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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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6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7 ✦
“옳지 않은 청지기의 지혜로운 일 처리”
(누가복음 16장 1~13절)
[들어가는 말]
이 시간 자신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며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자기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 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는 그 인생의 목적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이 잘못된 것이라면 잘못된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목적이 괜찮은가?’ 하는 말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는 8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중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자기가 이 세상에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왜 사는지 알고 살고 계십니까? ‘나는 이것을 위해 살고 있다. 내 인생의 목적은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인생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 중에도 그것이 올바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 내 인생을 산다.’라고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정말 적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왜 사람들은 제대로 된 목적이 없이 살고 있다는 말입니까? 왜 사람들이 목적을 가지기는 가졌는데 왜 잘못된 목적으로 산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그에 대한 답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이 없거나, 목적이 있어도 잘못된 목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이 땅에 보내져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 땅에 사고로 태어난 사람이나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목적이 있으셔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람을 성경은 ‘청지기’라고 부릅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으셔서 사명을 주며 보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다만 자기가 하나님의 청지기인 줄 알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하나님의 청지기인 줄 몰라서 순종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또 알더라도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에는 어리석고 악한 청지기와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는 어리석고 악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내 인생은 내 것이다.’라고 해도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겠습니까?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나를 제대로 인도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청지기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든 아니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청직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청지기인데 과연 어떤 청지기가 될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착하고 신실한 청지기(종)가 되어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또 배운 말씀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큐티하고 기도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이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되고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통독하고 또 열심히 기도한 다음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우리 신앙이 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 청지기가 등장하는데, 그는 불의하고 부정직한 청지기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의외로 주인에게서 칭찬을 듣습니다. 그래서 이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는 굉장히 해석이 어려운 비유로 유명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어떻게 주인에게 칭찬받은 것인지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교훈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통한 본문 해석 (1~8절)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바로 앞 장인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대상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며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어울리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비난했습니다(15:1-2).
15장에서 연속되는 세 개의 비유들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태도를 바꾸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오는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든 사람이 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태도를 바꾸라고 도전하시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오늘 나오는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절)
예수님은,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다고 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어떤 부자’는 당시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에 흔히 있던 부자, 즉 큰 땅을 소유한 지주를 말하는데, 특히 자기 밑에 청지기를 두고 거기 같이 있으면서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는 멀리 다른 데 살면서 여기에는 청지기를 두고 있는 ‘부재자 지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멀리 있는데 그런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에 관한 전권을 주인에게 위임받아 관리했습니다. 그러한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을 들은 주인은 어떻게 대처합니까?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2절)
주인은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한 다음 갑작스러운 해고 명령을 내립니다. ‘너는 이제 그만 해라.’ 그와 함께 이 청지기의 후임이 계속 맡아서 일할 수 있도록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즉 그가 맡아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고 결산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겁니다. 해고 명령과 결산 명령을 받은 청지기는 그 당시 격언처럼 사용되던 독백을 합니다.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3-4절)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직 해고당하기 전이니까, 진짜 그만둔 후 자기의 미래를 미리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5-7절)
여기 보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말로 고쳐 쓰라고 하고, 밀 100석을 빚진 사람에게는 80석으로 고쳐 쓰라고 말합니다. 이 기름은 올리브기름을 말하는데, 100말이라는 것은 3천 리터(900갤런)가 넘는 양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품삯으로 계산하면 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양인데, 그것은 약 3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이니까 꽤 큰 액수입니다. 또한 밀 100석은 35,000리터나 됩니다. 이것은 노동자 8년 품삯에 해당하는 2,500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기름 100말과 밀 100석은 엄청난 액수의 빚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이렇게 큰 액수의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서 자기 마음대로 빚을 깎아줍니다. 아니, 청지기가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이것이 아주 이상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청지기가 해고당하는 주제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이렇게 빚을 깎아주면 어떡하나? 그러면 주인에게 더 손해를 끼치는 것인데 어떻게 된 것인가?’ 그래서 성경 공부가 필요하고 이렇게 설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알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올리브기름을 빌릴 때는 이자가 무려 80%였습니다. 그리고 가격 변동에 대비해서 20%의 보험까지 더했습니다. 그러니까 원금의 100%를 더 붙여서 빌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 밀을 꿀 때는 이자가 20%였고, 가격 변동에 대비한 보험으로 5%를 더하여, 전부 25%를 더 붙여서 빌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관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동족, 즉 같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신 23:19)
또 고리대금은 도둑질이라는 율법의 규정 때문에 당시 부자들은 청지기에게 전권을 위임해 놓았다가 나중에 고리대금으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아닌 청지기가 책임을 지고 재판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지주들이 청지기를 대신 세워놓은 겁니다.
