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OoHvawgubM0?si=qBA96iyy0HLKzLtG&t=91
2024년 6월 9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9 ✦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누가복음 18장 1~8절)
[들어가는 말]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할 때가 있고, 어려운 환경이 낙심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의외로 기도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어서 낙심되고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겁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평소에 안 하던 금식까지 했는데, 또 안 나오던 새벽기도까지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응답이 잘 되고 내 기도는 응답이 안 될 때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 시절 당시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던 때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를 티브이로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기억으로 이란과의 원정 경기였는데, 한국은 반드시 그 경기를 이겨야만 월드컵에 나갈 수 있고 지거나 비기면 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한국이 1: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그러다 이란이 프리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골이 안 들어가게 해주세요. 하나님 이란은 이슬람 쪽이고, 우리 팀에는 기독교인들도 있으니까 골이 안 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어린 마음에 기도했는데, 기도하자마자 골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제가 너무 실망했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꼭 참고 계속 보는데, 다시 한국이 2대1로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대로 끝나게 해주세요.”라고 다시 기도했는데, 또 골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2대2로 비겨서 한국이 탈락했습니다.
제가 그때를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다니.’라고 했는데, 그것도 1대1 될 때 안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자마자 프리킥을 차서 헤딩으로 골이 들어가니까 너무 허무했습니다.
이런 것은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것이지만, 기도하다 시험에 들고 낙심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저도 그때 어린 마음에 ‘에이, 교회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면 ‘하나님, 저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는데 왜 기도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대드릭도 합니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혹시 지금 그런 상황 속에 처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봤자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네.’라는 생각을 넘어서 ‘에이, 이제는 교회에 안 나간다.’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아 낙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의한 재판장 비유’를 말씀하시며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할 것을 격려하십니다.
1. 불쌍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절)
오늘 본문은 소위 ‘과부와 재판장 비유’라고도 불리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과부는 지금 이 시대의 과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굉장히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돈도 연줄도 권력도 없고,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저렇게 되었다는 말까지 듣고 생계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율법을 통해 계속해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특히 구약의 율법에서 돌보아야 할 세 종류의 사람들을 콕 집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 즉 외국인, 부모가 없는 불쌍한 고아, 그리고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단순히 남편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과부는 사회적 지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게 남편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들까지 없으면, 또는 딸만 있거나 자녀가 없으면 정말로 사회적 지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생존이 힘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 예루살렘 초대교회 담임목사 격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야고보서에서 역시 그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 1:27, 새번역)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진짜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참 경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는 세속에 물들지 않게 경건하고 거룩하게 산다.’라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거룩하고 경건한 삶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 특히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헛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는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마저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자신의 괴로운 상황을 해결해달라고 재판장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이 재판장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2-3절)
이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과부가 간곡하게 호소했지만, 재판장은 과부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과부는 계속 찾아가서 간절하게 하소연하지만, 불의한 재판장은 그것이 귀찮기만 합니다. 해결해 줄 마음은 없이 귀찮아합니다. 사실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성실하고 선한 재판장이라도 일이 많아지면 귀찮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밤낮으로 재판장을 찾아가 간청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4-5절)
이 과부가 얼마나 끈질기게 찾아갔던지, 재판장은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재판장은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가는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2. 불의한 재판장과는 반대이신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보면서, 불의한 재판장이 하나님이시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과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처럼 계속해서 떼를 쓰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귀찮아서라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십니다. 그와는 완전히 반대이십니다.
또한 기도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마구 조르며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떼를 쓰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제 갓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와 자비를 내려주고자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조금 엉터리 기도라도 잘 들어 주십니다. 잘 자라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래전 어린이들의 성지가 있었습니다. Toy-R-Us라는 어린이들을 위한 ‘거룩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 상점이 있었을 때, 우리 아이도 어려서 장난감을 사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 하나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소리를 지르며 울어대는 겁니다. 엄마가 자기의 원하는 장난감을 안 사주니까 그렇게 한 겁니다.
