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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7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19 ✦
“요한이 다시 전한 복음: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 누리는 공동체의 충만한 기쁨”
(베드로전서 1장 1~9절)
1. 요한일이삼서에 대하여
복음주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신약성경에서 다섯 권의 책을 썼다는 데 의견을 일치합니다. 이 다섯 권은 요한복음, 요한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중에 제일 먼저 쓰인 책이 요한복음인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이어서 편지서들을 다시 기록해야 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은 당시 예수가 누구인가를 직접적으로 소개받을 수 없었던 세계 속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설명할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는 자신을 가리켜 ‘요한’이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3)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으시고 요한만 사랑하셔서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자기를 사랑하셨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셨음을 알았고, 겸손한 표현으로 이렇게 쓴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6-27)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 20:2)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요 21:7, 20)
이러한 표현들은,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 받은 자로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언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서신서에서는 자신을 ‘장로’라고 밝힙니다(요이 1:1). 또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 ‘자녀들’(요일 2:1, 28; 3:7; 5:21) 또는 ‘아이들’(요일 2:18)이라고 부릅니다. 서신서들은 요한복음과 달리 비신자들이 아니라 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였고,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요한이 쓴 편지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특히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경계하면서 그들이 누구인가를 밝히기도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19)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왔는데,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디서 갑자기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전에 함께 초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떠나 적그리스도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을 볼 때, 이 사람들은 원래 믿었다 안 믿은 게 아니라 원래 안 믿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요한일서는 이단의 교회 흔들기에 맞서 교회 공동체를 지키려는 의도로 기록된 목적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복음이었고, 따라서 복음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도 요한은, 오늘을 사는 신자인 우리에게도 자신의 편지를 통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가 지켜야 할 복음은 무엇인가?’ 이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에게 이 복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2. 요한이 다시 전한 복음
1) 생명의 말씀을 경험하는 삶 그 자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절)
이 첫 구절을 읽자마자 떠오르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 1절이 떠오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 1:1, 새)
이 두 구절이 비슷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저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 1:14, 새)
그런데 요한일서의 서두인 1장 2절에서도 이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2절)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분을 우리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말씀과 동일한 사건을 단순히 반복해서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의 역사적 존재와 성육신의 사실을 선포한 것이고,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는 그분을 믿는 신자들인 우리가 이제 그분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 1절에 우리가 그분을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을 늘 가까이에서 뵈었고, 그분을 손으로 만지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역사적 만남에 대한 선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헬라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작은따옴표가 붙어 있는 것은, 이 단어를 ‘말씀’이라고 번역한 것이 충분한 번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로고스’라고 하면 뭔지 확실히 압니다. 하지만 다른 민족 사람들은 그저 ‘말씀’, ‘원리’ 정도로 깨닫지, 그 깊은 의미를 완전히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어에도 그런 단어들이 있습니다. ‘한’이나 ‘화병’ 같은 단어가 그렇습니다. 외국인이 ‘한’을 들으면 뭐라고 번역하겠습니까? remorse라고 할 수도 없고, revenge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 하겠습니까? 아주 미묘한 한국 사람만의 정서입니다. 외국인들은 100% 이해하지 못합니다. ‘화병’도 마찬가지입니다. fire disease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화병(hwa-byung)’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고스’가 바로 그런 단어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탁 알지만 외국인들은 완전히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quotation mark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라고 썼지만, 요한일서는 그런 중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쓴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모두 영생을 얻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말씀이시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사장의 기도를 기록한 요한복음 17장 말씀을 보십시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17:3, 새)
어떤 목사님이 목사가 되기 전 목사고시를 볼 때 성경문제 출제자가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전도사 시절 목사고시를 볼 때 “영생은 무엇인지 쓰십시오.”라고 되어 있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틀렸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의아해하며 그것을 출제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영생이 당연히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까? 왜 틀렸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 말씀이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 정보를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yada)이고 헬라어는 ‘기노스코’(ginosko)인데, 둘 다 머리로만 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경험해서 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안다는 말은 서로 깊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경험하여 아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배우자를 아는 것과 내가 내 배우자를 아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앎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경험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그냥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을 맛을 보아 알 정도로 경험하여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그냥 알고만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정말 맛보아 알고 있습니까? 사과는 우리가 다 맛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플로리다(Florida)에 가서 악어꼬리(Alligator’s tail) 튀김 드신 분이 계십니까? 그게 치킨과 비슷한데 조금 더 질기고 기름이 더 많습니다. 