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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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조작 착오로 오늘 음성설교를 올리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2018년 7월 4일 수요예배
✦ 치유기도 2 ✦
“언어의 치유”
(룻기 1장 1~5절)
1. 언어의 선택은 영적 수준의 척도다
지난주부터 “치유기도”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는지가 영적으로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대변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의 조급함에서 분노로 이어지는 말의 배후에는 늘 악한 영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독이 묻은 화살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약 3:8-10)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 야고보는 말의 능력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혀는 가장 작은 지체이지만 가장 통제하기 어려우며, 실제로 측정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가끔 무서운 산불이 일어나 막대한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입힐 때 보면, 누군가 무심코 던진 작은 담배꽁초 때문에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지 않으면, 내뱉은 말은 아주 악하고 부패하여 우리 몸 전체를 오염시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귀가 원하는 것을 우리 삶에 이루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약 3:3-4)
기수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제어하고, 선장이 키를 조정해서 배의 진행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우리도 말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삶 전체를 아름답고 선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진짜 웃는 것이 아니라 약간 미소를 짓는 표정만 지어도 우리의 뇌는 우리가 웃는 줄 알고 속에서 엔도르핀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좋은 행동과 말은 우리의 몸을 새롭게 하고, 의지적인 선포는 우리의 내면세계까지 변화시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자주 쓰는 말과 표현으로 그 사람의 영적 단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기분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인데,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미성숙하고 육신적인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나아가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에 따라 행동함으로 마음이 어두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한 면으로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경우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들을 가리켜 ‘어린아이’라고 하고 ‘육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어느 누구보다 은사가 많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전도도 잘했고, 재림에 대해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렸고, 엄청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 어린아이이고 육신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시기와 다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은사가 많고 열정이 엄청났으며 전도도 잘하고 신앙이 대단해 보였어도,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을 보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심지어 그리스도파로 갈려져서 싸웠습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고 비난하며 나아가는 걸 보니 그들은 영적인 게 아니라 육신적이고, 성숙한 게 아니라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이 바로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한다는 점입니다. 불평이 많고 뒤 담화를 즐기며 쓸데없이 참견하기를 좋아합니다. 분별없이 충동적으로 마구 말을 하게 되므로 실수도 많아서, 가정과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통제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사탄이 그 삶에 활동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시 141:3-4, 새)
입술에도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마음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 합니다.
2. 감사는 축복의 연습이고, 불평은 불행의 연습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감사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데, 감사하는 것은 축복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은 불행을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행해지고 싶은 사람은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면 됩니다. 하지만 축복의 삶을 살고 싶다면 평소에 감사하는 말을 하면 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우리는 매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며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현실과 상황 때문에 나의 생각과 감정에 두려움과 근심이 몰려올 때, 믿음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모든 것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럴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감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목장에서 감사 제목을 나누는 것은 그냥 심심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에는 엄청난 파워가 있습니다. 감사를 선포하는 것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대적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감사를 지속적으로 선포할 때,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어두움이 즉시 도망하게 됩니다. 만약 어려움과 시련 가운데 있다면, 그럴수록 입으로 불평이나 원망의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더 크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더 자주 감사하도록 의식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특히 진정으로 행복하고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연습해야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격려하다’라는 단어에는 ‘전진하도록 권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해준 한마디 격려가 그 사람의 인생이 바꿀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는 물론이고, 이미 장성한 자녀라도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I’m proud of you.’라고 말해줄 때 자녀의 얼굴이 환해지고 태도가 더 당당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정말입니다. 아무리 찬양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화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공격하는 거친 말을 하게 되면,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분노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의 말은 성령님이 싫어하시는 말이기 때문에 성령님을 근심하시게 만들고, 그와 동시에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마귀에게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불평은 나의 인생을 가두어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과 사명을 향하여 전진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3. 감사는 남겨진 것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엄청난 고난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나 욥을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욥에 견줄 만큼 큰 고통을 겪은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나오미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의 기드온 때 벌어진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1-2절)
원래 유다 베들레헴 출신인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은,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었을 때 비교적 풍요로웠던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풍요는 고사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3-5절)
그러한 나오미가 나중에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자신의 비참한 형편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나오미’(기쁨)가 아니라 ‘마라’(괴로움)라고 불러 달라고 합니다(20-21).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원래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었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은혜가 풍성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의 가족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먹을 것과 풍요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곳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먼 곳이었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다툼을 피하기 위해 새 삶의 터전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 롯은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쪽을 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번영과 풍요로움이 있는 도시였지만, 죄악으로 가득한 곳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가지 말아야 할 곳인 모압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함으로 많은 고통과 비극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미심장한 단어가 있습니다. ‘남았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3). 비록 나오미는 남편을 잃었지만 두 아들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그 여인(나오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5). 이제 두 아들마저 잃어버렸을 때, 여기서는 혼자 남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두 며느리와 함께 남았으며, 결국은 든든하고 착한 며느리 룻이 함께 남았습니다.
