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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0일 수요예배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18

베드로가 전한 복음: 고난을 통한 구원의 완성

(베드로전서 11~9)

 

1.   베드로전후서에 대하여

 

오늘 설교 제목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지만 실제로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베드로가 다시 전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전에 이미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그런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물론 마가 요한이지만, 마가는 바로 베드로의 수제자내지는 통역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가 요한이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난 때 같이 동행했는데, 구브로에서 버가로 넘어가자마자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돌아갔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의 귀한 동역자도 되고, 특히 바울이 감옥에 갇힌 후에는 베드로와 함께 다니며 사역했다고 알려집니다. 특히 베드로가 학문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헬라어 통역도 해주면서 거의 수제자처럼 사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사실상 베드로가 전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벧전 5:13)

 

여기서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아들이 아닌데도 제가 누구를 가리켜 이 친구는 제 아들입니다.’라고 한다면, 영적으로 큰 도움을 준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겠습니까? 디모데가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이었고 영적인 계보를 잇는 제자였다면, 마가는 베드로에게 믿음의 아들이었고 영적인 계보를 잇는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증언한 모든 것은 실제로 그가 베드로에게서 들은 것을 기초로 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베드로복음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마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미 증거했던 베드로가 친히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기록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는 AD 64년으로, 그 해는 1세기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해입니다. AD 64719일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났고, 그 화재는 거의 로마 도시 전체에 영향을 줄 만큼 충격적이고 비참한 사건이었습니다. 가까스로 화재를 진압한 후 여기저기 널린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로마 시민들의 마음마저 황폐해지고 있을 때 한 가지 소문이 소리 없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것은 악명 높은 네로 황제가 술에 취해서 자신의 흥을 돋우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질렀고 그것을 보며 흥분하면서 황홀해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잠하게 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효력을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크리스천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고, 여기저기서 피비린내 나는 처형이 이어졌습니다. 다음 말씀이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잘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 4:12-14, )

 

박해에서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 지하 동굴로 숨어들어 갔고, 그 외에도 많은 성도들이 소아시아로 흩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디아스포라인데, 특히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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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도는 지금의 터키 중동부 지역으로 갑바도기아의 일부였고, 바울의 귀한 동역자가 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고향이었습니다.

 

갈라디아는 갑바도기아와 아시아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갈라이다서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의 중심지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가 포함된 터키 중부 지역입니다.

 

갑바도기아는 소아시다 동쪽 로마의 행정구역이었는데, 길리기아에서 본도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신기하게 솟은 바위산들이 많은 곳입니다.

 

아시아는 지금 우리가 아는 아시아가 아니라 소아시아즉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입니다. 이곳은 신약성경과 가장 관련이 많은 지역으로, 수도는 에베소였으며 지금 터키의 서부 해안 지역을 말합니다.

 

비두니아는 본도와 연결된 북부 지역으로,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 성령님이 그 길을 막으셨던 곳입니다(16:7)

 

박해로 인하여 이런 곳들에 널리 흩어져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당시 크리스천 공동체의 핵심 지도자였던 사도 베드로는 남은 자들에게 복음을 붙들고 살아야 할 이유를 강조하며 용기를 주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다시 전한 복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2.   베드로가 다시 전한 복음

 

1)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만 거듭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새로운 존재, 새 피조물 혹은 거듭난 존재로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새 생명을 선물로 받고,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소망, 영원히 살아 있는 소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성도들이 죽음의 위협 때문에 아시아 곳곳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이지만, 그냥 단순히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

 

그러면서 베드로는 성도들의 소망이 위협받는 엄청난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산 소망을 놓치지 말고 꼭 붙잡고서 살라고 격려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3-4)

 

이 말씀이 핍박으로 흩어져서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던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저 갑바도기아에서 동굴을 파고 숨어서 언제 잡혀 죽임을 당할까 떨고 있던 성도들, 두려움 가운데에서 그래도 같이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던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고 왔을 때 그것을 펼쳐 읽는 순간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지금 언제 잡혀서 죽을지 알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인데 하늘나라의 산 소망이 얼마나 생생하게 다가왔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 죽으면 천국 간다.’라고 하지만 죽음이 그렇게 생생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날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매일 죽음 앞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죽어도 천국에 간다.’ 하고 믿으며 버티고 있었는데, 그때 사도 베드로로부터 편지가 왔으니, 그것을 읽는 순간 얼마나 마음에 감동과 감격과 감사와 확신이 넘쳤겠습니까.

 

우리에게는 1세기 당시 성도들이 당했던 핍박 같은 것은 없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상황에서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할 소망은 바로 복음의 소망입니다.


    10년쯤 전에 나온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당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 지하무덤인 카타콤을 그들의 삶의 주거지로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 거기서 끌려 나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야수의 밥으로 사라져가면서도 주님을 찬양한 성도들의 순교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게다가 이 책에는 겨우 13세의 어린 소년 순교자였던 폴리오라는 아이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로마 관리가 말합니다.

     “예수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 너는 예수를 부인하고 살아라.” 