한참 씹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악어꼬리 튀김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지적인 정보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실제로 경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의 문제는,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드나들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여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지적인 수준으로 동의하는데, 정말로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명목상의 교인들’(nominal members; name-only Christians)이라고 부릅니다. 이름만 있고 실제는 아닌 겁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님을 경험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 매일 그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내가 인생에서 경험한 것 중에 최고의 기적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은 바로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사는 삶은 매일 최고의 기적을 체험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살면 매일 최고의 기적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을 경험하는 삶, 맛보아 아는 삶 그 자체입니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삶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3절)
‘사귐’을 뜻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복음적인 삶의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핵심 단어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지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입니다. 3절의 표현대로 하면 ‘사귐을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죄인 되었던 우리가 감히 창조자이시고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죄인 되었던 우리가 구세주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을 욕해도, 내가 그런 분들과 사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단지 인간들 중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분과 내가 사귀게 된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특권을 가진 우리가 그 어떤 것과 그것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것을 놓고 계속 자랑합니다. ‘내가 이래 봐도 OOO을 만난 사람이야!’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멀리서 본 것 말고 직접 만나서 인사도 한 사람 중 누가 유명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사도 도마는 자기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넣어보고서라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진짜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전승에 의하면 만져보았다는 겁니다. 그 후 도마가 인도까지 가서 전도했는데, 그의 시신은 다 썩어 없어졌지만 그의 손가락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진 손가락은 남아 있다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인도 저 어디인가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기독교 출판사를 하시는 분이 거기 가서 살짝 만지고 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만지고 오신 분과 악수를 한 목사님이 저와 굉장히 친합니다. 그래서 도마의 손가락을 만지고 오신 분과 악수를 하신 목사님과 여러 차례 악수를 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한 번 더 거쳐서 도마의 손가락을 만지신 것이니까, 그렇게 우리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냥 만난 게 아니라 그분과 지금도 매일 사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도, 만나기만 하고는 그 다음에 교제가 없습니다. 만나기만 하고 사귐이 없는 겁니다. 그냥 만나고 끝난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얼마나 놀랍고 어마어마한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고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복음은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며 매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돌아가신 한국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이 강력히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려면 교회관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그분은 ‘교회’라는 단어를 한자로 쓸 때 ‘교’ 자를 ‘가르칠 교(敎)’로 쓰지 말고 ‘사귄다’는 뜻의 ‘교(交)’ 자로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정의는, 축도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성령의 교통하게 하시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원을 통해 이루고자 애쓰신 것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건강한 자와 몸이 불편한 자가 다 예수 안에서 진정한 가족이 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교회를 하는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 주님 안에서 진정한 가족이 되자는 것입니다. 단지 주일예배만 드리고 나서 남남처럼 흩어져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교회로 살아가는 초대 교회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시도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통해 복음적인 삶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또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해관계로 나뉘고, 계층이나 신념의 끊임없는 대립으로 찢어져 있는 이 세상이 기다리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3) 충만한 기쁨이 약속된 삶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4절)
이 구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자신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바로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충만한 기쁨으로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 비유의 장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맺어야 할 열매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0-11, 새)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런 충만한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12, 새)
이 교훈을 사도 요한은 서신서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함으로 기뻐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일 3:14, 새)
우리가 생명을 얻은 자, 영생을 가진 자라는 증거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사랑을 실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표시가 바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의 기쁨은 모든 상황이 좋아서 느끼는 피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비록 삶의 현실은 무겁고 힘들고 어렵지만 사랑의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픈 지체들을 사랑하며 섬길 때 맛보는 그런 충만한 기쁨을 말합니다.
신약교회의 두 가지 성례전이 있는데,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나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로 받는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거기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 모두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과 섬김으로 죄인들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이유이며 기뻐해야 할 진정한 이유라는 말입니다.
지금 왜 내가 살아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좁은 길로 따라가며 내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라고 여기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엄청난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그렇게 우리가 희생함으로 우리 이웃이 살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더 크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