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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3일 수요예배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20

유다가 전한 복음: 믿음 안에서 세워 가는 거룩한 여정

(유다서 11~25)

 

1.   유다서에 대하여

 

이름은 일종의 브랜드 파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으면, 그 이름으로 자녀 이름을 많이 짓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나쁜 이름 중 하나가 이완용이 아닌가 합니다. 그 이후에 완용이라는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뉴스에서 한국에 이완용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어서 왜 하필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정말 의아했는데, 잘 보니 이완용이 아니라 이완영이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조금 이상합니다.

 

몇 달 전에 국제가정교회사역원 총무이신 성승현 집사님께로부터 이메일이 왔는데, 아프리카 선교와 가정교회 사역에 대한 내용이었고, 제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왜 나에게 왔나 보니까, 남아프리카 선교간사로 있는 선교사님 성함이 이원준인데 저와 혼동해서 그분에게 보낼 이메일을 저에게 잘못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유다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유다는 본래 찬양이라는 뜻으로, 구약의 유다 지파에서 시작하여 좋은 이름의 대표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하고 서양 사람들 중에서 유다(Judas)’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신약성경의 한 책이 유다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다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1)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셔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신 다음에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칭하셨습니다. 그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 말고 또 한 명의 유다가 있었는데, 어떤 신약학자들은 그 유다가 이 책의 저자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6:14-16)

 

그러나 그렇다면 관례를 따라 그는 자신을 사도 유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밝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서를 쓴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아들 유다나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으로 가서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시니까 그곳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런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외칩니다. 이 예수는 자기들이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된 거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동생들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13:55)

 

여기 예수님의 형제들 곧 요셉의 아들들의 명단에 야고보와 유다가 나옵니다. 그는 다른 예수님의 형제들처럼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야고보에게 나타나실 때 야고보와 함께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지금으로 하면 담임목사)가 되는데, 동생 유다는 그와 함께 교회를 섬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유다서의 영어제목을 보면 ‘Jude’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원래 필사본에서, 유다는 가룟 유다(Judas Iscariot)를 가리킬 때와 똑같이 ‘Judas’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 가룟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 예수님의 동생이자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를 영어로 Jude라고 다르게 표기한 것입니다.

 

유다(Judas)는 히브리어 유다(Judah)의 변형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입니다. 유다는 1세기 유대에서 아주 흔했던 이름이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두 명을 포함해서 신약성경에 적어도 일곱 명의 서로 다른 유다(Judas)가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룟인 아닌 유다를 가리켜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기록했는데(6:16; 1:13), 마태복음 10장과 마가복음 3장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대신 다대오(Thaddaeus)가 나옵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유다 다대오)가 일반적으로 유다보다는 다대오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대오는 유다서의 저자가 아닙니다.

 

또 다른 유다로는 갈릴리 폭동을 일으킨 유다가 있는데(5:37), 당연히 그는 아닙니다. 또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공회의 통치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준 교회 지도자 바사바라 하는 유다(15:22)도 있고, 교회를 박해하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사울이 다메섹에서 머물렀던 집이 있던 직가라 하는 거리에 살던 유다가 있습니다(9:11). 그러나 여러 사실을 종합해볼 때, 유다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자기를 가리켜 예수님의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한 것은, 야고보가 야고보서 서두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1)라고 한 것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서는 모두 227단어로 되어 있는데, 그 중 93개가 야고보서에 동일하게 등징하는 것을 보면, 유다가 형제 야고보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줍니다.

 

한때 예수님을 가까이 두고도 그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몰랐다가, 나중에 마침내 회심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2.   유다가 전한 복음

 

1)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

 

여기서 유다는 복음의 핵심이 구원 사건이고, 이 구원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단번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한 번에 주어진 것이지만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once for all)는 뜻입니다.

 

복음은 사도들을 통해 단번에 주어졌는데 그것이 영원한 효력이 있고, 우리도 이 복음을 단번에 영원히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복음이 본질적으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님의 속죄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8)

 

여기서 단번에3절에 나오는 단번에와 같은 단어(hapaks)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또 죽으시고 또 죽으시는 식으로 반복될 필요 없이 단 한 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먹는 약들은 다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한 번 먹으면 영원한 게 아니라 먹고 또 먹고 그래야 합니다. 그 효능이 떨어지면 다시 그것들을 취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가 그랬습니다. 일시적인 건강, 일시적인 회복, 일시적인 용납, 일시적인 기쁨에 불과했습니다. 효력이 떨어지면 하고 또 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거룩한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신 순간,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가져오던 모든 일시적, 순간적 은혜는 영원한 은혜로 바뀌었습니다. 이 장엄한 복음의 선포를 히브리서 10장 말씀으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10:11-12, 14, )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 유다를 통해 단번에 우리에게 전해진 영원한 구원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내가 예수님을 믿기는 믿었는데 지금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못 갈지 모르겠다.’ 하면서 부흥회가 되면 또 믿고 그 다음 부흥회 때 또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 기분에 따라 또 하고 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주 강력한 십자가, 한 번으로 충분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주신 영원한 속죄의 제사와 구원의 복음의 은혜가,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VIP 분들에게도 임함으로써 영혼 구원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하는 길

 

