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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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0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21 ✦
“밧모 섬에서 전한 복음: 다시 오실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
(요한계시록 1장 1~20절)
1.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1)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조선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 가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반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조선의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버린 채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전 연세대 신학과 민경배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기독교회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아주 귀한 정보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제 나라의 몰락이 거의 기정사실로 되어 갈 때 누군가가 이런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남겨진 희망은 천주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니 그런즉 속히 경성해서 머리를 들고 생기를 내어서 일도 하고 희망을 품으며 나라를 위해 살 것이니라.”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248)
이것만 봐도 당시 초대 한국교회 크리스천들이 애국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애국을 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나라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된 합병 전날 밤 애국자 도산 안창호는 외쳤습니다.
“나라의 독립은 인민에게 있으며 보호를 청하려면 하나님께만 있을 뿐이라!”
바로 그때 전국에 메아리친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한국인이 가진 유일한 벗이라.” (같은 책, 327)
그 당시 기독교의 위상이 굉장했습니다. 퍼센티지로 따지면 얼마 안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맞습니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그때, 복음과 교회는 우리 백성들에게 유일한 민족 희망의 근원지였습니다. 그때 연해주 독립운동 집회에서는 이런 글을 발표했습니다.
“현금 조선에서 기독교는 거의 국민적 종교로서의 의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국민을 위한 기독교의 가치는 위대합니다.” (같은 책, 585)
곧이어 3.1운동이 일어나 교회는 민족을 살리는 운동의 중심에 섭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때부터 조국의 교회들은 말할 수 없는 환난과 박해에 직면합니다.
1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던 소아시아 초대교회의 상황이 구한말 조선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자유를 잃고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소아시아 남서해안에서 약 35마일 떨어진 길이 7.5마일, 폭 4.4마일에 불과한 작은 섬 밧모로 유배를 갑니다. AD 90~95년 사이 로마의 도미시안(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9-10절)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당한 상태에서, 황제 숭배 강요 앞에 무너져가는 교회를 위해 안타깝게 기도하다가 본 환상을 기록한 편지입니다. 10절 앞부분에 “주의 날에”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요한도 주일을 지켰고, 그가 주의 날을 기억하며 밧모 섬에서도 기도하며 예배하고 있을 때 환상을 봤습니다. 이렇게 주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보여주십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 중에 주일을 맞은 어느 날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소아시아에 세워진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를 쓴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편지의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만이 궁극적인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무력이나 지혜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복음만이 최종적인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들에게 마지막 승리를 안겨 주리라는 소식입니다. 악이 아무리 날뛰어도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때가 되면 악은 심판을 받고 성도는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AD 90년경에 로마제국은 완전히 망하는 길로 가고 있었는데, 그 클라이맥스가 바로 황제숭배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황제숭배의 모습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황제숭배가 강하지 않았는데, 1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황제숭배가 심해졌다는 말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모시면서 황제숭배가 로마의 엄청난 사업이 되었습니다. 사실 종교가 아니라 비즈니스였습니다. 황제숭배를 한다고 신전을 지어 놓으면 도시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와서 참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황제 신전을 유치하느라 도시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제로 황제 신전에 모두 와서 숭배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황제숭배에 대해 가장 끝까지 버텼던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해 보였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에베소에 신전을 지었는데, 그 아시아 지역 7개 교회 및 여러 교회들이 참배를 하지 않고 다 버티니까 왜 그런지 조사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뒤에 당시 노년의 사도가 된 요한이 턱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를 잡아서 죽여 버리면 되는데, 그러면 크리스천들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며 너도나도 순교하겠다고 나설 것이니까 더 골치가 아프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그냥 놔둘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어 고민하던 황제는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내어, 결국 요한을 밧모라는 험한 섬에 유배시켰습니다. 그렇게 유배시켜 놓고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교회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때 지도자인 자신을 떠나보내고 흔들리는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픈 나머지 사도 요한은 밧모 섬 굴에서 하나님께 주일에 기도하며 울부짖다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인데, 요한이 그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2-16절)
계시 가운데 나타나신 분, ‘인자 같은 이’는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18절에서 ‘살아 있는 자’라고 하시며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셨습니다. 일곱별과 일곱 촛대가 무엇을 가리킵니까?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20절)