이처럼 철없는 어린아이는 가게에서 자기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발견하여 사달라고 조르는데, 부모가 안 사주면 이렇게 아예 바닥에 누워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창피해서라도 빨리 장난감을 사서 아이의 손에 쥐어주고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속상하지만 철없는 아이의 요구를 그렇게라도 들어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도 그런 식으로 막 떼를 써서 조르니까 하나님이 어쩔 수 없어서 주시는 식으로 그렇게 기도해서 응답받는다면 우리 영혼에는 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5)
시편 106편의 배경은,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 즉 이집트에서부터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왔는데, 그때 막 욕심을 부리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며 떼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들이 요구한 것을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들이 요구한 것을 받았는데도 영혼이 풍성해지지 않고 쇠약해진 것입니까? 왜 삶이 행복해지고 좋아진 게 아니라 더 괴롭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응답받은 내용 자체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물 자체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안 사준다고 마구 떼를 쓰며 드러누워 버리는 아이는 아빠 엄마가 남들 앞에서 얼마나 곤란해하는지, 저 장난감을 사줄 형편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원하는 것 가져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떼를 쓰며 드러눕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떼를 쓰면 부모가 사줄 거라는 기대감으로 더 소리를 질러 댑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아이들을 몇 명 봤는데, 제가 보니까 어떤 아이는 그냥 울어대고, 또 어떤 아이는 막 울지만 진짜 우는 게 아니고 눈물은 안 나면서 눈을 굴리는 겁니다. 옆을 슬쩍 보면서 사람들 눈치를 살피고 또 아빠 엄마도 보면서, 막 이렇게 하면 뭔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상당히 똑똑합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는 너무 어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가 아닙니까?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면 그 아이가 성장하고 성숙해집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교육이 됩니다. 오히려 떼를 쓰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주입되어서 계속 그런 잘못된 방향, 자기밖에 모르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아빠 엄마가 다음에 주겠다고 하거나 다른 것을 줄 때 참을 줄 알고 인내를 배울 때 성숙해집니다.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하는 때부터 철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떼를 써서 응답받는 기도는 자기가 영적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뭔지,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왜 지금 이렇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전혀 헤아리지 않으면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될 때부터,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 하는 것을 헤아릴 줄 알게 될 때부터 신앙이 자라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간절히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항상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부르짖는 기도, 눈물의 기도, 때로는 생명을 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시한 일에 막무가내로 조르거나 떼를 쓰는 기도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그런 식으로 오해하게 되면 기도 응답이 안 될 때 낙심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니, 쟤는 떼쓰니까 장난감을 사주는데, 왜 나는 떼를 써도 안 사주나?’ 하고 생각합니다. 왜 누구 기도는 들어주시고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느냐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는 기도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친밀한 교제입니다. 한마디로 관계입니다. 이 교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해주신 일에 감사하기도 하고, 죄를 고백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본문의 ‘불의한 재판장 비유’를 보면서, 하나님께 떼를 쓰며 귀찮게 해드려서라도 내가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핵심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뭐라고 결론을 내리십니까?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6-8절)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과부의 간청을 번거롭게 여겨서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외아들의 피 값을 통해 구원하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을 찾는 자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리가 없으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늘 부르짖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택하신 자들’이라는 말은,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택하지 않으신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끊임없이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면, 기도가 당장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믿는다면, 떼를 쓰기보다는 간절히 아뢰며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를 향한 그분의 선한 뜻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자녀로 받아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나를 분명히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는 겁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외아들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무슨 억만금이 더 중요하시겠습니까? 외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것을 내어 주신 분이 그보다 못한 것이나 시시한 것을 왜 안 주시겠느냐는 겁니다. 최고의 것을 주셨는데 어떻게 시시한 것을 안 주시겠습니까? 그보다 못한 것을 왜 안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다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하셨기에,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의심될 때, 의심이 생길 때, 십자가를 보면서 의심을 해결해야 합니다. 최고의 것을 주신 하나님이 왜 그보다 못한 것을 안 주시겠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기도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맨 끝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 그냥 읽으면 하나님께서 그 원한을 천천히도 아니고 속히 풀어 주실 것이라고 해놓고서는 “그러나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마치 김을 빼거나 초 치듯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사실은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심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이라기보다는, 문맥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항상 대화하고 말씀드리며 낙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지 않아도, 가장 귀한 것을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신뢰하며 더욱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임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을 오늘 찾고 계십니다. 그저 자기 뜻대로만 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되는 것을 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그렇게 믿음으로 간구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고 자기밖에 모릅니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을 보십시오. 세계를 보십시오. 전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때에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신뢰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 응답이 안 되어도 끈질기게 기도하며 나가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을 봅니다. 인내가 부족합니다. 아니,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물론 실제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도 믿고, 전지전능하신 것도 믿습니다. 사도신경을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이 뭔지,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어야 하고, 묵상해야 하며, 특히 삶 공부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을 잘 듣는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하나님을 만들어 내어 믿습니다. 램프를 문지르면서 ‘하나님, 하나님, 이거 주세요.’ 하면 나와서 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내 종으로 부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이 안 되면 쉽게 포기하거나 낙심하거나 분노합니다.
