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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AU4frCSNW18?si=BmRX5Gk-6Slssnmh&t=227
2024년 5월 12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6 ✦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11~32절)
[들어가는 말]
21세기 들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힐링(healing)’입니다. 원래 교회 내에는 이 ‘치유’ 개념이 도입되어 내적 치유 사역을 오래전부터 많이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인 미국장로교(PCUSA)도 수년 전부터 연금국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하면서 정신 건강(mental health)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그 진료를 받는 데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지금 정신 건강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만큼 21세기 들어 정신 건강이 큰 주목을 받고 있고, 육신의 건강만큼 중요하다고,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에 소개되기 시작한 ‘힐링’이라는 개념이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 전 분야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힐링 산업’이라는 것도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트래킹이나 휴양림 체험 같은 것을 모아서 ‘힐링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여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건강식품이라 불리던 음식이 이제는 ‘힐링 푸드’로 바뀌었습니다. 힐링 스포츠나 힐링 댄스도 나왔고, 백화점 문화센터에 가면 마음 치료와 관련된 강좌들이 많이 열립니다.
이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먼저 가기 위해 빨리 달리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기분은 물론 아주 시원하고 상쾌했지만, 그렇게 달리는 동안 아름다운 나무나 꽃이나 석양을 바라보거나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앞을 향해 빨리 달려야 했고,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달리다 보니까 사람들이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레길’을 찾아내서 걷기 시작했고, 또 자동차를 놓아둔 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멈추어야 보인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제적 부유함도 중요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게 되니까 마음의 풍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영성(spirituality)의 세계이고, 영성 세계의 핵심이 바로 ‘힐링’입니다. 산업화와 정보화 사회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아주 지쳤고, 도시 문명에 짜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 내면의 고민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해 주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있는데, 작년 이맘때 처음 한국어로 하는 크레도(CREDO) 목회자 컨퍼런스가 열렸습니다. 크레도 컨퍼러스는 우리 미국장로교 연금국에서 주최합니다. 이전에는 영어로만 했었는데, 한국 목사님들을 위한 한국어 크레도가 처음으로 열린 것입니다.
크레도는 전인적인 힐링을 추구하는 컨퍼런스인데, 저는 영성과 예배 담당 강사로 갔고, 또 다른 강사진 중에 정신 건강 담당이 있고 또 육신 건강 담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정신 건강은 상담 심리로 박사를 하신 분이셨고, 육신 건강은 의사이셨습니다. 그 정신 건강 담당 강사님은 애틀랜타에서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고 계시는데, 이분은 원래 신학도 공부하셨지만 목사가 되지 않고 상담 쪽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전에 정신과라고 하면 보통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는 정신병이 아니라는 식으로 부정하고 또 그런 곳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그분에게 얘기를 들어 보니까, 사람들이 약속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환자로 미어터진다는 겁니다. 너무 사람들이 많이 오고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정신병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이것도 치유가 필요한 질병이라는 개념이 많이 자리 잡게 됐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용광로와 같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며 상대방을 녹이려고 덤벼드는 곳은 많습니다. 영상을 보면 용광로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거기에는 뭐든지 다 녹여버리는 엄청난 파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모닥불과 같은 곳은 세상에 아주 드문 현실입니다.
용광로에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엄청난 파워가 있지만, 거기를 일부러 찾아가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모닥불에는 그런 파워가 없어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모여 앉아 노래 부르며 서로 추억을 나누고 꿈을 나눕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렇게 따뜻한 모닥불과 같은 힐링 스토리로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소위 ‘탕자의 비유’는 힐링 스토리 중에도 아주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아마 여러 번 들으셨을 겁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이 탕자의 비유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잘 아는 내용인데,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는 대개 그 초점을 탕자, 즉 둘째 아들에게 맞춥니다. 언젠가부터는 첫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스토리의 초점을 아버지에게 맞추게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전 수요예배 때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이 쓰신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을 가지고 시리즈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입니다. 회복과 치유로 나아가는 핵심은 아들들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1.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11~24절)
우리가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무엇보다 이 아버지는 상당히 무기력한 또는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둘 다 실망을 안겨줍니다. 특히 둘째 아들은 아주 심합니다.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1-12절)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권위는 재산권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재산이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병들어 더 이상 의식이 없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럴 때도 아버지가 주도권을 쥐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심각한 병이 든 것도 아니고, 죽기 직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효막심한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아버지, 왜 이렇게 안 돌아가세요? 빨리 가서 죽으세요. 그래야 내가 아버지 돈을 받죠.’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말을 한 겁니다. 얼마나 불효막심합니까? 둘째 아들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없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3절)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 집을 떠납니다. 자기가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어떠할지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먼 나라로 여행을 가서 돈을 신나게 쓸 생각밖에 없고, 그래서 너무 신이 났고 가서 놀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바로 가는데, 가서 실컷 흥청망청 놀다 보니까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4-16절)
이 둘째 아들은 분명히 유대인인데,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를 쳤다는 것은 이곳이 이방인 지역이고 또 그가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 엄청난 돈을 다 탕진하여 아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다른 선택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잠시 반짝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7-19절)
이제 그는 ‘내가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라고 마음을 품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갑니다. 사실 이때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0절)
작은아들이 집을 향해 오고 있을 때 아직 먼 거리에 있는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매일 아들이 돌아오는지 나가서 살펴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격하게 환영해 줍니다. 왜 아버지는 이 배은망덕하고 패역한 아들에게 달려간 겁니까? 반가워서 그랬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이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까?
