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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8 ✦
“완전히 뒤바뀐 운명”
(누가복음 16장 19~31절)
[들어가는 말]
살다 보면 언어가 잘못 사용되어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특히 미국에 와서 사는 우리들은 그런 일들을 경험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여기서 태어난 2세들이 K-Pop나 K-Drama 때문에 한국어를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전화가 바빠요”(The line is busy)라고 했습니다. 또 어른에게 하는 존댓말을 몰라서 “야, 이리 와.”라고 하는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2년 전쯤 가정교회 목회자 컨퍼런스를 갔을 때 새로운 참가자들이 앞에 나와 자기소개를 할 때 그중 동부에서 온 어느 2세 영어권 여자 목사님이 있었는데, 한국어가 서투니까 영어로 주로 했지만 가장 먼저 자기 이름을 소개하면서 “저는 김OO 목사님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봤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님’이라고 하지 않는데, 잘 모르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놀라운 일을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서울대 나온 유학생과 룸메이트를 했는데, 공부를 아주 잘하고 영어도 아주 잘했습니다. 하루는 같이 볼링을 치러 갔는데 자기가 목이 말라 마실 것을 사 오겠다고 하며 갔습니다. 조금 후 돌아올 때 보니까 엉뚱하게 감자튀김(french fries)을 사 왔습니다. 그래서 왜 이걸 갖고 오느냐고 하니까, Sprite를 주문했는데 p와 f 발음을 헷갈려서 ‘서후라이’라는 식으로 말했더니 ‘후라이’(fries)를 달라는 줄로 잘못 듣고 그것을 준 것입니다.
이런 실수들은 언어를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수들은 애교로 봐주며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그런 실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실수들이 벌어집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에도 그런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런 일들은 주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 부자들에 의해 저질러졌습니다. 소위 지도자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다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며 고의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을 결정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위 ‘부자와 나사로 비유’ 또는 ‘부자와 거지 비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죽음 이후의 상태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특히 물질생활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경고의 교훈을 줍니다. 누가복음은 특히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많이 하는데, 특히 지난번에 살펴본 것과 같이 16장은 물질에 대한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1. 부자와 나사로의 삶 (19~21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삶과 나사로의 삶은 아주 큰 대조를 보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19절)
부자는 조개류나 굴, 게, 새우와 같은 갑각류로부터 채취하여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인 ‘자색 옷’을 겉옷으로 입었습니다. 그리고 속옷으로는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부자는 수천 달러짜리 명품 겉옷을 입고 속옷도 수백 달러짜리 명품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사치합니까?
그렇게 겉과 속을 비싼 것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라고 되어 있는데, 매일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은 안 하면서 화려한 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벌이며 자신의 부를 과시한 것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왔겠습니까? 얼마나 높은 사람들이 많이 왔겠습니까? 날마다 그런 것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부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과 파티를 벌이며 먹였지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그는 아주 사치했고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마음대로 썼습니다. 부자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딱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가 가지지 못했던 한 가지는, 바로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돈도 많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있었지만, 불쌍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0절)
부자와는 대조적으로, 나사로라는 거지가 그의 대문 앞에 항상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가난했고 병든 상태였는데, ‘헌데투성이’라는 말은 그의 몸에 피부병이 나서 고름이 나고 굉장히 비참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피부병이 하도 심해서 어떻게 됩니까?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1절)
피부병이 하도 심해서 고름이 나니까 개들이 와서 핥을 정도입니다. 당시 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들은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되었는데, 그런 개들이 와서 자기를 핥는데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였고 참혹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개를 쫓아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나사로의 병은 피부병만 아니라,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20)라는 말은 그가 혼자서는 잘 걸을 수도 없는 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나사로는 이렇게 온몸에 고름이 철철 흐르는 비참한 모습으로 피부병에 걸려 있고, 스스로 잘 걷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으며, 또 아주 가난한 거지였습니다. 거지도 보통 거지가 아니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했던 거지였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나사로가 부자들이 먹는 상 근처에 있으면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자의 상은 당연히 집 안에 있고 이 사람은 부자의 집 밖에 있는 사람이니, 어떻게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아 먹겠습니까?
거기에 얼마나 음식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이 먹다가 버리고 또 다른 것을 먹을 때, 그렇게 먹다 버리는 것을 휙 던져주면 그것을 주워 먹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손님이 닭 다리를 입에 넣고 뜯다가 배가 불러서 반쯤 남긴 것을 들고 거지 앞에 휙 던져줍니다. 땅에 떨어지고 흙이 많이 묻은 그런 것을 좋다고 닦아서 먹는 그런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역겨운 그러한 장면입니다.
