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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21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3

참된 자유를 누리는 인생

(빌립보서 410~19)

 

[들어가는 말]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계신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소명을 받아 늦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된 분입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일을 하다가 40세가 넘어서 신학교에 들어가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렸는데 그 중에서 한국 학생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마주쳐도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열 살 정도는 아래인 사람들인데 자기를 보고도 인사를 안 하니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졌습니다. 아름다운 캠퍼스여서 아침마다 산책하듯이 기숙사에서 교실을 향해 걸어갔는데, 그런 일이 생기면 아침부터 기분이 잡치고 하루 종일 불쾌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가만 생각해보니까 인사를 안 하는 저 젊은 신학생들 때문에 내 마음이 불쾌해진다는 것은 내 감정이 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로워져야겠다고 결심하고, 먼저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젊은 학생들도 먼저 인사를 하게 되었고, 혹시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치더라도 본인이 먼저 인사를 하니까 기분 나쁜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아침의 상쾌함을 하루 종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젊은 학생들이 자기를 무시해서 인사를 안 한 게 아니라 자기를 잘 모르니까 쑥스러워서 그러기도 했고, 이분의 인상이 딱딱해서 무섭기도 해서 빨리 지나간 것이었으며, 또 아침에 바빠서 급히 가다 보니까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자기에게 인사를 안 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했다는 사실에 허탈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인 자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를 누려야 하고, 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는 자유가 아니라 진짜 자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는 크리스천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지면서 점점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의 영향에서 점점 더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수록 따지는 게 많은데, 자라갈수록 더 자유로워집니다그런데 주위에 보면,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 지역에 있는 빌립보라는 도시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 개척된 교회였는데, 다른 교회들은 바울의 속을 많이 썩게 했는데, 특히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속을 상당히 썩게 만들었던 교회였던 반면, 빌립보 교회는 끝까지 바울을 기쁘게 해주었던 교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보낸 헌금을 받아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3차 선교여행 후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그 후 로마 군인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때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황제에게 상소했고, 그래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갔을 때 죄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벼운 죄수들, 특히 로마 시민들은 집을 세들어 살게 하며 가택연금을 했습니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기에 완전히 감옥에 갇혀 있지 않고 가택연금 상태였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였을 때 쓴 편지들입니다.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였기 때문에 생활비가 필요했는데, 본문을 보면 한 동안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는 일을 소홀히 하다가, 한참 만에 바울에게 사랑의 헌금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0)

 

이 말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생각하는 것이 드디어 싹이 튼 것에 대해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여러분들은 전에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동안 그것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에게 전부터 헌금을 보내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드디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4-18)

 

복음의 시초에”, 즉 바울이 처음 빌립보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강가에 있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믿게 됩니다. 그 후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밤에 찬양을 하고, 그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립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살하려 할 때 그것을 말리면서 복음을 전했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다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럼으로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 조금 남쪽인 데살로니가(현재의 테살로니키)로 가서 있는데,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만난 지도 얼마 안 되고 생긴 지도 얼마 안 되는데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두 번이나 보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선한 마음을 갖게 하고 또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해주신 것으로 인해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유를 언급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1)

 

바울은 자기가 궁핍하기 때문에, 즉 돈이 없어 어렵기 떄문에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자신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만족하는 태도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덕목이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2, )

 

