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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1 ✦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
(마가복음 11장 12~25절)
[들어가는 말]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아주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쓴 <서양철학사>라는 책은 제가 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 필독서였습니다. 무신론자였던 러셀이 쓴 또 다른 책 중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라는 책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책에 바로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1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반드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이 온전히 신뢰받을 만한 ‘선한 신앙’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뛰어난 철학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의 사상을 연구할 정도로 그는 세계적인 철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 있어서는 아주 무지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예수님이 왜 그런 기적을 행하셨는지 그 의미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압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사랑이 넘치시고 인자하시고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또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신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때도 보면,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너무 불쌍히 여기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한가?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성경을 자기 입장에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 안에서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엄청난 외부 세계를 좁고 제한된 자신의 지식 안에 가두려고 하니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셨으며, 이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질서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도 오늘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맥과 문화적 배경을 잘 모르면 버트런드 러셀처럼 예수님을 이상한 분이라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 과연 무슨 의미인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시는 선언(12-14)과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결과(20-21)를 보여주면서, 그 중간에 소위 ‘성전 청결’(15-18)이라고 알려진 사건이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건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고, 본문 사건이 일어난 날은 월요일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2-14절)
예루살렘 바로 바깥쪽에 있는 베다니에서 주무신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아직 못해서 시장하셨고, 마침 길 가에 무화과나무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달린 열매인 무화과라도 먹으며 시장기를 없애볼까 하고 그리로 가십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버트란드 러셀 같은 무신론자도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런 것 때문에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조차 당혹스럽게 만들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있다는 이유로 기분이 나빠서 무화과나무를 저주내지는 책망하셨기 때문에(14)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러한 예수님의 인품과 잘 어울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게다가 13절을 보면 분명히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하고 나와 있습니다. 이걸 보고 당황하셨어요? 맞습니다. 이런 구절이 우리를 굉장히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리 기억할 것은, 이 당혹스런 구절들 가운데 바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가 의도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별 생각 없이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가서 저주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여기 보면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 왜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셨을까? 아직 철도 아닌데 예수님은 열매를 구하셨고 열매가 없으니까 화가 나서 저주를 퍼부으셨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아기가 태어나서 아직 몇 주도 안 되었는데 어른이 와서 보더니 아기에게 “야, 너는 왜 이빨이 없냐? 인간이 아니다!”라고 하면 누가 정상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비정상입니다. 또 갓 돌이 지난 아이에게 아빠가 와서 “야, 점프해. 왜 못해? 너 바보야?”라고 한다면, 그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식이 아닙니까?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 “야, 열매 내놔” 했지만 없으니까 “그럼 저주!”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무화과나무를 인정사정없이 저주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봐서는 안 되고, 당시의 문화와 지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요즘 참 많습니다. 특히 그 중에 <열린다 성경>(류모세 저) 시리즈가 도움이 됩니다. 식물 이야기, 광야 이야기, 성전 이야기 등 많이 있는데, 특히 식물 이야기에 아주 좋은 해석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지중해와 접한 중동 지방인 이스라엘의 독특한 기후에서,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있는 4월부터 초막절이 있는 10월까지, 모두 다섯 번 열매를 맺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4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지는 건기(여름)와 그 나머지 기간에 해당하는 우기(겨울)로 나누어집니다. 보통 건기(4-10월 사이)에 성지순례를 많이 갑니다.