일곱별은 바로 일곱 교회의 사자를 말하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가 흔들린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메시지는 주님께서 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역사를 운영하시며, 교회는 그분 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한 것 같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 같이 보여도, 교회는 주님이 붙들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2) 두 가지 문제
그런데 계시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검열 문제입니다. 계시로 받은 말씀을 그대로 다 쓰면 편지가 로마 군대의 검열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받은 그대로 ‘로마는 망한다’고 대놓고 쓸 수 가 없어서 ‘바벨론’, ‘용’, ‘짐승’ 등으로 표현하는 은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은유가 많다 보니 요한계시록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주님께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보여주셨지만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다고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보니 두꺼운 유리판과 같기도 하고 얇은 쇠상자 같기도 한 것이 번쩍번쩍 하며 총천연색의 각종 표시들과 함께 해괴망측한 소리가 나오는데, 차마 끔찍하더라.” 만약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그것을 읽는 사람은 ‘이게 뭐야?’ 하며 도대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요한이 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그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바벨론, 용, 짐승, 음녀 등으로 설명하다 보니까 요한계시록이 난해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아주 심플합니다. 결국 복음이 핵심이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요한이 밧모 섬에서 마지막으로 전한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2. 요한이 마지막으로 전한 복음
1)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정치적 자유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다면 단연 압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 아래 있던 한국 백성들에게 정치적 해방은 가장 큰 민족의 소망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1세기 소아시아 사람들의 최대 소망 역시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보다 더욱 중요하고 의미 있는 해방이 우리에게 이미 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5절)
정치적 압제보다 더 큰 존재의 입체는 죄의 압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죄 용서 받은 자유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18세기 영국인 존은 이제 막 30세가 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작은 배의 선장이어서 어릴 때부터 배를 타고 선원생활을 하며 노예무역에 가담했습니다. 일이 잘못되어 자기 자신도 얼마간 노예생활을 했지만, 그는 곧 선장 자리에 복귀했습니다.
1748년 5월 10일 그의 배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영국으로 오던 중, 엄청난 폭풍을 만나서 배를 건지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때 새벽 1시경 그는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대로 죽는다면 나는 신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이 갑자기 자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숱한 노예들을 잡아다 팔기도 하고 또 부리면서 살았지만, 정작 자기는 바로 죄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거기서 갑자기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박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 폭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7년간의 노예무역을 청산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자신의 신앙 간증을 담아 찬송시를 작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존 뉴턴(John Newton)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
존 뉴턴이 말년에 기억력을 상실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뭐가 기억나십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두 가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하나는 제가 큰 죄인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그런 저를 용서하신, 위대하신 구주이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고 복음으로 해방 받은 사람의 고백이며, 바로 이것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마지막 편지로 다시 강조하고자 했던 위대한 복음의 소식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최후에 승리를 누리게 된다
복음의 시작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6절)
죄로부터의 용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제일 처음 경험하는 소극적 은혜입니다. 그 다음에 적극적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사장으로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각자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한 중보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보여주며 그 나라 백성이 되도록 중보기도를 하는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중심적 공동체인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꾼으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외로운 밧모 섬에서 힘든 유배의 삶을 살면서도, 교회가 살아 있는 한 복음의 소망은 지속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절)
이 편지는 2~3장에 걸쳐 나와 있는 소아시아의 대표적인 일곱 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에베소를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일곱 교회를 언급합니다. 이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보면, 사도 요한은 각 교회마다 강점과 약점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각 교회에게 칭찬과 책망을 전달합니다. 특별한 환난에 직면해 있던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책망을 생략했지만, 어느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모두 잘하는 것도 있었고, 잘못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각각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미에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단서로 승리의 희망을 전달합니다(2:7, 11, 17; 3:5, 12, 21).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암시해주는 약속입니다.
