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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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4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 ✦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장 1~5절)
[들어가는 말]
이제 다니엘 금식기도가 일주일 남았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수고하셨는데, 마지막 일주일도 최선을 다하여 음식과 미디어를 절제하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우리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음식은 채식중심으로 먹으면서 하니까 괜찮은데, 특별히 미디어 금식이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디까지가 미디어 금식이고 어디까지가 아닌가? 그 기준은 ‘내가 이것을 하면서 즐거워하는가?’입니다. 일을 위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카톡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등은 필요한 것인데, 당연히 드라마나 예능은 안 보겠지만 뉴스 같은 것도 어디까지가 미디어 금식이고 어디까지가 아닌가? 그럼 3주 동안 세상 소식과는 완전히 끊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통해 내가 즐거움을 얻고 있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삼으시면 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소식을 알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면서 내가 즐겁고 오락이 되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특히 미디어 금식을 하면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나 스포츠 등을 절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영화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몇 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나온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Star Wars>, <Back to the Future>, <Indiana Jones>와 같은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 영화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속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다시 나온 <스타워즈>만 해도, 처음에 하나가 나왔는데, 그 뒤로 두 편이 더 나오면서 끝난 줄 알았더니, 다시 그 전 이야기를 주제로 만들어서 Episode I이라고 하여 그 다음 II와 III가 계속 나왔습니다. 이젠 정말 끝났구나 했더니, 최근에는 또 훨씬 더 미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7편이라고 나오고 또 지난 연말에는 8편이 나왔습니다.
오늘부터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말씀에 따라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열정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이 바로 다른 책의 후속편입니다. 그것은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도행전을 통해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될 텐데,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그러는 가운데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과정을 보게 되며, 무엇보다 그 모든 사건 속에서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과거에 모든 역사를 끝내고 지금은 쉬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폭발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도행전을 함께 나누면서,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서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그분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1. 누가가 쓴 두 권의 책
몇 년 전부터 교회들마다 외치는 구호들 중에 인기 있는 것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든지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가는 교회가 되자’와 같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 성도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생명력을 따르기 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호만 외쳐서 되는 게 아니라, 먼저 사도행전이 쓰인 목적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초대 교회의 겉모습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초대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여 나가셨는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1-2절)
사도행전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면 많은 분들이 바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니라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첫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가장 첫 단어가 바로 “데오빌로여”인데, 이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한다는 것은 이것이 편지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쓴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썼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1:1-4)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누가복음에도 나오고 사도행전에도 나온다는 것을 보면,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사도행전도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사람이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교회를 위해 누가가 썼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이 데오빌로가 실존인물이었으며, 누가복음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로마의 고위 관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가졌고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로마의 고위 관리였으며, 황제의 사촌이었다고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이제 막 복음의 기초를 배운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통해서 예수님을 더 확실히 소개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most precious(아주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그냥 “데오빌로여”라고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세월이 조금 흘렀는데, 데오빌로가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초신자였고, 그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데오빌로여”라고 하는데, 이제 그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더 자라서 꼭 ‘각하’ 소리를 안 들어도 상관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신약성경을 쓰신 분들 중에서 유일한 이방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유대인입니다. 그는 헬라인으로 알려져 있고, 고향은 안디옥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그 근거들이 조금 있습니다. 이방인인 그의 책 두 권의 분량은 신약성경의 거의 1/4을 차지하며, 장 수로는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가 제1권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분의 탄생부터 고난과 죽음을 거쳐 승리의 부활과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쓴 것이고, 제2권인 사도행전은 교회의 이야기로서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후 핍박으로 인해 고난 받은 것을 거쳐 약 30년 후에 성공적으로 로마를 정복한 과정을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누가가 보여주는 것은,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사도행전은 그분의 교회의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같은 예수님의 사역이 1단계와 2단계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와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둘 다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단계로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쓴 글에서는 예수님이 행하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신 때부터 그분이 승천하실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책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계속 행하고 가르치신 일들, 특히 사도들을 통해 그렇게 하신 일들을 쓸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 다음에는 사도들에 의해 성령님을 통해 행해지는 예수님의 천상(하늘) 사역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두 사역(이 땅과 하늘나라)을 가르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사건은 누가복음을 마무리하고 사도행전을 시작하는 분기점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하늘 사역을 시작하시는 분기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첫 두 구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두 구절이 사실은 우리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들과 구분지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들은 대개 창시자가 있고, 그 창시자가 자신의 생애 동안 교훈을 받거나 깨닫거나 해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창시자에게서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은 그를 추종하며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그 사역을 단지 “시작”하셨을 뿐이라고 합니다(1).