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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 ✦
“권위 있는 새 교훈”
(마가복음 1장 21-28절)
[들어가는 말]
정부에서 새로 뽑은 공무원들에게 부서장이 와서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부서에 들어오게 된 여러분을 환영한다. 앞으로 여러분이 직장생활을 잘하려면 다른 걸 필요 없고 딱 내 규칙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럼 내 규칙을 알려주겠다. 첫째, 부서장의 말은 언제나 옳다. 둘째, 부서장의 말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셋째, 만일 부서장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언제나 첫 번째 규칙을 기억한다.”
그런데 강력한 카리스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부서장이 아주 허당입니다. 허당이 뭔지 아시죠? 겉으로는 뭔가 멋져 보이거나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실수투성이이고 허점이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서장에게 권위가 있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겉으로 되게 폼 잡으며 권위를 내세우지만 자꾸 실수를 하고 허점을 보이면, 부하직원들이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굽신거리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존경하지 않고 오히려 속으로 무시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권위주의라고 합니다. 실제 권위는 없으면서, 윗사람이란 이유 하나로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참으로 권위를 잘 인정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권위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전 같으면 위에서 명령만 내리면 다 복종했는데, 더 이상은 안 통합니다. 그러나 사실 권위주의가 잘못된 것이지, 권위는 좋은 것이고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든 관계를 권위의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권위가 있는 사람은, 자기 권위를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권위가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일부러 안 드러내도 권위가 흘러넘치는 분이셨습니다.
1.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 (21-22절)
1)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1-22절)
예수님은 지난번 본문에서 부르신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의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지난 5월 말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갈릴리 가버나움에 가보았는데, 그 터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회당 터도 있어서 돌아보았는데, 꽤 넓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에 거기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서는 깜짝 놀랍니다. 왜 놀랍니까? 가르치시는 것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자 같았기 때문입니다(22).
예수님이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과는 달랐다고 사람들이 느꼈다는 말에서, 그 동안 그들이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많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기관들에게서는 권위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율법학자인 서기관들과 대비시킨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서기관들처럼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제 보여주기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기관들은 늘 백성들을 향해 소위 ‘잔소리’만 해댄 것이고, 예수님은 진짜 교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서기관들처럼 백성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이 자기주장만 하는 내용이 아니라, 백성들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즘 부모가 자녀에게 참 권위가 없습니다. 특히 십대 자녀에게 그렇습니다. 뭐라고 하면 말도 안 듣고, 오히려 부모를 우습게 여깁니다. 야단이라도 좀 치면 불공평하다고 기분 나빠하며 대듭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혼내면 잔소리한다고 듣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아빠엄마는 잘못한 게 없느냐고 따집니다. 어디 십대만 그럽니까. 말 안 듣는 자녀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님들 여기도 다 계시죠?
그럼 어떻게 해야 부모가 자녀 앞에서 진정한 권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면 됩니다. 지난주 <새로운 삶> 공부 때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들을 때 소리 지르고 때리고 무섭게 하고 야단치면 권위가 세워지나요? 그러면 그럴수록 권위는 오히려 떨어집니다. 권위가 서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여깁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엡 6:4, 새)
우리는 자녀를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쳐야 합니다. 내 맘대로 하고 내 뜻대로 교육시키려 하니까 아이가 말을 더 안 듣는 겁니다. 바로 이것, ‘내 마음, 내 뜻대로’가 핵심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니 말을 안 듣습니다. 부모가 자기 생각만 주장하니까 안 듣습니다. 서기관들처럼 바른 말은 많이 하는데 삶은 없으니까 안 듣는 겁니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말만 잘하는 것이었고 삶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훈련과 훈계”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삶으로 훈련을 하셨고 그 가운데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훈련 방식이었습니다.
부모가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삶을 살면, 아이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말씀과 기도생활을 충실히 하게 되면, 자녀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권위가 자기 부모에게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이 야단만 치고 언성만 높이니 듣지를 않습니다. 부모인 자기는 한국 드라마나 예능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아이에게는 공부하라고, 책 읽으라고 하면 먹히겠습니까? 부모는 제대로 영적인 생활도 안 하고 적당히 편안하게 하면서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거나 열심히 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처럼 말이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자녀가 아빠엄마를 찾다가 방에 가보니까 무릎 꿇고 간절히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가보니까 아빠엄마가 평소에는 전혀 안 읽던 성경 말씀을 열심히 찾으며 삶 공부 숙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나오는데 보니까 새벽에 부모가 벌써 나가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가는 겁니다. 또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목장 모임 때 자기 집을 오픈하고, 또 주위 사람들을 초대하고, 특히 처음 이사 온 사람들이나 VIP들을 만나 식사에 초청해서 오게 하여 섬깁니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는 자녀가 반항하고 삐딱해질리 없습니다. 혹시 잠깐 방황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자녀의 상태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사실 신체적인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매일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동과 같이, 어느 정도 몸에 붙으면 말씀묵상과 기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세 달만 꾸준히 해보십시오. 거룩한 습관이 몸에 붙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능력과 권세를 받게 됩니다.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특히 자녀와의 관계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하는 핑계처럼, 시간이 없어서 성경 못 읽고 기도 못한다는 말은 99% 이상 거짓말입니다. 대부분은 거기에 별 관심이 없거나, 말씀과 기도에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비디오 볼 시간 있다면, 하루 두 끼 이상 식사한다면, 성경 읽을 시간도 있습니다.