    그 말에 어린 소년 폴리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셨고요, 그분에 의해 나는 당신들이 나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나의 이 생명보다 더 귀중한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너는 죽음이 무섭지 않느냐?”


     그분은 죽음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주십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죽음은 이 비참한 육신의 생활에서 이제 영원히 행복한 삶으로의 변화라고 믿고 있습니다. 야수에게 찢겨 죽든, 불길에 타서 죽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내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붙들어 주시며, 나의 영혼을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당신들이 나를 위협하는 이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당신네들이 가지라는 이 목숨이 나에게는 천만 번의 죽음보다 더 두렵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나이 어린 소년이지만 확실한 구원의 확신을 지닌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의 담대한 고백이 아닙니까? ‘산 소망의 반대는 죽은 소망입니다. 그런데 죽은 소망이란 게 있습니까? 사실 소망이 죽으면 인생을 살 이유가 없어집니다.

 

<신곡 The Divine Comedy>을 쓴 단테(Dante)는 지옥을 묘사하면서, 지옥의 입구에는 일체의 소망을 버리라.” 하는 말이 적혀 있다고 기록합니다. 산 소망의 출발점은 거듭남의 순간입니다. 거듭남은 작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 저 건너편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소망’, 그것이 바로 천국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 산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된 사건입니다그래서 어떤 상황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할 것이 바로 베드로가 다시 전한 이 복음인 것입니다.

 

 

2)  우리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보호하심을 받는다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고백적 교리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박해를 당하면서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상황은 과연 이런 박해 앞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을지 묻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약속합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5)

 

우리의 구원과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혁교회 신학에서는 견인의 교리’(Doctrine of Perseverance)라고 합니다. 침례교에서는 영원한 안전의 교리’(Doctrine of Eternal Security)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경고하는 여러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가리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구절로 보는 것은 성급한 해석이며 해석의 비약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과 같습니다. 가족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절벽에 길이 나 있어서 위험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벼랑길을 걷는 아이에게 계속해서 내 손 놓치면 떨어져 죽어. 조심해.’라고 경고할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이 부모가 자녀의 손을 놓아버리겠다는 것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자녀의 안전은 자녀가 움켜쥔 손이 아니라 자녀를 붙들고 있는 부모의 강한 손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불안한 구원입니까?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상실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내가 조금 잘못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내가 조금 잘하면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 구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의지할 때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내 부모가 나를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에서 자라는 자녀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물론 실제로 자기를 향한 부모의 끔찍한 사랑을 악용해서 부모를 가볍게 여기거나 조종하는 자녀들도 종종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타락한 자녀가 부모의 집으로 디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부모의 변하지 않는 사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9:15)

 

비로 이런 약속이 우리의 영적 안전과 보호의 근거가 됩니다. 본문 5절이 동일한 약속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대한민국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시 우리나라 만세라는 부분이 있는데, 5절을 적용하면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믿음 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에 우리의 믿음을 통한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믿음의 박해를 두려워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완성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신다는 약속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3)  우리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 영화롭게 된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서 믿음으로 고난과 역경을 통과하는 날 우리가 기억할 것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신다는 것 하나입니까?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7)

 

7절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빚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불로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옛날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공인들은, 도자기들이 불에서 나올 때 시원찮은 것들은 그대로 깨버리고 기대한 대로 좋은 도자기가 나올 때 도키모스(dokimos)’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시험을 통과하고 합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6)

 

그래서 인내하며 견디는 지금의 시간은 오히려 기쁨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고난을 억지로 참고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도 힘들고 괴로운 고난과 시험을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8-9, )

 

우리의 믿음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지금 구원을 받는 중이며, 결국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구원의 감격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땅의 삶에서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평생은 그렇게 크고 작은 고난과 시험들을 견디며 우리가 하나님의 보석으로 정제되는 과정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과정을 견디는 시간을 성화의 기간, 이 가르침을 성화의 교리’(Doctrine of 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성화의 시간을 잘 견딘 모든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예비되어 있는 순간이 바로 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 교리를 가르켜 영화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7, )

 

여기 7절 상반절이 성화를 의미하고, 하반절이 영화에 대한 증언입니다. 복음은 거기까지입니다. 로마서의 증언도 바로 그것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0)

 

그러면 그 영화의 날 우리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기에 합당하도록, 오늘의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하며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일전에 영상을 같이 본 적이 있었던 호주 출신 전도자 닉 부이치치(Nick Vujicic)를 기억하십니까? 팔다리가 없고 혼자서는 다닐 수도 없는 그가 자신이 쓴 <플라잉> 책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도 삶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나를 쓰셔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빗장을 여십니다. 누구나 제 몫의 짐을 지고 삽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어떤 문제보다 하나님은 더 크십니다. 그러니 툭툭 털고 일어나십시오. 저와 함께 플라잉을 준비하십시오. 어린 시절 저는 평생 직업을 가질 수 없고 대학을 갈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고 아빠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래가 보이지 않던 내 인생에 하나님은 기적처럼 날개를 달아 주셨습니다. 믿음 때문에 우리는 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바로 이것이 복음이 주는 성화와 영화의 소망입니다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산 소망 안에서 매일 기쁨으로 살아가며, 이 땅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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