바울은 11절에서 한 말을 12절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비천에 처하는 방법도 알고 풍부에 처하는 방법도 안다고 합니다. 비천에 처해도, 돈이 없고 힘들더라도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낙망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되었어도 자만하거나 방심하여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돈이 없으면 걱정되고 낙심되며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 비굴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 돈이 많으면 거들먹거리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며 교만해지는 경향이 생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든 저렇든,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즉 배부른 상황이 되든지 배고픈 상황이 되든지, 풍부하든지 결핍되어 있든지, 자족하고 적절히 처신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10절에서 바울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한 것은 돈이 생겨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과 관심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 목장에서 선교헌금을 모아 선교사님들에게 보냅니다. 사실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지만, 선교지에서는 요즘 달러가 강세이기 때문에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교헌금을 보냈을 때 선교사님들이 돈을 받아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물론 감사함을 느끼겠지만, 기도를 하며 선교헌금을 보내기 때문에 기도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 내가 돈 벌었다.’라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성도들이 나를 기억하시고 기도하면서 선교헌금을 보내주셨구나하고 기뻐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교헌금을 보내며 기도할 때 사실은 선교사님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모세 목장에서 후원하는 김요엘 선교사님에게 며칠 전 연락이 왔는데, 같이 협력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도 콜럼버스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유익인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사랑의 헌금을 받았을 때 돈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바울은 물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으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오히려 부자유해집니다. 욕심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사람이 만족할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어야겠다는 욕망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억만금을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이 안 됩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오래 전 미국의 USA Today 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질문이 이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100만달러를 가지면 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100만 불을 가진 사람들에게 또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부자입니까?” 그들 대부분이 대답했습니다. “No.”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씀씀이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조금 벌면 거기에 맞춰 삽니다. 조금 더 벌면 거기에 맞춰 삽니다. 조금 더 벌면 또 거기에 맞춰 삽니다. 사실은 미리 앞서서 높여 놓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자라는 겁니다. 항상 쪼들립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많이 나가기 때문에 모자랍니다. 이게 바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기를 원했는데, 정작 그만큼 벌게 되면 또 모자랍니다.

 

우리가 원색적으로 이야기하면 인생을 사는 것이 돈 많이 벌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머리 터지도록 공부하며 애씁니다. 좋은 직장 잡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결국은 성공해서 돈 많이 벌겠다는 겁니다. 돈을 왜 많이 버나?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성경 말씀을 몰라서 그런 겁니다.

 

오늘 아침 영어예배 때 아주 좋은 말을 들었는데, 어떤 크리스천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모두 다 성공했으면 좋겠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 성공한 다음에 허무한 마음을 느껴보도록.”

 

사람들이 성공을 안 해서 모르니까 자꾸 성공하겠다고 경쟁하고 남을 짓밟으며 올라가려고 그러는데, 막상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보면 느껴지는 것은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허무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는데도 허무함을 느끼고 마음이 안 채워지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며 계속 돈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며 온갖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는 이 정도면 참 감사하다.’라고 감사함을 느끼면서, ‘내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으로 된 게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 중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나누며 사회에 환원합니다.

 

몇 달 전 뉴스에서 보았는데, 미국의 한 독지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그렇게 부자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교였던 코넬(Cornell) 대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두 벌의 바지를 입지 못한다.” 한 번에 한 벌을 입는 것이지, 돈이 많아서 옷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여러 벌을 한꺼번에 끼어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그러한 성공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보다는 종교적으로 최고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엄청나게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고 히브리식 이름이 사울인데, 자기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장점이 많았는지를 3장에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장점을 자꾸 이야기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어도 말을 안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걸 가지고 자꾸 자랑하느냐?’라고 하면서 죽 설명합니다.

 

35절 이후에 보면, 자신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또 자기는 이스라엘 족속이고, 그 중에도 사울 왕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라고 합니다. 율법으로는 너무 율법을 잘 지키는 열심을 가졌던 바리새인이었고, 또 자기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제1언어(native language)가 히브리어라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인 길리기아의 다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헬라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히브리어를 하는 히브리파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야 히브리파가 될 수 있는데, 자기는 외국에서 났는데도 헬라파가 아니라 히브리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미국에서 자란 2세 자녀가 한국에 있는 학생들보다 한국말과 한자를 더 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어는 기본이고, 한국말을 더 완벽하게 해서 국어를 늘 100점 맞는 겁니다. 바울이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예루살렘에 조기 유학을 시켜서 뛰어난 학자인 가말리엘 학파에서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뛰어난 학자였는데, 그 뛰어난 스승을 우습게 여기며 반론을 펴던 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누구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을 그는 버렸다고 합니다. 왜 버렸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7-9)