요즘도 대리인을 허수아비 사장으로 세워놓고 실질적으로는 자기가 뒤에서 조종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대리인이 책임지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는 나쁜 짓들은 비슷합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 청지기들도 자신들을 보호할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그냥 묵인해 주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였고, 대부분 그들의 종파는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비난하는 것을 보면 자기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비난했고,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뒤로는 자기들도 청지기들에게 뇌물을 받으며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그들에게 지적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왜 너희들은 율법을 자꾸 강조하느냐?’라고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그들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앞에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을 안 지키는 저런 죄인들과는 상종하면 안 된다.’라고 정죄하면서, 뒤로는 자기들도 율법을 어기면서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위선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이지, 율법을 지킨다고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도 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이런 것을 요즘 전문용어(?)로 뭐라고 합니까? ‘내로남불’이라고 합니다.
당시 청지기들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주로 쓰던 방법은 빚진 자들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 처음부터 이자를 포함해서 계약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주인에게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과 처음에 계약서를 쓸 때 어떻게 썼겠습니까? ‘A는 B에게 50말을 빌리며, 12월 31일까지 갚지 않으면 50말의 이자를 물겠다.’라고 쓰게 되면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율법 조항에 걸리니까, 아예 처음부터 안전하게 100% 이자와 보험을 붙여서 ‘A는 B에게 100말을 빚졌다.’라고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청지기가 기름 100말을 기름 50말로 바꿔 쓰라고 하는 것은(6), 원금이 50말이었는데 거기에 100%의 이자를 붙여 100말로 작성했던 계약서를 원래 빌린 양으로 고쳐 쓰라고 한 것입니다. 또 청지기가 밀 100석을 80석으로 고쳐 쓰게 한 것은(7), 원금이 80석인 겁니다. 원금 80석에 25%의 이자를 붙이면 20석이고, 그것을 붙여 100석으로 계약서를 썼던 것을 원래 빌린 양인 80석으로 고쳐 쓰게 한 것입니다. 청지기가 이렇게 행동한 것을 본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다고 하며 그를 칭찬합니다. 여기서 그를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빚진 자들에게 행한 것까지 포함해서 그의 모든 행위가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던 행위가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주인의 마지막 평가는 ‘지혜 있다’라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 지혜 있다는 겁니까? 이 청지기의 지혜는 그가 해고당하기 직전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을 잘 살려서 자기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최후의 순간에 단호한 결단을 내린 것이 그의 지혜라는 겁니다.
먼저, 그가 평소에는 율법의 고리대금 금지법을 어기는 일을 아주 교묘하게 저질러 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정직한 행동을 함으로써 율법을 지켰습니다. 둘째로,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주인이 잘못하면 고리대금 금지법에 걸리니까, 거기에 걸리지 않도록 깨끗하게 정리해서 결산서를 넘겨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주인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셋째로, 빚진 자들과의 관계에 있어, 청지기는 그들의 엄청난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자기가 해고된 뒤에 그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주인은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칭찬한 겁니다.
