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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7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

예수께서 땅에 오신 이유

(마가복음 1 29-39)


 

[들어가는 ]


우리 교회에도 로마 가톨릭 출신이 있습니다. 한 번은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대화를 나눌 때 가톨릭 신자가 물었습니다. “우리 신부님들은 독신으로 사는데, 개신교 목회자들은 왜 결혼을 합니까?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베드로 사도를 초대 교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말에 가톨릭 신자는 상당히 놀랐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베드로가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부르실 때 그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대부분도 결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희귀한 독신 사역자였던 바울이 그 점에 대해 증언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고전 9:5, )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혼도 안 하고 열심히 사역하는데 자기에 대해 자꾸 뭐라고 하고 잘 인정을 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항변하는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다른 사도들”, 즉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던 사도들과, 또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동생들, 특히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유다, 그리고 게바 즉 베드로도 다 결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말을 통해서 보면, 그들은 요즘 사역자들처럼 자신의 아내와 함께 다니며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굉장히 사랑했던 부부가 있는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브리스길라가 아내이고 아굴라가 남편인데, 브리스길라가 영적으로 더 성숙하고 더 열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통념과는 달리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결국 소위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다 (29-31)


게다가 베드로 같은 경우는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을 비롯하여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그의 장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29-30)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 가운데 가장 초기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약간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시몬의 집에서 그의 장모가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집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29)이라고 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하고, 누가복음 4장에서는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베드로가 장모님 집에 얹혀 살며 처가살이를 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어려운 형편에 있던 자신의 장모님을 자기와 동생이 살던 집에 모시고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시몬과 안드레는 부모님이 진작 돌아가셨고, 베드로의 장모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과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씀을 실행한,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모를 모셔와 같이 산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성격은 아주 급했지만, 동생은 물론 장모님까지 모시고 함께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고깃배에서 그물질을 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7-18)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길은 없지만, 우리가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보면, 이 사건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며 자신과 가정을 잘 돌보던 성실한 사위 시몬이 아무 대책도 없이 갑자기 그물을 확 버리고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간 것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게다가 사돈총각인 안드레까지 그물을 버리고 같이 갔다는 것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앞으로 난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위기의식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물고기를 잡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형편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안드레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아버지 세베대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두었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는 굉장히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나와 내 딸은 무엇을 먹고살라고 저렇게 대책 없이 그만두나?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장모는 사위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밖으로 불러낸 예수라는 사람에게 화가 났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분노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서운함, 섭섭함, 원망, 불평과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사역 초기였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라는 분이 누구인지 잘 몰랐던 베드로의 장모는, 비록 풍요롭진 않았어도 행복하고 화목하게 잘 살고 있던 자기 가정에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와 딸의 형편을 어렵게 하고 인생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몇 년 전부터 세계 의학사전에 한국말로 등록된 병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Hwa-byung. 화병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은 일종의 ‘화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28)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다가 배가 파선하여 몰타 섬에 오르게 됩니다. 거기서 보블리오라는 사람의 부친도 열병에 걸렸는데 이질에 의한 열병이라고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그 병은 바이러스에 의한 열병이었을 것이고, 오늘 본문의 열병은 그것보다는 마음의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수많은 병들이 마음의 병 때문에 생깁니다. 일단 요즘 제일 큰 게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분노가 일어나고 슬픔과 염려가 생깁니다. 이게 지나치게 되면 면역성이 약해진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의학백과사전에서 말하는 화병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참는 데서 오는 증세로, 주로 여성들에게 발병하는 질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화병이 더 많다는 겁니다. 이 병에 걸리면 특히 열이 치밀어 오르는 증상을 보이는데, 화병이라는 말처럼 속에 불을 품은 것처럼 속이 뜨거운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여기도 우리 자매님들, 우리 여성분들 중에 화병, 즉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원인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남편이 속을 썩이고 자식이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고, 이러다 보니까 화병이 되는 겁니다. 원인이 별로 없는데 열도 나고 몸도 아프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화병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베드로 장모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런 화병이 들고도 남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딸과 자신의 인생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를 좇아간 베드로와 안드레에 대한 원망과 섭섭함이 점점 심해져서 마침내 화가 나 온몸에 열이 펄펄 나는 증세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베드로 장모의 상태를 가리켜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30). 열병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와 함께 자기 장모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마음이 딱 닫힌 베드로의 장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듣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베드로는 장모님께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해드리려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장모는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30).


