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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4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7 ✦
“부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가복음 10장 23-31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미국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집에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늦게까지 직장에서 일한 아이의 아빠가 아주 피곤하고 짜증난 상태로 집에 왔습니다. 그의 어린 아들이 그때까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빠가 오니까 물었습니다. “아빠, 나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되요?” “그래. 궁금한 게 뭔데?” “아빠는 시간당 돈을 얼마나 벌어요?”
그 말을 들은 아빠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너 같이 어린아이는 그런 데 신경 쓸 필요 없어.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그냥, 알고 싶어요. 아빠, 말해줘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그걸 꼭 알아야겠니? 에이, 그래, 한 시간에 20불을 번다.” “아, 그렇구나!” 아이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자기 아빠를 올려다보며 말합니다. “그럼, 아빠, 나에게 10불만 빌려 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아빠는 매우 화가 나서 야단을 쳤습니다. “시시한 장난감 같은 거나 사려고 돈을 빌려달라는 거면 당장 네 방에 가서 잠이나 자! 나는 오늘도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왔고, 너무 피곤하고, 그런 유치한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아빠의 꾸지람을 들은 아이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아빠는 어린 아들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앉아 있었습니다. ‘아니, 어린 녀석이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늦게까지 잠도 안 자면서 그것 때문에 기다렸단 말이야?’
한 시간쯤 지나 마음이 좀 가라앉았습니다. 아빠는 그래도 어린 아들인데 자기가 좀 심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10불로 꼭 사야 하는 게 있을지 모르지. 게다가 평소에 자주 돈을 달라고 하는 녀석도 아닌데,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군.’ 그런 생각이 들자 아빠는 아들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고 작게 물었습니다. “자니?”
“아직 안 자요, 아빠.” “응, 그래. 내가 생각해 보니까 좀 전엔 내가 너에게 좀 심했다. 미안해. 오늘 회사에서 내가 좀 힘든 일들이 많아서 괜히 너에게 화를 냈던 것 같아. 자, 여기 네가 원했던 10불 가져.”
그러자 아이는 벌떡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습니다. “고마워요, 아빠!” 그리고 베개 아래 손을 넣더니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아들에게 돈이 있는 것을 보니까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불쾌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이 녀석아, 돈이 있으면서 왜 달라고 그런 거야?”
“아빠, 왜냐하면요, 돈이 모자랐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다 됐어요. 아빠, 이제는 나한테 20불이 있어요. 자, 내가요 아빠의 시간을 한 시간만 살 수 있을까요? 내일은 조금만 일찍 집에 들어와 주세요. 아빠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요.”
돈으로 집(house)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sweet home)은 살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돈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가정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그토록 돈을 벌려고 애를 씁니까?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이민 초창기나 70-80년대 이민자들이 몰려올 때 왜 이민을 왔느냐고 하면 대부분 자녀 교육 때문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two jobs, three jobs 뛰다가 자녀는 집에서 방치되고, 그러는 사이에 자녀는 망가지고, 그러다 갑자기 경찰에게 전화가 와서 “당신 아들이 마약을 팔다가 잡혔으니 오시오.”라고 합니다. 자녀 교육 때문에 왔는데 자녀를 망쳤습니다. 돈을 벌다 보니까 희생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까지도 우리는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침대는 돈으로 살 수 있으나, 단잠은 살 수 없다. 음식은 돈으로 살 수 있으나, 식욕은 살 수 없다. 약은 돈으로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다. 사치는 돈으로 살 수 있으나, 만족은 살 수 없다. 쾌락은 돈으로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아주 위험하다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 그런데도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되겠습니까? 이제 좀 그만 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23-27절)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재물이 많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이 사람은 관리였고(18),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청년이었습니다(22). 젊은 나이에 엄청난 것들을 이루었고 종교적으로도 아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토록 훌륭한 청년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절)
이 말씀을 들은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습니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2절)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씀을 듣고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던 그가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3절)
여기서 “재물이 있는 자”라고 했지만 부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깜짝 놀랍니다(24).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상식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된 것은 선한 사람이라는 표시이고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당시의 통념과 정 반대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놀란 것은 당연합니다.