당시 문화를 생각하면, 이런 아버지와 같은 어른들은 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성인인 것을 생각하면 이 아버지는 최소 40대나 50대 이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장년, 특히 남자들은 뛰지 않았습니다. 더운 날씨와 긴 옷과 엄격한 관습 때문에, 이런 장년 남자는 뛸 수 없었고 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사는 이 땅이 하나님이 주신 땅, 즉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그 위를 막 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향해 뛰어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둘째 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집안에만 모욕을 준 게 아니라 자기가 사는 그 마을 공동체, 자기 고향 전체를 모욕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13)로 갔다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자기 마을, 자기 고향을 버리고 갔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이 촌동네에 안 돌아올 거라고 하며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돌아올 때 어떻겠습니까? 혹시라도 동네 청년들이 그를 보게 되면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와? 당장 나가!’ 하고 내쫓길 수가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바로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가 자기 아들에게 침을 뱉거나 발길질하거나 돌을 던질 때 그 모든 걸 아버지인 자기가 대신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감동했는지, 그래도 둘째 아들은 미리 생각해 놓은 멘트를 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1절)
원래 그 뒤 19절에 보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한 다음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걸 읽고서 이 아들이 미리 그렇게 다 준비해 놓고 뒤는 일부러 생략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라 이제 그 뒤의 말을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막은 겁니다. 그만 말하라고 하고서 그냥 진행한 것입니다.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가 그의 말을 막고 아들을 집으로 맞아들이며 대대적인 환영 파티를 준비합니다. 이때 작은아들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것 하나하나가 전부 다 힐링입니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2-24절)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줌으로 주인 아들이라는 신분을 회복시켜줍니다. 이제 주인의 모든 권한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 즉. 최상품 고기를 잡아서 가져와 큰 축제를 벌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녀를 향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원래 둘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9절)
그러나 아버지는 어떤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아들로 보았습니다. 그는 종이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아무리 과거가 복잡하고 허랑방탕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악하고 추한 짓을 했더라도, 여전히 아들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은 결코 종이 아닙니다. 가서 노예처럼 살았지만, 그의 신분은 아버지 집에서 아들이지 종이 아닙니다.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사랑의 눈으로 봐 주십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에도 <생명 언어의 삶>을 했지만, 생명 언어를 말하지 않고 자꾸 죽음 언어를 말합니다. ‘역시 안 안 돼. 나는 틀렸어.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나는 하는 것마다 되는 게 없어.’라는 식으로 죽음 언어를 자꾸 사용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렇게 자기를 비하하는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올바르게 봐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비록 제대로 못 보더라도, 하나님은 올바로 봐 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우리도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아, 역시 난 안 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더라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에 머무는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말에는 파워가 있어서, 말로 나오는 순간 자기가 한 말소리가 귀에 들어가고 귀에서 뇌로 전달됩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이미 다 증명되었습니다. 좋은 말을 하면 정말로 행복해지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해진다는 것에 관하여 과학적인 연구도 수없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나는 틀렸어’, ‘아이고, 죽겠네’, ‘아이고, 힘들어’가 아니라, ‘나는 괜찮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라고 계속 자기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2. 맏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25~32절)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5-27절)
여기 보면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한 것은 작은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큰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동생보다 더 불효막심한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주 내는 성경 퀴즈 문제가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을 누가 가장 싫어했을까요? 큰아들입니까? 아닙니다. 정답은 살진 송아지입니다. 괜히 집에 돌아와 가지고 자기가 잡아먹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뭐라고 부릅니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12, 18, 21). 그런데 맏아들은 아버지를 뭐라고 부릅니까? 호칭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말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절)
여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당신(you)’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행동은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저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율법에서는 부모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출 21:17).
