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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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부모의 삶> 3기를 마쳤는데, 다시 4기(세미나 2기)를 하려고 하면서 준비를 하다가, 이전에 재미있게 읽은 글들 중 하나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이무석 교수의 글인데, 크리스천이며 교회의 장로이시기도 한 이분의 글 중에서 과잉보호에 대한 것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과잉보호(over protection)란,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을 부모가 대신 해줌으로써 아이의 성장을 막는 것을 말합니다. 과잉보호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배형’ 과잉보호입니다. 이 경우에 아이는 부모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됩니다. 아이의 모든 행동은 통제되며, 부모는 엄격한 시간표를 짜놓고 그 틀 속에 아이를 가두어놓습니다. 이때 아이의 자발적 욕망은 철저히 무시됩니다.
‘내 아이는 아직 미숙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라고 하는 불안이 부모를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를 한 인간으로 신뢰해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뢰가 없으면 아이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배형 과잉보호 속에 자란 아이는 겁이 많은 사람이 되고 자기 소신도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남의 밑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통제와 지시를 받는 입장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보호의 두 번째 유형은 ‘익애형(溺愛型)’입니다. 지배형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인 반면, 익애형은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겪는 아픔이 있고 그 고통을 해결해나가는 경험 속에서 인격이 성장하는 법인데, 익애형 과잉보호는 아이가 할 일을 부모가 대신해줌으로써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아이를 무력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버릇없는 망나니가 되어, 지나치게 공격적인 행동장애가 되고, 자기조절을 못합니다. 철저히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순간적 만족을 위해서 도둑질 등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독립심도 없고 대인관계도 잘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데, 돈을 받은 아들은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거기서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처럼 사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뉘우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때 아버지는 나가서 아들을 기다리다가 달려가 입을 맞추고 그를 영접하여 아들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줍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지배형처럼 한 번도 아들을 억지로 통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익애형처럼 아들이 고통을 당하는 자리로 찾아가 집으로 데려오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도록 허용합니다. 사실 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 부모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통당하는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의 고통을 견디어냅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돌아올 때까지 어떤 간섭이나 과잉보호도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선택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인격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과잉보호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르는 일이며 엄청난 인내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통제하는 지배형 과잉보호를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여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익애형 과잉보호도 안 하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해야 할 시험은 당하게 허용하시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통을 이기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