아니, 부자일수록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깝다고 믿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니까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재물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해를 시키시키 위해서 같은 내용의 말씀을 다른 식으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4-25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처음 말씀을 들었을 때보다 더 깜짝 놀랍니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6절)
그 당시 중동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동물들 중에 가장 큰 동물이 낙타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당시에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가 바늘귀, 즉 바늘구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큰 낙타가 그 작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면, 부자가 구원을 얻는 것은 심히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사실 낙타가 어떻게 바늘구멍에 들어갑니까? 그것도 불가능한데, 그것보다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더 어렵다면, 그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당시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천국 자리를 예약해놓았다고 여겨지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며 서로 쳐다보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 우리 중에 혹시 거지가 되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럼 부자 되고 싶으신 분? 저도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시는데 부자가 되기 원한다면, ‘나는 구원받기 싫다.’라는 말이 되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 가운데 ‘나는 부자가 아니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자동차가 한 대만 있어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엄청난 부자이고, 두 대가 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세 대가 있으면 최상위 수준입니다. 제가 몇 년 전 새들백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것을 듣다가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
한 달에 수입이 $1,000만 되어도 세계에서 상위 약 14% 안에 들어갑니다. 한 달에 $2,000을 벌면 세계에서 약 11% 안에 들어갑니다. $3,000을 벌면 5% 안에 들어갑니다. $4,000을 벌면 세계에서 1%(최상위권)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데도 내가 부자가 아닌가? 특히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수입이 몇 천 불 된다면 전 세계에서 최상위권입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세계에서 이곳저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내가 누리는 최하 수준이라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미국에 사는 것, 또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사는 것은 세계적으로 볼 때 엄청난 부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자인데, 그럼 구원을 못 받습니까? 이거 큰일 아닙니까? 어떡합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과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부자라고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한다면, 여기 우리 모두는 다 못 갑니다. 만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가 단지 돈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의 사람들 중에도 부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아브라함은 얼마나 돈이 많았습니까? 엄청난 거부였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 또 그의 아들 야곱, 또 요셉(애굽의 총리),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고난의 사람 욥, 또 다윗도 왕이었으니 부자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역사상 최대의 부자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을 장사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엄청난 부자였고, 삭개오도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큰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신실한 종이라고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는데 그런 부자들은 어떻게 괜찮다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단지 재물만 많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부자입니까? 돈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재물을 신뢰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너무 재물이 많아서 꽉 붙잡고 있기 때문에 천국으로 데려가시려고 해도 재물의 무게 때문에 데려가실 수가 없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저번 주에 어린아이에 대해 살펴보면서, 어린아이의 특징 중 하나가 의존적이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없이는 아이들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특히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5절)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받드는 자는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이 와서 이런 질문을 하며 재물의 문제가 나올 것을 미리 아시고,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영생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어린아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라고 하시면서, “이런 자” 즉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5)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신뢰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하나님만 신뢰하며 따르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왜 천국에 가겠습니까?
