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oRJMYIUYyA8?si=Jd1WZoJ-r39_VN0w&t=6
2024년 6월 23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21/최종 ✦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한 므나”
(누가복음 19장 11~27절)
[들어가는 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유언을 남기고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호흡이 가쁘고 굉장히 위독해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유명한 사람들이 특히한 유언을 남기고 죽는 경우를 봅니다.
“샤워 커튼을 욕조 안으로 집어넣어 둬.” - 호텔왕 콘래드 힐튼 (1979)
“내가 그에게 수탉 한 마리 빚진 게 있어.” 세계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주전 399)
“난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가기를 열망해. 지옥에서는 교황, 왕, 그리고 왕자들과 어울릴 수 있지만 천국에는 거지, 수도승, 사도들만 있을 테니까.” - 유명한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 (1527)
“나는 막 죽을 참이야. 또는 나는 죽게 될 거야. 둘 다 맞다.” 불어 문법학자 도미니크 부우르 (1702)
“이젠 내가 어둠 속으로 뛸 차례네!” -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 (1679)
“허튼소리 말고 꺼져! 마지막 말이란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하는 거야.” - 칼 마르크스 (1883)
이처럼 죽으면서도 여러 가지 특이한 말을 남기는 경우도 있는데, 대개는 굉장히 중요한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그 마지막 발걸음을 예루살렘을 향해 옮기시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남지 않은 이때 하신 말씀과 하신 행동들, 또 일으키신 기적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전역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가리켜 ‘기적의 사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권세 있는 교훈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랍비’라고 하고, 또 소문은 소문의 꼬리를 이어 계속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의 입에서 “저 나사렛 예수는 우리가 기다려 왔던 메시아가 틀림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보좌를 계승하였고,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권력에서 해방하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줄 다윗의 자손 메시아에 대해 흥분하며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 다윗의 후손이란 것을 알고, 병자들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외쳤습니다.
자연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그분이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실 것 같다. 그러면 우리도 끝까지 잘 따라야 큰 영광을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것이지, 그들이 신앙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랐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뭔가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계속 따르던 사람들이 열두 제자였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변화되어서 사도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 비유를 말씀하신 두 가지 동기
그런데 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기 직전에 누가복음에만 있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1~10절).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동쪽에서부터 들어가시는데, 바로 예루살렘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도시가 여리고였습니다.
그 여리고에서 세리장이었던 사람이 삭개오인데, 그는 굉장히 키가 작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뿐만 아니라 세리장, 즉 여리고의 세리들을 다 총괄하는 우두머리였으니까 얼마나 악한 일을 많이 했겠습니까? 자기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돈을 걷을 때 세금보다 훨씬 이상으로 거둬서 세금은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자기가 챙기는 그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이 세리인데, 삭개오는 그들 중에도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예수님을 보러 나왔고, 그랬다가 예수님이 그를 구원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신 다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열 므나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이 말씀을 하신 다음 므나 비유가 시작됩니다.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1-12절)
여기서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즉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여기 보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이제 왔으니까, 이제 로마를 물리치고 자기 민족을 다시 한번 회복시키시며 세계에서도 으뜸 가는 민족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구원자), 즉 구약에 기록된 바로 그분이시니, 이제 드디어 왕이 되실 것을 기다리며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지만, 메시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확히 그것을 알려 주셔야만 했습니다. 미리 열두 제자에게는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고 죽임당하고 또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것을 가르치실 필요가 있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는데, 바로 세상을 떠나시는 일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또 하늘에 올라가셔야 이다음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죗값을 치르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으셔야 하기에, 이것을 제자들에게 또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공개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둘째 동기는, 예수님이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주인이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그 사이의 긴 기간, 즉 예수님이 떠나셨다가 돌아오실 바로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3-14절)
12절에 보면 어떤 귀인이라고 나오는데, 어디 가면 “OO살에 귀인을 만날 것이다.”라는 말에 익숙한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상당히 사상에 의심이 가는 분들입니다. 몇 살에 만나는 귀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날 때부터 굉장히 고상한 집안 출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귀족이나 왕족인 사람이 왕위를 받기 위해 지금 먼 나라로 떠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14, 27).
