가족들은 똑똑했든지 착했든지 상관없이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 이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어릴 때 밖에 나가서 놀았을 것입니다. 다방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고무줄 같은 것을 하면서 놀다가 컴컴해질 때면 집에서 , 들어와, 밥 먹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조금만 더 놀고! 조금만 더!”라고 하며 더 놀다가 진짜 캄캄해지면 집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누구 집으로 들어갑니까?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기 집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은 자기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가끔 옆집 아이가 잘못 들어오면 , 왜 여기 왔어? 너희 집으로 가야지.”라고 해서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뭡니까? 그 부모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그 집에 들어갑니까? 내 부모님의 자녀이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우리 인생이 어둑어둑해지고 마감할 때가 되었습니다. 집에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집으로 들어갑니까? 우리 아버지 집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우리가 들어갈 아버지 집을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딸이니까 들어가는 겁니다. 착해서 들어가고 뭘 잘해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자녀이니까 들어갑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가 생기고 특권이 주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특권이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1:12). 예수님께서 앞으로 불로 심판하시는 재림주로 다시 오십니다. 매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다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가 생각하기에 의롭고 지혜롭고 지식이 많고 똑똑하고 착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결국 다 죽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약간 좀 마음에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착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지 왜 착해도 안 된다고 그러는가?’ 여러분, 왜 착하다고 되는 게 아닌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다 안 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고 하는데, 그 배우자에게 물어보십시오, 진짜 그런 사람인가. 그 자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진짜 그런 사람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런 것이지, 우리가 안 보는 데서는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천국은 완벽하게 착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몰래 카메라가 있어서 내 삶의 24시간을 다 찍고 있고 심지어 내 생각까지 다 찍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앞의 스크린에 한 사람씩 다 돌린다고 해보십시오. 그런데도 자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계시다면 저를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면담으로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끔 휴대전화가 잘못 걸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걸지 않았는데 이전에 걸었던 전화번호가 자기도 모르게 눌려서 자동으로 걸리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어떤 전화가 왔는데, 통화를 했던 분에게서 금방 또 온 겁니다. ‘이분이 왜 또 전화를 했지?’라고 하며 받으면서 여보세요?”라고 하는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잘못 걸려온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제 험담을 하는 겁니다. 아주 심한 험담은 아니고 목사님과 사모님이 그렇고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했을까요? 제가 여기서 밝힐까요? 뜨끔하십니까?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뜨끔합니까? 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는 아니죠?” “저는 아니죠?” 딱 그 심정입니다. ‘혹시 내가 그런 게 아닌가?’ 자기들의 마음속에 다 그런 생각이 조금은 있는데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시니까 다들 뜨끔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중에 깨끗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자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전혀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실 때 내 아들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하겠다.’라고 하시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내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어, 인생이 어두워지고 이 세상을 마감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어나는 생명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의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는데, 노아는 그때 알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다 알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지식으로 깨달아서 그 다음에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합리성이고 상식이지만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신실하신 분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신데, 노아에게 일반적인 배가 아니라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명령을 주실 때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바꿉니다. ‘에이,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걸 하라고 그러세요? 이렇게 해야 맞죠.’라고 바꿉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하실 때 합리적인 인간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배를 만듭니다. 또 크게 만들라고 하시는데 크게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작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믿음도 아니고 순종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에 지금 이해가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하다 보면 내 눈이 열려서, ‘, 왜 이것을 이렇게 하라고 하셨는지 이제 알겠다.’라고 깨달아질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 세상은 변하고 하나님의 기적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냥 생각해보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처럼 황당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다른 데는 구원이 없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에게는 참 황당하고 답답한 말입니다. 2천 년 전에 죽은 한 유대인 청년을 믿으면 생명을 얻고 부활하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성령으로만 이해가 되는 말이지 그냥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믿음은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내가 믿기로 결정하는 순간, 이상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논리나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과 사고가 계속 일어납니다. 미국에도 일어나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얼마 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총격사건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후에 소말리아에서 테러 사건이 일어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감각해진 것은, 미국에서 몇 명만 죽어도 큰일이라고 그러는데, 소말리아 같은 데서 폭탄이 터져 몇 백 명이 죽으면 그런가 보다 합니다. 이건 참 불공평한 게 아닙니까? 생명은 똑같은데 미국에서 죽으면 큰일 나는 것이고, 소말리아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으면 당연한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 주변 나라들은 어떻게 되고 통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만이 해답이시고 길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에서 배우는 영적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앞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방주 사건 같은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이것을 신화나 전설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면서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과학 법칙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지금은 설명이 안 되는데 얼마 있다가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오래 전에 설명이 안 되던 것들이 지금 설명이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우리가 발견하고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굉장히 한계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설명을 해주셔도 우리 수준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따르도록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것은 해라. 이것은 하지 마라.’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하며 살면,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잘 안 되어도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면, 우리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우리를 잘 살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은 혹시 부서진 나무 판이나 다른 배를 타고 살아난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24)

 

150일은 약 5개월 정도 됩니다. 혹시라도 널빤지를 붙들고 어떻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150일 동안 물도 안 마시고 음식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조금은 몰라도 150일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홍수가 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양식도 물도 배도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배가 있었다 할지라도 홍수로 다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5개월 동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뭔가를 붙들고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이미 임하면 거기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을 계속 읽어보면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면서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명이라도 더 빨리 방주로 들어와서 구원을 받도록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지금 심판이 임하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이 세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며 회개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당장 저런 악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끝내시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명이라도 빨리 더 와서 구원받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우리에게 지금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하나니은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주시고, 바로 이것을 전하라고 지금도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힘을 모아서 매일매일 우리 주변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만나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서 구원의 방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계속 기도해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우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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