우리가 좋은 목적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좋은 데 쓰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많으면 아무래도 우리 마음이 다른 데로 분산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내가 잘 컨트롤하면 되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돈을 이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돈이 많아져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뉴욕에 가면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가 있습니다. 엄청난 거부였던 록펠러에게 기자들이 물어봤습니다. “당신은 돈을 얼마나 더 벌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조금만 더(Just a little bit more).”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 벌면 또 조금만 더 벌고 싶어 합니다. 왜? 억만금보다 우리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정문에서 집 건물까지 차로 10분 걸리는 엄청난 대저택 맨션에 살아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조금만 더”라고 하면서 멈추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물질은 사실 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부자는 물질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받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장수와 튼튼한 치아와 같은 복 말고, 하늘의 복은 예수님을 믿으면 다 받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그런 것과 같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만 받습니다. 성령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사가 아니라 복입니다. 구원은 어떤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십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쓰라고 주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전 12:7, 새)
“나타내 주시는 것”이 바로 은사를 말합니다. “공동 이익” 즉 공동체의 이익, 교회의 유익을 말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주셔서 함께 교회 공동체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는 것은 이 땅에서 그저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나만을 위해 쓰면서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바로 사용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은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대부분 잘못 갑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바로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물질의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할 게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쓰면 쓸수록 더 늘고, 쓰지 않으면 소멸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셨는데도 주님을 위해서 바르게 쓰지 않으면 물질의 은사도 자연히 없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재물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많은 물질의 은사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니까 잘 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재물을 더 주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잘못 쓰면 하나님이 뭔가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돈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돈은 정말 놀라운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돈이 주인이 되면 최악의 주인이 됩니다. 돈은 아주 유용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이 목적이 되면 인생을 망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많은 재물 때문에,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소중한 영생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자기가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재물이 그 사람을 소유해 버렸습니다. 돈이 자기의 노예였던 게 아니라 자기가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노예의 특징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돈만 걸려 있으면 돈을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돈의 노예입니다.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으면 자기가 주인일 텐데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만 걸리면 이성을 잃거나 판단을 잘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의 노예입니다.
이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보여줍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부자 청년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너무 놀라면서 서로를 보며 말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부자가 구원을 못 받는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절)
예수님은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틀림없이 못 들어간다고 너희는 생각한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 구원을 받는 것은 너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봐도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린아이들은 거기에 속한 자들입니다(14).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도 구원하실 수 있고 어른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도 구원하실 수 있고 부자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악독한 사람도 구원하실 수 있고 착하게 산 사람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게도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중에 ‘나 같은 사람은 구원을 못 받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조금 더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까? 누가 그렇게 정했습니까?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합니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주님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착하게 사니까 천국에 갈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하거나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착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적당히 착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 100% 착해야 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영생/천국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한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2.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 사는 삶 (28-31절)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대표하여 이번에도 역시 베드로가 나섭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8절)
베드로의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 조금 전에 떠난 저 돈 많은 친구는 자기 재물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네요.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헴.”
베드로는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과 우월하다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 19:27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로 뭔가를 얻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29-30절)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이것은 반드시 영생을 받는 삶입니다.
둘째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삶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집이나 가족이나 소유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딸이 있는데 이제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딸에게 친한 남자 친구가 두 명이 있습니다. 결혼을 해야 하므로 한 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두 명과 동시에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아무리 사랑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한 명만 선택해야 합니다. 드디어 그 중 한 명을 택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A와 결혼하여 같이 삽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B와 계속 만나고 데이트를 합니다.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그 관계는 부적절한 관계입니다. 불륜의 관계입니다. 한 명을 택했으면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다른 쪽은 그저 친구일 뿐입니다. 남편과의 관계와 친구와의 관계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공평한 사람이라 똑같이 하겠다.’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처럼 반드시 선택이 필요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둘 다 선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쪽만 선택해야 합니다. 둘 다 붙들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잡으려고 따라가며 그것들을 의지하면 오히려 그것들이 도망을 갑니다.
