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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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8Lrxv9QHVP0?si=IHOn1qKo1H5Bv6pm&t=73
2024년 1월 14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 ✦
“만족이 없는 세대”
(마태복음 11장 16~19절)
[들어가는 말]
제가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목회하면서 깜짝 놀라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 중 이전에 교회를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았다는 분들을 만납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숫자가 많이 줄어서 그런지, 교회를 한 번도 안 다녀봤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교회를 한 번도 안 다녀보았다는 분들입니다.
특히 요즘 한국에서는 청소년, 대학생, 청년 중 교회 다니는 사람 비율이 3%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전에 한국교회 교인 숫자가 전 인구의 25% 또는 30%라고 자랑을 했었는데, 지금은 청년층과 청소년층에서 3%나 2%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니까, 정말 앞날이 어둡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한 번도 안 다녀봤다고 하는 분들이 와서 목장에 나오더니, 그다음에는 교회에 나오고, 또 <생명의 삶>까지 듣더니 결국 ‘내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하며 믿고 세례받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참 경이롭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것은 정말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매번 그렇게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하면서 놀라는 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교회 웹사이트에 가 보시면 몇 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중 ‘주일 설교’, ’목회편지‘, ’수요예배‘가 있어서, 설교를 거기에 올립니다. 오래전에는 음성 파일을 올리다가, 코로나 이후에는 비디오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는데, 거기에 제가 설교문을 올립니다. 그런데 조회수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 숫자를 보면 몇십 번 조회해도 놀라운 일인데 100번이 넘어가고, 심지어 몇 년 된 설교를 보면 무려 몇천 번 조회가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찾아보니까 그동안 조회수가 가장 높았던 설교가 6939회였으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누가 그걸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동영상 올려놓은 것은 조회수가 그렇게 높지 않은데, 설교문만 읽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거기 설교를 올리는 이유는 목장에서 설교 요약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라고 올리는 겁니다. 그런데 보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설교 동영상은 안 보고 설교문만 읽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참 놀라운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많이 읽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물론 한 번 볼 때마다 조회수가 올라가기에 같은 사람이 몇 번을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도 그게 몇천 번이라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몇 년 전 코로나 상황 중에 한국에서 갑자기 이메일이 하나 왔는데, 보니까 과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질문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쪽 누군가로부터 고발이 들어왔는데, 저의 설교를 갖다 쓰며 표절했다고 고발했다는 겁니다. 한국 과천에 있는 사람이 여기 미국 오하이오 콜럼버스, 그것도 한국에서 콜럼버스라고 하면 알지도 못하는데, 그런 데 있는 목사의 설교를 어떻게 표절했는지 이상합니다. 그러면서 그게 허락된 것이냐고 문의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오픈된 것이니까 누구든지 볼 수 있다는 정도로 답을 했더니 그다음에는 연락이 안 왔습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의 대학 때 친구가 있는데, 한국 기독교 방송국 피디(PD)입니다. 오랫동안 못 보던 친구인데 갑자기 카톡이 와서 뭔가 했더니, 자기가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다투고 갈라진 것에 대해서 찾아보고 있는데, 인터넷을 찾다 보니 “바나바와 바울의 결별에 관한 진실”이라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쓴 글이 있어서 자기가 봤다면서 연락한 것이었습니다. 그 “훌륭한 목사”(?)가 바로 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우리 교회 웹사이트를 전 세계에서, 특히 한국에서 보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책임감을 가지고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난 대강절 때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살펴보면서, 그 비유의 말씀이 참 좋다는 반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래전 살펴본 적이 있지만, 이번 새해가 되면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란 무엇인가
비유들을 하나씩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비유가 뭔지에 대해 중요한 점들을 먼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
첫째로, 유대인들은 비유를 사용하여 가르치는 것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비유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은 유대 랍비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둘째로, 비유라는 것은 ‘하늘의 의미를 지닌 땅의 이야기’라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인데, 하늘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시기 위해 이 땅의 것을 사용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잘 아는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이끄심으로써 자기들이 내린 그 판단 기준을 자기들의 삶에 스스로 적용하도록 도전하시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방법이 바로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른 다윗을 찾아가서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른 다음에 자기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선지자 나단이 찾아가서 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느 부자는 양들이 많고 가난한 사람은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데, 부자가 그 가난한 사람의 양 한 마리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그랬을 때 다윗이 격분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당장 그놈을 잡아들여라! 어떻게 자기는 양이 많은데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느냐?”라고 분노할 그때 나단이 정색하며 다윗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얼마나 많은 것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남의 아내를 빼앗아서 간음을 저질렀느냐?” 그러니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다윗이 ‘이것은 잘못됐다. 악하다.’ 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한 다음, 그 판단 기준을 다윗 자신에게 적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하시고,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이야기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모든 사람이 도전받으며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듣고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중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고 도전하셨습니다.
