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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1 ✦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장 1-13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영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보니까 여러 외래어를 씁니다. ‘커피’라는 말도 많이 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영어 중 하나가 바로 ‘화이팅(fighting)’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안 쓰는 단어입니다. ‘싸우는’이라는 뜻인데 외치면서 “싸우는!”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미국과 한국에서 발음이 다른 것이 ‘슈퍼’입니다. 미국에서는 ‘수퍼’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슈퍼’라고 합니다. 영화 <Superman>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수퍼맨’이라고 하면 틀리고 ‘슈퍼맨’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어쨌든 <슈퍼맨(Superman)>이 오래 전에 나왔는데, 그 뒤로 계속해서 각색되면서 나왔고, 최근에는 ‘슈퍼맨과 배트맨의 대결’이라는 영화도 나온 광고를 보았습니다. 어릴 때 슈퍼맨 영화를 봤는데, 그때는 아주 경이로운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북극에 있는 슈퍼맨의 비밀기지에 이 사람이 슈퍼맨이 되기 전에 처음 가니까, 거기서 아주 엄청나게 찬란한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운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너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는 엄청난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변형 (1-4절)
지난 8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메시야다’ 하는 것을 인정하시면서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로부터 6일 후에,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데, 거기에서 변화가 되십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1절)
여기서 예수님이 8장과 이어서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 뭔가? 그것의 의미가 바로 이렇게 변화되신 사건을 말합니다. 오래 전부터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리켜 ‘변화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며 말씀을 들을 때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이라는 식으로 들어서 ‘아, 변화산이란 게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Byun Hwa'를 찾았더니 안 나옵니다. 실제로 ‘변화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없습니다. 그것은 지명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냥 “높은 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2절)
학자들에 의하면, 이곳은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가르치셨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있는 헐몬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6일 동안 충분히 다른 지역으로 가실 수 있기 때문에 갈릴리 지역의 다볼 산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산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놀랍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되신 의미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는데, 거기서 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합니다. 그 영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첫째로는, 그의 옷이 광채가 나고 희어진 것입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3절)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눈부실 정도로 희게 변형되셨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세상에서 빨래(표백)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희어지셨다는 겁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흰색이라기보다는, 아주 찬란하게 빛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권능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시고서는 왜 자신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셨는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장차 자신이 다스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 가운데 다스리실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다음에 천국에 가보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천국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영광의 의미 두 번째는, 놀랍게도 엘리야와 모세가 여기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4절)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처럼 책을 남긴 사람은 아닙니다. ‘엘리야서’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그 누구보다도 엄청난 능력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가 신기합니다. 뭔가 분명한 특징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사람으로서,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가기 직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다음에 그의 무덤을 알지 못합니다. 엘리야 역시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이 땅에 무덤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런 특징이 있는 동시에 둘 다 자기 민족으로부터 배척과 반대를 당한 선지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백성들의 불평, 불만, 원망을 받으면서 이끈 사람이고, 엘리야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하다는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던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백성들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이보다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이것을 보면, 예수님과 이들이 대화한 내용은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이 산에서 나타난 것은, 앞으로 예수님도 자기들처럼 백성들로부터 배척받고 반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다가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누가복음 9:31에서 “별세”라고 번역된 것도 특이한데 바로 그 단어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바로 ‘출애굽’과 같은 단어, 즉 ‘엑소더스(exodus)’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혀 고통 없이 영광중에 떠나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높은 산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어 하늘에 바로 올라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택하신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철저히 우리 인간을 위해 사시고 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하셨습니다. 철저히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 당황한 베드로의 제안 (5-6절)
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아주 놀랐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직접 목격하면서 전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5-6절)
여기서 ‘초막’이란 말은 ‘성막’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예배하는 데를 지어놓고 세 분을 다 예배하겠는 말로 한건데,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입니다. 역시 베드로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뭔가를 얘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의합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할 지 알지를 못해서 그렇다고 6절은 알려줍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가 졸다가 깨서 놀라며 말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졸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잠이 덜 깨어 뭔지도 모를 말을 횡설수설하면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분명히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체험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럴 정도의 놀라운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기쁨과 만족을 그가 여기서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여기 그냥 있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어떤 것도 다 잊어버리게 하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천국은 지겨운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감히 비할 수 없는, 엄청난, 황홀한, 아름다운, 너무나 좋은, 너무나 기쁜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베드로가 맛본 그곳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들이 내려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들은 산을 내려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천국은 장소 개념보다는 관계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어디나 다 천국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내 마음이 천국이 되어서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고 아름답고 황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가정이라면 그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교회라면 아름답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정말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감격의 눈물도 흘리는데, 뭔가 이 세상에서 안 채워졌던 것이 채워지는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마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만 있고 싶어 할 수가 있습니다. 삶 공부를 할 때도 배운 내용이 너무 좋아서 계속 말씀을 공부하며 배우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같이 머물며 너무 뜨겁고 기쁘고 눈물 흘리고 서로 부둥켜안고... 그런 체험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데, 그런 놀라운 체험만 하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저 하늘 위가 아니라 이 땅입니다. 세상 속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라고 하실 때 ‘교회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의 소금과 빛’도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교회에서 믿는 사람끼리 소금과 빛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기쁨, 이 만족,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이 영광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맛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지 않아서 못 받는 것이지,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열고 조금만 주님을 찾으면 다 부어주십니다.
