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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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6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20 ✦
“자기를 높이는 자인가, 자기를 낮추는 자인가”
(누가복음 18장 9~14절)
[들어가는 말]
오늘 세례받은 분들처럼 우리 중에는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이 계십니다. 반면 우리 중에는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교회를 다니며 주님을 믿는 삶을 가리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신앙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신앙생활이 따로 있고 내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부터는 내 인생 자체가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동행하는 삶,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삶이 곧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기뻐야 정상입니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사는 여러분은 지금 기쁨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물론 기쁨이라는 것은 꼭 감정만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우리가 기쁜 것도 있지만, 어렵고 힘들어도 그 가운데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삶에 기쁨이 없다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가 행복하고 기쁩니다. 그런데 기쁨이 없다면,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구나’ 하고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삶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이후에는 끊임없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참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수많은 크리스천이 ‘이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 감사하다. 나 이제 천국 간다.’라고 하는데, 그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고 항상 뭔가가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주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한다고, 삶 공부 과정을 마쳤다고, 매일 큐티하고 새벽기도를 한다고, 또 무슨 무슨 제자 훈련을 받았다고 저절로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고 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런 것들을 했다고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삶 공부는 주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원리와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기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하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 모두 크리스천으로서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평생 살아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또 예수님의 길을 따르면서 변화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세어보니까, 작년에 영어권 목회자가 없어서 한 해 동안 설교를 무려 126번이나 했습니다. 토요새벽예배는 포함하지 않고 주일 영어예배, 한국어 예배, 그리고 수요예배 때 설교한 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그렇게 많이 전했는데 나는 얼마나 변화되었나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또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었던 여러분은 얼마나 변화되셨습니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이 변화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며 기도하고 예배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들은 말씀, 배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목장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고 잠깐 친교 점심을 하고 가면, 거기에서 우리가 정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정말 실천해 보자고 해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 서로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 믿는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초청하고, 거기 와서 같이 사랑으로 섬기고 하는 가운데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알아도,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고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데, 이 운동이 좋고, 이렇게 하면 좋고, 이렇게 하면 여기 근육이 키워지고, 저렇게 하면 저기 근육이 키워진다고 하며 머리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서 그대로 운동해야만 자기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그대로 살지 않으면 나에게 별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의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또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행복하고 풍성하게 살 수 있는데, 믿은 후에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 노릇을 하면, 즉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면,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살아 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더 부자유해집니다. 자유가 오히려 없어집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좋아하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를 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성경에서 지적하는 죄 중에서 소위 ‘일곱 가지 큰 죄악’ 또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Seven Deadly Sins)’을 지목하여 경계해 왔습니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4세기의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였습니다. 이 일곱 가지 죄는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입니다.
이중에도 교만이 가장 앞에 오는데,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며, 다른 죄악들은 교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교만의 문제에 대해 다룹니다.
1. 교만의 특징
1) 교만은 자기중심적이다
오늘 본문은 소위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라고 불리는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교훈을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9절)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의 대표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봐도, 건강한 자존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존감(self esteem)은 나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장 큰 계명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것이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잘 사랑해야 이웃도 잘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 것만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바로 그게 죄입니다. 자기는 너무나 의롭고 자기는 너무나 소중하다고 여기면서 자기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일을 하거나 수를 쓴다면, 그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죄가 됩니다.
사실 교만이라는 것은 우상 숭배인데, 자기 숭배의 일종입니다. 자기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즐거운데 다른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면, 바로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숭배의 경향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병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 3:4-5, 새번역)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 따먹은 겁니다. 사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교만이고,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게 조금 더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 같은 회의를 할 때,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데, 꼭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런 것이 바로 교만이고, 바로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도 그런 예화가 나오지 않습니까? 몇십 년 전 이야기입니다. 서부에 있는 어느 교회가 오래전에 새로 교회 피아노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피아노를 어디에 둘까를 결정하려고 당회를 하는데 한 장로님이 “우리 성가대가 위에 있으니까 그 바로 옆인 위에다 놓읍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장로님이 “그 위가 좁은데 뭘 위에 놓습니까? 아래에 놓읍시다.” “아닙니다. 위에 놓읍시다.” “아닙니다. 아래에 놓읍시다.”
이러다 당회가 둘로 갈라지고, 그다음 제직회에 가서 좀 얘기해 보자고 했는데, 제직회가 또 “위에 놓읍시다”, “아래에 놓읍시다”라고 하다 갈라지고, 온 교회가 갈라지고, 그래서 실제로 교회가 갈라졌다는 겁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당사자들에게는 이게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위에 둘까, 아래에 둘까, 하는 것으로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이게 참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후 한 5년쯤 지나서 장본인인 두 분 장로님이 어느 한인마켓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났으니까 악수하며 서로 풀면서 그때 미안했다고 이하며 “잘 지내죠?”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만있어 봐. 그때 우리가 피아노 갖고 그랬는데, 피아노를 위에 놓자, 아래 놓자고 했는데, 가만 내가 위에 놓자고 그랬나, 아래에 놓자고 그랬나?”
