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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4EdKic-wqto?t=2079

 

 

202232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2

위기 속에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사람

(사무엘상 301~20)

 

[들어가는 말]

 

저는 한국에서 대학생일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그때 제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니까 어떤 교회 어른이 미국에 유학을 했던 분인데 저에게 미국에 가면 한인 교회를 나가지 말고 미국 교회를 나가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인 교회들은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미국에 와서 보니까 그분의 그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이민을 갔던 동남부 지역의 한인 교회들 중 문제가 많은 교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여러 교회가 별 것 아닌 일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지고 깨어지고, 그래서 새로운 교회가 금방 생기기도 하고 또 없어지기도 하고, 게다가 교인들은 교회를 이리저리 아주 쉽게 옮겼습니다. 그것도 소위 중직자라는 분들 중에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저를 가장 두렵게 했던 것은,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소위 쫓겨나는경우가 꽤 많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도 그런 일들을 보게 되었고, 신학생이 되고 나서는 그런 일들을 더 많이 보고 또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웠습니다. 저도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나도 이 다음에 목사가 되어 쫓겨나면 어떡하나?’

 

그런데 지금까지 30년 이상 제가 목회자가 되어 살아온 날들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별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주님의 은혜이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콜럼버스에 온 지 어느덧 17년이 넘었는데, 좋은 성도님들을 만나 지금까지 별 어려움 없이 목회해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사한 것은, 저를 쫓아내지(?) 않으시고 잘 데리고 있어 주시는 게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의 목회 사역 중 교회가 분쟁하는 현장에 있었던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제가 문제 가운데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부목사로서 서로 다툼을 벌이던 두 진영 사이에 끼어서 상당히 괴로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웠던 것은, 서로 다투고 분열하고 심한 분쟁을 일으키게 된 사람들이 결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때까지 같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교회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직분자로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함께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지내고 동고동락하며 친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들고 일어나 서로를 대적하며 싸우고 분쟁하게 되었는지, 지금까지도 참 안타깝습니다. 나중에 결국 분열을 겪은 후에 그래도 교회가 회복되고 안정되어서 그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그런 일이 다윗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단순히 왔다 갔다 하며 보던 사이가 아니라 10년이 넘게 생명을 나누며 함께 동고동락하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며, 오늘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강해설교를 하다 보면 내용이 길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설교 노트도 나누어 드립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오늘 주신 말씀에 대한 나의 결단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적어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많은 내용 중에 특히 오늘 내 마음에 와 닿거나 귀에 들리는 것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일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가 아니라 그 하나의 말씀을 매번 설교 때마다 붙들고 그렇다면 나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이번 주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면서 설교 후 결단의 기도 시간에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1.   위기를 믿음으로 돌파하는 다윗 (1~8)

 

지난번 29장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과 전쟁이 벌어질 때 블레셋 편에서 이스라엘과 싸울 뻔했던 다윗과 부하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부하들과 같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엄청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1-2)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시글락(가드 왕 아기스가 자기들에게 살라고 내어준 마을)에 놓아두고 군사작전을 위해 가드의 아기스 왕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곳은 시글락에서부터 사흘 길이 떨어진 거리에 있었습니다(1).

 

그 사이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 여자들과 아이들을 잡아가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사흘 만에 돌아와 보니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불에 탄 폐허와 연기뿐이었습니다. 살던 집이 다 무너지고 불탔으며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앞이 캄캄했겠습니까?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의 손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약탈하면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집도 부수고 전부 다 파괴했지만, 사람은 한 명도 죽이지 않은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사실 그들은 얼마든지 여자들과 아이들을 다 죽이고 가축만 약탈해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사람을 다 죽이고 짐승들만 끌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모두 끌어가기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아말렉 사람들은 사람들을 모두 사로잡아 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아마도 자기들을 섬겨줄 손길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로 부리려고 끌고 간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당장 노예로 쓸 수 있고 아이들도 자라면 다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런 결정을 하도록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이 참 많습니다. 결정하는 사람은 그냥 결정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이런 식으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집이 모두 불타버리고 가족과 가축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비탄에 빠집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3-5)