 

그 모든 좋은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로 여겨 다 버렸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그랬다는 겁니다. 그는 인생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택연금 상태인데도 뭐라고 합니까?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2)

 

감옥에 갇힌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유익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바울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보니까, 집정관의 수비대라는 부대가 바울을 지켰습니다. 그 부대는 놀라운 부대인데, 거기서 황제도 나오는 부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울을 지켰습니다. 13교대로 8시간씩 돌아가며 지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와서 체인으로 바울과 함께 묶여서 같이 8시간을 지내는 겁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계속 같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8시간 동안 바울이 뭘 했겠습니까? 계속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복음을 전한 겁니다. 체인에 묶여 있기 때문에 어디 도망도 못 가고, 듣기 싫어도 계속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8시간이 끝날 때쯤에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끝나고 가면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그럼 바울은 또 8시간 동안 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그러니까 또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 놀랍게도 로마 군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나갔더니 관점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자기가 종교적으로 최고의 자리를 추구하며 나갈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다고 성공하지 않고 돈이 없으면 자유로워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돈이 부족해도 자유롭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시기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될 수도 하고, 원망과 미움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오래 전 조직폭력 조직이었던 지존파가 한 고급 백화점의 최고 고객 명단을 빼내어 그들을 죽이려고 계획하다 잡힌 적이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불만, 부자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 때문에 부자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범죄자가 부잣집 딸들만 골라서 폭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꼭 그런 범죄자들뿐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생활하는 가정에서도, 아내는 돈을 시원찮게 벌어오는 남편이 원망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또 남편은 아내가 뭔가를 좀 배워서 일을 하면 좋겠는데 그냥 집에만 있는 것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자신은 이런 것들로부터 초월해서 자유함을 누리며 기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면 그 풍성함을 감사하면서 즐길 줄 알았습니다. 많이 주시면 교우들과 같이 식사하며 즐기고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안 주시면 안 주신 대로 그 형편에서도 감사하며 허리띠를 졸라 살면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울처럼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형편에도 자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바로 나다라고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자족의 비결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 비결이 다음 절에 적혀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3)

 

이 구절은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저도 어릴 때 제일 먼저 외웠던 성경구절들 중 하나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언제 가장 많이 외웠는가 하면 시험 보기 직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크게 써서 집 안에도 붙여 놓고 가게에도 붙여 놓습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이 말씀을 액자로 만들어놓은 것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오래 전 한국 경제 발전의 구호였던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의 기독교식 문구로 생각하거나, ‘긍정적 사고방식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힘들더라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큼 오해가 되고 남용되는 구절이 없습니다. 이 구절을 비롯해서, 성경은 문맥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파트가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즉 주님 안에서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문맥을 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환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아무 거다 다 할 수 있거나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궁핍할 때도 적절히 처할 수 있고 풍부할 때도 적절히 처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가난 중에도 잘 지낼 수 있고 풍요로울 때에도 잘 지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 끝을 보십시오. “배웠노니.” 12절의 끝도 보십시오. “배웠노라.”

 

바울이 주님 안에서 자유하게 된 것은 결코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배웠다는 것입니다. 배움, 즉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훈련을 받아서 이렇게 된 것이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라고 단기간에 저절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주님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애쓰는 가운데 배우게 된 것입니다.