2) 비유를 접할 때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첫째, 어떤 비유든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갑자기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속에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특정한 비유를 통해 성경 전체의 메시지와 진리를 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유 하나가 성경 전체의 진리를 모두 대변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개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진리의 한 가지 면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의 어느 특정한 면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5장에 아주 유명한 비유가 나오는데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들이 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아서 외국으로 가 허랑방탕하다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계속 기다려 주시고 사랑으로 또다시 받아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알려주는 교훈과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심판에 대한 비유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이 다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만 이야기하고 사랑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비유가 많은데, 우리가 모든 비유를 다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잘 아는 비유들, 또 잘 알지 못하는 비유들을 앞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 ‘장터 아이들 비유’의 배경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누가복음 7장에도 나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소위 ‘장터 아이들 비유’라고 부릅니다.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아이들이 하던 놀이를 알아야 합니다.
몇십 년 지난 다음 후대 사람들이 지금 우리 세대를 연구할 때 그 당시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놀았나 연구한다고 생각해 보면, 제가 어릴 때 자라면서 많이 하던 것 중 ‘다방구’가 있었고 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만 한 줄 알았더니 저번에 <오징어 게임> 드라마에도 그게 나와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심지어 코로나 기간 중 우리 동네 미국 아이들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 놀이들이 그때 유행했다는 것을 연구해야 그 당시 시대상을 알 수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당시 아이들은 뭘 하고 놀았나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이 하던 게임 중에 ‘결혼식 놀이’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요즘 아이들처럼 무슨 게임기가 있었습니까, 컴퓨터나 인터넷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그냥 놀았는데 그중에 ‘결혼식 놀이’가 있었습니다. 결혼식하는 것을 보면서 흉내내는 놀이입니다. 서로에게 ‘너는 신랑, 너는 신부, 너는 피리 부는 사람, 너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각자 배역을 정하여 역할극을 하며 노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게임으로 ‘장례식 놀이’가 있었습니다. 죽은 메뚜기를 땅에 묻으면서 몇몇 아이들은 장송곡을 부르며 슬퍼하고, 다른 아이들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역할을 하는 놀이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에 나오는 ‘장터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시던 상황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의 사역이 사람들 사이에서 큰 논쟁을 일으키던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7장을 보면 그 배경이 나옵니다.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눅 7:29-30)
보통 백성뿐 아니라 세리와 창녀같이 사회에서 가장 천한 계층이며 죄인이라고 질타를 받던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와서 회개하며 그가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베푸는 세례만 받으면 신통력이 있어서 저절로 죄 용서받는 게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통회하고 죄를 회개하면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걸 왜 받느냐? 죄인이 아닌데 왜 회개의 세례를 받느냐?’라고 교만하게 나옴으로써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준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6-17절)
예수님은 장터에서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노는 것을 보셨습니다. 장터를 지나가시다가 아이들이 흔하게 하는 그런 놀이들을 보시면서, 세례 요한과 자신에 대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강퍅한 마음을 그런 놀이를 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른 무리의 아이들에게 “얘들아, 우리 같이 결혼식 놀이를 하자.”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그룹 아이들은 “오늘은 우리가 별로 즐겁지 않아서 못 하겠어.”라고 대답합니다. 마음이 좋지 않다고 하니까 첫 번째 그룹 아이들이 또 말합니다. “좋아, 그렇다면 장례식 놀이를 하자.” 그러나 두 번째 그룹 아이들은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은 슬프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도 못 하겠어.”