나오미 가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룻은, 나중에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서 보아스와 결혼함으로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말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감사는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고, 그러한 감사에서 소망이 일어납니다. 반면, 나에게서 사라진 것과 잃어버린 것만 슬퍼하고 후회하면 불행한 삶이 되고 맙니다.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뭔지 깨닫지 못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기막힌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지금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아직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거기서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보십시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나 없어진 것들만 보지 말고, 아직 남아 있고 아직 갖고 있는 것을 보며 매일 감사하다고 주님께 말씀드려보십시오. 사실 감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4.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라
에스겔에 보면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그때 주님은 에스겔에게 그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선포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9-10)
골짜기에 버려져 있던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함으로 절망과 죄와 상처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아주 많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그들을 살려내기 원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정도로 능력에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통해 대언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는 말에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그 능력을 직접 체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포하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때도 있지만, 최대한 말로 선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라고 선포하자(9), 하나님의 영인 ‘생기’가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엄청난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10).
그런데 기도해야 하는 것도 알고 실제로 기도도 하지만,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기도한 내용이 과연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라, 놀랍게도 엄청난 성령의 역사를 수없이 체험하던 초대 교회 성도들도 자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을 의심했던 것을 봅니다.
바로 오늘 큐티 본문이었던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아그립바 1세)이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를 죽이는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좋아하니까 베드로도 잡아서 옥에 가둡니다. 이 엄청난 죽음의 위기 앞에서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서 시내로 인도해주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던 곳으로 갑니다. 그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여종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너무 기뻐서, 문을 열지도 않고 도로 달려 들어가서, 대문 앞에 베드로가 서 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여종에게 ‘네가 미쳤구나’ 하고 말하자, 여종은 참말이라고 우겼다. 그러자 그들은 ‘베드로의 천사일거야’ 하고 말하였다. 그 동안에 베드로가 줄곧 문을 두드리니, 사람들이 문을 열어서 베드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행 12:14-16, 새)
당시에 성도들은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베드로가 옥을 나와 자기들이 기도하고 있는 곳에 옵니다. 그런데 여종이 베드로가 왔다고 소식을 전하니까 “네가 미쳤구나”라고 합니다. 정말 왔다고 다시 우기니까 “베드로의 천사일거야.”라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를 정말로 보게 되니까 다들 깜짝 놀랍니다. 기도하면서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도하면서도 의심을 합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시달리시는 부모님이 과연 나으실 수 있을까?’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절망적인 저 가정이 회복될 수 있을까?’ ‘파산하여 앞길이 막막한 우리 가족이 다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집을 나가 방황하며 망가진 우리 아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오랫동안 믿음을 거부하며 믿지 않은 배우자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을 날이 올까?’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예스(yes)’입니다. 지금 내게 닥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대언하며 선포할 때,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른 뼈가 붙고 힘줄과 새 살이 돋아나 놀라운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는 역동적인 역사가 우리 삶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20세기 초중반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1884-1973)가 있습니다. 그는 1938년 타임 지(Time magazine)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는 88세를 얼마 앞둔 1971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고령인데다 뇌혈관이 터져서 의사도 포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스탠리 존스 선교사는 병상에서 분명하지 못한 발음으로 말한 것을 녹음하여 딸에게 주었고, 딸은 그것을 듣고 글을 써서 다시 아버지에게 읽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읽어 주는 원고를 읽고 수정하였고 딸은 그것을 다시 기록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유언장이 된 책이 탄생했는데, 그 책의 제목은 <하나님의 예스>(원제: The Divine Yes)입니다. 쓰러진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인도로 돌아가서 쓴 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972년 6월 인도의 삿 할에서 -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네 일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시력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여전히 기뻐하면서 내게 주어진 길을 가겠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미국 최고의 의사들은 “당신은 이제 걸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인도 최고의 안과 전문의들은 내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자기들이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과학은 나를 위해 휠체어와 기도를 권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점에서 나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모든 정황들이 이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가 ‘하나님의 예스’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결과만을 기다린다. 만일 내가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는 것과 시력을 잃은 채로 여전히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자유롭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1972년 6월 인도의 삿 할에서 – 좀 더 친밀해진 동행>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참이고 진리라는 것을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예스’이신 예수님! 인생이 우리에게 인간의 ‘노’(No)를 말할 때에 ‘하나님의 예스’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감사드립니다. 제 평생을 주님과 동행했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오늘까지 지난 몇 개월은 특별히 더 그랬습니다. 지난 몇 개월은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원칙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이 원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격과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스이신 예수님이 인격이시고, 저 또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환경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의 '예스'의 쪽에 서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 사역을 능히 감당할 만큼의 시력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운동 능력과 관련해 주님께서 충분한 힘을 주시어 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게끔 해주셨습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뇌졸중 발작 이후 까마귀 우는 것처럼 쉰 소리를 내던 제게 본래의 목소리를 회복시켜 주고 계십니다. 넷째로 주님께서는 기도 시간에 말씀해 주셨던 그대로 제 왼손이 보조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끔 회복시켜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대로 저는 신체적인 한계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한계도 제가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제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한계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주님과 제가 서로 협력하여 신체적 한계의 문제를 풀어 가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은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많은 세월을 주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결코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늘 내적으로 흥분되어 있었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뇌졸중 발작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적응 기간 동안, 단 한 순간도 우울해하거나 낙심한 적이 없습니다. 뇌졸중 발작이 가져다준 신체적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 한계들이 바로, 제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가 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자신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스’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며 나아갈 때,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