 

다윗과 사람들이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울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어려운 고비들을 잘 넘겨왔는데 이제는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큰 장애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꼐 이스라엘과 싸울 뻔하다가 간신히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다 죽었는가 보니까 눈앞에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의아해합니다. 지금 가족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고, 또 설령 살아 있다 하더라도 이 넓은 땅 중에 어디로 가서 그들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들의 좌절과 낙심과 슬픔이 분노로 변합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6)

 

이 구절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600명의 용사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했는데 아내 때문에마음이 슬펐다는 말은 없다는 겁니다. 자녀들 때문에만 슬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상하고 가정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너무 비약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표현한 것 뿐입니다. 너무 문자적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에 큰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최악으로 만듭니다. 시글락에 닥친 재앙은 사람들을 최악으로 만들었습니다. 광야생활 동안 이들 600명은 다윗의 리더십 아래 아름다운 삶을 보았고 또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윗에게서 기도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도망자 생활 동안 시를 얼마나 많이 썼습니까? 그 시들이 다 기도이고 찬양입니다. 그와 함께 주님의 구원 역사를 그들은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22:2)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둘람 굴에 있는 다윗에게로 모여든 사람들이었는데, 다윗과 함께 지내는 가운데 조금씩 마음이 치유되고, 조금씩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으며, 조금씩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다윗의 믿음을 보면서 그들도 조금씩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글락에 벌어진 이 재난은 그들의 집과 가족뿐 아니라 그동안 천천히 쌓여 오던 그들의 신앙도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다윗의 책임입니다. 리더로서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기들이 항상 주변의 아말렉 마을들이나 베두인 마을들을 치고 약탈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떠난 것을 알면 그들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워낙 급히 가야 했기 때문에 그냥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차적으로 다윗의 책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도 다 압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슬픔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고 분노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졌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너무 화가 나니까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한마디를 외쳤고, 그것이 죽 퍼지면서 커다란 고함 소리로 변하여 사람들이 다 같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 하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한국말로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조금 길지만 영어로는 ‘Stone him!’으로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응원할 때 화이팅이나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한 사람이 돌로 치자!’라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돌로 치자!’ ‘돌로 치자!’라고 번져 나가는 겁니다.

 

이 엄청난 위기 앞에서 다윗은 어땠습니까?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큰 곤경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다윗이 지금 굉장히 위기를 느끼며 급박함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순간 다윗도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자기들만 가족을 잃었습니까? 다윗의 가족들도 다 잡혀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윗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여기서 봅니다.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아주 다급했지만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것은 다윗이 큰 곤경에 빠진 이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위기 속에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사울이나 블레셋 등 외부로부터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는데, 지금은 자기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하는 내부에서의 반란이 일어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더 큰 위기입니다. 밖에서 오는 것은 함께 견디어낼 수 있지만, 내부에서 이런 반역이 일어나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하지만 비탄과 분노와 쓴 뿌리의 폭풍이 몰아치는 이 위기 속에 다윗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다윗은 지금 사람들이 자기를 돌로 치자고 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계획적인 반란이 아닙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 보면 그들은 분명히 백성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6) 이렇게 하는 겁니다. 가족을 잃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슬퍼서 그게 분노로 변했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나오는 그들과 맞서서 싸우지 않습니다.

 

그들이 돌로 치자!’ 하며 나올 때 다윗이 그들을 맞서서 , 니들만 가족을 잃었어? 나도 잃었어!’ 이러면서 막 세게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그들에게 나아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나아가 말로 설득하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합니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로만 나아갑니다.

