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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7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2 ✦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마가복음 14장 27~42절)
[들어가는 말]
병원에서 심장 이식 수술이나 간 이식 수술 같은 큰 수술은 아주 어려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담당의사는 수술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선 환자의 상태를 여러 차례 검사를 통해 잘 파악해야 하고, 또 수술하는 순서에 대해 미리 철저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큰 수술은 10시간 이상씩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전날 충분한 잠과 휴식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다는 것은 마치 큰 수술을 받는 것과도 비슷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그런 일을 당하시는 것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에서 건짐을 받는 아주 어려운 수술인데, 예수님 자신이 수술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수술을 당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훌륭한 의사가 자기 몸에 있는 병을 수술로 고쳐야 하는데, 전혀 의학 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맡겨서 수술하게 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이 의사는 더 많은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서 조금도 실수가 없이 수술이 이뤄지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철저히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 항상 철저히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늘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중간에 뛰어들어 방해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준비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준비가 두 가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붙잡힐 때 무조건 덤벼들어 싸우면 안 되고, 숨고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 외에는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평소에 누구를 데리고 다니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항상 따로 데리고 다니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들을 편애를 하신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편애가 아니라, 이들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요주의인물’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제어를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이들을 따로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 명을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게 하셨고, 특히 베드로에게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누가 이렇게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1. 제자들이 해야 할 일
이제 드디어 온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려 할 것입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이 잡히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지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십자가가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당시에는 십자가라고 하면 정말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형에 처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목이 잘려 죽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 더 잘 죽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십자가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판받는 중이나 십자가 사형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중단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흩어져 도망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7-2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는 나를 버려야 한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시면서 제자들이 자신을 지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을 수도 있고 제자들 중 희생되는 사람도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 제물은 자발적이어야 했습니다. 죽기 싫어 발버둥치거나 도망치다가 잡혀 와서 죽으면 제물로서 자격이 없었습니다. 제물로 바칠 때 보통 양이나 소를 바쳤습니다. 돼지나 개는 왜 안 됩니까? 사슴이나 노루 같은 야생동물도 왜 안 됩니까? 그 동물들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제물로 바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양은 정말 조용히 죽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너희는 나를 버리고 흩어져 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말씀은 구약 스가랴 13:7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자를 탁 쳐서 쓰러지게 하면, 양들은 목자를 지킬 수 없습니다. 이때 양들이 할 일은 흩어져서 숲속에 들어가 숨는 것입니다. 목자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양들을 부를 때까지 숨는 것이 양들이 할 일입니다. 괜히 양들이 목자를 지킨다고 나서면 전부 다 양 도둑에게 붙들려 가거나 맹수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곳은 남쪽 유대의 예루살렘이고, 부활 후에는 저 북쪽 갈릴리로 가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계획에 의하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두 번 만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저녁에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는데 거기에 나타나셨습니다. 거기에 도마가 없었기 떄문에 그를 위해 1주일 후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 계획은 먼저 갈릴리에 가셔서 제자들을 기다리다가 만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붙들리실 때 괜히 목자인 예수님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흩어져 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을 돌보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아직 형편없었습니다. 그들은 다 무서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변화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말을 듣지 않을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말을 듣지 않을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29절)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까지 인용하시면서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버릴지라도”라고 하면서 베드로의 시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보다가 제자들이 옆에 있는 것을 슥 둘러보며 저들이 다 버려도 자기는 안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직도 왕이 되실 줄 아는 겁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로마를 쓸어버리시고 왕이 되실 것이니까, 그 순간 어떻게 도망을 가겠습니까? 그래서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주님을 부인하게 될지 미리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0절)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신앙을 버린다는 의미인데, 예수님은 그가 나중에 그러는 게 아니라 바로 그날 밤 베드로가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맹세하며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고, 이날 밤이 큰 시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시험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닭이 울기 전, 즉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숨어서 가만히 있으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부인하지 않으려면 새벽에 닭이 울기까지 숨어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따라갔습니다. 