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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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6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13 ✦
“디모데에게 전해진 복음: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생수의 강”
(디모데후서 3장 10절 ~ 4장 8절)
1. 디모데에 대하여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기 삶을 깊은 것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인생일 것입니다. 사실 미국에 살면서 목회를 하다 보면 그런 친구가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대학 때 사귄 친구가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교수가 되어 살기 때문에 가끔 연락하면서 참 귀한 친구라고 느낍니다.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여정에서 그런 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만일 이 질문을 사도 바울에게 던졌다면, 바울은 빙그레 웃으면서 ‘물론 내게는 그런 사람이 있지요.’ 하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 한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다른 동역자들도 있었지만 특히 그런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고전 4:17, 새)
얼마나 디모데를 신뢰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디모데가 알려줄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아무도 이러한 온갖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전 3:2-3, 새)
로마서 16장 21절에서는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도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릅니까? 빌립보서 말씀을 보면 그것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빌 2:20-22, 새)
바울은 지금 채광과 환기를 위해 천정에 겨우 구멍 하나 달린 으스스한 로마의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예감하며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AD 66년경이었고, 그 편지가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이 마지막 편지에서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향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딤후 1:14)
오래 전에 이 구절을 가지고 나온 노래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힘써 지키세요”라는 곡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거은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며 제자인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아름다운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2. 디모데에게 전해진 복음
1) 성경의 지혜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소식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처음 디모데를 만나던 AD 51년경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행 16:1-2)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어서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의 영향을 함께 받으며 자랐습니다. 요즘도 한국분이 미국분과 결혼하여 자녀가 나온 경우, 바로 그 자녀와 디모데가 아주 비슷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는 소아시아를 지배했고, 소아시아의 청년들과 지성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낳은 그리스 철학도 하나님을 찾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무력한 세상의 지혜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고전 1:20-21, 새)
여기서 “설교”는 예배 때의 설교라기보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게 들리지만, 그런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무슨 이론을 너무 많이 세워서 전도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하면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지혜는 성경의 지혜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여기 헬라 문화의 토양인 당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자라면서도 경건한 유대인 어머니를 통해 어려서부터 성경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니까 구약성경을 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자랐기 때문에 나중에 복음을 듣고 어머니와 자기 자신이 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3:15)
세상의 어떤 책이 우리에게 죄 문제에 대한 해답과 인간 구원의 소식을 전해줍니까? 이 세상의 어떤 책도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그저 이렇게 하면 조금 행복해진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을 말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성경대로”에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에 이미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해 다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냥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미리 예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으실 것,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어 우리를 새로운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증언한 책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은 성경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바로 그 소식인 것입니다. 복음은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 어머니를 통해 처음 접한 복음을 지키는 자로,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 것을 기대하며 이 복음을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1893년 M. B. 윌리엄스(Milan Bertrand Williams) 목사는 6천 명의 복음 사역자들이 보스턴에 모인 집회에서 설교를 할 때 설교를 앞두고 집회의 찬양 인도자인 찰스 틸먼(Charles Davis Tillman) 목사에게 갔습니다. 그는 다음 날 저녁 성경의 소중함에 대해 설교할 텐데 거기에 맞는 적절한 찬송을 골라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곡이 어울릴지 한참 뒤적이던 틸먼이 윌리엄스에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차라리 목사님이 성경에 대한 노래를 작사하시면 제가 거기에 맞추어 작곡을 해보겠습니다.”
그때 마침 윌리엄스 목사가 가지고 있던 성경은 자신의 어머니가 늘 보시다가 자신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그때 성경을 손에 들자마자 자신의 어린 시절 그 해어진 성경을 들고 어머니가 자기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예수님을 소개해주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가 생각나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15분 만에 아름다운 찬송시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가 눈물로 작사한 가사를 보던 찬양사역자 틸먼 목사도 눈물로 가사를 읽으며 즉석에서 찬송가를 작곡했습니다. 그렇게 눈물로 태어난 찬양 곡은 다음 날 밤 거기에 모인 사역자들에게 성경의 영광을 눈물로 고백하게 하는 아름다운 찬송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찬송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3절)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한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후렴)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새찬송가 199장입니다. 영어로 가사를 읽어보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바로 이런 성경의 복음이 디모데에게 전달되었고, 여러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소식
바울에게 복음은 성경의 지혜로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를 구원한 이 성경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고 선포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3:16-17)
요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복음이 그저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보험 정도의 의미 밖에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성경으로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중요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알지만, 성경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바로 오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경의 유익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성경 말씀과 함께 날마다 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읽기도 하며 큐티도 하지만, 성경대로 사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3:13-14)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더 악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속이기도 하는데 속임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속였다고 생각하는데 자기도 당하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복음에 적대적인 환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1세기의 소아시아와 이스라엘이나 21세기의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해지고 속이는 것은 더욱 늘어갈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사는 우리는 복음을 받을 뿐 아니라 말씀 안에 늘 거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그러한 말씀을 자신의 편지에 적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약 1:22-25, 새)
야고보서는 AD 5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공의회 직전에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상당히 타당한 것은, 여기서 ‘율법’이라고 하는 야고보가 원래 유대주의자였습니다. 유대주의적인 사고가 가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성경은 당연히 구약성경이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자꾸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신약성경의 책들이 나오기 전이고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가 가장 먼저 쓰였다고 보기 때문에, 더더욱 그때 갖고 있던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율법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억지로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얽매임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 즉 그렇게 해야 삶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할 때 기쁨과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하면서도 왜 이렇게 안 풀리고 답답하고 괴롭습니까?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행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야고보가 이렇게 썼습니다.
