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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3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9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장 14~37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여러 종류의 공포와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염려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가벼운 걱정이 아니라 더 나아가 두려움을 주는 것이 혹시 있는가? 이런 공포를 ‘포비아(phobia)’라고 하는데, 의학백과사전에 보면 2000개 이상의 공포증(phobia)에 대해 나와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것이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 이슬람포비아(islamphobia: 이슬람교에 대한 공포)도 많습니다. 또 젊은 여성들이 많이 갖고 있는 포토포비아(photophobia: 사진을 찍을 때 잘 안 찍힐 것을 두려워하는 것), 아라키뷰터로포비아(arachibutyrophobia: 피넛버터가 입천장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공포), 주포비아(zoophobia: 동물들에 대한 두려움), 클라스트로포비아(claustrophobia: 좁은 장소에 있는 것에 대한 공포/밀실 공포증)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갖지 않으기를 제가 바라는 것이 호밀로포비아(homilophobia: 설교에 대한 공포)입니다.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무엇이 있는가 하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말에 대한 공포, 즉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피넛버터가 입천장에 붙어서 안 떨어지는 게 왜 공포스러운가? 죽을까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 그 밑에 깔려 있습니다. 그 누구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위해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미래학자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 점성술, 점쟁이, psychic 등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교인들 중에도 점치러 많이 간다고 합니다. 예언기도도 변질되어서 점쟁이가 점쳐주듯이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심리와 아주 똑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대해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며 오실 날짜를 계산합니다. 한국과 미국에도 다 있습니다. 자기들이 계산한 날에 틀림없이 오실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사기극으로 끝났습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예언하고 종말에 대해 안다고 떠들어대도, 성경은 분명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 환란 때 할 일 (14-23절)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가 미혹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일어날 끔찍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십니다. 또 그 사실들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재림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함께 언급하십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얼마 후에 일어난 일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뤄진 일도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4절)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단 11:31),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12:11)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가증한 것들이 어느 순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짓밟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된 것이 BC 167년에 시리아 통치자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성전에 이상한 것을 세워놓고 성전을 모독한 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사실은 다니엘이 예언을 하기 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상한 것들을 많이 세워놓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하시는 예언은 실제로 AD 7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우상과 제물로 더러워질 것을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 위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 시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하는 적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실이 다시 한 번 성취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핍박을 당하는 대환난의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이 망하고 있는데도 물질적인 것이나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물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어 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빨리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5-18절)
아이를 가진 여인들과 젖먹이는 엄마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그들이 저주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피할 수가 없어서 화를 당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 사고가 나서 바다 위로 떨어졌는데, 비행기가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자기 짐을 챙기겠다고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온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빨리 목숨을 구해야 합니다. 물건들은 회복할 수 있지만 목숨은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아이티(Haiti)와 플로리다(Florida)로 허리케인 매슈(Matthew)가 왔습니다. 그때 대통령도 이야기했고 플로리다 주지사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물건이 손상되는 것은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목숨이 손상되는 것은 회복할 수 없다. 그러니 빨리 도망가라.”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게 있어도 살아 있으면 회복이 가능하지만,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빨리 도망하라는 겁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2-23절)
이렇게 마지막 때가 될수록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기적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복수입니다. 즉, 수많은 거짓된 자들이 날뛸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적은 기독교 신앙에만 아니라 어느 종교든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된 자들이 기적을 행할 때 사람들이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타겟(target)이 누구인가?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입니다.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단을 보면 누구에게 찾아갑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오래 전에 여호와의 증인들과 토론회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치 격투기에서 선수끼리 붙고 구경꾼들이 있는 것처럼, 옆에 구경하는 사람들, 소위 ‘관심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이 자기도 장로교회에 다녔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단들이 타겟으로 삼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인데, 다니긴 다녀도 대충 다니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툭 찔렀는데 그런가 하고 혹 하는 사람들은 쉬운 먹잇감입니다. 얼마나 많은 믿는 자들이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아예 안 믿는 사람보다 조금 믿는, 교회를 다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예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되는데, 조금 아니까 그걸 통해서 보면 성경을 너무 완벽하게 풀고 해석하니까 넘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과학 법칙처럼 1, 2, 3, 4로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면 오히려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 들어보지도 못한 희한한 말로써 성경을 척척 풀면 그것은 이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 이단 중 신천지가 있는데, 교회에 침투해서 대충 어리숙한 사람들을 택하여 성경공부를 기가 막히게 인도하는 성경교사가 있으니 성경공부를 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가보니까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니까 거기에 넘어가는 겁니다.