부자는 자기 집 대문에 이런 거지 나사로를 항상 두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재수 없게 왜 저런 거지가 내 집 앞에 있나? 에이, 역겹다. 저걸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를 어디로 쫓아버리지도 않습니다. 쫓아보내면 자기 명성에 흠집이 나기 때문에 그냥 둡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 덕분에 선을 행할 기회가 매일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자기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자가 나사로에게 선을 행하며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가 악을 행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마구 때리고 쫓아 보냈다든지, 악을 행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자는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는 그렇게 살고 나는 이렇게 살면 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그래서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라며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브라함이 언급하는 “모세와 선지자들”(29), 즉 율법서와 예언서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의 핵심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전체 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도 1계명부터 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에 오면 보텽 ‘하나님, 우리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데,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이 들으면 ‘뭘 죄인이라고 하나? 당신들이나 죄인이지 나는 아니야. 왜 나까지 거기에 끌고 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개 ‘범죄(crime)’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랏법에 걸리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만약 어떤 사람이 너무 미워서 마음속으로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습니다. 그러면 폴리스가 와서 잡아갑니까? 전혀 잡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랏법을 어기는 범죄(crime)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살인과 같은 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 그렇게 보면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라고 하신 것을 전부 다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저를 포함해서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입니다.
살인처럼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는 것을 가리켜 ‘저지르는 죄(sin of commission)’라고 부릅니다. 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처럼 하라고 하신 것을 안 하는 것은 ‘빠뜨리는 죄(sin of ommission)’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행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와 나사로의 삶은 각각 엄청난 재벌과 최대 극빈자의 차이만큼 컸지만, 나사로에게도 죽음이 찾아왔고 부자에게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나사로는 아주 비참하게 살다 죽게 되었던 반면, 부자는 요즘 식으로 말해서 온갖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고 좋다는 데는 다 다니며 여행을 즐긴 사람이었고, 이 세상의 좋다는 것은 다 소유하고 누리며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생전에 멸시와 천대 속에서 살았으니,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거적 같은 것으로 덮고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초라하게 매장당했을 것입니다. 반면, 부자의 죽음은 어땠겠습니까?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피리 부는 자들과 곡하는 자들을 고용해서 울어대는 가운데 아주 엄청난 규모의 장례식을 화려하게 치러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온갖 높으신 분들이 다 조문을 오고 장례식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또 아주 크고 굉장한 무덤에 그의 시신을 안치했을 것입니다. 향품도 최고릅으로 발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거적으로 덮든지, 화려한 무덤에 안치하든지, 죽은 것은 똑같습니다. 죽은 후에는 누구나 똑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망률은 100%입니다. 사람들은 애써 이 사실을 무시하고 외면하려 애씁니다.
온갖 좋은 건강식품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건강하게 살기 위함이지만, 왜 그런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사실은 죽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게 아닙니다. 죽음은 부자에게도 왔고 나사로에게도 왔으며, 언젠가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2. 두 사람의 죽음 이후 (22~23절)
그렇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확실한데,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이웃의 아픔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도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이 알려주는 것처럼 죽음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능성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죽으면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죽으면 그냥 다 끝난다는 것입니다.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2-23절)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천국에서도 아주 높은 자리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반면에 ‘음부’라는 것이 헬라어 원어로 ‘하데스(Hades)’인데,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는 곳을 말합니다. 이곳을 지옥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사로와 부자의 운명이 죽음 후에 완전히 뒤바뀐 것을 보여줍니다.
제가 오래 전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공부가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안 되겠다.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 하다가 ‘아, 영화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근처에 영화관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미리 보고 예매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가서 시간을 확인하고 봐야 했습니다. 신문을 찾아서 영화 시간표를 볼 수 있었지만, 신문을 구독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무조건 갔습니다.