요즘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암울한 소식 밖에 없습니다. 교계 소식도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습니다. 어제 교회협의회에서도 최근에 한국을 방문하고 오신 목사님이 이전에 한국에서 소속되었던 교단의 친구와 만나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교단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선거에 나갔는데, 자기는 전혀 돈을 쓰지 않고 하겠다고 하며 깨끗한 선거를 하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의 방해로 안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금권선거와 타락한 모습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들을 해주시는데, 너무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목회자들이 그럴 수 있고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또 세습이나 학력 위조 또는 돈 문제 등 많습니다.
미국의 다른 주에 있는 어느 교회는 35년 역사에서 20년 가까이 싸우다가 갈라지고 또 갈라지며, 한때 천 명이던 교인이 지금은 70명 이하로 줄었고, 그나마 몇 년 동안 몰기지도 내지 못하여 건물을 그대로 빼앗길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문을 닫을지 모르는 위기상황에 몰렸습니다.
그 외에도 안 좋은 소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어두운 소식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과연 희망을 주며 희망이 될 만한 교회들이 얼마나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질문이 결코 우리만 하는 새로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도 그런 질문을 할 만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고 소위 ‘설교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에게 어느 청년이 찾아와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문제투성이 교회 현실에 지쳤습니다. 목사님, 문제없는 교회를 좀 소개해주시겠어요?” 그때 스펄전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문제없는 교회요? 형제가 그런 교회를 혹시 찾거든 저에게 꼭 알려주십시오. 저도 그 교회의 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만일 그런 교회를 찾게 된다면 형제는 절대로 그 교회의 교인이 되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형제가 그 교회의 멤버가 되는 순간부터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 있는 인간이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문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성숙함이 있느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표현하는 ‘이기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기는 자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이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계 3:3-5, 새)
주님은 흰 옷 입은 몇 사람을 보시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또 역사를 새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3장 3절에 비추어 보면,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주님은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바로 그렇게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사람이 교회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바로 그런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사에 보면 바로 그런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무 소망이 없이 살던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은 길선주, 주기철, 손양원, 조만식, 안창호, 이상재 같은 몇 사람을 보시고 민족의 등불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민족을 살리시고, 복음이 지금 우리까지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우리 각자가 새로워지면 교회가 새로워집니다. 문제는 교회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문제는 저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고 계속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동안 교회는 계속 무너져가지만, 우리가 회개하며 돌이키는 순간 교회는 다시 살아나며 새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소망이 되고 결국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이 마지막으로 전해준 복음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마침내 새로운 세상이 온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7-8절)
특히 8절 말씀은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완성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그날은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일꾼이 되어 일한 사람들에게 그날은 역사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알맞은 상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찾으시고 ‘자, 이제 너희에게 상을 줘야겠다.’라고 하시는데, 아무리 줄 상을 찾아도 상이 없으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또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텐데 닦아주실 눈물이 없다면 이것도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소 하늘에 상을 쌓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평소에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바쁩니까? 하늘에 쌓아둘 것은 거의 하지를 못하고 땅에서 어떻게 끝내려고 하는 게 너무 많은데, 그러다 주님 오실 때 받을 상이 아무것도 없게 되지 않도록 빨리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려면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 일곱 개의 인이 나오는데, 그것을 하나씩 뜯을 때마다 뭔가가 튀어나오고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마지막 봉인을 뜯을 때는 일곱 나팔을 든 천사가 나타납니다. 또 천사가 나팔을 불 때마다 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또 일곱 대접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갈수록 인을 떼는 것보다 나팔을 부는 것이 훨씬 더 급박하고, 나팔보다 대접이 더 급박해집니다. 왜냐하면 대접은 즉시 갖다 붓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계 11:15, 새)
요한은 그날이 새 하늘 새 땅이 임하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1-4)
그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사망과 애통과 곡함을 치유해주시는 날입니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계 21:5-8, 새)
왜 ‘둘째 사망’이냐 하면, 첫째는 몸이 죽는 것이고 둘째는 영혼까지 다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복음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새 세상이 펼쳐지고 완성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오늘의 힘든 현실에서도 절망하지 않으며, 다른 방법이 아닌 사랑과 공의로서 매일의 삶을 살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는 우리는 매일 이것을 외치며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