그럼에도 아버지는 왜 맏아들을 벌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는 참으로 무기력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굉장히 우유부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벌을 내려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무기력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전능자이시며,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여기서 이토록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보이십니까?
사실 그것은 무기력함이나 무능함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랑입니다.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식들을 향해 ‘오래 참아 주고 기다려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벌을 주는 일에 있어서는 한없이 약하고 무능력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벌을 내려야 함에도 불쌍해서 참아 주시는 마음, 바로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8절)
여기 보면 맏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거절함으로써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노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것도 아들로서는 말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분노하며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쫓아내도 마땅한 것이 그 당시 문화인데 여기 보면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다독거리는 겁니다. 이 ‘권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사정하다, 빌다, 구걸하다’입니다. ‘제발 좀 들어가자.’ 하며 빌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들어오기를 거부하며 분노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나와 막 빌면서 ‘제발 들어가자.’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구차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나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그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큰아들을 내쫓을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빌면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인데, 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큰아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조금 전 읽은 29절에서 한참 불평한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0절)
지금 아버지가 힘이 없어서, 자격이 없어서 자기에게 쩔쩔매는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맏아들의 패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게 말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여기서 한번 야단칠 만한데 전혀 그러지를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1절)
여기서 “얘”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My son”이라고 되어 있고, ‘새번역’ 성경에는 “얘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데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얘야”라고 할 때 이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어떤 톤으로 말했을까요? 맏아들이 자꾸 불평하며 열받게 하니까 큰소리를 지르며 “얘!”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부드럽게 “얘야~”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두 번째입니다.
사실 저를 봐도 그렇고, 여기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엑 화가 났을 때 뭐라고 부르십니까? “얘야”라고 안 합니다. 저도 화가 나면 이름을 안 부릅니다. 평소에는 이름을 부르지만, 화가 나면 “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드럽게 “얘야~. My Son~”이라고 한 겁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호칭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들이 잘했을 때도 ‘얘야’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 문호에서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엄청나게 분노하며 말도 안 듣고 잘못하는데 그런 아들을 향해 “얘야”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이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기도했는데 내 뜻대로 안 될 때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는가?’ 하면서 실망하고 분노하며 대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기도도 안 하고, 예배도 안 드리고,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거부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 녀석, 이거 불맛 좀 봐야겠구먼.’ 하며 막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얘야. 얘야.” 불러 주십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 실망하고 분노하고 삐지고 서운할 때가 있으십니까? ‘하나님, 저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고 할 때가 있으십니까? 그때 꼭 이 음성을 들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얘야, 얘야” 하고 부르십니다.
큰아들은 자기 동생을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30)이라고 부릅니다.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부름으로써 이제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큰아들은 지금 아버지에게 상당히 무례하게 구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아버지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 ‘내 동생’이 아니고 ‘이 아들’, 그것도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하며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굽니까?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별명이 붙은 장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고린도전서 13장을 가리켜 소위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저번에 실제로는 요한일서 4장이 진짜 ‘사랑장’이라고 말했지만, 통상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혹시 누군가에게 막 무례하게 굴 때가 있으십니까?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은데,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굉장히 무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무례하게 굴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잘 믿어라’가 아닙니다.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신약성경에 4복음서를 주셨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자기가 만들어 낸 제5 복음서를 가지고 자기 편리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 제5 복음서의 제목은 ‘내가복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례하게 구는 우리에게 똑같이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아들이 막 무례하게 나오면 저도 ‘이 녀석이!’ 하면서 막 야단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절대 무례하게 행하지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맏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먹으며 즐길 수 있는 ‘염소 새끼’를 구하고(29) 또 뭐라고 계속 말합니까? 그 언어를 보십시오. ‘내가’, ‘내게는’, ‘나와’, ‘내 벗’ 등 이렇게 ‘나’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는데,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게 없다고 함부로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2절을 잘 보시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주세요.’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아버지는 둘째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에게도 그때 이미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장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두 배 많았습니다. 여기 아들이 둘이니까, 아버지가 재산을 셋으로 나누어서 두 몫을 큰아들에게 주고, 한 몫을 작은아들에게 준 겁니다. 그러니까 큰아들은 이미 동생보다 두 배가 많은 엄청난 재산을 받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례하고 얼마나 말이 맞지 않습니까?
