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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4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3 ✦
“불의한 체포와 불법적인 재판”
(마가복음 14장 43~65절)
[들어가는 말]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배신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은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역사에서도 시이저가 죽으면서 “부루터스, 너마저...”라고 했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져오듯, 믿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감정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잘할 줄 알았는데 나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것도 일종의 배신입니다. 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안 해주고 오히려 반대로 나갈 때, 배신당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그런 것이야 이해가 되지만, 정말 믿었던 사람, 나와 가깝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거나, 나를 떠나거나, 뒤통수를 치며 배신했을 때, 그것은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한 분들을 보면 정말 힘들어합니다.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자다가도 벌떡 깨고, 꿈에도 악몽을 꿉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감정이 배신입니다.
그런데 별로 기대가 없던 사람이 배신하면 별 충격이 없습니다. 내가 신뢰하고 믿고 함께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배신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아마 해결이 잘 안 되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주님 안에서 용서를 했을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이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던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고, 그 중 한 명은 아예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게,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만 배신을 당하신 게 아니라 전부에게 배신당하셨습니다. 전부 다 도망을 갔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과 다른 제자들의 도망을 통한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예수님이 다른 점은,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나를 배신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어떻겠습니까? 결코 그 사람에게 말이 곱게 안 나갈 겁니다. 보기도 껄끄럽고,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다 아시고도 발까지 씻겨주시며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1. 예수님의 체포 (43-49절)
예수님은 드디어 체포되십니다. 그런데 이런 체포의 현장에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열두 명 중 한 명인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3-44절)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그렇게 가깝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것도 가장 앞장서서 행동을 합니다. 그것도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의 인사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잡도록 합니다.
여기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와 같이 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미리 군호를 짜서 자기가 입 맞추는 자가 예수라고 합니다. 밤이라 얼굴이 잘 안 보일 수 있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와서 팔겠다고 했을 때 대제사장들이 좋아했습니다. 자기들은 헷갈릴 수도 있고, 또 백성들이 분개하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팔겠다고 했을 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존경과 사랑의 입맞춤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3년이나 주님을 따라 다니며 모든 기적과 가르침을 다 경험했던 유다가 아닙니까? 심지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보내실 때, 나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전한 유다가 아닙니까? 옆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던 그 엄청난 능력의 말씀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들었고, 또 예수님이 베푸시던 그 기적들을 가장 가까이서 봤던 사람이 유다입니다. 또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재정담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핵심적인 인물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잡는 데 앞장을 서는가?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민족을 위한 메시야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자기들의 기대와 달리 잡혀서 죽는다는 말을 하니까, 이제는 예수를 제거하는 것이 민족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그가 민족을 위해서 앞장섰다기보다는 자기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안 해주니까 실망해서 예수를 제거하는 데 앞장을 선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러운 것은, 금방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보다,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 몇 십 년씩 교회를 다닌 사람들, 성경을 많이 알고 신앙의 여러 체험도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유다를 보며 깨닫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고 신앙의 체험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를 만든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서 시시하게 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굉장히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변질되어 잘못된 겁니다. 결국 문제는 그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과 기적을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열심, 내 생각으로 하는 게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예배드리고, 왜 그래도 집에서도 성경 읽고 묵상하고 큐티하고 기도하자고 합니까? 왜 삶 공부도 하고 그렇습니까? 내 열심, 내 생각으로 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주님과 기도로 교제하지 않다보면, 그런데 교회는 다니고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뜻과는 반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고 착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지금 예배를 드립니까? 왜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는 계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더 아름답게 해나가기 위해서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참여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큐티하고 기도하고 다 하는데, 이상하게 관계가 점점 안 좋아진다면 어떻습니까?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고, 또 요한일서 등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 그 자체가 일단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래서 함께 예배드리는 형제자매들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나가자마자 싸우고 서로 멱살 잡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예배를 드린 것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방금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고 예배를 드린 사람이 나가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고, 기적도 행했고, 많은 기적들을 보았고, 말씀도 들었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욕심과 탐심을 추구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배신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성전에서 밝히 드러내고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체포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체포했다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까봐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되어 잡으러 왔습니다.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47-50절)
지금 주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왔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어떻게 하면 잡아 죽일까를 연구해 왔습니다. 특히 안식일 문제가 컸습니다. 예수는 꼭 안식일에 병자를 고칩니다. 그리고 자기들보다 더 권세가 있고 사람들이 따르니까 시기와 질투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거하기 위해 연구하던 그들은 가룟 유다의 가담으로 힘을 얻어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보냅니다. 백성들이 못 보는 캄캄한 밤에 아무도 없을 때 가서 잡아오게 하는 겁니다. 그것도 중무장해서 보냅니다. 큰 몽둥이 같은 것을 가지고 갑니다. 이 분위기를 보면 딱 ‘조폭’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옆에 있던 사람 즉 제자 중 하나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베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누구의 귀를 베었는지 안 나오지만, 요한복음 18:10을 보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다는 것을 보면, 거룩해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조직 폭력배와 같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만약 제가 어디서 조폭을 고용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보내서 폭력을 행사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정상적인 목사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깡패 같은 자들을 평소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도자들은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니까 강도짓을 하는 것이고, 강도니까 강도나 들고 다니는 검과 몽치를 들고 나오는 겁니다. 