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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4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0 ✦
“겸손한 왕을 따르는 길”
(마가복음 11장 1~11절)
[들어가는 말]
아주 친한 두 명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크리스천이었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 비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둘이서 지방으로 여행을 갔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크리스천 친구가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비신자인 친구는 자기 친구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곰곰이 친구가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보고 있는데 저 앞에 교회가 보였습니다. 평소에 크리스천인 친구가 자주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생각나서, 믿지 않는 비신자인 친구는 그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까 자기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비신자인 친구는 크리스천 친구가 도대체 뭘 기도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조용히 가서 들어보니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부족한 놈입니다. 저는 매일 잘못을 저지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 기도를 들은 비신자 친구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자신의 크리스천 친구를 시험해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앞자리로 가 말했습니다. “야, 이 ‘부족한 놈’아!” 그러자 깜짝 놀란 크리스천 친구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뭐? 부족한 놈? 그럼 너는 뭔데? 너는 얼마나 잘나서 나한테 그래?” “야, 네가 기도할 때 부족한 놈이라며?” “뭐? 아차...”
그 크리스천 친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이 부족한 놈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에 발린 말로 한 것이었고 말로만 한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에는 자신이 정말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는 않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저 같은 죄인을, 이니 죄인 중의 괴수를 용서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데 누가 옆에 와서 “야 이 죄인의 괴수야!”라고 하면 절대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주 기분이 나빠집니다. 진짜 겸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분으로 묘사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겸손한 척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정말로 겸손한 분이십니다.
1.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겸손하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절)
예수님은 이제 감람산에 도착하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했고, 성과 도시의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는데 그곳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작년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가보았는데, 정말로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벳바게와 베다니는 이 감람산 기슭에 있는 마을들인데 이곳에서 예수님은 2명의 제자들을 마을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왜 보내십니까?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2-3절)
예수님은 이 제자들에게 아직 사람이 타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어디어디로 가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가 “왜 이렇게 하느냐?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느냐?”라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고 대답하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가보니까 정말 나귀 새끼가 있어서 끌고 주님께로 옵니다(4-6).
예수님은 그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7). 그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님이 가시는 길 위에 깝니다(8). 그 당시 이처럼 옷과 나뭇가지를 깔아주는 것은 왕의 등극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할 때 행해지던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엄청나게 환호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9-10절)
“호산나”라는 제목의 찬양곡들도 있는데, 이 말은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말이 마치 요즘의 ‘할렐루야’와 같이 자주 사용되며 기쁨과 환호를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는 그들의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9)라는 말은 시편 118편 26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말도 당시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또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10)라는 말은 메시야가 올 때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메시야, 그 왕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 그들이 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예수님에게 환호하는 모습이나 그들이 외친 말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야(구원자)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면서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 하시며 비밀로 하기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남자만 5천 명, 즉 수만 명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도 미리 아시고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공개적으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왜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고 목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이것이 나오는데 왜 마가복음에는 그것을 인용하지 않는가? 마가복음은 로마 사람들,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책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의 내용을 말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가 힘으로 정복했으니까, 그 강력한 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래서 간단간단히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하면서,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하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 오시기 하루 전에 예언된 게 아닙니다. 요즘에는 오늘 예언해도 내일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모르는데, 스가랴 9장부터 14장은 특히 메시야에 대한 예언 장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이 9장 9절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스가랴는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두 번째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스가랴는 BC 520년에서 470년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500년 전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500년 전에 이것을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이 쓴 것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이 우연하게 어쩌다 보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그 메시야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승리한 용사나 왕이 개선할 때 군마를 타고 칼을 높이 들면서 입성하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도 어른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그러셨는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왕은 왕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왕은 왕인데 무력이나 군사적인 힘으로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