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끝내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 말고 구원의 길이 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완성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 후에 사역을 계속해 나가셨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예수님이 선택하신 사도들의 독특한 사역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고, 그 후에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 있는 교회들을 통해 그렇게 해오셨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옛날에 사셨던 역사의 인물인 동시에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역사 속의 예수는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영광의 예수는 세상 끝 날까지 그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계속해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9장을 우리가 쓰자는 말이 가능하고 또 맞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책은 28장에서 끝났지만,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복음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게 복음입니다. 우리가 시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복음이 약해진 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너무 약해진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예능 프로그램을 안 보는데 유일하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개그 콘서트>라는 겁니다. 그나마 요즘은 잘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몇 달 전 그것을 마침 보다가 “봉숭아 학당”이라는 코너에 한 남자가 나옵니다. 콧수염 기르고 머리도 길고 런닝 같은 것을 입고 나와서 외칩니다. “요즘 남자들이 너무 약해!” 그러면서 자기는 “강력한 남자~~ 강남!”이라고 하는데, 제가 ‘아, 저거다!’ 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음에 탁 와 닿았습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너무 약해! 요즘 교회들이 너무 약해! 강력한 크리스천~~ 강크!’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합니다. 제가 그 개그를 보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요즘 많은 교회 목회자들이 제일 걱정하는 게 이겁니다. 성도들이 그냥 청중이 되고 방관자가 된다는 겁니다. 운동 경기나 콘서트 구경하는 관중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공동체로 함께 하는 건데, 공동체 활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교인이 늘어나고, 신앙생활보다는 육신의 생활에 더 치중하는 교인이 많아지고, 변화의 삶을 살기보다 아주 습관화된 신앙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주일이면 마치 사우나에 가는 것처럼 소위 ‘영혼의 몸’을 풀러, 위안 삼아 눈도장 찍으러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이런 행동들조차 굳은살이 배겨나서 예배가 무덤덤해지고 별 의미도 없고 은혜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화석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말세로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벌어집니다. 다수는 이렇게 화석화 현상으로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은혜도 없고, 그냥 있으니까 가고 가니까 가는 습관으로 굳어지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 뜨거워지고 더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마 25장)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1900년대 초부터 한국교회가 최근까지도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특히 처음에 가장 인기 있는 메시지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 후 조금 시대가 바뀌면서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조금 더 나가서 사회 개발과 맞물려 예수 믿고 천당만 가는 게 아니라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가 되었습니다. 그 복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한 것 같은 복입니다. 믿는 것도 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믿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믿어봐야 별 볼 일 없으니까 안 믿겠다는 겁니다. 세상적인 유익이 없으면 안 믿겠다고 하고, 유익이 있으니까 믿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70-80년대에 교회가 부흥하다가 지금은 교회 말고도 좋은 곳이나 재미있는 곳이 많으니까, 교회가 지금 쇠퇴기에 들어섰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본받다’라는 단어와 ‘변화를 받다’라는 단어의 헬라어 동사들은 모두 form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본받는 것은 conform이고, 변화를 받는 것은 transform입니다. 우리가 운동할 때 ‘저 사람은 폼(form)이 좋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형태’입니다. 즉,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의 핵심은 ‘form(형태)’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제시하고 따라오게 하는 삶의 그 형태, 그 form, 그 틀, 그 패턴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그 틀 자체를 바꿀 것인가?
이 세상은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가 죽는 정글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은 피 말리는 노력을 하고, 사업하는 분들도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씁니까? 대부분 이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 올라가게 될 때, 예를 들어 아주 좋은 학교 나오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돈 많이 버는 직장을 잡을 때, 우리 자녀가 일류 대학 나오고 일류 직장 잡고 여섯 자리 또는 일곱 자리 연봉을 받을 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자녀들이 잘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잘되었을 때,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시고 축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좀 해봐야 합니다. 일등만이 살아남고 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남고 성공하게 되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사건이냐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소수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체제라는 이 세대의 틀, 이 세대의 폼(Form), 이 세대의 형태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인가?
거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틀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제일 올라가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남들보다 경쟁에 이기고 뛰어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영향력 있는 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말하면서 그 위치를 잘 사용해서 영향을 미쳐 복음도 전하고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성공을 하더라도 꼭 기억할 것은, 그렇게 되었을 때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응답해주셨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끝난다면, 결국 본받지 말라고 하신 이 세상의 form을 인정하는 게 됩니다. 인정한 틀 안에서 성공한 것이고, 그 안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그런 게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는 믿지만 실제로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변화를 받는 것(transformed)’입니다. 그래서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의 핵심은 세상의 틀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높이 올라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그 안에서 정직하게 살면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그 틀 자체를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꼭 그 자리에 안 가도 되고 꼴찌를 해도 되고 상관이 없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능력이 없어서 꼴찌를 한 것을 합리화하려는 것이 되면 안 되겠지만, 그 틀 자체를 바꾸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뒤처진다면 그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고 높이 평가하는 것을 우리 신앙 안에서는 달리 보자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제일 높이 올라가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라 틀 자체를 바꾸어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까지 이렇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복음으로 변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사도들의 사역
이제 예수님은 사도행전을 통해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택하신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하시고 예수님의 사역이 이 땅에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서 계속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사역을 감당하는 사도들은 네 가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1)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
2절에서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이라고 할 때,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도라고 부르시며 열두 제자를 택하셨을 때 똑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1장 후반부에서 가룟 유다가 죽고 그 자리를 채울 때 두 사람을 후보로 올립니다. 두 사람이 지명되고 성도들이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유다를 대신할 자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할 때 ‘대신하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똑같은 동사가 나중에 바울과 관련해서도 사용됩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9장 말씀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 하시면서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왕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9:15)이라고 하실 때 ‘택하다’가 그 똑같은 단어입니다. 아나니아가 그 메시지를 사울에게 전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라고 하는데 ‘택하여’ 역시 같은 단어입니다.