가서 봤더니 시간이 맞는 영화가 하나 있어서, 뭔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가서 봤는데 제목이 <Reversal of Fortune>이라는 영화였습니다. 한국에도 나왔는데 <행운의 반전>이라는 제목으로 변역되었는데, 운명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들어가 봤는데, 굉장히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그냥 대사만 계속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를 일부러 코마 상태에 빠뜨리게 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고, 그래서 재판받다가 나중에 무죄로 풀려나는 그런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 주인공이 그다음 해 아카데미상의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전혀 모르고 봤다가 나중에 아카데미상을 발표할 때 보니까 그 사람이 받아서 ‘아, 이게 굉장히 유명한 영화였구나.’ 하고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제목 그대로 부자와 나사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이 죽음 이후에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죽음이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고, 이 땅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천국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장소를 말할 수도 있지만, 천국은 이 땅에서도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뜻이 다스리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면 천국의 삶이 되고, 내 가정이 그렇게 하면 천국이 되고,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천국이 됩니다.
반면, 지옥이란 무엇입니까? 지옥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이 거기에 안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나는 내가 알아서 산다.’라고 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그것이 곧 지옥의 삶입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인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사람이 일단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이 세상에서의 삶과 다른 삶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크게 나눠서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습니다. 육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죽으면 육과 영혼이 분리되어, 육은 땅으로 돌아가 썩고 영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가는데,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육체와 영이 다시 합해져서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죽음을 가리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빌 1:23)이라고 표현합니다. 믿는 자의 죽음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6장을 보아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순교자들이 천국의 제단 아래서 ‘심판까지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주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죽는 즉시 믿는 사람의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바로 본문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간 곳을 “아브라함의 품”(22)이라고 하고, 부자가 간 곳을 “음부”(23)라고 합니다. 죽은 뒤에 나사로는 천사들에 의해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이끌려지는데,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축복으로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서 살 때는 최악의 상황에 있었는데,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 이제 자기 민족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서 천국 잔치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죽은 뒤에 굉장한 고통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는 생전에 자기 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고통 중에 보게 됩니다. 부자가 간 ‘음부(하데스)’라는 곳은 신약성경에서 죽음 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악인이 가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실 ‘게헨나(Gehenna)’인데, ‘하데스’이든 ‘게헨나’이든 둘 다 지옥이라고 봐도 그렇게 틀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왜 지옥에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사로는 가난하고 불쌍했으니까 천국에 가고, 부자는 돈이 너무 많았으니까 이제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 본문은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한두 가지 중요한 핵심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왜 천국에 가고 왜 지옥에 갔는지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이런 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나오는데, 예수님의 다른 비유를 보십시오. 이름이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비유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사로’라고 예수님이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그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라는 이름을 언급하신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 또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다른 나사로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예수님이 일부러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사로는 불쌍한 거지였지만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힌트를 줍니다. 그는 거지에다 장애인이었고 또 병자였는데,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이 세상에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암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나사로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천국으로 간 반면, 부자는 왜 음부(지옥)로 간 것입니까? 무엇보다 부자의 죄는 나중에 아브라함과 그의 대화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언급하는데, 모세는 율법서를 의미하고 선지자들은 예언서들을 말하며, 결국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웃을 돌보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자들, 특히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령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도 많이 나오고, 예언서들에도 많이 나옵니다.
결국 이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는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무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부자가 돈이 많고 자기만을 위해 돈을 써서 지옥에 간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없는 지옥으로 간 것뿐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를 의지했고, 물질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대신 오직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을 섬겼습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늘 구걸하고 있었던 나사로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를 통해 그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할 기회가 매일 주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평생 그 기회를 놓치며 살았습니다. 어쩌다보니까 놓친 게 아니라, 나사로라는 자기 앞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지, 바빠서 못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나 정도만 돼 봐. 나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 이러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면서 ‘당신처럼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은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당신은 안 믿어도 천국 갈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막 아첨하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부자는 돈이 많아서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너무 불쌍했기에 천국에 간 게 아닙니다. 물론 그의 이름만으로 추정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일부러 그의 이름을 말씀하셨기에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산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함께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간 것이고, 부자는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으로 간 것입니다.
만일 부자가 단지 돈이 많다고 지옥에 떨어졌다면, 엄청난 부자였던 아브라함도 지옥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엄청난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까? 그는 부자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3. 부자의 다섯 형제 (24~31절)
이제 부자는 음부에서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요청합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4절)
부자가 여기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른 것을 보면, 부자는 자기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인데, 우리 식으로 하면 ‘저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모태신앙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25절에서 아브라함이 그에게 “얘(Son)”라고 부르는데, 그러니까 부자가 자기 후손이라는 점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엄청난 신앙인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목사나 장로라고 해서, 집안이 5대째 신앙의 집안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목사이고 할아버지가 목사이고 작은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전부 다 목사이고 증조할아버지도 목사 아니면 한국 초대 교회를 세운 장로라고 해서 그 아들이나 딸이나 그 후손이 덕분에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는 손주가 없습니다. 자녀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부모님이 믿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다 아버지입니다.