이것과 똑같은 상황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오늘 ‘열 므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지식이 조금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삶> 공부를 꼭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이고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는 400년 이상의 긴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한 장만 넘기면 말라기에서 마태복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가 잘 모를 수가 있는데, 그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해야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를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식이 헤롯 가문에 대한 것입니다. 헤롯 가문의 족보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신약 성경에 헤롯이라는 사람이 몇 명 나오는데, 그중 가장 먼저 나오는 헤롯은 복음서에 나오는 헤롯 대왕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처음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왕이었던 바로 그 ‘헤롯’이 헤롯 대왕입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던 것을 스룹바벨의 인도로 재건했는데, 그 성전을 아주 화려하게 증축해 준 사람이 바로 이 헤롯 대왕입니다.
그런데 동방에서 박사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자기 왕위에 대해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학자들에게 물어보니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예언되어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을 알고도 아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박사들이 돌아오지 않고 그냥 가니까 속은 것을 알고 분노하며 두 살 이하인 베들레헴 근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아주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 대왕에게는 부인들이 많았는데, 그중 다섯 명이 특히 중요합니다. 부인들이 많으니 그에 따라 아들들도 많았습니다. 그가 후계자를 지목하려고 할 때 많은 아들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권력 투쟁을 벌입니다. 요즘도 재벌가에서 누가 후계자가 될지를 놓고 형제들이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그 당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헤롯은 아들들과 부인들까지 의심해서 그들 중 여럿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으로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박사들이 오니까 깜짝 놀라서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겁니다.
그때 왕위 계승에서 가장 앞섰던 인물이 헤롯 아켈라오입니다. 아켈라오는 마태복음 2:22에서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네 번째 부인인 말다케의 아들인데, 그의 형제는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였고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 아켈라오가 정식 왕이 되기 위해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나러 떠납니다. 그러자 아켈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똑같이 사절단을 보내서 아켈라오가 유대인의 왕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결국 로마 황제는 헤롯 대왕의 아들들인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세례 요한을 죽인 사람), 그리고 또 다른 부인의 아들인 헤롯 빌립에게 나라를 분할해서 나눠주고 분봉왕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아켈라오가 돌아와서 자기를 반대하던 사람들을 죽이는 등 포악하게 구는 바람에 로마 황제가 그를 유배 보내고 로마 총독을 유대로 보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지방은 분봉왕, 즉 전체 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같은 개념인 분봉왕에게 나눠주고, 유대 지역은 로마 사람인 총독이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배경에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가르치신 다음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35-40).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거기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45-48).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 19:47-48)
여기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던 때로부터 약 30년 전, 즉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그때쯤 아켈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제 30년쯤 지나서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며 죽이려고 했던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손에 움켜쥔 기득권과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집단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아켈라오 때는 그가 너무 포악하게 구니까 ‘이 사람은 자격이 없다.’ 하며 반대했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자격이 있으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됨으로 또 다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이해됩니다. 이 비유에서 책망받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둔 종이고, 둘째는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백성입니다. 이 세상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예수님 앞에 모였던 유대인들처럼, 수건에 한 므나를 싸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므나를 남긴 사람들이 있고, 왕위를 반대해서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 므나 비유를 통해 누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므나가 의미하는 것
이 귀인은 떠나가면서 열 명의 종을 불러 똑같이 한 므나씩 나눠준 다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13) 말한 후 먼 길을 떠납니다. 그러니까 이 돈을 가지고 열심히 장사하며 일해보라고 합니다. 결과가 어때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이것으로 일하라고 하고는 떠납니다.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4-15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것을 듣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유대 사람들에게는 그 아켈라오 사건이 아주 생생하게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14절 내용이 바로 아켈라오가 로마로 왕이 되고자 갔을 때 유대인들이 했던 일입니다. 사람들을 뒤로 보내서 ‘이 사람이 왕이 되면 안 됩니다.’ 하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바로 떠올렸을 겁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그 귀인은 왕이 되어 돌아오고, 종들로부터 나눠줬던 은화에 대해 보고 받습니다.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6-17절)
열 명에사 한 므나씩 나눠주었는데, 첫 번째 사람이 보고하기를 자기는 주인이 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를 ‘착한 종’이라고 칭찬하면서 열 고을을 가지라고 줍니다.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18-19절)