힘을 앞세워 약한 자들을 짓밟고 억누르는 일을 일삼는 것이 놀랍게도 대제사장들이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사하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하는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폭력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 억누르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들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예수를 없애기 위해 그들을 보내서 체포해 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악한 생각대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아래 다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메시야(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고, 놀랍게도 사람들의 악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악인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하박국의 외침이었습니다. 남 유다가 망할 때, 어떻게 저 악한 바벨론이 와서 살육하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저런 악인들이 의인을 짓밟을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의인이 누구냐? 너희가 의인이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악인도 사용하셔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악인을 조종해서 악을 행하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자기의 생각에 의해서 악을 행하는데, 놀랍게도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그 가운데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입니다. 무슨 로봇처럼 미리 프로그램을 해놓고 ‘너는 이때 이 날 이 시에 가서 악을 행하라.’라고 조종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였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쓰임 받은 선지자가 아니냐고 하며 숭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다가 아니었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할 때 그것조차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조종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인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가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처절히 몸부림치며 애쓰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저절로 그냥 되는 게 아니라, 그 악함 속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얼마나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이 보입니까? 악한 것들이 많고 불의와 불법이 판을 칩니다. 그래서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여기서 이뤄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람이 안 되도록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평소에 속 다르고 겉 다르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이런 말을 하는데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식으로 되면, 이런 종교 지도자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밭이 중요합니다. 속에 있는 마음이 말과 행동으로 나와야 합니다. 속 다르고 겉 다른 게 지속되면 이중인격자가 되어서 결국 자기 함정을 파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다윗을 좋아하셨습니까?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최악의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간음죄를 지었고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그를 그렇게 좋아하셨는가? 그것은 그의 마음이 솔직하고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서 속에 있는 마음 그대로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여기서나 저기서나 똑같은 말을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여기서 한 말과 저기서 한 말이 다르면 삶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을 못하니까, 그러다 보면 말을 안 하게 되고 사람을 기피하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나?’ 하는 것을 따지다 보면 삶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습니까? 그런데 정직하면 정말 편합니다. 정직하면 복잡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깨끗한 마음 밭 위에, 칼과 몽치 같은 세상에서 힘 쓰고 무력을 쓰는 것을 자꾸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 밭을 옥토로 갈고 거기에 자꾸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겁니다. 그럴 때 귀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2. 모든 제자가 도망함 (50-52절)
예수님께서 이미 27절에서 예언하신 것과 같이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을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고, 다른 열 명도 똑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좀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51-52절)
이게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럼 누구이겠습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 사람이 바로 마가복음을 쓴 마가 요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100%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잡히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는데 그곳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소유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때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성령을 받은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교회가 모이는 곳으로 사용된 곳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겟세마네의 한 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서 기도하신 곳이 바로 그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소유한 동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이 사람이 따라갔는데, 그러므로 이 사람이 마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서 “베 홑이불”이라고 했지만, 우리 식의 이불을 알몸에 덮고 있다가 잡으니까 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간 게 아닙니다. 베 홑이불이라는 것은 고급인 비싼 겉옷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 밤에 자다가 급해서 일어나 겉옷만 입고 따라오다가, 무리가 잡으려 하니까 그것을 벗어 놓고 도망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집은 부유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니까 체면이고 뭐고 그냥 도망갑니다. 여기서 마가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망을 해도 좀 고상하게 도망가면 좋은데, 체면이고 뭐고 없이 도망갑니다.
고난이 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그냥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평소에 주님과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예배하고 성경 읽고 기도해도 주님과의 관계가 안 세워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진짜 마음은 없이 형식적인 행위만 가지고 있으면 관계가 안 세워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도,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를 할 때도, 그 안에서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기 위해 애쓰며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하지 않게 되면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없기 때문에 관계가 안 세워집니다. 믿음보다 뭔가 더 중요한 게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저버리는 데에는 체면이고 뭐고,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데에는 체면을 차리는 모습이 있지만, 어려움이 와도 신앙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좋을 때는 좋지만, 어려울 때 믿음을 지키기는 힘듭니다. 믿기 때문에 손해가 와도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견디는 겁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 오는 것이고,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미국 정부에서 법을 만들어 선포한다고 해보십시오. “이제부터 예수를 믿으면 잡힐 때마다 $1,000씩 내야 된다.”라고 한다면, 계속 예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릴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시겠습니까? 숨어서 하면 된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숨어서 예배드렸는데, 그때는 벌금 정도가 아니라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벌금을 물려도 예수를 믿으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믿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후의 세상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길어야 100년 정도인데, 그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이 끝나면 셀 수도 없는 영원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이 더 영광되고 찬란한 영생이 있습니다. 이것은 헛된 망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깔린 것이 금이나 보석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금이나 보석은 별로 귀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값있는 것이 거기에선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찬란하고 영광스런 곳입니다. 거기 가서 우리가 무슨 흰 옷 입고 날개 달고 머리 위에 둥그런 게 있고 하프나 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재미없고 지겨운 데가 어떻게 천국입니까? 그런 건 지옥입니다. 천국은 정말 재미있는 곳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하는 곳이 천국인데, 그러나 죄는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죄를 지을 때 거기에 은근히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죄가 아니라 아주 선한 것을 하는데도 재미있는 곳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조그만 손해를 얼마든지 견딜 수 있게 됩니다.