무슨 말입니까? 위에 놓느냐, 아래에 놓느냐,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럼 뭐가 중요했습니까? 한 분이 위에 놓자고 하니까, 다른 분이 욱하고 화가 나면서 ‘아니, 자기가 뭔데 위에 놓재?’ 그래서 “아래에 놓읍시다.” 이렇게 된 겁니다. 위냐 아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존심, 자아, 에고 같은 게 중요해서 그렇게 싸우다가 교회까지 갈라졌습니다. 이게 실화인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피아노를 위에 놓느냐 아래 놓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의외로 많은 교회들이 카펫 색깔을 무엇으로 하느냐를 놓고 싸웁니다. 카펫을 파란색으로 하느냐 빨간색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깔면 됩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도 건축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친교 점심으로도 밥을 먹느냐, 빵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이고, 저렇게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울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일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피아노를 아래 둘까, 위에 둘까를 놓고 싸우며 갈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위에 놓아도 좋고 아래 놓아도 좋습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내 주장을 통해 이웃과 사이가 멀어지고 서로 불편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겠습니까? 내 뜻대로 일이 진행되어서 사이가 갈라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내 뜻대로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덕을 세우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교만이 그것을 막습니다.
2) 교만은 이웃과 자기 사이에 벽과 담을 쌓는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0-11절)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모두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데, 바리새인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같은 자리가 아니라, 떨어져 다른 장소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같은 존재와 같은 데서 기도하기 싫어서 아예 자리를 멀리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두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같지 아니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11절, 새번역)
바리새인은 자기가 저런 죄인들과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로마에 아부하는 사람,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나쁜 존재,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 갖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원래 거두어야 하는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거두어서 세금은 로마에 내고 나머지는 착복하여 자기 재산으로 하는 등, 그렇게 착취하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할 가치도 없는 비천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세리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바로 그런 것이 교만입니다. 자기는 의롭고 세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교만입니다. 세리에 대한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심판해 버리는 것, 그래서 ‘나는 저런 유와는 함께할 수 없다. 나는 다르다.’라는 것이 교만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게 해주신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를 멸시하면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 하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켜 교만이라고 지적하십니다.
혹시 우리도 기도할 때 다른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같은 자리가 아니라 다른 기도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저 죄인들과 다르게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기도합니까?
이 바리새인이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하나님, 제가 저 죄인들처럼 저렇게 죄를 지으며 살 않고 세리처럼 저렇게 매국노로 살지 않는 위치에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한 다음에, ‘저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 죄인입니까? 하나님,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역사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진짜 감사의 기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기도할 때 ‘나는 저 사람들과 달라서 감사합니다. 저 사람들은 지옥으로 갈 사람들인데,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사하지만, 그렇다면 그다음에 이어져야 하는 기도는 ‘하나님, 그냥 두면 저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데, 저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교제할 때 교제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는 것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겠다고 해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나 자기가 편한 사람들과만 만나기 시작할 때, 그것이 파벌을 조성합니다. 그 속에는 무서운 우월감과 교만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 편한 사람들만 만나는 것은 파벌을 만드는 것이고 교회를 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에는 교만이라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다른 형제자매에게 너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남을 비판할 때는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건설적인 비판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 펄펄 뛰며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족 중에 있으면 가족 전체가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 사람이 일터에 있으면 일터 전체가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있으면 교회 전체가 큰 고통을 당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렇게 자꾸 벽을 만들고 담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꾸 편을 가른다는 것입니다. 담을 쌓고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이 교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다리를 놓습니다. 브릿지 빌더(bridge builder), 즉 다리 놓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갈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간격에 다리를 놓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도 다 깨져 있는데, 서로와 서로 사이에 이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그분을 좇아 다리 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한번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 때문에 이웃이 화목한가, 아니면 괴로워하나?’ 이것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교회가 화목합니까, 아니면 뭔가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가 어느 자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환영해 줍니까, 아니면 불편해하며 눈치를 봅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제가 상당히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막 웃고 떠들 때 목사가 나타나면 갑자기 분위기가 다운되면서 조용해집니다. 그러면 제가 좀 불편한 사람인 것 같은데, 사실 그 정도는 애교입니다. 정말로 내가 탁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어서 오라고 환영하며 기뻐하는 분위기인지, 아니면 뭔가 힘들어하는 눈치인지 봐야겠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은 자꾸 벽을 쌓는 사람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단절의 벽을 쌓는 죄악입니다.
