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8년 6월 13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5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
(창세기 5장 21~24절)
1.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사람은 대개 자신의 앞길이 어떤 길이 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누구와 길을 갈 것인가’입니다. 아무리 힘든 길이라고 해도 좋은 사람과 동행한다면 기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시는 길이 어떤 길인가에 관심을 갖기 전에, 그 길이 어떤 길이든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에 복된 길이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몇 번 다룬 적이 있지만, 오늘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사실 에녹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없고, 다만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짧은 본문 중에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22, 24). 그러므로 에녹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어성경으로 보면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walked with God”, 즉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1-22절)
에녹은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뒤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를 낳던 때부터 에녹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에녹처럼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는 것은 귀찮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고 힘들지만, 기도를 하나님과의 데이트라고 생각하면 기도가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대되고 흥분되는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조급하게 후다닥 해치우고 다른 것을 하러 거쳐 가는 시간이 아니라, 천천히 매 순간 음미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를 즐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너무 비장하게만 합니다. 물론 비장하게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간절히 피땀 흘려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드리는 기도는 비장한 기도보다는 첫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그 시간을 기대하며 주님과의 대화를 즐기면서 하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참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데이트를 해야 하는 동시에, 하루 종일 틈만 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식사하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산책하면서, 운전하면서, 일하면서 속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런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놀랍게도 우리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늘 대화의 창을 열어놓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5-6)
에녹은 하늘로 올림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기쁘시게 했는데, 그렇다면 에녹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까?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믿음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에서 배우는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께 기대는 것’,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하나님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바로 뛰어나옵니다. 안 하면 혼날까봐 오는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오는 겁니다.
반면,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표시는 그 반대입니다.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지 몰라도 ‘육적인 크리스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다른 일이 생기면 뛰어나갑니다. 예배하고 교제하고 훈련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이 항상 다른 일에 밀립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 11:6).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십시오. 둘 다 일하고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만납니다. 일을 하는 중에도 점심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꼭 만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항상 하나님께 드릴 시간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마음이 열려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내 말을 집중해서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만나자고 해도 시큰둥하고 만나면서도 내 말을 듣는 것보다 딴청을 피우거나 자꾸 다른 데 전화하고 스마트폰 검색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전자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토록 에녹을 기뻐하셨습니까? 그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끼리도 얼굴 표정만 봐도 마음이 여기에 있는지 없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그런 것을 가리켜 요즘 ‘영혼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고 의무감 때문에 몸만 와 있는 것을 우리 인간도 느끼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에녹은 항상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너무 좋아하고 늘 신이 나서 달려오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듣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 에녹을 보실 때 하나님이 어떻게 기뻐하지 않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에녹을 보실 때마다 하나님은 ‘내가 그를 책임져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전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중학교 때 이민을 온 학생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Youth Group 회장까지 된 학생이었는데, 제가 뭐라고 조언을 해줄 때마다 귀를 기울여 들었고, 더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제가 마음을 다해 조언해주고 기도해주었겠습니까, 아니면 귀찮아했겠습니까? 당연히 더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삶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내용의 강의라도, 어떤 기수는 정말 졸지도 않고 귀 기울여 열심히 듣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별로 재미없는 말인데도 크게 웃으며 반응도 너무 좋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하나라도 더 제가 아는 말씀을 나누게 되고 더 열심히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는데 졸고 있거나, 딴 짓을 하거나, 전화하느라 왔다 갔다 하거나, 말씀을 전해도 반응이 시큰둥하고 노트 필기도 별로 안 하는 사람들이 다른 때보다 많은 기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조금 더 말씀을 나누려고 하다가도 적당히 최소한만 하고 그냥 빨리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에녹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더 돌봐주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돌봐주고 싶어 하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야기해도 소용없으니 그냥 넘어가시는 사람입니까? 정말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기대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사람을 책임지시고 그 인생을 이끌어주십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
1) 죽음을 이기는 능력
에녹의 믿음이 하나님을 너무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도 바로 천국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천국에 올라간 인물로 엘리야가 있고 또 에녹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죽음입니다. 병들었을 때 왜 마음이 힘듭니까? ‘내가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직장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도, 직장에서 힘들어도 버티려고 애쓰는 것도, 어떻게든 사업이 무너지지 않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다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죽으려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항상 죽음의 두려움을 일으켜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
에녹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죽음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 영원한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잠시 잠들었다 깨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결코 이 땅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잠시 흔들리거나 넘어질 수는 있지만 금방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며 평안을 누립니다. 하루하루 천국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기 때문이며,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살면, 우리 인생에 그런 생명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2) 거룩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지내게 되면 그 거룩함이 우리에게도 전달됩니다.
오래 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다른 문화권을 방문하는 과목이 있어서, 1지망으로 헝가리를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2지망인 중미로 갔습니다.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과테말라를 갔는데, 특히 과테말라시티의 한가운데 있던 커다란 쓰레기 소각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면적이 엄청나게 컸고 거기에 사람들이 움막을 세워 살면서 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머물다가 나왔는데, 우리 신학생 일행을 태우고 다니던 버스 운전사가 버스로 돌아온 우리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에게 쓰레기 냄새가 난다.”