6개월의 우기 동안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보낸 무화과나무는 봄인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작은 잎사귀와 함께 첫 열매인 무화과를 맺고, 긴 여름 동안 무화과 열매를 5번 맺습니다. 그런데 이 첫 열매인 무화과와 이후에 열리는 무화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가 전혀 다릅니다. 바로 여기에 말씀의 비밀이 있습니다. 본문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아침이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0절)
이것은 그 다음 날 아침을 말하는데, 그 전 날 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저주하셨던 그 무화과나무를 다음 날 아침 보니까 말랐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즈음에 맺히는 첫 열매인 무화과는 히브리어로 ‘파게’라 하고, 이후에 순차적으로 열리는 먹는 무화과는 ‘테에나’라고 합니다. 무화과의 영어 단어인 ‘fig’가 히브리어 단어인 ‘파게(page)’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다른 두 종류의 무화과를 구별하지 않고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안 되거나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시장하셨는데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처음 나는 열매인 파게)가 있을까 해서 가셨지만 잎사귀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파게를 찾으신 것은 때가 유월절 즈음인데, 아직 본격적인 무화가(테에나)의 때가 아직 아니었습니다. 유월절 즈음에 잎사귀와 동시에 맺혀야 할 파게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막무가내로 하신 게 아닙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분명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지시고, 시청각 교육의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당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열매를 찾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마땅히 열매(파게)를 맺어야 할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과일나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책망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종종 포도원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영적 관계에 따른 하나님의 복을 보여주는 동시에(복을 주셔서 풍성해진 것),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특히 그 종교 지도자들의 형식적인 삶, 위선적인 삶을 비유해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지만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해서 이제 그 독특한 위치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 문맥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의 청결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5-17절)
무화과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다가가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이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에 들어가신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또는 예루살렘, 그리고 나무에 다가가신 것은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가신 것을 가리킵니다. 또 예수님이 이 나무를 보시고 발견하신 것은 열매 없는 잎사귀뿐이었는데(13), 그것은 성전에 출입하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삶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잎만 무성하고 정작 있어야 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열매 없는 위선적 삶과 그런 헛된 삶의 형식적 중심이 되어 버린 이 예루살렘 성전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마른 것처럼 멀지 않아 곧 무너질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뒤의 13장에서 설명해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전 안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에 대한 단순한 정화 정도가 아니라, 성전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회복을 위해 마지막 때에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또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려놓고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맞는 합당하고 온전한 열매를 당연히 맺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분별하지 못하여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그들의 지도자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예수님은 여기서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크리스천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안 되는데 억지로 맺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나무라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살아 있는 성도라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열매에는 크게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내적인 열매는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곧 성품의 변화입니다. 외적인 열매는 봉사라든지 전도의 열매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들어오셨는데 어떻게 사람이 안 바뀌겠습니까?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안 바뀌겠습니까?
우리가 사업을 해도, 사업체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이전에 하던 주인과 새로 산 주인이 똑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도 합병이 되어 주인이 바뀌면, 새로운 회사의 모든 정책과 원칙과 빌딩 겉모습과 실내 장식까지 새 회사의 것으로 다 바뀌는 것이지, 옛날 회사 식으로 그대로 두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세상의 원리도 그러한데, 예수님을 믿고 선물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으며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옛날 주인이 하던 그대로 놔두고 새 주인을 모시겠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뀌는 게 자연스럽고, 안 바뀌는 게 이상한 겁니다.
이전에는 짜증과 불평과 원망의 말만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서, 그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지만, 점점 바뀌는 겁니다. 감사와 기쁨과 사랑의 언어가 조금씩 나오다가 점점 그런 언어로 가득 차게 되는 삶, 그런 것이 변화의 열매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약 2:17, 새)
이 말은 행함이 있어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은 행동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러면 그 전의 삶과 믿은 후의 삶이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믿었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찾고 계신 것은, 우리가 과연 얼마나 변화되었느냐,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저 자신을 포함해서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안 닮고 이상하게 형식적, 위선적 삶인 바리새인을 닮는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예수님을 안 닮고 바리새인을 닮는다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리적인 신앙,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모습에 매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이미 선택되었다. 나는 신앙고백이 확실하고, 나의 구원도 확실히 보장받았고, 나는 정말 믿고 있다. 그러니까 삶은 내가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 나는 어떻게 살든지, 하여간에 천국에 갈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예수 믿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노력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랑에 빚졌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은혜에 감사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됩니다. 제대로 믿었다면 그 증거가 삶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도 가짜가 있습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약 2:19)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한 분이시라는 것은 귀신들도 믿고 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못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머리로만 아는 게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식적으로만 아는 믿음, 교리적으로만 믿는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입으로는 고백하는데, 정말 그 고백한 자신의 신앙 같이 살고 있지 않다면, 조금도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 신앙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못된 성격, 비뚤어진 성격은 하나도 안 바뀌면서, 미워할 사람은 계속 미워하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지는 않더라도 일단 괴롭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더니 밉던 사람이 금방 사랑스러워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단 마음이 찔리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욕을 해도 마음에 안 찔리고 너무 통쾌했는데, 이제는 찔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자꾸 찔러주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그렇게 하는 게 옳겠니, 용서하는 게 옳겠니?’ 그래서 ‘내가 이래선 안 될 것 같다’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면서 점점 사람이 불쌍히 생각됩니다. 그러다 보면 용서가 되고, 심지어 사랑하고 섬기게까지 됩니다. 이렇게 점차 변화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변화가 없고 똑같다면 한 번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은 것인가?’
사역에서도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해도 내적인 열매가 없이 그냥 하면 형식적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섬기고 봉사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크신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교회, 내가 봉사하고 헌신하며 주님께 기쁨을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잘난 사람으로 드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너무 감사해서 섬깁니다.