3) 교만은 위장된 마음이다
교만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려는 죄악입니다. 본문은 기도에서의 죄악 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1-12절)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나쁘다고 지금 이야기하는데, 기도하고, 저런 죄인들과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는 그 자체가 나쁘거나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게다가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는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지금 금식이나 십일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마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한국어로는 ‘나’가 두 번만 나오지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문장마다 ‘나는 이렇다.’라는 식으로 ‘나’가 계속 나옵니다. 이런 기도가 어떻게 진실한 기도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내 업적이 얼마나 화려한지, 그것을 하나 앞에서 자랑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주어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나는’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도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눅 22:42, 새번역)
그런데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주어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입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면 되지만, ‘나는 이렇고 저렇다.’는 식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는 다만 자기 위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변화가 안 됩니다. 잘못된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는 기도를 하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그러나 교만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중심적으로 나갑니다. 자기를 자꾸 포장하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지금 바리새인이 이런 식으로 “나는 저들과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고 나서 내려온 다음, 만약 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당신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고 잘 말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축복해 주었다면, 그는 진실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정말 기도를 제대로 하나님 앞에 드렸으면, 하나님께 나아간 그런 기도였으면,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에 변화를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도, 이렇게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다 해놓고서도, 가서 다른 사람을 향해 찬바람이 쌩쌩 불고 냉랭하고 정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올바른 기도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 교만의 결과
그렇다면 교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교만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4절)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인 너는 구원 못 받아. 안 돼. 불가능!’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가 구원받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실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세례식도 있었지만, 세례라는 것은 사실 겸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제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그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려면 자기 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하면 그것이 안 됩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를 믿는 순간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었다는 사람이 교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분명히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게 산다면 하늘 복과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만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다 자기로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시겠습니까? 14절에도 나와 있듯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집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성경에 수없이 나와 있고, 특히 잠언을 보면 교만에 대해 경고를 많이 합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교만은 사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본질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했기 때문에 악한 사탄이 되었고,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본질입니다. 그뿐 아니라 마귀는 파멸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자기만 망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함께 망할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교만하라고 충동질합니다. 우리 안에서 계속 교만을 충동질하기 때문에, 교만을 조심하며 물리쳐야 합니다.
3. 교만을 극복하는 길
그러면 교만의 죄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됩니다. 그것은 세리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로 일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리가 괜찮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가 그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겨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나오는 그 마음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리의 그런 태도를 배우고 그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3절)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이웃의 도움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뿌리치고 또 이웃을 뿌리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실 사역도 하고 있지만, 분명히 같이 기도해 주면 좋은 제목이 있는데도 쉬쉬하며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것도 교만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의 기도 제목을 부탁하고 기도를 요청하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교회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 요청하지 않는 것은 사실 교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너무나 고독한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세리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세리를 정당화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리로 살아도 괜찮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만약 이 세리가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해 놓고는, 그다음에 내려와서 사람들을 또 착취하고 돈을 갈취하는 식으로 나갔으면, 이 기도는 가짜 기도입니다. 진짜로 기도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했으면, 그다음에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는 세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겠다.’라는 식으로 뭔가 변화된 삶이 이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비유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그렇게 자세히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태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원래 구약에 나오는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과 같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이 있는데 성소의 맨 앞에 커튼 쳐놓은 곳이 지성소입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이 1년에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 그 안에 법궤(또는 언약궤)가 있는데, 그 앞에서 대제사장이 피를 뿌립니다. 그런데 그 법궤 위에 판 하나가 앞쪽으로 붙어 있습니다. 그 판을 ‘속죄소’(은혜의 자리)라고 부릅니다. 그곳에 피를 뿌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기도가 응답 되던 것이 구약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를 대신한 속죄의 제물을 바칩니다. 여기 그 피가 있습니다. 이 피를 보시고 저를 용서해 주시며 저의 기도를 받아주십시오.”라는 의미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는 당장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아까 우리가 부른 곡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라고 노래했는데, 그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같으면 그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갔다가는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죽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습 그대로 나왔으면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렇게 설 수 있도록 하고 우리 기도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나아가는 순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주님 앞에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늘 확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귀고리를 하거나 목걸이를 하시는 분들은 늘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보시고 또 착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 덕분에 이렇게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시카고에 가면 다운타운에 Moody Bible Institute라는 신학교가 있고, 또 무디 교회(The Moody Church)도 있습니다. ‘무디’는 사람 이름인데, 19세기말 유명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디 신학교 합창 지휘자가 한국 분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 무디(Dwight L. Moody) 목사가 스코틀랜드에서 전도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그 집회에 한 소녀가 참석했습니다. 이 소녀에게는 평소에 고민이 있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가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나는 배운 것도 없는데다가 예쁘지도 않고, 명성도 없고, 돈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아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자격지심 속에서 괴로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집회에 참석했는데 집회의 마지막 날 무디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 설교하고 있을 때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그 소녀가 우뚝 서서 복도를 통해 정면을 향해서 달려 나왔습니다. 나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족한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받아주시지요?” 달려 나오는 소녀를 끌어안으면서 무디 목사님은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께서 그대로 받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매를 받으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날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감격과 해방감으로 주님 앞에 찬양과 감격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성가대의 에리사 헤밀턴(E. Hamilton)이라는 성도가 펜을 들어 작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디 목사와 평생을 음악 목사로 동역했던 생키(Ira Sankey) 목사가 그 자리에서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아주소서.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바로 이것이 겸손이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의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