2.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의미 (9절)
8절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빛의 아들들’은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자기들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하여 믿는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중 소위 재테크 같은 데에 엄청나게 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정말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9절)
여기서 한국어 번역으로 ‘불의의 재물’이라고 되어 있어서 더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재물 자체가 원래 불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물이 원래 불의한 것이라면 주님은 불의를 사용해서 미래를 보장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거짓이 없으시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죄를 저지를 것을 조장하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만일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면 만지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은 그것을 얻는 과정이 불의했다거나, 정직하지 못하게 얻은 재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정직하게 얻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 한국말로 ‘불의한 재물’이라고 되어 있어서 그렇지 이것은 사실 ‘하늘의 보화’와 대조되는 ‘세상의 재물’(worldly wealth)을 말합니다. 사실 세상의 재물은 타락한 이 세상 질서에 속한 것이라 불의하게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돈을 선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의하게 사용하는 경우에 비하면 아주 적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을 보십시오. 살인, 강도, 도둑질, 부동산 투기, 탈세, 입시 부정, 밀수 같은 것은 모두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전쟁도 돈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 핵심에 돈이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잘 살펴보면 그 가운데에는 돈이 있습니다. 정말로 돈이 불의의 세상을 지배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재물은 반드시 없어지는 날이 옵니다. 여러분은 지금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십니까? 현금이 많이 있으면 금고에 넣어 놓든지, 은행에 넣어 놓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합니까? 언젠가 없어지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재물 자체가 세상에서 없어지기도 하는데, 실제로 고대사회의 돈은 닳아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차피 없어지고 말 허무한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 재물을 이 땅에 있는 동안 잘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해 네가 가진 재물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의 노예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사용 목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청지기는 뭔가를 위해서 돈과 소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만큼은 돈이 그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돈에 매달리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깎아주는 행위를 통해서 친구들을 사귄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어서 돈을 초월한 모습을 그가 여기서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었습니다.
‘불의한 재물’(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그들’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6장이나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천사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 청지기에게 구제받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구제를 사람처럼 의인화해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상으로 볼 때 청지기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 앞에서 증언해 준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진 돈뿐만 아니라 나의 시간과 재능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투자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것이 다 나를 위해서 증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참된 부유함은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느냐, 얼마나 잘 쓰느냐에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돈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잘 쓰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면 사람들이 와서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습니까? 심장을 막 눌러서 일으키는 방법을 쓰는데, 그것을 CPR이라고 합니다.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의 줄임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기적을 일으키실 때 CPR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C = Command (명령)
P = Promise (약속)
R = Risk-taking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거나 또는 하지 말라고 하시는 명령만 주시고 끝이 아닙니다. 약속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만들라.”라고 하시면서 그 명령만 주신 게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20)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위험 부담을 안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것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도 알고 약속도 압니다. 그런데 믿음의 모험을 하지 못합니다. Risk-taking을 하지 못합니다. ‘나가서 내가 믿음으로 해보겠다.’라고 하지 않고 편안하게 안주하는 데 그칩니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선을 싹 그어 놓고 ‘여기까지만 하면 된다. 신앙생활은 요렇게만 하면 된다.’ 하고 안전한 데에 안주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것도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남으면 돕거나, 너무 바쁠 때는 섬길 시간이 없고 좀 시간이 나면 가서 섬기거나, 몸이 피곤하면 안 하다가 좀 좋아지면 하거나,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지만 드리고 섬기며, 시간이 없고 바빠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섬기고, 또 몸이 피곤하고 아파도 몸을 일으켜 가서 주님이 시키신 일을 감당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C)하실 때는 반드시 약속(P)을 주십니다. 그때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믿음으로 모험하며 나아가면(R) 반드시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 삶에는 기적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기적을 보여다오. 그러면 내가 믿겠다.’라고 하지만,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CPR 중에서 Command(명령)와 Promise(약속)는 주어지는데, 믿음으로 Risk-taking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상식에 갇혀서 살 뿐입니다.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1 더하기 1이 몇입니까? 당연히 2입니다. 이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로 믿으면서 위험 부담이 있어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약속이 있기에 그 명령과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면, 1 더하기 1이 10이 될 수도 있고 100이 될 수도 있고 100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나아가지를 않으니까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는 믿음으로 나간다고 용기 있게 나아갑니다. 사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도 없고 약속을 주신 것도 없는데 무대포(?)로 자기가 무조건 한다고 나가는데, 그런 것은 자기 확신내지 자기 기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는 Risk-taking을 하는 것이지, 자기가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 세 가지(CPR)가 함께 할 때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대부분 C와 P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어서 명령하시고, 또 항상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Risk-taking, 즉 우리가 믿음으로 모험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재물로 영원한 미래를 예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어도 착한 행위를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 표시로서 자기가 가진 재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헌신하지 않은 자들에게 돈을 써서 구원을 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 재물에 있어서도 주님의 방법대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재물이든지 시간이든지 재능이든지, 이것을 내가 이 땅에서 올바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즉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약속에 따라 그것을 여기서 잘 사용하면 그것이 천국에 쌓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돈을 쓸 때,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샀다면 그 돈은 없어집니다. 내 손에서는 없어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손에서 없어진 그 돈이 천국에 쌓인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 (10~12절)