호기심이나 걱정스런 마음도 있었지만, 저분이 잘되어야 자기도 잘되니까 따라간 겁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베드로이니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너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자신감은 서로 맞지가 않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강한 자신감과 주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이 더 믿을 만합니까? 당연히 나 자신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다음에, 누가복음을 보면 그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거기서 무너지며 통곡의 눈물을 흘립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돌이켰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말씀을 붙들게 되니까 그가 회개하고 돌이킨 겁니다. 가룟 유다는 말씀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는가 아닌가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무서운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로마 시대 황제들 중에서 황제 숭배를 하게 했는데,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살게 해주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고문해서 죽였습니다. 그런 로마시대 상황에서 이 마가복음을 읽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베드로가 무서운 죄를 범했다고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무서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숨어 있으라고 했음에도, 베드로는 계속 큰소리를 칩니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31절)
베드로는 여기서 더 강하게 말합니다. 한 번 얘기해서 못 알아들으신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 얼마나 강한 자신감입니까? 정말 믿음이 좋습니다. 예배 때 우리도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다!”라고 외치면 얼마나 기분이 좋고 자신감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것 같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베드로의 자신감의 근거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열정이나 기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기도는 하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믿음에서 실패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을 때가 있습니다. 열정이 넘치고, 기분도 좋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도 열심히 읽고, 신앙생활이 너무 잘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공동체의 사랑을 나누고, 예배도 같이 아름답게 드리고, 사역도 열심히 하고, 삶 공부도 열심히 하는 등 아주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겁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과 확신이 나 자신에게 근거한 것일 때, 그것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시험을 눈앞에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큰 방해가 되는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거나 처형이 진행될 때 “나는 이렇게 죽기 싫다.”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하늘에서 천군천사가 내려와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포되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쳐 복종시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철저히 준비시키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도 사랑하고 가까이 했던 세 명을 데리고 가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2-33절)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데려오신 후, 특히 이 세 사람을 더 깊이 기도하는 데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기도 하셨지만, 특히 실수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고 무력을 쓸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기도가 잘 안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평소에 잘하다가도, 하기 싫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평소에 성경 읽기와 묵상과 기도를 잘하다가 하기 싫을 때, 바로 그때가 가장 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가 가장 마귀의 시험이 격렬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을 써서 기도하신 것을 봅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도와달라고 하신 기도가 아니라 모든 힘을 다하여 하신 기도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애를 쓰면서 기도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눅 22:44). 어떻게 기도하면 땀이 핏방울 같이 흐를 수 있습니까? 일단 우리 몸에서 땀샘은 아주 작은 구멍이기 때문에 땀은 작은 구멍에서 몸에 퍼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모이면 큰 땀방울이 되기도 하지만, 일단은 작게 피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핏방울은 몸에 큰 상처가 생겼을 때 한꺼번에 많이 흐르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너무나 애를 썼기 때문에 몸 안에 있는 땀이 다 나온 것 같습니다. 또 땀이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핏방울이 흐르는 것처럼 흘렀고, 어쩌면 그 땀 안에 정말 피가 들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힘을 다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몸에 가시가 있었는데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을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시며 안 고쳐주셨습니다. 그때도 바울이 그저 고쳐달라고 간단히 기도한 게 아니라, 목숨을 건 기도를 세 번 했다는 것입니다.
여성 분들은 아기를 낳을 때 얼마나 힘을 다합니까? 온 힘을 다해 아기를 낳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때 뼈마디가 늘어나고 근육도 늘어나게 됩니다. 생명을 낳는다는 것이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존경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그냥 단순한 말로만 기도하신 게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에 온 힘을 다 쏟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극단적으로 힘을 써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분도 계시고 금방 시작한 분도 계시지만,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정말 이런 기도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두어 번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이 힘들다, 힘들다고 해도, 왜 이렇게 잠도 잘 자고 입맛도 좋습니까? 정말 힘들면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옵니다. 정말 힘들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정말 힘든 게 아니라고 느낍니다.
예수님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실 때 가볍게 하신 게 아닙니다. 정말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심정을 제자들에게 솔직하게 나누십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4절)
아니, 이건 정말 충격적인 말씀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아셨던 겁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하십니다.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게 될 때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지금까지 십자가 하나만 바라보고 오셨지만, 막상 눈앞에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니까 심히 놀라며 슬퍼하셨습니다. 마음속에 큰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온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닌 척하신 게 아니라 고민하며 죽게 되었다고까지 이야기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데려오신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나누십니다.