어디에 머물렀는가에 따라 냄새가 달라집니다. 향수 가게에 오래 있다 나오면 향수를 사지 않아도 향수 냄새가 납니다. 커피 집에 오래 있다 나오면 커피 향이 납니다. 그리고 쓰레기장에 머물다 나오면 쓰레기 냄새가 납니다. 이처럼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가가 내 영혼의 향기를 결정합니다. 모세가 40일 밤낮을 하나님과 함께 하다 나오니까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대로 묻어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때 거룩해지고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임재로 깨끗해지니까 죄가 발붙일 틈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잔소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영혼이 정결해지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3) 하늘의 지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과 거룩한 친밀함을 나누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기도하면 기도하기 전에는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계획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친한 사람에게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당신과 친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답답해하지 말고 하나님과 친해지면 됩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항상 나누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거룩한 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4) 하나님의 영으로 말함
하나님과 동행하면 영혼이 깨끗해지고 하늘의 지혜로 가득 차면서 성령으로 말하게 됩니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말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유 1:14, 새)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이 깊어지면 언어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 더러운 말, 공격적인 말, 불평하는 말, 원망하는 말로 가득했던 입술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계속 머무르다 보니까 숯불로 지져주신 이사야의 입술처럼(사 6장)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 정결해진 입술을 통해 찬양의 말, 축복의 말, 소망의 말, 감사의 말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언어를 보면 측정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을 살리고 축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따뜻함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따뜻합니다. 그래서 언어도 따뜻한 언어, 격려하고 축복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5) 악을 분별하며 거절함
에녹은 악한 세상과 동행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영적 안목으로 악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미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서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다.” (유 1:15, 새)
여기도 보십시오. 불경건한 죄인들의 특징이 뭡니까? ‘주님을 거슬러서 말한 거친 말’입니다. 말로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말들을 많이 하는 것이 불경건한 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과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계획을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에게는 미리 알려주십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신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도 모든 불경건한 자들,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이 당할 영원한 죽음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영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 에녹은 세상의 화려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들과 교제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왜? 심판당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받습니다. 인간은 간사해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같이 교제하며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자꾸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에게 붙으려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세상의 화려함에 취해서 정신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무덤은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놓아도 시체가 썩어 있는 무덤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작정해놓고 계시는 죽음의 땅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이기고 싶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빌붙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과 거룩한 동행을 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6) 악한 권세가 접근하지 못함
하나님과 동행하면 악한 어둠의 세력이 감히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멀리하기 전에 세상이 먼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못 들어오듯, 악한 자들과의 교제가 자연스럽게 끊어집니다.
우리 삶에 목적 없는 빈 공간이 생기면 사탄은 반드시 그곳을 치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시간의 빈 공간을 말씀과 기도로 충만하게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24시간 우리를 채우고 계신 것을 볼 때 마귀는 감히 접근하지 못합니다. 우리 각자는 마귀에게 만만한 상대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7)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과 동행하면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올 때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항상 하나님께 엎드려 도움을 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삶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관계의 문제, 재정의 문제, 진로의 문제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해결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3, 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먼저”입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다 책임져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야 되기 때문에 평생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8) 믿음의 가문
하나님과 동행하면 믿음의 자녀들이 배출됩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아 길렀습니다(22).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온 세상이 죄악으로 타락했을 때 홀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노아의 할아버지입니다. 즉, 에녹은 노아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 노아의 영성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증조부 에녹의 기도와 영성이 그에게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에녹은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고,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25). 그때 에녹이 252세였고, 365세 때 그를 하나님이 데려가셨으니까 라멕은 113년 동안 에녹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 에녹이 하늘로 올라간 지 69년 후인 182세 때 노아를 낳았습니다(28).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창 5:29, 새)
노아에 대해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이 바로 라멕인데, 이 내용을 보면 라멕은 영적인 안목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노아에게 전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자녀 교육에 성공하여 믿음의 명문가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 교육에 대해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면 됩니다. 걱정할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직접 책임져주십니다. 부모가 아무리 돌봐주려고 노력을 해도 24시간 쫓아다니면서 보호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늘 붙어 있어도 지켜줄 능력이 안 됩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언제나 동행하며 보호해주시니 안전한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을 원한다면 자녀를 위해 다른 것을 해줄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보다 훌륭한 믿음의 자손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태교할 때부터 기도하면서 낳은 아이와 늘 신나게 부부싸움 하면서 낳은 아이가 같겠습니까? 자라면서 부모가 날마다 기도로 키운 아이와 세상적인 재미에만 심취한 부모가 키운 아이가 같겠습니까? 성격부터 다릅니다. 태도가 다르고 인생의 비전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거룩한 보호막과 기름 부으심이 항상 그 아이 위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동행하는 우리를 기뻐하시며, 그러한 우리의 자녀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도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쓰임 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비전을 품고, 날마다 주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