이처럼 열두 사도들,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운 맛디아, 사도 바울 등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거나, 뽑아달라고 하거나, 인간이나 위원회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종교회의나 교회에 의해서 사도로 임명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직접 개인적으로 택함을 받고 임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그들에게 몸소 자신을 보여주신 것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입니다. 그분에 대해 증언할 독특한 자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 열두 사도를 임명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나중에 교회가 세워지는 역할을 하는 증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1:21-22에도 나오지만,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울 때의 자격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가 우리 가우데 출입하신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 가운데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3절)
고난을 받으신 후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몸소 자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직접 나타나셨고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특별히 이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여러 확실한 증거를 그들에게 주셨는데, 부활부터 승천까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셨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그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게 부활하신 저녁에도 나타나시고, 갈릴리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저녁에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도마가 없어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 다시 오셔서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상처를 만져서라도 믿음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인도에 지금까지 예수님의 상처를 만졌던 도마의 손가락이 남아 있어서 썩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 가운데 오셨을 때 반가워서 서로 부둥켜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고, 특히 서로 만졌습니다. 또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함께 음식도 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령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었다는 겁니다. 같이 만났을 때 “너희에게 평안이 있기를!” 하시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냄새가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5감으로 감각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주님을 만난 것이 사도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그들에게 명령을 주신 것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성령에 대한 일들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명령을 확실하게 주십니다. 특별히 ‘웨스턴(Western) 본문’이라는 사본이 있습니다. ‘베잔(Bezan)’ 사본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에 보면 ‘그가 택하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명하신 사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게 옳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 즉 ‘대사명’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에도 나오고, 특히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대위임령(대사명)이 바로 사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메시지와 함께 보낸 사람의 권위를 받고 보내어진 외교사절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대사들이었습니다.
4)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이미 사도들에게 진리의 영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해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성령님이 다 보충을 해줄 것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약속된 그 성령을 받을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4절)
이것은 원래 하나님의 아버지의 약속이었고, 또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약속이었으며, ‘선물’이나 ‘약속’을 ‘세례’라고 부른 세례 요한의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5절)
이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시면서, 그렇게 여러 번 반복된 성령의 약속이 오래지 않아 이루어질 것을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시고 그들이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들이 받은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나가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삶
우리에게도 주님이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성경에 분명히 약속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냥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겁니다. 안 계시면 그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믿으십니까?”라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 또 교인이 될 때 첫 번째 질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교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성령을 주십니다. 그것을 소위 ‘성령 세례’라고 부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겁니다. 한 번 받았으면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영원히 지속되지만, 우리가 죄도 짓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 세례를 안 받아서가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계속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마음이 뜨거운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말씀대로 살며 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예수 믿고 사람이 변화되는 놀라운 능력이 나옵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겁니다. 날마다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내가 손을 뻗으면 저쪽에서 뭔가가 딸려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혀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고 보기도 싫은 사람이 이상하게 자꾸 불쌍하게 생각되는 겁니다. ‘저 사람이 그래도 안 됐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용서가 되는 겁니다.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는데 된 겁니다.
또 이전에는 불평만 하던 일이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손해 볼까 봐 겁내던 일을 이제는 겁을 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는 아주 좁았던 마음이 넓은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변화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새로운 삶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의 능력이 내게 임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른 게 기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게 기적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삶을 우리가 원하지 않습니까? 계속 그냥 시시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지극히 상식에 머무는 그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감동 없는 그런 삶을 지속하시겠습니까? 다른 데 눈을 돌릴 수도 없고 그냥 내 문제에 급급해서 쩔쩔매며 간신히 교회에 나오는 삶을 계속 사시겠습니까?
같은 예수를 믿어도 왜 이렇게 다릅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회는 많이 다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광스러운 삶, 성령 충만한 삶, 도구로 쓰임 받는 삶에 우리가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 갑자기 트럼프 대통령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서 초청을 합니다. ‘내가 당신과 백악관에서 일대일로 만찬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거절을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한국에서 연락이 옵니다. ‘대통령께서 당신과 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걸 확 거절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높은 사람이 초청하는 것도 영광스러워서 편지를 모셔놓고 절하기까지도 하는데,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초청하고 계십니다. 영광스러운 삶으로!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이 초대하고 계십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가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 예수님은 오늘 사도행전의 사건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변화되길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변해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되면 놀라운 축복의 길이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놀라운 변화, 놀라운 능력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