이런 부부를 상상해보십시오. 분명히 같이 사는 부부이지만 전혀 대화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스케줄은 각각입니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가끔 집안의 복도에서 마주치며 잘 지내냐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을 알지 못합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방에서 잡니다. 이들은 분명히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친밀한 관계가 전혀 없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따로 만나 교제하는 시간이 없다면, 마치 그런 부부와도 같은 불행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전혀 대화가 없습니다. 따로 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은 신앙생활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단지 그런 관계로 만족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을 받습니다. 권위가 생깁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2) 권위가 없는 서기관들
오늘 본문에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는 권위를 느꼈는데, 왜 서기관들로부터는 권위를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알면 더 이상합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전문가, 쉽게 말해서 그들은 율법의 도사입니다. 율법을 줄줄 꿰고, 줄줄 외우며,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원본을 가져다 필사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알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르칠 때에는 왜 사람들이 권세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지식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통달했지만, 스스로 율법의 전문가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듯이, 말씀묵상과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큐티하고 기도한다고 저절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큐티하면서도 말씀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 읽고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딴생각하며 읽으면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애인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어도 마음속으로 다른 여자 생각하고 있으면 둘 사이의 관계가 세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성경을 많이 읽는다.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한다.’는 식으로 자기 자랑이나 자기 의가 되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권위주의입니다. 권위가 없으니까 권위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는 않으면서 그 사람의 편지에 적힌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외우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애인이 준 연애편지를 문학적으로 철저히 분석하고 내용을 모조리 외웁니다. 그녀의 문학적 경향은 어느 학파와 비슷하다, 어느 작가를의 경향을 닮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 정도로 이 여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 하며 자랑합니다. 그런데 정작 애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한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기관들이 가졌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애인이 하는 말을 모조리 기억하거나 애인이 준 연애편지의 문학적 가치를 따지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인격적 교제가 상대의 말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합니까?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그분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교제가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분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달으며, 그렇게 한 후에는 그 내용대로 실천하는 삶,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2.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의 방법 (23-26절)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3절)
놀랍게도,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던 그때 이 가버나움 회당에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회당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그처럼 기도와 말씀이 있는 곳, 경건해야 마땅한 장소에 귀신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를 다니시다가 좋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교회는 거룩해야 되는 곳입니다. 경건해야 마땅한 곳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별로 깨끗지 못하거나 잘못된 모습들이 교회 안에 종종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회당에도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귀신 들린 이 사람은 외모부터가 정상과는 거리가 먼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4절)
여기 보면 “우리가”라고 할 때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나는”이라고 할 때는 한 사람의 소리가 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게다가 머리는 풀어헤쳐지고, 침은 질질 흘리고, 거품을 품고, 몸은 지저분하고, 피도 줄줄 흐르고, 눈은 뻘개 가지고 마구 돌아가고, 괴성을 지르고, 힘은 굉장히 셉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한 그가 나타났을 때, 그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문제거리가 왔다고 귀찮아했을 것이고 또 그의 모습에 두려워하면서, 그가 여기를 빨리 떠나줬으면 하고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더럽고 끔찍한 겉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사로잡혀 괴로움을 당하는 그 사람의 불쌍한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통해 받은 능력과 권위로 그의 영혼을 회복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신을 제압하는 주님의 권세도 보지만, 한 가지를 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누구를 상대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5절)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상대해서 명령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쫓아낸 대상은 귀신이지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6절)
이 구절에서도 분명히 “더러운 귀신”과 “그 사람”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거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주변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제발 좀 이 지구를 떠나다오. 지구가 아니라도 최소한 나를 떠나다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아예 상대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유명한 말이 아주 잘 생각나기도 합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 또 어떤 때에는 잘못하는 사람을 볼 때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또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태 16).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들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마귀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지체를 미워하고 따돌리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에도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저 사람은 원래가 저런 인간이야”가 아니라, “저 사람은 참 특이한 방식으로 행동하네”라고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반대파야”가 아니라, “저 사람은 다른 의견을 내놓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문제야”가 아니라, “저 사람이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문제는 지적하되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이 가진 문제를 구분해서 보는 시각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말에 "찍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의 선입관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번이 두 번째야. 한 번만 더 하면 국물도 없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한 번, 두 번, 세 번, 세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남이 나에게 잘못할 때 그렇게 세고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중에 자기가 남에게 잘못했을 때 한 번, 두 번 세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찍힌 사람들이 있습니까? 혹시 제가 찍힌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나한테 찍혔으니까 이제 알아서 해.”라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찍힐 일을 했어도 확 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풀어주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수없이 주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을 때에도 한 번 두 번 세시면서 두고 보자고 하지 않으십니다. 계속 참아주십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랑과 인내의 눈으로 우리를 봐주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믿는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주님의 방법대로 대한다면, 바로 그 때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권위 있는 가르침의 결과 (27-28절)
권위 있는 말씀과 귀신을 쫓아낸 결과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온 갈릴리 지역에 빠르게 퍼지게 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7-28절)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권세와 능력을 받고, 또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방법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결과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자신이 유명해지거나 잘한다는 소문이 난다면 그것은 곧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떻다, “내가” 어떻다, 하는 것은 곧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큰일을 하는 데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능력을 부으셔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주어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광과 칭찬을 받으실 분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교회가 뭔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렇지. 우리 교회는 뭔가 다르지. 우리는 아주 잘하고 있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라고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나아갈 때, 주님의 능력과 권세를 받게 됩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를 통하여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이름만이 드러나며, 주님의 소문만이 퍼져나가는 귀한 역사가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 교회 안에 넘치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