두 번째 사람도 주인이 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다섯 고을을 줍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0-21절)
그는 주인에게서 받은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님이 엄한 사람인 것을 무서워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주인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주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2-23절)
왕이 되어 돌아온 주인은 크게 분노합니다. 여기서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를 얻게 해야지 왜 그냥 두었다가 가지고 왔느냐?’라고 하지만 지금 은행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사람은 변명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변명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뒀다가 가지고 나온 것은 그냥 변명이라는 이야기를 여기서 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판결을 내립니다.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4-27절)
우리는 이 비유를 읽을 때 어떤 비유가 또 생각납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작년에 살펴보았고, <생명의 삶> 공부에도 이것이 나옵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새 종에게 각각 돈을 맡기고 떠나는데,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비유가 내용이 비슷하니까 같은 비유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는 내용도 다르고 말씀의 목적도 다릅니다. 실제로 다른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헷갈려서 달란트와 므나 비유를 혼동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도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을 불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열 므나 비유’에서는 내용이 어떻게 다릅니까? 여기는 세 사람의 종이 아니라 종 열 명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처럼 종들에게 다른 액수를 준 것이 아니라, 열 명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나눠주고 떠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목적이 다르며 다른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한 므나라는 것은 큰 화폐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달란트라는 것은 당시 그 비유를 듣던 사람들이 ‘그게 가능한가?’라고 할 정도로, 달란트를 종에게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 당시 종에게 달란트를 맡기는 주인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달란트는 종이 맡을 만한 액수가 아닐 정도로 큰 액수입니다.
한 달란트는 요즘 화폐 가치로 따져 약 100만 달러라고 보시면 됩니다. 100만 달러를 종에게 맡겼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500만 달러를 맡겼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자산 운영가에게 돈을 맡기는 차원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의 종은 지금 우리 식으로 돈을 굴려주는 자산 운영가가 아닙니다. 종은 종이고 노예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인데, 그런 종에게 각각 500만 달러, 200만 달러, 100만 달러를 맡기는 그런 일은 당시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라도 종에게 맡기는 주인은 그 당시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므나는 충분히 맡길 수 있을 만한 액수입니다. 한 므나가 100데나리온 정도였는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한 므나가 100데나리온이라는 것은, 100일 정도 일에서 버는 정도의 액수라는 겁니다.
지금 화폐 가치로 대략 계산해서 1데나리온을 100달러로 계산하면 대충 맞습니다. 한 므나가 100데나리온이니까, 한 므나는 1만 달러 정도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100만 달러인데, 그런 100만 불에 비해서 만 불은 굉장히 적은 액수이고, 또 당시에 충분히 종에게 맡길 만한 액수입니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갈리아 원정을 떠날 때 시민 중 자원해서 군대에 들어온 로마 시민군이 있었습니다. 전쟁사를 기록한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당시 그러한 로마 시민군의 연봉이 225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므나를 나눠줬다는 것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액수입니다. 1년 연봉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인데, 그러니까 장사하기에도 애매하고 뭔가를 하기에도 애매한 금액이 바로 한 므나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는 열 명이 똑같이 한 므나씩 받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이 비유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달란트 비유는 나중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하신 비유인데 그때는 또 다른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지금 이때는 어떤 생각으로 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나중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
이것을 소위 ‘지상대명령’ 또는 ‘대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주신 대 사명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라는 명령입니다. 핵심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예수님의 제자가 세계 속에 없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믿게 해서, 즉 영혼 구원해서 제자가 되도록 잘 훈련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명령은 교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복음을 너희에게 맡긴다.” 하고 주신 중요한 부탁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이 교회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고 하신 그 명령이 ‘대 사명’이고, 또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또 우리가 함께 교회로 모여서 복음을 전하며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라는 바로 이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길을 떠나면서 그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장사하다 말라는 게 아니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하라고 합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즉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일을 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다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조금 하다 관두지 말고 끝까지, 나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렇게 하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장사를 잘하고 있나? 나는 장사를 얼마나 잘하고 있나?’ 지금 얼마나 제대로 사명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까?