 

우리도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때, 사람들이 나에게 분노와 원망의 말을 쏟아낼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다윗에게서 배웁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변명하거나 말로 설득해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무릎 꿇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의논하거나 회의를 해서 결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회의도 필요하지만 우선적으로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 회의가 많아지면 회의가 많아진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회의를 많이 하면 마음속에서 회의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바꿀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생각을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말재주가 좋다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만지시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이 상황을 해결해주실 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문제가 생겼다면, 사실은 그 사람과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특히 크리스천에게 인간관계의 문제가 생겼다면 이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말다툼할 때 가만히 보면 그 순간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다르게 말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말이 잘못 나가고 그러면서 서로 다투게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 그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먼저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전혀 만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먼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괜히 사람을 만나서 해결해보겠다고 하다가 문제가 더 꼬여버리고 더 어렵게 된 경험을 다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먼저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전혀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은 , 이게 좋은 거야. 이것만 해. 저건 나쁜 거야. 절대 하지 마.’라고 너무나 분명하게 나쁘고 악한 것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것만 하고 저것은 절대 하지 마라.’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다 악해 보이지 않고 다 괜찮아 보이는 일을 할 때 이걸 할지 저걸 할지 모를 경우 하나님은 이것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뭐라고 하십니까? ‘먼저 이것을 해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너희가 걱정하는 모든 문제는 하나도 쓸데없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 구해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을 먼저 구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생활의 결정을 할 때 보면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회복하고 그 다음에 그 당사자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7-8)

 

다윗은 제사장으로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던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사울이 에돔 사람 도엑을 통해 제사장 85명과 모든 가족들을 학살할 때 유일하게 살아 남아서 다윗에게로 피한 아비아달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제사장은 속에 하얀 옷을 입고 겉에 남색 옷을 입었으며, 겉옷 위에다 밑에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같은 것을 걸쳤는데, 바로 그 앞치마 같은 것이 바로 에봇입니다. 그런데 이 에봇에는 정사각형으로 된 흉패가 달려있는데, 이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흉패의 안 주머니에 우림과 둠밈(빛과 완전)이라는 두 개의 돌이 들어있습니다.

 

이 우림과 둠밈이 바로 이스라엘 왕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 이번 전쟁에 나가야 합니까? 나가길 원하시면 우림이 나오게 해주십시오.’라는 식으로 기도해서, 우림이 나오면 전쟁을 나가고 둠밈이 나오면 안 나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돌을 두 개 가져다가 하나님, 이걸 해야 합니까, 저걸 해야 합니까?’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그렇게 했지만, 오순절 이후 성령이 오셔서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됩니다. 옛날처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아멜렉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하나님은 반드시 따라잡고 되찾을 것이니 쫓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의 순간에 다윗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블레셋으로 망명한 후 14개월 동안(27:7) 다윗은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기간 동안에 신앙적으로 나태해지고 둔감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얻고서 거기에 너무나 푹 빠져서 살았을 때 아무 일이 안 일어났던 것처럼, 다윗도 14개월 동안 더 이상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지 않아도 되어 몸이 편안해지니까 영적으로는 오히려 나태해지고 둔감해진 겁니다.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편해지면 나태해집니다. 뭔가 일이 생기면 간절하게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데, 모든 게 잘 풀리고 잘 돌아가고 돈이 잘 벌리고 높이 올라가고 그러면 나태해져서 하나님을 잘 찾지 않게 됩니다.