즐겁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한마디로 놀기 싫다는 겁니다. 첫 번째 그룹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무슨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든지 상관없이, 두 번째 그룹 아이들은 아무 놀이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주목해서 보셨습니다. 아이들의 놀이 자체를 보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 내키는 대로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태도를 보신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놀고 싶으면 놀고, 놀기 싫으면 어떤 변명이든 대면서 안 놀려고 하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3. ‘장터 아이들 비유’의 해석
1) ‘우리’와 ‘너희’는 누구인가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장송곡을 부르며 애통해했지만,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피리를 부셨지만 사람들은 춤추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에 안 내킨다는 것입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8-19절)
하늘로부터 온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들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거부했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광야에서 금욕적으로 살며 금식하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떨어져 인간으로서 즐길 수 있는 낙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멀리하니, 귀신 들렸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니까 귀신 들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심지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더럽고 부정하게 여기며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도 미쳤다.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아주 질이 안 좋은 천한 것들하고만 어울리는 자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중에서도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를 거부했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선포하시며 오라고 하시는 초청도 거부했습니다.
사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죄 사함을 받는 회개를 하고, 그다음에 주님의 천국 잔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세례를 받은 세리들, 창녀들, 천한 사람들, 죄인들,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나니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런 것 필요없다. 우리는 의인인데 뭘 회개하느냐?’ 하며 세례 요한의 세례를 거부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거부했고, 결국 그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회개한 사람은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이는 천국 잔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진심으로 내 죄를 고백하며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 맞추어 하나님이 ‘이것은 죄다.’라고 하실 때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한자어로도 ‘회개’는 ‘후회’하고 ‘개선’ 즉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회개한 사람은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 아무 행동이 없거나, 회개했다고 하는데 전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회개했을 때 기쁨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면 금방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3-4)
천국을 소유하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위로를 받으려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애통하며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런 척하라는 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고 오직 주님밖에 없다고 하며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완전히 파산했다고 고백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애통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애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개 없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회개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볼 때 정말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되고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는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 같은 죄인에게도 선물로 주어진 이 천국의 기쁨으로 인해 춤을 추며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회개의 선포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라는 초청도 거부합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인이다. 죄인이다.’라고 하면 싫어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천국 잔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라고 하는데 왜 거부합니까?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라고 성경 말씀에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롬 3:10). 반면에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하라고 권해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안 옵니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라고 해도 싫어하고, 회개를 안 하니까 즉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니까 용서받은 죄인들이 초대받은 천국 잔치가 열려도 관심이 없습니다. 또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인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려고 하셔도 그보다 훨씬 덜 좋은 것인데도 그게 좋다고 거기에 심취해서 가장 좋은 것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경우야 그렇다고 해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우리도 혹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초청하고 싶어 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고 싶어 하셔도, 여러 가지 변명을 대면서 거절하는 경우가 없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하는 것 일상생활 중에서 보통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직장이나 사업이나 학업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이나 자기의 개인 시간에 주로 뭘 하며 지내는가를 돌아볼 때, 나의 인생을 바꿀 만한 일을 지금 하고 계십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 중에 정말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일, 이 세상에 아주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일, 또 내가 천국까지 가져갈 수 있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과연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 최고의 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관계인데 무슨 관계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 묵상과 큐티를 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처럼 말씀 묵상, 기도, 예배, 봉사, 교제, 전도와 같은 것들은 우리 삶의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아주 최고의 일들입니다.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크리스천이 하기 싫은데 마지못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이 바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최고의 유익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 그런 것들을 할 때, 즉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릴 때 그게 유익이 안 되겠습니까? 그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안 하려고 합니까? 왜 안 합니까?