하지만 종은 무엇입니까? 특히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 좋은 주인이 뭐라고 하든지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실망할 이유도 없고 화가 날 이유도 없습니다. 17장에서 종이 주인이 시킨 대로 다 한 다음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고 고백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종은 주인이 시킨 것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주인이 시킨 것을 종이 했다고 해서 상을 주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종입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자기가 잘 아는 부분에 있어 주인이 잘 모르는 것 같으면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고 ‘아, 그거 좋구나.’라고 하면 나도 좋고, 주인이 ‘그것보다는 다른 게 좋다. 다른 것을 해라.’라고 하면
주인의 그러한 뜻을 받들어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왜 실망하고 낙심하며 화가 납니까? 아까 그런 식으로 기도했는데 응답이 안 되면 왜 실망이 되고 낙심이 되고 화가 납니까? 내가 종이 아니라 주인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 종이 되셔야 하는데, 종이 감히 주인인 내 말을 안 들으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지연될 때 낙심이 되고 화가 나는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 즉 마지막 날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정말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을 보겠느냐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 6:46)
예수님을 향해 ‘주여’ 했으면 자기는 종이라는 말인데, ‘나는 주인이고 너희는 종인데 왜 내가 하는 말을 행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말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그게 진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뭔가 행함이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지만 정작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많았고 또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ᄄᅠᆫ 사람이겠습니까? 내 뜻이나 내 시간표대로 되어야 한다고 기도하며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과의 관계에 힘쓰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예수님이 오실 때 그런 믿음의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신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양곡입니다. 아까 우리가 불렀던 찬양곡 가사가 뭡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뜻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바라며 순종하는 것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도하다가 응답이 오지 않거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거절하셨다고 생각하여 낙심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지금 혹시 그런 상태에 있으십니까? 그래서 ‘기도해 봐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니까, 이제는 기도 안 하겠다.’라고 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만약 그런 상태에 있다면 두 가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말로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이신가,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내가 필요할 때 불러다 ‘이것 좀 해주세요.’ 하고 부리는 그런 분인가? 아니면 정말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신가?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사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누가 내 삶의 진짜 주인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일치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이것, 내가 기도하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과 맞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신가, 아니면 내가 주인인가?
이 두 가지를 꼭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살고 있는지, 또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정직하게 찾고 답할 수 있다면 기도하다가 낙심할 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했는데 응답되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그리고 계속 기도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주님이 쉬시지 못하게 하라
19세기 유명한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0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거 어떡하지? 큰일 났네.’ 하고 염려하는 시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보다 훨씬 길지 않습니까? 여러분, 앉아서 기도하려고 하면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갑니까? 그런데 드라마를 틀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갑니까? 그런데 염려해도 시간이 빨리 갑니다.