3.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던 종의 문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사람은 한 므나를 받아서 수건에 그대로 싸두었던 종입니다. 왜 그는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것입니까? 왜 그는 다른 종들처럼 나가서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지 못했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주인이 맡겨준 한 므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그의 변명이 나옵니다. “저는 주인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신을 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주인께서 주신 이 한 므나마저 장사한다고 하다가 자칫 잘못해서 잃어버리면 주인께서 하실 책망이 두려워서 저는 이것을 수건에 잘 싸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20-21)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이 그 당시 보통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종에게 돈을 맡기고 떠나는 경우에는 이렇게 수건에 싸두든지 아니면 땅에 파묻든지, 이렇게 가만히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돌려주는 그런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게 잘한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경우 종들이 대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괜히 나서서 일했다가 손해 보면 그 받을 징계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으면 본전은 간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놔뒀다가 주인에게 가지고 간 겁니다.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된 건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왜 잘못입니까?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달란트 비유도 그렇고 여기 므나 비유도 그렇고, 주인은 이 돈을 가지고 종들이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손해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어쨌든 일하라는 게 주인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일을 안 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뭐라고 하든지, 사람들의 통념이 어떻든지, 그 당시 사람들이 이런 돈에 대해 어떻게 하든지, 그냥 싸두든지 묻든지 상관없이, 자기 주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해라.” 그런데 장사를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이 사람의 문제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세상 시류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이 오랜 기간에 이 사람은 뭘 했습니까? 결국 주인의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일을 하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도 땅에 묻어 놓고 자기 일만 했지만, 므나 비유에서 한 므나를 받고 수건에 싸둔 이 종도 므나를 수건에 싸둔 채 주인의 일로 장사한 게 아니라 자기 일만 하면서 그 오랜 기간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종입니다. 이렇듯 이 사람은 한 므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물질주의 가치관이 팽배한 이 시대에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고 별것 아닌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제자를 만들어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아무리 우리가 가장 큰 계명과 대 사명을 여러 번 들으며 계속 강조해도, ‘뭐, 그건 그거고 나는 나지.’ 하며 전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이 시대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문제가 아닙니까?
‘사랑, 섬김, 복음, 진리, 영혼 구원, 제자 만들기,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어느 정도로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나는 주님의 명령을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세상 시류를 따라 적당히 해도 된다고 하며 살고 있는지, 반드시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혹시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그 정도의 가치밖에는 되지 않습니까?
둘째로, 이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은 모험이나 희생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장사하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실 겁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에서 ‘내가 혹시라도 해고당하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합니까? 특히 장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 당시는 지금과 굉장히 다릅니다. 지금의 눈으로 옛날 하던 장사를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절대로 장사하기에 좋은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업이 발달한 유일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상업이 아주 발달해서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완전히 타락한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곳은 상업으로 아주 번창하고, 다른 데는 상업이 전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사람들은 농업과 목축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중에 농업이나 목축업에 관련된 비유나 가르침이 많은 겁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잘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이 장사하라고 하니까, 이 종은 장사가 힘든 것을 알기에 ‘내가 힘들게 땀을 흘릴 필요가 있나? 그냥 가지고 있다가 주인이 오시면 그대로 드리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너무 힘들고 위험 부담이 있으니까 가만히 두고 있었던 겁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흐름을 깨뜨리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살던 대로 그냥 살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를 우리가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살고 있지 못하다면, 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지를 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의 삶> 과정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을 공부합니다. <새로운 삶> 공부 때는 그런 고민을 같이 해봅니다. ‘나는 내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공부하는 과정이 <새로운 삶>이고, 또 더 깊은 영성의 과정으로 가는 게 <경건의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크리스천이라면 다 알 텐데, 실제로 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만약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까? 혹시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말씀대로 살면 ‘적당히 믿어라. 저거 예수쟁이 다됐네.’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입니까? 아니면 한 영혼을 섬기며 사랑하는 그 희생과 땀 흘리는 노력이 나의 체면을 손상하고 무엇보다 내 소중한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이유 때문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특히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섬기려면 내 시간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소중한 시간에 요즘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코로나 시대 이후에 재밌는 것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걸 다 봐야 하는데, 언제 가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섬깁니까?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또 너무 힘드니까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우리가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열심히 사랑하고 섬기면 돈이 생깁니까?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을 쓰면서 해야 합니다. 돈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내 사업이 번창하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말씀대로 사는 삶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고, 또 죽음 저 건너편에 대해 확실한 소망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갖게 해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냥 시간을 보내고 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고 있는 건지를 항상 돌아봐야겠습니다. 