지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그 일을 위해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눈에, 먹고사는 이 세상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자기 사위 데려갔다고 원망, 서운함, 섭섭함 등으로 병들어 누워 있는 그 모습은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1)


결국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손을 통해 치유를 받고 병석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 점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 모두 베드로의 장모가 병이 나은 다음에 뭘 했는지를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뭘 했습니까? ‘수종 들었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베드로 장모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종 들다’라는 뜻의 헬라어가 ‘디아코네오’인데, ‘종처럼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망과 섭섭함과 미움의 분노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 이제 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예수에게 수종 드니라’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장모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가 마치 종인 것처럼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위 베드로도 안드레도 섬겼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니까 치유를 받고, 다른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실 때 예수님과 치유 받은 사람 사이에 항상 인격적 관계가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치유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복음서 저자들은 치유 사건뿐 아니라 양쪽이 대화를 한 것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니까, 예수님의 손길이 임하니까, 몸의 치유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영혼의 치유도 일어나고,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그러고 나니까 이웃과의 깨어졌던 관계도 회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성분들뿐 아니라 여러분 중에 혹시 지금 마음의 열병을 앓고 계십니까? 영적인 열병이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자꾸 원망스럽고, 서운하고, 섭섭하고, 밉고, 눈에 보이면 불편하고, 보기도 싫고, 회피하고 싶고..., 혹시 이런 증상이 있으십니까? 해결책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와 마음이 좀 맞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 대해 욕을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랬고 저랬고, 나에게 이렇게 서운하게 했고...


거기에 해결책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지금 나의 삶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증상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의 치유의 손길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 그분과 기도와 말씀으로 대화를 해보십시오. 분명 그 열병이 떠나고, 일어나서 주님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수종을 들게 되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분명히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그런 상태는 아닌데, 혹시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자꾸 화가 나고, 섭섭하고, 서운하고, 밉고, 불편하고 그런 감정을 갖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성경이 이것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30).


이 “사람들” 속에는 물론 베드로와 안드레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 형편을 예수님께 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내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이처럼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그럴 때, 아픈 사람이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편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에게 주님이 오시도록 하는 길,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지금 내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 특히 마음이 괴롭고 불편해 하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 그 사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님, 지금 저 형제님(자매님)이 이러이러한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저분을 낫게 해주셔야겠습니다.


이건 우리 다 할 수 있겠지요? 충분히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옆에 괴로워하는 형제자매가 있는데 ‘내 일이 아니니까 난 모르겠다. 난 내 일이 바빠서...’라고 하는 게 아니라, 또 그저 내 성공을 위해, 내 자녀, 내 가족만 위하는 것도 아니라, 그 안타까운 상태를 보며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저분에게 오셔서 치유해주십시오. 아픈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이렇게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겠습니까.


 

2.   계속되는 치유의 기적들 (32-34)


베드로의 장모가 치유되었다는 소식을 비롯해서, 예수에 대한 소문이 금방 지역에 퍼지게 됩니다(28). 그래서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를 데려와 치유를 구합니다.


저물어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동네가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2-34)


여기 다른 것보다도 표현들을 보십시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32), “온 동네”(33)라고 합니다. 근처 사람들이 전부 몰려왔다는 말입니다. 아픈 사람,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가지 주목해볼 점이 있습니다. “저물어 때에”(32).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29절을 보면 “회당에서 나와 곧”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날은 같은 ,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데려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정확히 말하면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병자들을 안식일이 끝나고 나서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안식일이 지났으니까 회당의 공식적인 일들은 끝났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이것은 사실 안타까운 건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안에서 교제하는 곳이 회당인데, 회당의 업무가 끝나고 나니까 다음에서야 회당 밖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회당 안에 귀신 들린 사람도 있었고(회당의 책임은 아니지만), 회당에서 능력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끝나고 나서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거룩해야 마땅한 ,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하는 곳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우리 믿는 자들에게 경고를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함께 나아갈 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밖에서 자꾸 어떤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오래 전부터 자꾸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해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회가 좋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교회 밖에서 어떤 운동을 성령께서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선교단체가 처음 나오게 원인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해보려다가 뭔가가 이루어지니까 교회 밖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모이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치 교회와 선교단체가 서로 대립관계에 있고 다투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아름답게 교회와 선교단체가 서로 동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측에서는 반드시 교회 내에서만 하라고 주장하고, 선교단체 측에서는 교회 안에서보다 자기 단체의 일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이든 밖이든 상관없이(물론 이단을 좇아가서는 되겠지만), 우리는 어떤 것이든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감옥에 갇히니까, 복음을 전하는 데에 경쟁자들, 이전에 바울처럼 사역을 제대로 못하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기하고 다투면서 하는 사람들은 경쟁심으로 불순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 1:17-18, )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을 보면서, 동안 바울 때문에 드러나지 못하고 유명해지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울이 불편하겠지’ 하며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야, 내가 갇히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괴롭게 하려고 설치는구나. 못됐다.’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전해지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나는 너무 기쁩니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마음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지금 2 후에 우리도 복음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귀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데려왔는데 예수님은 ‘모든’ 병자가 아니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데려오기만 하면 고쳐주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뭔가?