그렇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그분을 통해 로마를 물리치고 압제에서 해방되어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되고 다윗의 영광을 회복하는 그때가 왔다고 하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7-8절)
여기에 보면, 사람들이 겉옷을 나귀 위에 올려놓으니까 그 위에 타셨고, 사람들이 또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예수님을 진작부터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구분되는 “또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여행길에 죽 따라오면서 큰 무리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들”은 그 큰 무리들과 구분되는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행동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주님을 따라가던 무리들과는 아주 다른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자기 겉옷을 길에 좍 깔았는데, “또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정리해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서 오랫동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오고 여리고까지 따라오며 바디매오와 삭개오 사건도 목격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입성 때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다른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길에 깔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나타나 나뭇가지를 깐 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이 누구인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늘 성경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들”이라는 단어를 잘 봐야 합니다. “들에서 벤 나뭇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너무 기쁘니까 대충 거기를 둘러보다가 거기 있던 나뭇가지를 베어 온 것이 아니고, 들에서 미리 나뭇가지를 베어 가지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을 보면 이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나무가 울창한 지역이 아니라 메마른 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유다 지역은 대부분 광야입니다. 일반적으로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데, 여기서 깐 나뭇가지도 종려나무 가지였을 것이라고 대부분 해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상황에서 종려나무(palm tree)는 그 당시 매우 중요한 이스라엘의 과일나무 중 하나였습니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려나무 열매를 버무려서 아주 단맛이 나는 일종의 잼을 만들어 먹었고, 보통 이것을 가리켜 ‘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때 ‘꿀’은 벌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종려나무 열매로 만든 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상황을 자세히 연구한 독일의 신약학자가 있는데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인데, 고대의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예루살렘 근처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감람원과 더불어 무화과나무나 종려나무 등의 과일나무들을 심어 놓은 “장미원”이라는 과수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입성 당시에 사람들이 베어 온 나뭇가지가 바로 이 과수원에서 베어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때 안 살아보았는데 정말로 그 나뭇가지를 거기서 베어 왔는지 어디서 갖고 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냥 거기에 사람들이 있다가 길가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를 보고 그 즉시 가지를 베어 온 것이 아니라, 어떤 과수원(들)에서 재배하던 과일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과수원에서 정식으로 재배하는 과일나무를 외부인이 아무나 막 들어가서 벤다면 그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과수원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베어 가지고 올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과수원에서 직접 그 과일나무를 기르던 농부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근처의 장미원 혹은 다른 과수원(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자기들이 재배하던 과일나무 가지들을 베어서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그 발아래 좍 나뭇가지를 깔았던 것입니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지주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 작당해서 예루살렘 농부들에게 아주 못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세를 내지 못할 형편에 있는 가난한 농민들의 밭을 종교 지도자들이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부유한 지주들에게 되팔았습니다. 그러니까 부유한 지주들은 더 땅이 많아지고, 가난한 농부들은 땅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원래 주인이었던 농부들이 새 주인인 지주들의 소작농이 되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노동력 착취’가 지금만 있는 게 아니라 당시에는 더 심했습니다.
그 후 지주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 밭에 지금까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짓던 밀과 보리농사를 못하게 하고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과일나무 위주로 심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농부들이 부자들의 횡포 때문에 지주들에게 빼앗긴 원래 자기 밭에다가 자기는 심을 마음이 전혀 없었던 종려나무 등의 과일나무를 심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농부들의 경우는 자기 땅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합니다. 우리가 자기 집 앞에서 가꾸는 텃밭을 누군가가 망치면 얼마나 마음이 상합니까? 그런데 자기의 생명과 같은 땅을 빼앗기고, 그것도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농사짓던 것을 못하게 하고, 자기가 하기를 원치 않았던 과일나무들을 심으라고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들을 베어 와서 땅에 깐 것은 일종의 데모(시위)를 벌인 겁니다. 농부들은 자기 밭을 빼앗긴 후 자기 마음대로 씨도 못 뿌리고 지주들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과일나무를 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메시야로서 그 영광 가운데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이렇게 억울합니다” 하는 자신들의 억울한 마음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본래는 자기 땅이었던 그 과수원에 억지로 심은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 와서 깔았던 것입니다. ‘땅을 빼앗긴 이 불쌍한 농민들을 해방시켜주십시오.’ 하는 심정으로 와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새 시대가 오고 그분이 왕이 되신 후에는 억울한 자신들의 땅을 도로 회복해주실 것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날이 주일(일요일)이라 지금도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지킵니다. 그런데 주일에 입성하셔서 금요일(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불과 5일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바뀌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무리가 어떻게 5일 만에 이렇게 바뀌었는가?