“해도 안 되는데요”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럼 저는 또 이렇게 여쭤봅니다. “얼마나 하셨는데요?”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조금 해보고는 아무것도 안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계속 해보십시오. 분명히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영적 체험도 하고, 서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체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야, 여기가 너무 좋다. 우리끼리만 하자’라는 게 아니고, 세상에 나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어가고 있습니까? 뉴스만 보아도 전부 안 좋은 소식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습만 조금 달라졌지 남을 속이는 범죄들로 가득합니다. 미국도 얼마나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가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살인 사건과 테러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이 너무나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 큰일이다. 나도 갑자기 저렇게 맞아 죽으면 어떡하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어 가는 이 세상을 보면서 먼저 안타깝게 여기고, 세상을 보시며 너무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내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나아가서 최선을 다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체험은 없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는 없이,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은 없이, 그저 자기 힘으로 하겠다고 나가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고도 안 나가며 여기만 계속 머물고 있는 것도 곤란합니다.
‘가장 큰 계명’(마 22:37-40)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두 가지가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열려야 하고, 그 사랑이 나를 채우고 넘쳐 이웃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수직적), 그리고 이웃과의 교제(수평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채움을 받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
지금 제자들이 서로 발 안 씻기고 눈치 보고 있을 때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셨고 그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사랑해라. 그런데 자기 기준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내가 낮아져서 사랑으로 섬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서 내 제자인 줄로 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은혜 받고 우리끼리 교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부흥회를 통해 뜨겁게 찬양과 기도로 눈물 흘리고 그럴 때 ‘야, 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구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지?’라고 충격을 받으면서 ‘저 사람들을 저렇게 만든 예수는 뭔가 있나보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끼리만 머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끼리만 머물고 나가지 않게 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우리도 썩어 버립니다.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만 집중하는 교회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역사상 제일 처음으로 생긴 교회인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뜨겁고 엄청난 일들을 벌였습니다. 하루에 갑자기 3천 명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또 갑자기 5천 명이 들어왔습니다. 몇 달 안에 엄청난 메가처치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에 힘쓰고, 같이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또 집집이 흩어져 우리 목장처럼 작은 모임으로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그런 엄청난 교회였는데 ‘야, 이거 너무 좋다. 이전에 이렇게 해본 적이 없다. 너무 기쁘다.’ 그러면서 가만히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핍박을 일으키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큰 핍박이 일어나서, 그 많던 성도들이 사도들 외에는 다 흩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 등으로 안 가고 그냥 예루살렘에서 ‘여기가 너무 좋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뜨겁게 했는데, 나가야 하는데 안 나가니까 하나님께서 핍박을 통해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어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고,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는 선교의 베이스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바울을 통해 소아시아와 유럽에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나중에는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가서 그것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 교회가 우리끼리만 즐거운 곳이 되어 버리면,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안 나가면 하나님이 흩어 버리십니다. 안 나가는 교회에 문제가 많은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즐겁게 친교만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인간적인 정에 의해 친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통 ‘친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나에게 지나치게 잘해주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너무 잘해주는 사람, 너무 친한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친할수록 우리가 더 예의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친해지면 말도 막 하게 되고, 그러면서 허물없이 지낸다고 이 얘기 저 얘기 막 하다가 거기에서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왜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보다 부부싸움을 하는 횟수가 더 많습니까? 교회의 다른 성도 분들과 다투는 게 더 많습니까, 부부간에 다투는 게 더 많습니까? 왜 부모와 자녀 간에 가끔 소리도 질러가면서 다툼이 그렇게 일어납니까?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모습을 다 노출시키고 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친한 가족이기 때문에 별 조심성 없이 할 말, 못할 말을 다 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고 하면서 화도 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가족이 아닌 사람끼리 그런 식으로 친하다고 할 말, 못할 말을 다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서로 친하고 좋을 때, 더 조심하고 더 서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모여야 합니다. 이렇게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이유는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즐겁자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같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체험하고 같이 흩어져서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치유해서 내보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그런데 병원은 병원인데, 그냥 병원이 아니라 야전병원입니다. 전투에서 싸우다가 군인이 다쳐서 실려 들어오면 치료해서 다시 전쟁터로 내보내는 야전병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편안한 세상이 아닙니다. 영적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입니다. 전장에서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케어하고 서로 치료해주고 서로 격려해주고 서로 힘을 주고, 그래서 다시 나아가 싸움을 잘 싸울 수 있게 해주는 훈련소이며 야전병원입니다.