인생은 건축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삶의 집을 건축해 갑니다. 신앙생활도 건축입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믿음의 집을 건축해 가는 것입니다. 이 건축이 견고하려면 무엇보다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합니다. 건물이 무너질 때 보면, 많은 경우 기초공사가 부실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한 사람은 모래 위에, 다른 한 사림은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건축이 완성되고 보니까 두 집의 겉모습은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밀려오니까 두 집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주 심하게 무너진 것에 비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견고하게 버텼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기초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7:24-25, )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 저도 모태신앙이지만,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말씀을 듣는 것은 잘합니다. 듣는 것은 굉장히 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여기는 안 썼지만 그 다음 말씀에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듣는 것은 같은데 행하는 사람과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튼튼하고,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너졌는가? 이 말씀만 봐도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듣는 건 정말 잘합니다. 부흥회도 많고, 집회도 많고, 훈련도 많고,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행하는 것이 너무 약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약합니다. 무엇보다 제일 핵심이 되는 말씀이 뭡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실천이 약하다보니까 무너지는 겁니다. 그래서 겉은 화려한데 밑이 약하니까 무너져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0-21)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build)’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권면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그것은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믿음의 기초를 흔드는 거짓된 교훈들이 교회 내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4)

 

여기서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이런 교훈을 퍼뜨리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신약학자들은 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초대교회에 몰래 잠입한 영지주의(Gnosticism)자들과 무율법주의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그들은 크게 두 가지 그릇된 가르침의 바이러스를 퍼트렸습니다. 첫째,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는 다르다.’라고 하여 결과적으로 예수의 주 되심을 부인했습니다. 둘째,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은 사람은 이제 용서 받았으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요즘 구원파의 말과 비슷합니다.

 

유다는 이런 가르침을 용납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우리 믿음의 거룩한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며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가 주님이시라면 그분이 우리 삶을 이끌어가시도록 맡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거룩한 믿음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붙들고 매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 자신을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거룩한 여러분의 믿음을 터로 삼아서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0-21, )

 

이 과정을 기독교 교리에서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복음은 구원 받고 천국에 가도록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믿음 안에서 거룩하게 세우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까지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소식입니다.

 

 

3)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 앞에 기쁨으로 서게 하는 길

 

단거리 경주에서는 처음에 누가 빠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먼저 출발하느냐가 승리의 관건입니다. 그래서 100미터 경기를 보면 출발신호와 동시에 출발하려고 굉장히 신경 씁니다. 그러다 먼저 출발하여 실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에서는 그렇게 출발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라톤에서는 출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긴 과정을 통한 인내와 골인입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골인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좋았던 사람이 나빠지고 나빴던 사람이 좋아진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제가 1986년에 이민을 올 당시에는, 그때 한국 대통령이던 분의 권력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 후 감옥에도 들어가고 지금까지도 수치스럽고 부자유하게 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때 탄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정권을 잡게 되는 것 역시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나 지금 부자로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앞으로 몇 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또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인생은 짧아 보여도, 속성상 장거리 경주입니다. 지금 잘되고 있다고 계속 잘된다는 보장이 없고, 지금 어렵다고 계속 어려울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끝에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과정을 잘해야 끝도 좋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패를 말할 때 서양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말로 ‘finish well’(잘 완주함)이란 말이 있습니다. 유다는 오늘 본문 마지막 대목에서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그렇게 ‘finish well’ 하도록 축복하고 있습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4-25)

 

아멘!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마지막 날 그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절정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인생길에서 보호해주셔서 흠이 없도록 만져 주시고 마침내 그 영광 앞에 기쁨으로 서게 해주신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성도의 최종적인 소망입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영화’(glorification)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낸 성취가 아닙니다. 여기서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거침이 없게 하시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 그분의 은혜였던 것처럼, 구원의 완성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복음은 이 영광스런 완성의 순간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3.   두 유다가 걸어간 두 가지 상반된 길

 

죽음은 우리 삶을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가 남긴 마지막 축복의 메시지를 생각해보며 유다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최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 유다보다 먼저 믿음의 출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리지널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이고, 예수님의 제자 팀의 재정을 담당할 만큼 신뢰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유다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30에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준 스승을 팔아 넘겼고, 결국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끄럽게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유다는 처음에 예수님의 형제로서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본 자기 형님을 구주로 알아보는 안목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 형제 야고보와 함께 회개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13-14)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던 120명 중에 이 유다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고전 9:5)

 

여기도 보면 주의 형제들이니까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야고보도 그렇고 유다도 자기 아내와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유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전도하던 중 칼에 맞아 순교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찬양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유다는 자기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바로 이런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먼저 출발해서 믿음의 길을 가다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결국 배교자로 인생을 비참하게 마무리한 가룟 유다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유다서 11절은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통렬하게 선포합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1)

 

유다는 그 길이 가인의 길이고 발람의 길이고 고라의 길이며 멸망의 길이라고 증언합니다.

 

또 다른 한 길, 믿음의 출발은 늦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신약성경의 저자가 되며 순교자로 인생길을 finish well(잘 완주)한 예수님의 동생 유다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길이 이 땅에서는 어려운 길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영광의 길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도 이 유다와 같이 복음의 길을 중간에 끝까지 걸어감으로써 주님 앞에 서는 날 칭찬받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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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로마에 전해진 복음: 세상과 인간을 바꾸는 유일한 해답" (롬 1:1-17)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6 (12/19/18) kpccoh 2018.12.20 908
178 "누가가 다시 전한 복음: 성령의 권능으로 펼쳐질 드라마" (행 1:1-8)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5 (12/12/18) kpccoh 2018.12.13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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