물론 전부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식으로 예수님을 오해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치적 메시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원했고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아무리 말씀하셨어도,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 말씀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듣기도 두려워하고 싫어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누가 크냐?’ 하고 싸우고, 또 엄마까지 데려다가 하나는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고 다른 열 명은 열(?) 받았습니다. 다 권력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그랬는데 그 뒤 따라오던 무리들은 어땠겠습니까? 게다가 가지를 잘라온 이 농부들은 또 어땠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죽기를 각오하고 로마와 싸우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한다고 하나 보다 하고 생각한 겁니다. ‘아, 고난을 당하시는 게, 왕이 되려면 로마와 싸워야 되니까 고난을 당하나 보다.’라는 정도로 생각했고, ‘죽었다 살아난다’는 말씀도 그 정도로 힘든 건가 보다 하고 상징적으로 생각하며 그래도 그 후에 영광을 얻는다는 것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다음에 로마 정부를 엎어버리고, 또 그들과 결탁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다 싹 쓸어버리고, 민족 해방의 날을 선포하신 다음 최고의 민족으로 만들어주실 줄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백성들의 기대를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혁명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이상하고 뜻 모를 설교만 하시다가, 허무하게도 로마 병정들 앞에 끌려가 모진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밧줄에 꽁꽁 묶이고 맞아서 피를 흘리며 부어 있는 모습으로 빌라도 법정에 나타난 예수님을 본 무리들은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나 채찍질을 당했는지 피가 줄줄 흐르는데다 일어설 힘도 없습니다.
여리고에서부터 예수님을 이곳까지 따라와 자기 겉옷을 깔던 큰 무리나, 종려나무 가지를 깔던 예루살렘 지역의 농부들이나, 모두 그런 모습을 봤을 때 완전히 절망인 겁니다. 소망이 없어진 겁니다. 저럴 줄 몰랐는데 너무 비참하고 초라하게 잡히셔서 죽게 되셨으니까 너무너무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칼날과 악한 지도자들의 횡포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실 것을 기대했는데, 자기들을 착취하던 악한 지주들의 횡포에서 자기들을 건져줄 것을 기대했는데,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전혀 그럴 힘이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자신들을 최고의 민족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던 군중들은, 또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께 실망하고 결국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뭡니까?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내 마음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여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그들의 그런 기대를 충족해줄 의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헛된 기대감을 가지고 그렇게 가다가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때 그 무리들의 변심한 모습, 이것이 혹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돌아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은 분명합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어깨에 십자가의 무게가 조금만이라도 느껴지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께 불평하고 항의하며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거예요?’라고 항의하며 예수님을 몰아붙이면서 ‘자꾸 이러시면 저는 더 이상 믿어드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가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해주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최종적으로 영광의 길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광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엄청난 천국의 영광의 길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길 이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거치고 영광으로 직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 신앙 때문에 조금만 어려움이 오거나 손해가 와도 몸을 사리며 피합니다. 그리고 길을 벗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계산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농민들이 아무리 피켓을 들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외치며 과수원의 나뭇가지를 꺾어 자기들의 억울한 뜻을 호소하면서 ‘악덕 지주들은 물러가라! 예수, 만세!’라고 외치며 아무리 농민 해방의 날을 기대했다 할지라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던 주님의 본래 뜻은 단순한 농민 해방이 아닙니다.
물론 불쌍한 농민들도 해방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인류의 구원입니다. 농민들의 해방이 아니고 인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로마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한 압제를 당하는 자들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도 압제자들도 다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로마 사람들까지 다 품으시고 그들조차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예수님의 뜻이며, 그것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신 의미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라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자신의 삶을 보며, 왜 이렇게 잘 안 풀리느냐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 생각과는 달리, 사실 모든 일은 주님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장 악한 일이 일어나고 테러가 일어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의 소행입니다. 그러나 그런 악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상황만, 그것도 내 눈앞의 현실만 볼 수 있지만, 주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눈에 꿰뚫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박당하신 예수님의 모습, 비참하게 피 흘리는 무기력한 그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아주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무기력하고 초라한 모습이 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뜻에 맞추어 너를 섬기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정말로 네가 나의 뜻대로 나를 섬기기를 원하느냐? 선택을 하여라. 정말 네가 나를 섬기기 원하느냐? 정말 네가 나의 길을 따르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자기를 부인하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3. 예수님을 따르는 바른 신앙
우리도 바로 이 점을 체크해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유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환호하며 따랐던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거나 알기를 원치도 않은 채, 단지 자기 욕심과 야망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점입니다. 바로 여기서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시험에 들거나 실망을 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알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으로만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사회 개혁가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귀한 도덕적 가르침을 전해준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야 예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교회 밖에서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고 예배도 드리고 다 참여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주님의 뜻이 정말 뭔지 관심도 없이, 그냥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구세주로 믿으면 정말 구원을 받습니다. 그때 신앙생활이 시작되는데, 동시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를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로 복된 삶이 됩니다.