 

다윗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큰 사건을 겪으면서 그가 다시금 믿음을 회복합니다. 놀랍게도 이 어려움은 16개월 동안 하나님보다 아기스를 더 바라보고 있던 다윗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바꾸어줍니다. 그 동안은 가드에서 무슨 소식이 오나 하고 가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14개월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왜 몰랐겠습니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편하고 나태하게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가 지금 편해지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정신이 번쩍 드는 이 사건이 벌어지니까,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영적 의미, 즉 하나님이 지금 나를 깨우고 계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돌로 치자고 하며 살기등등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600명의 사람들은 다윗을 죽이자는 파괴적인 일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의 해결책입니까? 지금 다윗을 죽이면 이 문제가 해결되고 가족들이 돌아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럽니까? 그러니까 좌절, 낙심, 분노에 사로잡히니까 막 나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해결책이 아닙니다. 분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도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와 노하기는 더디 하라.” 하고 말씀합니다. 생각을 좀 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분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때 그들이 진짜 다윗을 죽였다면 그들의 인생도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지금 환난 당한 자들, 빚진 자들, 원통한 자들이 모여 있는데, 늘 하나님과 교제하는 믿음의 사람 다윗이 없이 자기들끼리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이처럼 엄청난 분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격하고 파괴하자는 계획을 세웁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좋은 말, 아름다운 말, 세워주고 격려하는 말보다는 파괴적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파괴적인 행동도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사회 운동과 정치 개혁이 사실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실제로는 개혁이 아닌 보복이었고, 그 결과는 평화가 아닌 더 큰 분열과 더 큰 적개심을 가져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삶의 어려움을 정말 해결하려면 분노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의로운 분노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완벽하게 의로운 분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의로운 분이셔서 의분이 가능한데, 우리는 의분이라고 해도 거기에 약간의 사심이 끼어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나 가정에서의 어떤 결정도 그렇고, 교회의 결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아니라 다윗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분노가 아니라 기도로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어려운 문제가 찾아올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슬퍼하고 망연자실하여 다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분노하면서 다윗을 돌로 치자하는 식으로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나가시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나름대로 판단한다고 하지만 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정확하게 판단을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이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앞서 먼저 기도로 하나님께 여쭈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움직여야 하는데 기도해야 한다고 하며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먼저 기도하고 응답받고 나가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어떤 문제가 생겼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안 바뀌어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나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2.   하나님의 극적인 인도하심 (9~15)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9-10)

 

가족들을 모두 도로 찾을 수 있다는 응답을 받은 다윗은 이제 그들을 찾으러 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윗과 함께한 600명 중에서 1/3이나 되는 200명이 너무 지쳐서 도저히 함께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너무 지친 사람들을 억지로 데려가지 않고 쉬게 한 다음, 나머지 400명을 데리고 추격을 계속합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더라도, 그렇게 나아간다고 해서 언제나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이 또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같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떨어져 나가거나 지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길 때, 또 요즘 같은 경우는 이사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낙심될 수도 있습니다. 같이 열심히 했는데 사람들이 이사 가고, 떠나고, 그만두고, 포기하는 것을 보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회의가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히 인도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주신 사명을 따라 계속 정진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지쳐서 도저히 갈 수 없는 200명 때문에 다윗은 시험에 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사람은 쉬게 하고 건널 수 있는 사람만 데리고 계속 나아갑니다. 가족을 되찾는 일은 어차피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600명이 가면 이기고 400명이 가면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00명이 가도 되고, 심지어 10명이 가도 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분명한 것 같은데도 힘이 없어서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도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 쉬라고 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도 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버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돌아와서 함께 하고, 서로의 관계를 다윗이 회복시킵니다. 그것이 다음번 본문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더라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나아갈 때 이렇게 부족한 부분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은 또 그것을 채워 주시고, 부족한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며,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 된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도움의 손길도 보내주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다윗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안내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11-12)

 

지금 가족들을 찾기 위해 11초도 아까운, 아주 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광야 길에서 죽어가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누군가가 발견하여 데려온 겁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도와줄 의무도 없습니다. 딱 보아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살리느라고 시간을 지체하면 잃어버린 가족들에게 더 큰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급한데 누구를 돕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자기 일도 급했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 사람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또 다윗이 누구입니까? 그의 센스는 대단합니다. 혹시 이 사람이 저 아말렉 사람들과 관련이 있지 않은지 감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어서 그를 살려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는 게 아닌가?’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이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 죽게 됩니다. 이 사람이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버려두고 갈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인데, 다윗은 그를 살려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꼭 이 사람에게 도움을 얻을까 해서 살려낸 게 아니라 불쌍히 여겨서 살려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사람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안내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13-14)