지난 4월세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 어느 목사님이 사례 발표를 하면서 굉장히 마음에 와 닿는 비유를 발표했습니다. 교회는 구조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물속에 빠져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구조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구조선보다는 유람선(cruise ship)에 가까워 보입니다. 기도할 때는, 교회가 이 시대 노아의 방주처럼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는 하는데, 죽어가는 생명보다는 방문객과 관광객을 태우는 일에 교회들은 경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구조선에는 외출복이나 드레스 복장의 손님이 탈수 없습니다. 대신 구조에 능한 정예 요원과 훈련받는 훈련병이 있을 뿐입니다. 구조선에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한 팀으로 유기체처럼 연결되어서 사명을 수행하는 생명요원이고, 그 배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것은 구조선이고, 목장은 죽어가는 영혼에 가장 근접하여서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의 손을 직접 붙들어 구조하는 구명선(보트)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발견할 때마다 커다란 구조선이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오히려 위험합니다. 구조선에서 출동한 구명선(보트)이야 말로 생명의 길잡이이고, 죽어가는 영혼을 가장 효과적으로 살려내는 생명보트입니다. 그리고 보트에서 살려내면 원래 본선(구조선)으로 옮겨서 치료받게 합니다.
여러분, 항구에 배를 정박해놓으면 안전합니다. 폭풍이 불든, 태풍이 오든 상관이 없습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어느 배도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배는 없습니다. 물에서 나가기 위해서 배를 만들지 전시용으로 만든 배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항구에서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비록 위험하고 폭풍이 불어오는 곳이라 할지라도, 저 넓은 바다를 누비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구조선이 되어야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음성 (7-8절)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여기서 살자는 말을 할 때, 구름이 나타나 그들을 덮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주는 상징(symbol)인데, 구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시내 산에서 구름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셨고, 초막 위에도 구름으로 임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에도 구름으로 가득 채우셨는데, 그것을 ‘쉐키나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1장 11절에 이어 두 번째로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7절)
1장에서 첫 번째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직접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첫 번째는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사랑의 확신을 주신 것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의 고난의 길을 가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라는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할 일은 초막을 짓고 여기가 좋다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스러운 체험이 제자들에게 나중에 큰 유익이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중에 성령을 받고 이런 것이 다 생각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후서 1:16-18)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듣고 나서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리고 다른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체험도 중요하지만, 가장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가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는데, 체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다 보면 주실 수가 있는 겁니다.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체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바로 알게 해주는 수단입니다. 또 결과입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8절)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히 그분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믿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대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도 우리 각자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21세기에는 ‘10인10색’으로 열 명이 다 색깔이 다른 시대입니다. 각자의 개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개성은 다 다르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입니까? 각자 자기주장만 하면 굉장히 복잡해지고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됩니다. 그분을 보고 따라가면 우리가 다 달라도 결국 한 곳으로 모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의견은 이렇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견이 주님의 말씀과 합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견을 갖고 있어도 주님의 말씀과 다르다면 그것은 좋은 의견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체험이라도 말씀과는 다르다면 좋은 체험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감동이 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데, 성경말씀과 상관이 없거나 전혀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 보셔야 합니다.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내용은 너무 좋은데 말씀과는 다릅니다.
4. 예수님의 경고 (9-13절)
결국 이후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그들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9-10절)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하면, 인자가 부활하신 다음에는 이것을 이야기해도 좋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높은 산에서 변화되셨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예수님에 대해 열광적인 반응이 나타나면서 그 분위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누가 십자가에 막 달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로마를 제압하고 이스라엘이 세계 최고가 되게 해주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가시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대로 그냥 두셨으면 이것을 얼마나 떠들었겠습니까? ‘우리가 거기 갔는데 모세와 엘리야와 하나님의 음성과...’라고 했으면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더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가지고 이들은 서로 또 의논을 합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이야기하셨는데도 지금 이 사람들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아침에 가보고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들 생각으로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실제적인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절)
말라기 4장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4: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다시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다시 먼저 올 것이라고 이 말라기 말씀을 의지해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은 엘리야가 오면 큰일 아닙니까? 막 불로 심판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높은 산에서 엘리야를 봤는데, 그 말라기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2-13절)
사람들은, 특히 제자들은 하늘로 간 엘리야가 그대로 다시 올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엘리야를 지금 봤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라고 하십니다.
그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아니고, 마치 진짜 엘리야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비가 오지 않게 기도하고, 비가 오게 기도하고, 불이 떨어지도록 기도했던 그 엘리야의 심정으로 백성을 주님께 돌이키는 세례 요한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중에 헤롯은 자기를 책망했기 때문에 요한을 잡아서 결국 죽였습니다.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은 함부로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엘리야가 필요합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바알을 다 따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은 줄 알았지만 주님께서 700명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바알을 따라가고, 돈을 따라가고,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니 이거 큰일 났구나’, ‘심지어 교단들도 잘못 나아가니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이방인 과부 집에 숨어 있었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자기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도 이 주님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는 일,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 이 영광을 맛보았으니 너희 마음대로 잘 판단해서 살아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좋사오니 계속 있자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이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라!”
지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짓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하고 싫어하면 안 하고 그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