2천 년을 지나면서 성경이 주어져 있는데, 전혀 들어보지 못한 희한한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 외에 뭔가 다른 신기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이단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말세에 대해 숫자로 푸는 사람들에게 혹 하기도 하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2. 아무도 그 시기를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2절)
1)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주님이 재림하실 날짜를 정해 놓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짜를 비밀로 해 놓으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주님이 오실 날짜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이 잘 준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시기 바로 직전까지 방탕하게 죄 가운데 지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려 할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날을 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경건하게 준비하면서 주님이 오실 날을 준비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엄청난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그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2). 그러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찾아가 예수님께 조용히 질문을 합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을 이루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4)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의 본문을 포함하여 13장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가를 모릅니다. 미래학자들이 이전에 많은 것들을 예측했지만, 틀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우리가 모르지만, 누가 미래를 붙들고 있는가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꽉 붙들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시 31:14-15)
우리가 할 일은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세계의 종말에 대해 벌벌 떨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붙드는 겁니다. 내 앞날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붙들면, 우리는 아무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는 주님의 뜻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2) 천사들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모른다
심지어 천사들도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모른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사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들도 이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입니다.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7절)
여기에 보면, 최후의 심판 때에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게 천사들인데도 불구하고, 천사들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날짜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천사들도 모르는 것을 자기가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교만이고 잘못입니다.
3) 아들도 자신의 재림의 날짜를 모른다.
어떤 인간도 또 천사도 그 날과 그 시를 모른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기 자신이 재림하는 것을 모르신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놓고 씨름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재림의 때를 모른다는 것입니까?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에는 아직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그 시기를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분한 해석은 못 되지만, 이 말씀이 어떤 뜻이든 간에 여기에서 마가복음이 전해주기 원하는 것은, 예수의 재림의 정확한 시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점입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3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5절)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37절)
지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살짝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우리에게, 또 온 세상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십니까?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계속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몸이 깨어 있는 것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즉 처음 오신 날과 다시 오실 날 사이에 있는 중간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에 우리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게 뭔가?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게 아니라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반복하여 강조하고 계십니다.
저는 지난 1992년 10월, 소위 이단에서 재림의 날이라고 하던 그날 한국에 있었습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나가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다미선교회가 전단을 뿌리며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목한 재림의 날의 바로 전날 저는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젊은 여성 두 명이 들어와서 유인물을 나눠주며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내일 밤 오십니다. 내일 밤 오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아저씨 한 분이 “아가씨, 이리로 좀 와 보쇼. 내일 안 오면 어떻게 할 거요?” “아닙니다, 오십니다.”라고 하며 쩔쩔 맸습니다. 그때 마침 신문 돌리는 사람이 “신문이요!” 하고 외치며 들어오는 바람에 그 장면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그 전 주일 설교 때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미 선교회가 주장하는 그 날에 절대로 안 오십니다. 아니 오실 수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원래 그날 오려고 계획을 하셨더라도 이제는 안 오십니다. 사람들이 그 날짜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안 오십니다.”
미국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이 몇 월 며칠이라고 했는데 틀렸습니다. 자기가 계산을 잘못했다고 하며 또 다른 날을 이야기했다가 또 틀렸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날을 말했는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었습니다.
사탄의 계획은 이러한 이단들을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종말이나 재림이란 말만 들어도 “저거 이단 아냐?” 하는 생각이 바로 듭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짜로 예수님이 언젠가 오실 텐데, 사람들은 재림과 종말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마음을 풀어놓고 지내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적당히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며 지내거나, 매일의 삶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바쁘지만 큰 의미는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같이 섬기자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자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도 그런 말만 되풀이하면서 영양가 없이 분주하기만 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주님이 다시 오셔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분명히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28-29절)
예수님이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지만, 어느 정도 징조는 있다는 겁니다. 여기 많이 나오는 것처럼, 자연재해가 얼마나 많습니까? 허리케인이나 태풍이 더 많아졌습니다. 지진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끊이지 않는 전쟁, 특히 민족 분쟁들이 많습니다. 이전에는 나라끼리의 전쟁이었는데, 지금은 같은 나라 안에서도 다른 민족들끼리 싸웁니다. 심지어 이슬람은 같은 종교이면서도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싸우고 죽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20세기 말 이후에 복음이 빠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정확한 때는 몰라도 그 날이 분명히 가까이 왔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먼저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겁니다.
신문을 읽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 신문에는 끔찍한 소식들만 많이 전해집니다. 살인, 전쟁, 테러, 기근, 폭동, 반란, 미움, 다툼 등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또 사고가 났구나. 이런 몹쓸 인간들이 있나!” 하면서 회를 낼 게 아니라, ‘참 안 됐다’라고 하면서 진정으로 애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뉴스를 접할 때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단순히 뉴스가 아니라 중보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당연히 그것을 다 알면서도 잘 안 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삶 속에서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자꾸 분산됩니다.
특히 사탄이 우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주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좋은 것들’입니다. 사탄은 바보가 아닙니다. 아주 똑똑합니다. 나쁜 것을 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것을 하면 고통이 올 때 누가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면 내가 즐거운 것, 하면 내게 유익이 되고 좋은 것을 통해 우리의 눈을 자꾸 분산시킵니다.