정말 문제는 안 믿는 분들이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이 멸망으로 가는 것을 슬퍼하시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악을 행해서 슬퍼하시는 것보다는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안 할 때 슬퍼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자기 야망이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할 때는 결국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 갈 때 슬퍼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그분을 환영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치유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시고 결국 그 목적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환호하며 이스라엘 해방의 날을 기대했다 할지라도,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던 예수님의 뜻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해방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로마도, 또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한 압제를 당하는 자들도 구원받고, 심지어 부자들이나 압제자들도 다 구원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다 구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또 열심히 봉사하고, 특히 남들이 보지 않는 데서 묵묵히 청소도 하고 수고하는 분들이 참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여기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처럼 ‘호산나’ 찬송하며 열정을 다해 나아가는데, 그것이 혹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라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이라고 말은 하는데 사실은 내 영광과 만족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열정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신앙생활의 함정입니다.
이것이 진짜 주님을 위한 열정인지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원하던 것이 내 삶에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내 삶에 어려움이 왔을 때 어떻게 하는가,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왜 세상이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응하는가? 아니면 그래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는가? 그것을 봐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뜻과 내 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내가 기도한 것이 안 이루어지거나 전혀 다르게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 세상이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겁니다.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갈 겁니다. 내 소원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내 삶 속에 또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최대 목표가 내 어려움이 해결되고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일 경우가 참 많습니다. 단순히 복 받고 형통함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와 같은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섬기는 겁니다. 우상은 한 장소에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고 계속 성경에 나옵니다. 다른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을 갖다 놓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온다는 겁니다. 필요 없을 때는 나가서 잘 지내다가 필요가 생기면 와서 ‘나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때만 와서 제사를 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와서 빌고, 일이 잘 풀리면 올 필요가 없습니다. 내 스케줄에 맞추어서 스케줄이 되면 오고 바쁘면 안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 뜻이 성취되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너무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단지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또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해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섬기고 함께 전도와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로 그 주님의 뜻을 위해 쓰임받기를 원해서 자신을 써 달라고 간절히 소망하며 이 땅을 살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혹시 그 과정 속에 내가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고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몸까지 아프게 된다고 해도, 그러한 나의 고난을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하기 원합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가? 나는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 오늘 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이 황금 같은 일요일 오전 시간, 더 잘 수도 있고 다른 좋은 일도 할 게 많은데, 왜 굳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정말로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오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짐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담이 되어서 억지로 마지못해 나온 것은 아닙니까? 혹시라도 괜히 안 나오면 뭔가 찜찜해서, 안 나오면 벌 받을까봐? 사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모태신앙인들에게 그런 의식이 상당히 많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이지만, 교회에 나오는 게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혹시 안 나왔다가 뭔가 벌 받지 않을까 해서 잠깐 왔다 도장만 찍고 가는 겁니다. 재빨리 왔다가 재빨리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길이야말로 짐이 되고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나가는 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또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야 되겠습니까?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불평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주인이신가를 다시 점검해보면서, 내가 정말 그분의 종인가를 확인하며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안 하는데 어려움이 오면 보통 어떻게 생각합니까?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축구를 정말 좋아합니다. 지금은 많이 못하지만, 이전에는 축구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가서 했습니다. 특히 제가 신학교 다니던 전도사 시절에 저희 학교에 축구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섬기던 교회는 신학교에서 한인 교회 중에 가장 먼 교회였습니다. freeway를 40분 이상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오후 3시에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오후에 재빨리 교회 일을 다 해놓고 빨리 달려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 열심히 축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제 마음속에 뭔가 조금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러다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하루는 그렇게 대충 끝내고 빨리 와서 축구를 했는데 골을 넣기 직전의 상황에서 골키퍼와 충돌하여 다리가 거꾸로 꺾였습니다. 다행히 부러지거나 찢어진 데는 없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아팠습니다. 그때 쾅 쓰러져 으악 하고 소리 지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금방 두 달 만에 거의 다 낫습니다. 그래서 다친 건 가을이었는데 봄이 되어 다시 축구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주 자유로운 마음으로 갔습니다. 할 것 다 하고 갔고, 서두르지 않고 가서 할 수 있을 때 했습니다. 늦게 가면 늦은 대로 하고, 못하면 다음에 또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했습니다.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하고 있는데 뭔가가 탁 생기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어려움이 왔다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인가? (믿어도 소용이 없는 건가?) 절대 아닙니다.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뭡니까? 엄청난 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잘 믿음으로 통과하고 나면 그 엄청난 복을 받고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혹시라도 내가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따름으로써, 승리의 역사를 체험하는, 그 엄청난 복을 받아 누리며 또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