 

 

3.   자유로워지는 비결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자유할 수가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유하게 됩니까?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자유하게 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정말 자유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남의 말에 의해 기분이 상할 때 자신의 자유를 잃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을 원망한다는 것은 곧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내다가 거울을 보면서 근래 들어 내가 살이 좀 쪘구나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요즘 뚱뚱해지셨네요.”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말은 안 했다고 해보십시오. 그 생각 때문에 제가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니까, 말로 안 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똑같은 사실인데도 생각만 하면 괜찮고, 말로 표현하면 기분이 상한다는 것은, 내가 그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집어던지는 것은, 그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TV 드라마를 보다가 열 받는 장면이 나올 때 화를 낸다면, 그 드라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팍 화를 내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정말 자유를 누리려면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이 상대방의 조종을 받지 않도록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You make me mad.” 우리가 잘 쓰는 말로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왜 나를 화나게 해?” “열 받게 하네.” “상처 받았어.” 이게 다 뭡니까? 저쪽에서 주는 대로 다 받았다는 말입니다. 저쪽이 나를 조종합니다. 저쪽에서 나를 컨트롤합니다. 상대방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이 나를 지배하도록 만듭니까? 하나님 외에는 나를 지배하는 분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화를 내고 내가 기분 나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쪽에서 어떤 말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보이든지 상관없이, 내가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안 받으면 됩니다. 저쪽에서 주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지만, 받고 안 받고는 내가 안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곡이 있는데 나 기뻐하리라는 곡입니다. 거기에 아주 좋은 가사가 있습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내 마음 기뻐하기로 결심을 했네.”

 

결심과 결정의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려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기로 결심을 해야 합니다.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기뻐하기로 결심을 해야 합니다.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2)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결심을 했다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염려할 만한 일이 생길 때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그 문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상황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자유하려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차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의 삶>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복잡한 상황에 처하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백지를 가져다 가운데 아래위로 줄을 하나 긋습니다. 왼쪽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적고, 오른쪽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적는 겁니다. 그래서 종이 왼쪽에 적은 것은 기도를 하고, 오른쪽에 적은 것은 실행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3)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노예의 특징이 뭡니까?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지배를 받으며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선택권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환경을 변화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자유인의 특징입니다.

 

주인이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한 시간 동안 그냥 있으라고 하면 종은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불편하기 때문에 편안한 자리로 옮깁니다. 이것이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입니다.

 

물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환경이 많습니다. 세계 경제가 아주 안 좋으면 어떻게 그것을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영향력 밖의 일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기분 나쁠 때 그것을 내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환경도 바꿀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바꿀 수는 없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겁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타인과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자기가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친절하기로 결정해서 행동하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도 약간 낙심되기는 하지만 기뻐하기로 결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킬 때 주변 사람들이 바뀔 때가 너무 많고, 환경도 변화가 일어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느껴지는 분들은, 차별하는 사람들이나 이 사회를 원망하지 말고 나 자신을 바꿀 방법이 무엇인지를 더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차별 대우하는 사회를, 차별하는 사람을 아무리 원망해도 사회는 변하지 않습니다. 혹시 지금 저 인간은 왜 안 변하나?’라고 하십니까? 그 인간, 안 변합니다. 빨리 포기하십시오.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더 빠르고 좋습니다.

 

성령을 안에 모시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바뀔 수 있는 법도 지식적으로 알 수는 있지만, 실천할 능력이 없는 겁니다.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도박 중독자는 자기 스스로를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도박을 더 이상 안 하겠다고 손을 자른 사람들도 있지만 나중에 노름을 또 합니다. 발가락으로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성령님을 선물로 받기 때문에 성령의 지배로 인하여 자기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우리가 삶을 염려나 분노로 낭비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즐기며 살라고 우리의 인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에 젊은 청년들도 있고 연세가 많은 분들도 계시는데,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아 있든지 상관없이 내 인생은 하나님께서 즐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게 즐기고 기뻐하며 살기 위해서는 자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겠다. 이제까지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또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아왔다. 이제부터 나는 오직 하나님의 지배만을 받는 참된 자유인이 되겠다.’라고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이 올 때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황의 노예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고, 할 수 없는 것은 무릎 꿇고 주님 앞에 기도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주위 사람과 환경을 오히려 주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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