왜 그렇게 봉사를 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눈에 안 보이시지만 교회는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대로 사랑을 서로 실천하면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이 나타나고, 성품의 변화가 나타나고, 그러면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내가 무엇으로 섬기든지 간에, 정말 거기에 주님이 성품,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가, 아니면 내 혈기와 주장으로 하고 있는가를 보면, 이것이 제대로 된 섬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무화과나무처럼 잎사귀가 무성하니까 괜찮겠지 하고 스스로 속고 삽니다.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안 그런 것 같은데 정말 그렇습니다.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다른 분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은 까다로운 사람이다. 원래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그 말을 한 사람을 가리키며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속으로는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저 사람이 까다롭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보면 둘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착각을 하겠습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가 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를 해서 그렇습니다. 엉망인 사람과 비교해보니까 내가 괜찮아 보입니다. 사담 후세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과 비교해보니까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겁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와 비교해보십시오. 그런 사람과는 비교하지 않고 왜 꼭 히틀러 같은 사람과 비교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비추어볼 거울은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앞에 늘 자기를 비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이제 변화되자고 격려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QT와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자꾸 자신을 비춰보는 노력입니다. 그러면서 자꾸 주님을 닮아가고, 그러다 보면 너무 감사해서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말만 그럴 듯하고 예수 믿는 체하면서 열매는 없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니까, 예수님의 거울에 비추니까, 그것을 보며 애통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여기 와서 한 시간 꾹 참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자신의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그래서 더욱 주님을 붙들며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삶에서 되는 것이고, 함께 모였을 때는 함께 공동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마 7:16-18, 새)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축복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안 믿는 분들을 자꾸 주님께 데려오려고 합니까? 왜 자꾸 목장에 데려와 어떻게든 마음을 열어서 예배에 나오게 하고 <생명의 삶> 듣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교인 숫자를 늘리려는 게 아닙니다. 이게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에 그분도 이것을 알기를 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영원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축복이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에 맞는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 15:5, 새)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있는 사람입니다. 몇 십 년을 믿었다, 평생을 믿었다, 직분이 있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한다는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잎사귀가 무성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잎사귀가 많으면 풍성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면 안 되고 그 안에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으면 잎사귀도 무성합니다. 그 안에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열매를 맺는 비결은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열매를 맺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고, 집에서도 혼자 말씀 묵상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직분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주님과 관계없는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되게 살아도, 예배에 와서 거룩하게 앉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3. 주님 안에서 맺는 열매 - 믿음, 기도, 용서
그런 것이 바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인데, 주님은 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 그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2-25절)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열매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면 산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에게 바다에 던져지라고 하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더니 정말 산이 바다에 들어간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겠지만, 한다고 해도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이런 게 믿음이면 우리는 다 믿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과장법입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기적이 나타납니다. 기적만 따라가는 사람은 정작 기적을 못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과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이 비슷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 15:7, 새)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정말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 믿음에 대해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하고 놀라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게 왜 마른 줄 아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십니다. 완전히 동문서답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을 믿으면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것인가?
결국 여기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사람이 주님 안에, 주님이 그 안에 머물면 열매를 많이 맺게 되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즉,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과 하나 된 삶,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기도를 통해서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는 것은 기도의 응답이며, 기도의 응답은 주님과 동행할 때 가능합니다. 잎만 무성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즉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매일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사람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나아가는 사람은 그 삶 속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바로 용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와 용서, 바로 이것이 사실은 예수님이 깨끗하게 하신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일이고 또 이루어져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다 치우셨습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17)라고 하셨는데, ‘만민’, ‘모든 민족’ 즉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6장 말씀의 인용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는 것은 예레미야 7장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장사하던 곳이 어디였는가 하면, 성전에 들어가서 처음 나오는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어야 하는 이곳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꽉 채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는 곳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고, 그럴 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는 곳이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에 대해 물었을 때, “하나님을 믿으라. 기도하라.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열매는 내가 주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것을 통해서 나만 즐겁고 나만 기도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또 믿은 후에 변화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삶 속에서 너무나 많은 어려움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 다 뭔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해결책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 안에 해결책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다른 분들을 데려오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샘이 있는데 그 샘에 계속해서 물이 솟아나지 않으면 그 샘은 썩어버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고인 물이 되고, 그러면 썩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왜 수많은 교회들이 분란이 일어나는가? 우리끼리만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에 자꾸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까, 교회 원래의 본질과 목적과는 멀어지고, 인간적인 욕심과 다툼과 파워 게임이 판을 치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일하시는 무대는 새로운 생명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곳입니다. 그 생명이 들어와서 자라고 또 다른 생명을 구원하고, 그러한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과 동행하며 그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며 열매 맺기 위해 기도하고 그러한 가운데 응답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 이러한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섬김이 있고, 그 가운데 풍성한 성품과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