우리도 이렇게 마음을 나누는 게 필요합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혼자 마음에 담아두어서는 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장에서 이런 고민과 괴로움을 나누는 게 필요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나누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나누다 보면, 내가 엄청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문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가장 솔직한 기도를 드리십니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5-36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 때문에 비참하게 죽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고, 결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가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옮겨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시니까 내가 죽지 않고 인간을 구원하게 해주십시오.”
지금 모든 인류의 구원이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을 원치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죽게 만들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36절에서 중요한 단어가 “그러나”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자기 뜻은 뭡니까?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은 겁니다. ‘아니,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안 죽으시면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데 피땀 흘려 세 번이나 기도하시고서야 자신이 포기가 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러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평소에 기도의 자리를 잘 지키던 분이 한 번, 두 번 빠지게 되면 염려가 됩니다. 모임의 숫자가 줄어서 염려가 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쳐지는 게 아닌가 해서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사실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죽 늘어놓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과 처음에는 대화가 잘 안 되지만 커가면서 되는 것처럼,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다 믿음이 자라가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을 점점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점점 더 구하는 겁니다.
믿음이 성숙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면 지구가 멸망하겠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면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다고 나아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또다시 나의 욕심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뜻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또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 애를 쓰며 나의 욕심이 죽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안 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이 번제로 잡혀서 바쳐지듯이, 펄펄 살아 움직이던 나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피땀 흘려 세 번을 기도하신 후 자신의 마음을 잡으셨습니다. 이제는 저 골고다로 가실 확신이 생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너무 잘 자고 있었습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7-3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이 무엇입니까? 여러 어려움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고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험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불시험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돌아가는 속에 살다 보면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결사적으로 기도하며 나아가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뜻이 뭔지가 확실해집니다. 그때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이해해주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많은 분들이 자기합리화를 할 때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우리를 이해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싶고, 걱정하고 싶지 않고, 믿음으로 해결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은 늘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내 뜻을 가리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하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강할수록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 뜻이 점점 밑으로 들어가고 점점 더 주님의 뜻을 섬기게 되는 것이 믿음 성장을 이루는 겁니다. 내 것은 줄어들고 주님의 뜻이 올라가는 겁니다.
3.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셨을 때 어땠습니까?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39-40절)
두 번째 기도하고 또 와보시니 아직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너무 피곤했습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충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이 스르르 오는 겁니다. 그런데 세 번째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완전히 바뀝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1-42절)
조금 전에는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자고 쉬라” 하십니다. 왜 이렇게 주님의 태도가 변하신 것입니까? 이 세 번째 기도 후에는 십자가를 완전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가 힘들지,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아주 평안합니다. 그런 갈등이 없으십니까? 이것을 할까, 말까 할 때, 그때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하자고 결정하면 평안해집니다. 하지 말자고 하면, 일단 평안해지는 것 같다가 일이 꼬입니다. 정말 주님 뜻대로 하자고 하면 평안해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평안하게 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왜 자꾸 옆 사람을 몰아세우고 날카롭게 굽니까? 그것은 자기 마음이 평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평안하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평안하지 못하면 날카롭게 나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나도 평안을 누리고 이 평안을 다른 사라들에게 나눠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다 됐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이제는 금방 잡히시게 됩니다. 이제는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도 매주 있고 기도와 말씀을 언제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관두고 다음에 하지.”라고 하지만, 이 ‘다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런데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실패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또 만나주시고 회복시키셔서 다시 사용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늘 깨닫습니다.
[나가는 말]
유명한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는데 세상에는 아프리카 탐험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있습니다. 그는 정글에서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리빙스턴은 늘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딱 한 가지입니다. 저는 늘 이것을 생각하고 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제가 위험하거나 어려울 때마다 저는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나의 사역과 나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나는 결코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도 선교의 아버지이자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세계 교회가 선교를 몰랐을 때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을 떠나 인도로 갔습니다. 40년 동안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위험도 많았고 희생이 컸습니다. 그의 아내는 거의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선교 활동과 함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책임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의 꿈이자 평생의 과제는 성경을 인도 말로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인도에는 수없이 많은 방언들이 있기 때문에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인도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윌리엄 캐리에게 그토록 많은 위험과 희생과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 밖의 무엇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 붙들었습니다. 정말 주님의 뜻이 여기 있다면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하며, 그러면 마침내 그 뜻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고통을 당한다 해도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참아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 나는 지금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께 놀랍도록 쓰임 받는 축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