그러나 “10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이것은 10년의 걱정거리가 10분의 기도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기도의 능력이 강하다는 뜻도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기도의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된다.’라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해도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귀찮아하는 때가 한 번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얘는 왜 이렇게 기도를 안 하나? 빨리 좀 기도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십니다.
기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대화입니다. ‘얘는 왜 나와 이렇게 대화하기 싫어하나? 나와 대화를 좀 하면 좋겠다.’라고 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약 내 자녀가 나와는 대화를 안 하고 다른 어른들과 대화를 자주 한다면 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실 아이는 자기 아빠 엄마와 가장 많이 대화해야지, 어떻게 다른 어른들과 대화를 훨씬 많이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는 대화를 안 하고 다른 데 가서만 시간을 보낸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서운하실까요? 사실 하나님은 서운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신데 왜 서운해하고 섭섭해하고 삐지고 그러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한마디 여는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6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7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 62:6-7, 새번역)
주님이 자꾸 약속을 잊어버리셔서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자꾸 피곤해서 쉬어야겠다고 하시니까 쉬시지 못하도록 귀찮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니까 기도를 통해 말씀드리며 우리 스스로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한 내용을 다 기억하십니까? 기도 카드 쓴 것을 다 기억하십니까? 기도 카드를 써 놓고 잊어버릴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기도해 놓고서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연초에 오랜만에 2024년도 333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매주 주보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대부분 기억을 못 하실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를 안 하니까. 기도를 매일 하면 이 내용이 그냥 들어옵니다. 왜? 매일 하니까.
“하나님, 이준원 목사에게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고, 모일 때마다 은혜가 넘치는 목장과 주일예배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것을 그냥 읊는 데에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하루에 3번 33초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데 이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기도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하면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즐거워하며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계속 일하시도록, 계속해서 기도로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 너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시 121:3-4, 새번역)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기를 쉬지 않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까 주무시거나 쉬시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슬프시게 하고 근심하시게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일하시지 못하게 하고 날마다 쉬시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요즘 기도 좀 하세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전 세계를 돌보시느라 얼마나 바쁘시고 피곤하신데, 나까지 기도를 부탁드리면 하나님이 더 피곤하시고 힘드실 테니까 저는 하나님을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사실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오히려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위해 너무나 일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 너무 설치지 마시고 저기 구석에 그냥 가만히 계세요. 이 일에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제가 다 알아서 하면 돼요. 제 삶은 제가 알아서 하면 돼요. 가만히 계세요.’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에 대해 또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상황을 다 알고 계시고 또 얼마든지 나를 인도해 줄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내가 귀찮게 기도로 아뢰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나라의 영적 원리를 그렇게 정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일하시는, 그런 원리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바로 이 원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기도가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에 동참한다는 벅찬 감격과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기도 응답이 더디거나 안 되더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기도하자고 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옆에서 속삭입니다. ‘뭐 하러 기도하니? 응답 되지도 않는데 왜 기도하니?’라고 속삭이는 유혹에 금방 넘어가서 기도를 멈추고 맙니다. 참 안타깝고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상 숭배로 황폐하게 된 이 땅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송하고 협력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무너지고 깨진 가정,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 방황하는 자녀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운 사업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못 이루는 가정을 돕고 싶어 하십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자녀의 앞길을 인도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병들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합심해서 그렇게 간절히 그런 제목들로 기도할 때, 우리가 이렇게 ‘세겹줄 기도’로 하든지, ‘다니엘 금식기도’라든지, 또 중보기도실에서 하는 기도든지, 합심해서 하는 기도를 너무나 기뻐하시며 역사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처럼 일을 귀찮아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귀찮아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능력과 사랑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돕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하다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하며 흘린 모든 눈물, 또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괴로워하던 것까지 하나님께서는 다 보시며 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우리의 그 기도의 눈물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닦아주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위해 한 번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쉬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무릎을 꿇고 기도의 손을 들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매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런 예배가 그런 것 중 하나이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며 우리를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품을 우리가 느끼게 될 것이며, 또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팔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