또한 맏아들은 동생의 죄를 고발합니다.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30)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허랑방탕’과 ‘낭비’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했다가 잘못해서 다 날렸을 수도 있고, 쇼핑 중독에 빠져서 돈을 물 쓰듯 쓰다가 다 없어졌을 수도 있고, 도박에 빠져서 다 허비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엄청나게 비싼 고급 주택과 세계에서 몇 대 없는 최고급 자동차를 사는 데 돈을 다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형은 동생이 돈을 다 낭비한 것을 가리켜 뭐라고 합니까?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라고 단언합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페이스북(Facebook)이나 인스타그램(Instagram) 같은 SNS도 없고,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도 없었는데, 어떻게 동생 사정을 그렇게 잘 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돼지 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스라엘 안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이며 아주 먼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 멀리 있는 동생의 사정을 이렇게 잘 안다는 말입니까? 스파이를 보내서 다 체크하고 있었습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요즘 표현으로 하면 바로 이런 말이 ‘가짜 뉴스’입니다. 비슷한데 사실이 아닌 겁니다. 동생이 잘못했다는 것은 맞는데, 잘못한 내용이 사실과 다른 이런 게 가짜 뉴스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맏아들은 사랑이 없으니까 악한 것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이처럼 악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확실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단언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맏아들을 집어넣어서 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이 됩니다. ‘맏아들은 오래 참지 않고, 온유하지 않으며, 시기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무례히 행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성내며, 악한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같은 내용에 아버지를 넣어서 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이 바로 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의 아버지는 맏아들을 타이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2절)
형은 “이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녀가 두 명 이상인 가정이라면 자녀마다 각각 성격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지금 저희 가정으 아들 하나이지만, 제가 자랄 때 남동생과 같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둘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자녀 중에도 순종적인 자녀가 있는가 하면, 반항적인 자녀가 있습니다. 독립적인 자녀가 있는가 하면, 의존적인 자녀가 있습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형제도 아버지에게 이처럼 다른 성격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소위 ‘착한 아이 증후군(Good Child Syndrome)’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첫째와 맞붙어 싸우거나 야단치거나 훈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따뜻하게 그를 대해줍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왜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 자신이 큰아들과 비슷하다고 느껴지십니까?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눈으로 자기를 봐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사실 건방지고 무례한 아이가 아니라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시 문화에서 어떻게 보면 이 둘째 아들의 욕구는 인간의 발달 단계에 맞는 욕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왜 아버지가 둘째에게 그토록 무기력한 것처럼 대했고 그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들어주었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말로 해서 듣는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체험해보고 깨닫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힐링(치유) 방법은 ‘허락’하고 기다려 준 것입니다. 허락하고 그냥 방관한 게 아니라, 잘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참아줌(인내)’이라는 치유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버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고 바르게 돌아올 때까지, 아닌 걸 알면서도 참아 주며 기다려 준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기다려 주는 사랑’입니다.
[나가는 말]
오래전에 어떤 책에서 굉장히 감명 깊게 읽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경북대학교 13대와 14대 총장과 국회의원도 지낸 박찬석 총장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경남 산청 출신인데, 지금도 그렇게 부유한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 되고 머리도 안 되는 그를 대구로 유학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구중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가 하기 싫었던 그는 반 석차가 68명 중 68등, 즉 꼴등이었습니다. 자기가 교육받지 못한 한을 자녀를 통해 풀고자,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좋은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성적표를 드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등으로 싹 고쳐서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까 친척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했냐?” 물으니,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지. 근데 이번엔 어쩌다 1등을 했나 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식 하나는 잘 뒀네.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지.” 해서 잔치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집이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돼지는 그의 집 재산목록 1호였는데, 그것을 잡아서 잔치했으니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그다음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냥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겁이 난 그는 강으로 달려가 죽어버려야겠다는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하고,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막 때렸다고 합니다.
결국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그는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고, 그로부터 17년 후에는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쯤, 그러니까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그 일에 대해서 이제 솔직히 말하며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한 건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는데,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다 알고 있다. 그만해라. 네 아들이 듣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인 그 부모님의 마음보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이 훨씬 크지만, 그런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사랑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르셔서 지금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모르셔서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허락하시고, 다 알면서도 믿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허락과 그 기다림과 그 인내, 그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힐링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둘째 아들처럼 당돌하게 하나님께 반항하고 멀리 떠날 때, 바로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런 경험을 하도록 허락하시면서 성장하게 해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맏아들처럼 하나님께 분노하고 성내고 무례하게 굴고 폭발할 때, 야단치거나 벌을 내리는 대신, 오래오래 아주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그런 치유자이시며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을 입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를 두었다면, 먼저 내 자녀를 향해 알면서도 허락해 주고 기다리는 것, 알면서도 기다려 주는 겁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내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이웃에게도 그러한 사랑으로 허락과 인내와 기다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진정한 치유를 체험하며 또 그런 치유의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