자기 배우자가 신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내 아내 또는 남편이 너무 신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믿지 않는 사람이 그 배우자 덕분에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각자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결정을 다음에 하지.’라고 하지만 그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압니까?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자비를 얻을 수가 없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기회가 주어집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데(24),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부자는 생전에 나사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는데, 사랑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아직도 나사로를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지옥 불의 고통이 크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옥은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 요청에 대해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5절)
아브라함은 부자가 살았을 때 누렸던 좋은 것과 나사로가 살았을 때 겪었던 고난을 대조하면서, 지금은 그것이 뒤바뀌었다고 말합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쌍한 이웃을 외면하면서 혼자 잘 먹고 잘 살았고, 나사로는 살았을 때 온갖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제 죽은 후에는 행한 대로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그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했다면 나중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지옥이냐 천국이냐 하는 심판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을 줄까, 하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6절)
천국과 지옥 사이에 서로 왕래할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는 운명이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기회는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뿐이고, 죽은 다음에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종종 가톨릭 출신들이 있는데, 로마 가톨릭에서는 연옥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가톨릭은 교인 중에서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중간쯤 되는 연옥에 가는데, 연옥은 속죄와 정화의 의미에서 고통의 장소이고 고통의 기간과 정도는 생전의 죄와 비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기간과 정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로로 줄어들 수 있다고 하면서, 교회가 연옥의 고통을 바꿀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분명히 인간의 운명은 죽음 이후에 고정되는 것입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연옥은 없습니다. 성경은 연옥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7-28절)
첫 번째 요청을 거절당한 부자가 자기는 안 되겠으니까 형제들을 위해 두 번째로 요청합니다. 아직 살아 있는 형제 다섯이 자기가 있는 음부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사로를 노예로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형제 다섯은 아직 재산을 분배받지 못해서 아버지 집에 함께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처럼 음부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어 구원으로 인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금 아주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29-30절)
아브라함이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들어야 한다고 하니까, 부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 말을 듣고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또다시 아니라고 하는데 아주 단호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31절)
살아 있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신 사람 중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살아났을 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그를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마음이 완악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하고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며 나사로까지 죽이자고 했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도 그것을 본 사람들조차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기적을 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주어진 기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회개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잊어 버리게 해주는 것, 마치 마취제나 진통제 같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삶은 일시적인 쾌락을 통해 죽음과 그 후의 운명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음이 오고, 그때는 모든 게 결정되며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라고 하는데, 처음 그것을 읽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좋은 것을 왜 다 버리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버드 나오고 프린스턴 나오고 예일 나오고, 또 그런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몇 개씩 받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하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이 세상에 있을 때만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만 효력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그 믿음만이 구원을 줍니다. 아무리 좋은 학교 나오고 학벌이 좋고 지위가 높아도, 그런 것이 구원을 줍니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나가는 말]
20세기 초반 의사이자 사업가이자 설교자였던 월터 윌슨(Walter L. Wilson) 박사가 어느 날 무신론자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윌슨 박사님, 저는 박사님이 전한 말씀의 내용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윌슨 박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믿는 것이 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무신론자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습니다. 죽으면 다 끝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윌슨 박사가 동의하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뭐라고요? 박사님도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임을 믿으신다고요?” “예, 저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당신이 악을 행할 모든 기회의 끝입니다. 죽음은 당신의 모든 기쁨의 끝입니다. 죽음은 당신의 모든 계획과 모든 야심과 모든 관계의 끝입니다. 죽음은 당신이 들을 수 있는 모든 복음의 끝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당신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 대해 말하자면, 죽음은 저의 모든 방황과 모든 눈물과 고통과 좌절과 실망과 아픔의 끝입니다. 죽음은 이 모든 것의 끝이고, 저는 영광중에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윌슨 박사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말하며 무신론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죽어가는 자들의 땅’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살아 있는 자들의 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는데, 바로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까도 사도신경으로 고백했고 매주 고백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뭘 하신다고 했습니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심판하신다는 것은 막 벌을 내리신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구별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도 산 자가 있고 죽은 자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이 ‘죽어가는 자들의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제공하고 계시는 은혜의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걸 붙들고 나가는 사람이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 이 땅을 떠날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OO년 OO월 OO일에 죽겠다.’라고 해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이든 상관없이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잘 사용해서 최대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최대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