 

이것을 보면, 그는 시글락을 쳤던 아말렉 족속 어떤 사람의 종이었던 이집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글락을 약탈했던 바로 그 현장에 자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후 돌아가는 길에 그는 병에 걸려 쓰러졌고(아마도 사막이니까 열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은 병에 걸린 그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얼마나 잔혹합니까? 그런데 사실 당시 노예는 물건이니까 물건을 버리듯 버리고 간 겁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열병으로 쓰러져 3일 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다는 말입니까? 또 그 넓은 땅에서 어떻게 이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살아 있게 하시고 또 다윗과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실 때 처음부터 늘 편하고 넓은 길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대수롭지 않아 보이거나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순간의 만남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까 그냥 가자고 했다면 다윗은 엄청난 것을 놓치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이런 것을 주실 때 별것 아니라고 외면하며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급하고 내 갈 길도 바쁘지만,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손길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며 섬길 때, 놀랍게도 그것이 사실은 나를 돕는 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로 인도하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 (15)

 

아말렉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병에 걸린 종을 비정하게 버렸기 때문에 결국 자기도 망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종이 지금 병이 났다고 해서 버리지 않았다면 이 종이 다윗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자기와 아말렉 군대가 몰살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짧은 순간에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순간의 선택을 별것 아니라고 하거나 작은 결정이라고 하며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작은 일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결되면서 큰일이 됩니다. 그런데 욕심대로 나아가다 보면, 작은 일들이 또 서로 연결되고 연결되면서 큰 재앙으로 나에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신 큰 승리 (16~20)

 

쓰러져 있던 애굽 청년을 살려주고 도움을 받게 된 다윗은 마침내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게 됩니다. 도착해 보니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이었고 그들의 파티는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16)

 

이것은 시글락과 인근 여러 마을에서 노략해 온 음식과 술로 벌이는 잔치였습니다. 약탈한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들은 안심하고 보초도 세우지 않은 채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놀고 있는 그들을 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17)

 

그토록 즐기고 노니까 힘이 빠져서 다들 곤히 자고 있었는데, 그 새벽부터 다윗은 공격을 감행했고 아말렉 사람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단 400명만 도망갔습니다. 사실 400명이 공격했는데 아말렉 사람 400명만 도망갔다는 말은, 나머지 죽은 사람의 수가 어마어마했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모든 것을 회복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얻습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18-20)

 

다윗은 잃어버린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되찾고 빼앗긴 물건들도 다 되찾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이 다른 마을에서 약탈해 온 많은 양 떼와 소 떼도 덤으로 얻게 되어서, 오히려 재산이 늘어났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물건을 되찾은 다윗과 부하들은 기쁨으로 가득하여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어땠습니까? 풀이 죽고 비탄에 젖고 심지어 분노에 차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기쁨에 겨워서 모든 것을 다윗의 공로로 돌리며 외칩니다.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한마디로 다윗이 다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으며 다윗이 얼마나 씁쓸했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자고 하더니 이제는 다 다윗이 잘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은 그냥 사랑해줄 대상이지 믿을 대상이 아니다.’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쩌면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다윗과 용사들이 가족들을 두고 블레셋을 따라 전쟁터에 나간 동안, 아말렉 사람들이 습격해서 불태우고 가족들을 다 잡아갔습니다. 일단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미 일어났다면 정신을 차리고 그때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위기를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를 통해 그렇게 해주십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서 어려움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특별히 이렇게 순간순간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을 통해서도 연결되고 연결되면서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얼마나 괴로운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질문은 괴로울 때, 어려움을 당할 때, 나는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위기 속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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