여러분, 내 자녀가 내 말을 다 듣습니까? 특히 성인이 되면 내 말을 다 들을 의무도 없습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돈이 쑥쑥 들어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따라가도 오히려 더 멀어집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포기하고 주님 한 분만 의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그것들을 다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런 것들을 다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하나씩 쫓아다니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듭니까? 그런데 다 갖고 계신 주님 한 분만 붙들면 거기 다 있는데, 뭐 하러 다른 데를 쫓아다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9-30절을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or)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이 땅에서의 삶 동안) 집과(and)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이 땅을 떠날 때)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모든 것들 중 하나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포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은혜입니까? 이 반대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거 다 포기해. 그럼 내가 하나를 줄게.’라고 하셔도 은혜인데, 하나만 포기해도 다 주신다니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럼 딱 한 가지만 포기하고 나머지는 그냥 붙들고 있어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 중 어떤 것이라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중에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가장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붙들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와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다 버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가지려고 따라가면 결코 자기의 것이 될 수가 없지만, 그것들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의 것을 다 소유하려고 하면 다 잃지만, 예수님을 붙들면 모든 것을 다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이 한 분만 붙들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라고 하는 찬양도 나온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이 말씀도 똑같은 말씀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쓸 데 없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 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이 곧 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것이 다 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만 붙들면 다 내 것이 되는데, 왜 그것을 관두고 하나씩 자기가 해보겠다고 쫓아다니느냐는 것입니다.
1세기 당시 마가복음을 받아서 읽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진짜로 곧 집이나 가족이나 친구나 재산을 잃는 것을, 또는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림을 의미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백 배나 받지만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하십니다(30).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기쁘고 행복한 길이지만, 세상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박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에게 또한 주어지는 것은 내세의 영생입니다. 정말 주님을 붙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천국에 들어갑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는 박해도 고통도 눈물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때론 손해를 볼 수 있고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 땅에서 생각만큼 누리지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아도 자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31절)
[나가는 말]
최근에 한국에서 나온 어느 노래 가사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스물넷인 난 매달 십일조 봉투에 100만 원을 100장씩 넣을 거야
모든 집중과 관심 명예와 돈 전부 챙겨
현재 난 꿈나무들의 Role model
근데 얘들아 나는 저걸 따라가지 않아
더 가치 있는 걸 바라보지
영원한 걸 따라가렴 그럼 다 나를 따라올 걸
점점 늘어나는 Follow 돈이 생길수록 늘어나는 Problem은 없어
그저 불어나는 잔고 유명해질수록 입술은 많아져
더 늘어날 걸 알아 그래서 난 더 원하지
원하지만 집착은 내게 절대 안 권하지
눈에만 보이는 달콤한 우상들에겐 난 평생 절하지 않아 당연하지
무언가를 얻지 못해도 난 걷지 믿음으로 역시 주님께 맡겼지
그가 원한다면 가고 아님 말아
이 노래는 크리스천 복음성가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가요입니다. 그것도 가장 세속적인 가치관과 문화가 담겨 있고 욕설도 많이 섞어서 하는 힙합(Hip Hop) 곡입니다. 랩 가사입니다. 얼마 전에 끝난 <쇼미더머니5>라는 힙합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비와이라는 래퍼의 <Forever>라는 곡입니다. 스물 네 살인데 비와이는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메시지를 이런 식으로 가사에 담았습니다.
비디오를 한 번 보시면, 그 분위기가 옛날식으로 하면 디스코텍이고 요즘으로 하면 클럽 분위기입니다. 춤추고 열광합니다. 그런 데서 “주님을 따른다. 십일조를 나는 한다.”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 가사를 잘 못 알아들었는지 열광합니다. 너무 음악적으로 뛰어나서 그렇습니다.
자기는 돈을 많이 벌기 원하지만 그걸 따라가지는 않으며, 우상에게 평생 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만 따라가겠다는 성경적 메시지를 클럽에서 춤추는 분위기 가운데 이야기합니다. 그런 실력파가 크리스천 중에 나왔다는 게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교회에서 사탄의 것이라고 혼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괜찮다고 하며 자기 길을 가다가 성공을 했습니다. 이 어린 친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정말로 하고 있습니다.
내 삶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집입니까? 형제입니까? 자매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자식입니까? 전토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것입니까?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알고, 버릴 것은 버릴 줄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주님과 복음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을 과감히 포기할 때, 오히려 포기한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들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받고 누리게 되는 역사가 분명히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