한 청년이 유명한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붙들고 사는데도 왜 저의 인생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때 무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아무리 성경 말씀을 붙들고 다닌들 자네 인생이 변하겠나? 이 성경 말씀이 자네를 붙들고 있어야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변화됩니다. 무디의 동역자였던 R. 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번역 성경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책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 이렇게 말한 것도 기억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읽는다.” 우리의 삶으로 성경을 읽은 것이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읽었으면 말씀대로 살 때, 안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들이 다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유익과 축복은 거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냥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고, 죽으면 천국 간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그런 유익과 축복을 누리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보장할 뿐 아니라, 지금 이곳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사람됨을 온전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해주는 복음입니다.
3)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되어야 할 소식
복음이 나를 구원하고 나를 변화시킨 소식이라면, 이 소식은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만 믿을 것이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흘러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복의 근원 된 삶입니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비장하고 엄숙한 권면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1)
그는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말합니다. ‘엄히 명한다’는 말은 원래 법정에서 서약을 위해 쓰이던 말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의 마지막 부탁을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서약함으로 꼭 실행을 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2)
그렇게 엄히 명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표현은 ‘항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모든 경우에, 모든 상황에’라는 뜻입니다. 지금 상황이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 쉽든지 어렵든지 상관없이 복음은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편하고 시간이 있을 때는 하고 내가 힘들고 시간이 없고 바쁘고 다른 일이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어떻든지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가능합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당연히 전할 수 있고, 시간이 없을 때도 뭔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면 말로도 전하고 삶으로도 전할 수 있습니다. 작은 섬김 하나, 사랑 베푸는 것 하나도 전도에 포함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임을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4:3-5)
사람들이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 좋아하는 말, 자기에게 흡족한 말만 해주기를 원합니다. 부담이 되는 말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설교에서도 자기에게 좋은 말이나 귀에 즐거운 설교는 좋아하고, 부담이 되는 말이나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싫어합니다. 1세기나 21세기나 똑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무슨 낭만적이고 편안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3:10-12)
4:5에서도 ‘전도자의 일을 하며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일예배 때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이미 보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 때문에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 사람들이 보기에 죽었다고 생각되어 버려두고 갈 정도로 실제로 죽었거나 거의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3:11)라고 말합니다. 그때 루스드라에 있었던 디모데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생명의 복음이 나에게서 멈추어버린다면 그것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1-2)
이 말씀을 잘 보면 복음의 4세대가 등장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1세대라고 하면, 디모데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믿게 된 2세대이고, “충성된 사람들”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듣게 되는 사람들이니까 3세대이며,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4세대가 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몇 세대입니까?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 외에, 나를 통해서 믿음의 후세대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야 사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가? 목장도 한 번 분가하고, 거기서 또 분가하고, 거기서 또 분가하는 식으로 2세대, 3세대, 4세대로 나아갈 때 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 정체가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강은 계속 흘러서 이 땅을 적시고,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생수의 강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기 위해서는, 복음의 역사의 강물 안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흘린 피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나에게 구원의 복이 흘러오는 통로가 되어준 것입니다.
이제 이 피 묻은 생수의 강이 내게 이르러서 내가 예수를 믿고 새 생명과 새 소망을 얻어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면, 여기서 이 복음의 물결이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전도도 하고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들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 하고, 더 나아가 해외로 가서 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나가야 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다 보면 조금 불편하고 고통당하고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희생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의 아주 작은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요즘 사도행전을 주일에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의 헌신에 큰 도전을 받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고 구원을 받아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가는 말]
주후 66년경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쓴 바울은, 그 다음 해인 주후 67년 로마 서문 밖 1마일 지점의 참수장에서 당시 황제였던 네로의 명령으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참수형으로 잘려진 바울의 머리가 떨어지면서 땅에 세 번을 튀었는데 그 후 그 세 지점에서 샘물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 순교 기념교회’로 불리는 그 장소는 ‘Tre Fontane’(세 개의 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바울이 죽음으로 전한 복음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샘터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죽음을 예견하며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마지막 죽기 직전에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 유언 같이 남기는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4:6-8)
‘전제’는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제물 위에 부어 바치는 의식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과 섬김으로 이러한 생명의 샘터를 만드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섬김으로 이러한 생명의 샘터를 만드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우리도 이웃들에게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과 같이 바로 이런 고백을 하며 우리 인생을 마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