주님과 고침을 받는 사람 또는 데려온 사람 사이에, 어떤 믿음의 관계가 있을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진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고, 자기 유익만 찾아서 사람들은 그것이 됐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갈 ‘어떻게 하면 내가 여기서 이익을 얻을까?’라고 하는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이것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세울까? 하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병이 나아도 병에 걸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럼 혹시 나중에 병에 걸리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의 능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목적 (35-39)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5)


예수님은 해가 뜨기도 전에 나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생각나는 있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이민을 와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다음 일이 없으니까 잠이 온다는 진리(?)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벽 아직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셨는데, 저는 해가 저기 떴는데 그때에야 일어나고, 그러다 말씀을 보니까 창피하고 찔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보기에 이해할 없는 일입니다. 물론 경건한 유대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쁜 때에 혼자서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바쁠 조금이라도 자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힘으로 나와서 사역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새벽 일찍 일어나 나가서 기도하신다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따라와 말합니다.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6-37)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38-39)


지금 치유하시고 귀신 쫓아내셔서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함께 따르는 무리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이 그분의 오신 목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인 크리스천들, 교회도 바로 이것이 사명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인기를 즐길 있으셨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고 능력이 있으신데, 말만 하셔도 병이 나을 정도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렇게 치유 받은 사람들이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베드로의 장모처럼 자기를 종과 같이 섬겨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 그런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웃고 즐기고 떠들고 교제하고 시간 보내고 같이 먹고 마시고 그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땅에 오신 주님의 목적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홀로 새벽 조용한 시간에 따로 한적한 곳으로 나가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하며 교제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지치기 때문에 반드시 사역을 후에는 영적 재충전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힘을 얻어 다시 나아가 사역을 하는 겁니다.


요즘 평일에도 새벽기도에 여러 분들이 나와서 기도를 하고 가십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피곤하거나 그러면 쉬기도 합니다. 물론 아프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머리로 계산을 합니다. 나중에 일을 하려면 일단 아침에 일찍 나가면 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맞기도 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사실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시겠습니까? 제자들보다 피곤한 상태이십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나가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으로 교제를 하셨습니다. 그러셨겠습니까? 사역을 때의 파워는 잠을 자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역을 파워는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면 피곤할 같은데, 해보면 상식을 초월하는 힘이 주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먼저 찾는 일을 하며 나아가면, 상식을 초월하는 어떤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힘으로 나가 사역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가버나움 한곳에 모든 생각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지금 급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인기가 대단해지니까, 제자들도 얼마나 기쁘고 우쭐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을 우리가 해줘야 합니다.”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근처 다른 마을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버나움에도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만 머무실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많은 곳으로 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에는 이미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은 주님을 아예 모르고 있기에 가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 일이 많다고 여기에만 우리의 생각이 제한되어 있어서는 되겠습니다. 물론 이곳에도 일이 많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여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으로도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주님과의 뜨거운 관계와 서로 돌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밖으로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주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가서 믿는 분들에게 전도하고, 믿는 민족들에게 가서 선교해야 합니다. 이곳 미국에도 믿는 사람들이 많기에 전도는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동시에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민족들을 향해 나아가는 일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얼마든지 우리끼리 즐겁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솔직히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들과 있으면 말도 통하고 불편한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있는 훨씬 편합니다. 우리끼리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는 모임을 하면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면 너희는 나보다 일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땅에서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근처까지만 사역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거기를 넘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


나라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가장 두는 사람, 혹은 국수전(國手戰)이라는 바둑 경기를 제패한 사람을 국수(國手)라고 부릅니다. 국수전을 제패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존경받는 사람이 조훈현 9단입니다. 그는 9세에 세계 최연소로 프로에 입단했고, 한국 최초로 9단에 올랐으며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과 지금까지 1,800 회의 승리를 거두는 화려한 이력을 자랑합니다. 조훈현 9단은 1989 1 응창기배에서 우승해 중국과 일본에 밀려 바둑의 변방으로 평가받던 한국 바둑을 일약 세계 바둑의 중심에 올려놓은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가던 그가 31세이던 1984년에 9 소년 이창호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소년을 조훈현 9단은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6년이 흐른 , 조훈현 9단은 최고위(最高位)전에서 15 제자 이창호에게 패배하고 타이틀을 내줍니다. 같은 9월에는 국수전 타이틀도 넘겨주었습니다. 지난 한국에 가보니까 책이 나왔습니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인데, 책에서 말합니다. 그때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창호가 나한테 배웠지만 앞으로는 내가 창호에게 배워야지요. 창호는 내가 모르는 경지를 알고 있는 같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훌륭한 스승에게서 훌륭한 제자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14:12). 우리가 나가서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면 예수님이 아파하시고 누르려고 그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며 그분께 배운 제자라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그분을 뛰어넘는 제자가 되어야 하고 그런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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