꼭 사탄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요즘 얼마나 발전 속도가 빠릅니까? 옛날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것들이 많습니다. 무인자동차도 계속 개발 중이고, 전기 자동차도 있습니다. 또 virtual reality라고 해서 큰 TV를 살 것 없이 그저 안경만 쓰면 엄청난 영화관에 온 것 같이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른 스피드를 요구합니다.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우편 배달도 처음에 Priority가 나왔을 때 많이 안 썼는데 요즘은 대부분 사용합니다. 또 Express도 많이 씁니다. next day나 second day를 많이 사용합니다. TV 광고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네 회사는 빠르게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우리 약만 바르면 머리카락이 빨리 납니다.” “이것만 먹으면 살이 빨리 빠집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걸 다 하면 빨리 죽습니다.
이토록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는 게 참 힘이 듭니다. 20마일로 달리는 자동차서 옆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80마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옆을 내다보면 너무 빨라서 잘 안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너무 빨리 나가니까 우리가 제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또한 우리의 눈을 더 분산시키는 게 뭔가 하면, 선택사항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감기기운이 조금 있어서 약국에 감기약을 사러 갔더니 감기약도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사야 할지 고를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daytime과 nighttime이 있고, Tylenol, Advil, Sudafed 등, brand부터가 여러 개입니다. 같은 종류 내에서도 Cold가 있고 Cold & Flu가 있고 Severe Cold가 있고,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뭘 사나 하다가 대충 집어서 왔는데, 결국 대충 집을 걸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칫솔, 치약도 왜 이렇게 종류가 많습니까? 콜라 하나 마시려 해도 뭐가 이렇게 많습니까? Regular가 있고 Diet가 있고 Sugar Free가 있고 Vanilla도 있고 Lime도 있고 Lemon도 있고,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grocery store에 가면 그 앞에 서서 뭘 사야 되는지 고민됩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니까, 우리가 삶 속에서 정말 중요한 데 집중하기보다 자꾸 이런 데에 분산이 됩니다.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더 초이스가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데에 우리의 눈이 분산되게 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시대, 선택의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모든 것이 다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전 미국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1절)
“내 말”이라고 하셨지만 전체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미 1세기에 예수님은 이 세상이 이토록 빠르게 변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변하다가 결국은 끝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미래를 준비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변질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도 또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주신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신 말씀이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것도 바뀌었다고 하셨으면 큰일인데,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뀌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신뢰합니다. 그것이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나온 수많은 과학 이론과 기술들이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거나 더 이상 쓸모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처럼 금방 변하는 것이나 곧 쓸모가 없어질 것들을 신뢰하고 산다면, 우리는 마치 아주 약한 기초 위에 지어진 집에 사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아주 헛된 것을 붙드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십니까? 단순히 내용과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특히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성경 읽고 설교 듣고 내용이 이거라고만 하며 끝나면 별 소용이 없고,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를 먼저 깨닫고, 이것이 내 삶에 무슨 의미인가를 깨달아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사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살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붙들고 산다고 삶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걱정거리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여러분,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내 아이가 어떻게 해야 좋은 학교 가나? 못 가면 어떡하나?’
‘내 아이를 결혼시켜야 하는데 못하면 어떻게 하나?’
‘성적이 안 좋아서 어떡하나?’
‘직장을 어디로 가나? 한국으로 가나 미국에 남나?’
‘내 인생이 여기 이 콜럼버스에서 끝나는가? 조금 도시스럽기도 하지만 시골스럽기도 한 콜럼버스에서 끝인가? 아니면 이사를 가야 되나?’
‘사업이 안 되니 어떡하나?’
‘당장 렌트비, mortgage 낼 돈도 빠듯한데 어떡하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는데 내가 이러다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붙들며 사는 사람들도 수많은 걱정거리들과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심지어 금식하고 기도하신 예수님께도 사탄이 찾아와서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안 붙드니까 걱정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말씀을 정말 붙들고 살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뜨거운 물 틀어놓고 샤워하면 뜨끈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물을 잠그고 몸을 닦으며 나가려고 할 때 오싹하고 추워집니다. 뜨거운 물로 나를 덥게 만들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못 됩니다. 더 좋은 해결책은 운동하고 땀을 내는 겁니다. 똑같은 날씨인데도 운동을 하고 땀을 내면 뜨거운 물을 틀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틀어도 좋고, 별로 춥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추위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아주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위를 이기는 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해서 안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추워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째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방법인데, 예배 참석해서 남이 해주는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식습니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지만 금방 식습니다. 자신이 직접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나갈 때 지속이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어려움이 밀려올 때 어느 정도 위로 받고 이겨내는 것은 그냥 듣는 것으로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금방 식어버립니다. 그러나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할 때, 마치 운동으로 몸에서 열이 펄펄 나는 사람 같이, 이 세상의 추위가 몰려와도 괜찮습니다.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의 음성으로 매일 대화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말씀을 붙들어야 된다고 하는 게 부담이 되십니까?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것은 부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무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대화하고 싶어서 하시는 그 말씀을 우리가 붙드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걱정되십니까? 염려되십니까? 두려우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 추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