예수님은 영원한 미래를 대비하는 방법으로서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0-12절)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11절에서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그리고 12절에서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 서로 대조되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흐름은 현재의 재물 사용과 영원한 보화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 점은 문맥이 비슷한 마태복음 6:19-24를 살펴봐도 금방 드러납니다. 보물은 이 땅에 쌓아 두면 안 되고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이 땅에 쌓아 두면 다 썩고 없어지고 벌레가 먹는다. 그러니까 썩어 없어지지 않는 하늘에 쌓아 놓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재물을 제대로 사용할 때, 또 시간도 재능도 제대로 사용할 때, 놀랍게도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천국에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의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보화는 큰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불의하지만, 하늘의 보화는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관리하는 ‘남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가지고 있다고 내 돈이 아닙니다. 남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보화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누릴 ‘너희의 것’ 즉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책임을 맡은 청지기이기도 하지만, 물질과 재능과 시간도, 또 주어진 모든 것도 주인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해야 할 청지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특히 오늘 본문에서 청지기 개념을 물질 문제와 연관시켜 지적하십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청지기,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청지기다.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이렇게 천국에 놀라운 보화를 쌓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청지기’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남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남의 것’이라는 말은 직설적으로 우리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사실 이 땅에 있는 것 중에 내 것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몸도 사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병이 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다 남의 것인데, 그 ‘남’이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 나의 재물도 나의 시간도 나의 재능도 내 자녀도 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서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주어진 시간과 재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잘 사용하며 충성할 때,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인다는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난번 살펴본 ‘어리석은 부자’(눅 12:13-21)는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줄 알고서 자기만을 위해 쌓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불의한 청지기였습니다. 다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로 목숨을 잃고 세상을 떠나니,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겁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살펴볼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가 있는데, 그 비유의 부자도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는’ 나사로에게 베풀지 않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지 말고 ‘남의 것’, 즉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빌린 것으로 나누어주며 잘 사용하는 일에 충성하는 삶을 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13절)
예수님은 미래를 위한 재물 사용의 지혜를 말씀하신 다음, 마지막으로 맘몬과 하나님 중 양자택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를 매듭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3절)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지금 시대에 투잡(two jobs), 쓰리잡(three jobs)을 뛰는 상황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파트 타임으로 여기서도 일하고 저기서도 일할 수 있는데, 왜 꼭 한 주인만 섬기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것은 파트타임 정도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인에게만 충성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그 당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00% 자기 주인만 섬겨야지, 두 주인을 놓고 6대 4나 7대 3 정도로 섬긴다는 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100% 섬겨야 합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과 모든 능력 하나, 하나는 다 우리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사실 파트타임(part-time)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프타임(half-time)도 아닙니다. 그럼 풀타임(full-time)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풀타임이라고 해도 40~60시간 정도 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올더타임(all the time)’이나 ‘애니타임(anytime)’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부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나는 정말 당신을 최고로 사랑해. 나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최고로 사랑해. 그런데 미스김도 사랑하고, 미스리도 사랑하고, 미스박도 사랑해. 그러나 당신을 최고로 사랑해!” 이게 사랑입니까?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사랑입니까? “나는 당신만 사랑해.”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그런데요, 돈도 사랑하고요, 명예도 사랑하고요, 저것도 사랑하고 이것도 사랑합니다.” 이게 사랑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하며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성공하는 것은 사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입니다.
재물을 전적으로 섬기면서 맘몬 섬기는 일에 하나님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일 잘되게 해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직장생활 잘되고 승진하게 해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좋은 학교 가게 해주세요.’라고 당연히 기도해야 하지만, 내가 잘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살짝 가져다 쓰고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을 버리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을 중히 여기고 재물을 경히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재물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업이 잘되거나 직장에서 잘나갈 때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가 더 늘어난 것으로 보게 됩니다. 본문에 나온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며 돕는 것입니다.
오래전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들었는데,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복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복을 낭비한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복을 세어본다. 착한 사람들은 복을 나눈다.”
이 시간 자신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 재물을 혼자 차지하여 낭비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어보면서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받은 복만 보면서 즐거워하는 현실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시간과 재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착한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는 참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