3. 산헤드린 공회의 불법 재판 (53-65절)
요한복음 18장에 의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님은 처음에는 바로 이전의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끌려가고, 그 다음에 현직 대제사장으로 있는 가야바에게 끌려갑니다. 그때 시간은 아직 밤이었지만 예수를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스라엘을 이끄는 국회와 같은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속속 안나스의 집으로 모여듭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3절)
그 밤에 그들은 “다” 모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5-56절)
53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였습니다. 55절에도 “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모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거기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신봉하던 그들의 율법과 특히 공회에 대한 법에 의하면, 심야에 이렇게 모여서 재판을 하는 것은 완전히 불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불법을 행한다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하던 그들이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 법을 다 압니다. 그러나 지금이 예수를 처치해 버릴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불법임을 알면서도 재판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은 잡히실 때도 불의하게 체포되신 것이고, 법적으로 아주 불법적인 절차를 통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심문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한국은 이제는 꽤 선진화가 되어서 요즘은 덜 한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회에서 법안을 날치기 통과할 때 싸우고 난리가 난 적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뉴질랜드에서 한 TV 광고가 나왔는데,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법안 날치기 통과를 하면서 서로 붙들고 싸우고 때리고 휘두르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게 광고였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그것이 와이셔츠(dress shirts))를 파는 광고였다고 합니다. ‘저렇게 잡고 뜯어도 우리 셔츠는 찢어지지 않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나쁩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이것은 훨씬 더 나쁩니다. 그것은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내게는 없는지 돌아봅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다 알면서도 옳지 않은 것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소에 교통법을 안 지키는 것은 작은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주님의 뜻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하며 합리화를 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예배를 드리냐? 상황이 이렇게 좋지 않는데 무슨 예배냐? 무슨 기도냐? 무슨 성경공부냐? 지금 너무 바쁘니까 주님의 일은 다음에 하자.’
이처럼 도적재판을 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 있을만한 증거를 찾습니다. 많은 증거들을 내어놓지만 서로 일치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의 특징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들을 내세우지만 서로의 증언도 맞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때 아무 말씀도 안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0-61절)
자기들이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에 서로 증언이 맞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거짓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런 순간에도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신가? 그들은 지금 너무나 유치하고 속 보이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남들이 나를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왜 내 진심을 저렇게 몰라줄까?’ 오해하고 나를 멀리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대화를 해보려고 하지만 대화를 해볼수록 더 꼬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뚫리면 그 관계도 뚫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은 혹시 나를 몰라주고 오히려 공격하고 내 진심을 모르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너무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시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정직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저게 아닌 것을 아시니까...
그게 이때 예수님의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막 나를 고발하며 이런저런 죄를 지었다고 공격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 아시지요?’라고 기도하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면, 내가 제대로 했고 진리를 행했다면, 언젠가 주님께서 그것을 드러나게 해주십니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증인들의 거짓 증언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자, 대제사장은 머리를 써서 아주 비열한 방법을 씁니다. 증인들의 말에도 대답을 안 하시니까, 결정적으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네가 메시야냐? 네가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그 구원자냐?”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침묵하신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불리한 줄을 아시면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2절)
불리할 것을 아시면서 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까? 그들이 믿지 않을 것도 다 아십니다. 그런데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주님의 때가 이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병을 고치시거나 귀신을 쫓아내신 다음에 “내가 그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루실 때가 드디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 때문에 죽음을 자초합니다. 사실은 사형을 받아야 할 명백한 증거가 하나도 없이, 자신이 한 자빅 한마디에 십자가형을 선도 받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백으로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성 모독으로 몹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3절)
예수님은 참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때도 가만히 계셨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안락함이나 성공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으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얻어맞고 침 뱉음을 당해도 참을 수 있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5절)
눈을 안 보이게 가려놓고서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치며 “누가 쳤는지 맞춰봐라!” 하며 놀리는 겁니다. 제가 예수님과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이름을 탁 대면서 “너, OOO, O월 O일에 저기서 간음죄 범했고, 저기서 돈을 훔쳤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그냥 맞으십니다.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이고 그들조차 구원하셔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성공과 편안한 생활에 엄청난 관심이 있습니다. 지금도 삶을 편리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샤핑을 많이 하셨습니까? 매년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복권에 미쳐 매달립니까? 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남을 죽이기까지 합니까? 왜 우리기 매일 열심히 일하며 이렇게 돈을 법니까?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편안함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에 집중이 되어 있으셨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까지도 용서하신 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바로 그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혹시 좀 불편하게 산다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이 땅에서 좀 떵떵거리며 산다고 해도 너무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기준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삶을 우리 예수님이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루의 삶도 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말고, 너무 우쭐거리지도 말고, 오직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