드라마 한 편만 봐도 한 시간입니다. 기도를 한 시간씩 하는 건 그렇게 힘든데, 드라마는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지? 영화는 두 시간짜리가 왜 이렇게 금방 끝나는지? 그런데 정말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5분, 10분도 하기가 힘든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여리고 길을 가다 강도를 당해 쓰러진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곁을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 고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그 사람을 쓰러뜨린 것도 아니고, 그에게 어떤 해를 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도 만나 쓰러진 그 사람 곁을 왜 그냥 지나갔습니까? 쓰러진 사람을 돌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고 여러 가지가 들어갑니다. 시간을 희생해야 하고 그를 돌봐주는 데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희생을 원하지 않는 겁니다. 현상 유지가 좋습니다. 그냥 지나가면 됩니다. 내가 악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냥 외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극입니다.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줘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이 어떤 사람들을 해롭게 했습니까? 해코지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살인한 것도 아니고, 간음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돈이 그의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킨다고 해놓고, 사실은 돈이 그의 우상이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에 관심이 있고, 신앙을 가지는 것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도 드립니다. 교회에 나오다 보니까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은 없지만 천국이 혹시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쯤은 교회에 나와줍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내 시간을 더 이상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기희생을 거부하면서 주일 아침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때우려는 이 시대 교인들의 심리 속에서 그 부자 청년 관원의 비극이 보이지 않습니까?
셋째로, 이 종은 주인에 대한 오해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잘 몰랐습니다. ‘이 한 므나를 잘못 관리해서 잃어버리게 되면 주인이 야단치겠지. 내가 크게 야단 맞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주인이 엄하고 대단히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한 므나를 잃어버리면 주인이 크게 책망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장사하지 않은 이유이고, 그가 봉사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무언가 중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이 매우 위대한 사랑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해 보셨습니까? 남녀간의 사랑도 있고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사랑도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예로 들어보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저 사람이 얼마나 기분 나빠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내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조금 더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기쁘게 해줄까?’ 이런 생각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항상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억지로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복음도 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합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일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주 너의 하나님을 잘 믿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안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데 왜 내가 말한 것은 지키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주여, 주여 하면 내 말대로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라고는 믿는데,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둔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넷째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세 번째 종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주인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믿었습니까?”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매주 ‘사도신경’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 재림하실 것을 믿나?’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믿는다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질문을 바꾸어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내가 죽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내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삶에 대해 결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오늘 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아니, 그 사실을 정말 믿는데도 계속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잘해서 지금 이러는 게 아니라, 설교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 아니, 정말로 믿는데 그렇게 살고 있냐?’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계속 흘러가는 시간, 이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바라보면서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단하며 매일 살아가야겠습니다.
[나가는 말]
미국 사람들이 75년 정도 이 땅에서 산다고 계산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75년이라고 하면, 20년은 잠자는 일에 사용하고, 20년은 일하는 데 사용하고, 7년은 노는 데 사용하고, 6년은 먹는 데 사용하고, 5년간은 TV를 보는 데 사용하고, 5년간은 내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그래서 옷을 사는 쇼핑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3년간은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는 일에 소모하고, 2년 반은 화장실에서, 2년 반은 잡념에, 그리고 2년은 커피를 마시는 데, 그리고 1년은 전화 받는 일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삶 가운데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한 므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8장, 19장, 20장을 읽어 보면 유대인들에게도,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배척받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상징하는 것이 므나입니다.
예수님이 1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잃어버린 한 영혼, 잃어버린 한 므나를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어서 하신 비유가 이 므나 비유라는 겁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은 요즘 말로 하면 백만 장자였고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이 피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도 한 므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잃어버린 한 영혼이 한 므나라는 겁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예수님이 만들어 가기를 원해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이고, 바로 그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치 수건으로 덮어서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려고 하는 한 므나를 남긴 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하지 않고 다른 것만 하는 이 한 므나를 남긴 종을 빗대어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바로 한 므나를 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로 볼 때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지만, 아니 오히려 손해를 보고 해를 당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것이 진정한 교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또 그런 우리 각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