그런 일을 할 때 우리는 천국의 엄청난 기쁨과 감격과 평안을 맛보며 춤추게 됩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제가 볼 때 모든 문제는 하나님만 제대로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삶이 복잡하고 꼬이는 겁니다.
세계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뽑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입니다. 마이클 조던이 저에게 같이 농구하자고 초청하는데 ‘나는 오늘 농구할 기분이 아니라서 하기 싫어요.’라고 한다면 잘하는 일입니까?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곳 OSU 출신의 잭 니클러스(Jack Nicklaus)도 있고 타이거 우즈(Tiger Woods) 같은 선수도 있는데 얼마나 뛰어납니까? 그런 선수가 와서 나와 같이 골프를 쳐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 바쁘기 때문에 당신과 골프를 쳐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제정신이겠습니까?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국 최고인 손흥민 선수가 와서 같이 축구해주겠다고 초대하는데 ‘나는 지금 드라마를 봐야 하기에 안 되겠다.’라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무리 비판하더라도 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통령이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오늘 저녁은 안 됩니다. 내 스케줄에는 다음 달에나 시간이 납니다. 특별히 같이 먹어주려고 했는데 안 됐군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만일 실제로 그런 초청을 받았는데도 그런 식으로 거절한다면 얼마나 바보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 나와 만자자.’라고 초청하시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싫어요.’ 하고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시는 예배에의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만약에 ‘이건 이래서 못 하고, 저건 저래서 못한다.’라고 변명하며 핑계를 댄다면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변명이 없습니다. 순종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애통하면 가슴을 치고, 피리를 불면 춤을 추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니까 변명도 많고 핑계도 많고 이유도 많습니다. 주님의 놀이가 얼마나 재미있고 나에게 유익한지를 모르니까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놀이에 초청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초청받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으로 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 거절하고 ‘나는 다른 놀이가 더 좋다.’라고 그것을 선택하면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천국 잔치, 주님의 놀이에 참여하면 가장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 재미를 체험해 본 사람은 그 주님의 놀이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최고의 존재이신 우리 주님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외로 나쁜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일 수도 있고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Good to Great>이라는 책도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좋은 일(good)에 둘러싸여 있어서, 최고의 일(best)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최고의 것을 해야 좋지 않습니까? 최고의 것을 하는 것이 나에게 제일 좋은 게 아닙니까? 그런데 좋은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거기에 빠져서 그런 것을 하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최고의 것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최고의 것을 주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좋은 것에 만족하면서 이게 더 좋은 줄 알고 ‘나는 이거면 됐습니다.’ 하며 지금 살고 있다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1짜리를 들고 있는데, 거기다가 $100짜리를 주어도 절대 안 놓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게 더 좋은 거라고 하며 거부합니다. $1짜리를 자기 생명과 같은 돈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포기하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바보 같지 않습니까? $100이 훨씬 좋은 것인데, 그 $1짜리를 놓지 않습니다. 저걸 가지면 더 좋은 것인데(물론 둘 다 가지면 더 좋지만), 이걸 안 놓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최고의 것을 ‘자, 나와 같이 하자.’라고 하시는데, ‘나는 그거 싫어요. 난 이걸 하겠어요.’라고 훨씬 못 한 것, 상대도 안 되는 것에 빠져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2)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속담을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를 마치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b). 이 말은, 하나님의 지혜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옳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 음식이 맛있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먹어보지 않은 수만 명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의견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안 먹어본 사람들이 ‘비주얼을 보니까 맛있을 것 같다.’라고 하거나 ‘보니까 별로 맛없을 것 같다.’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이라도 그것을 먹어본 사람이 맛있다고 하는 것에 권위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악어 꼬리 튀김’(Fried Alligator's Tail)을 드셔보신 분이 계십니까? 오래전 제가 먹어봤는데, 닭고기와 조금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쫄깃쫄깃하고 또 기름기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아, 악어 꼬리 튀김이 그런 거구나.’ 하며 지금 감이 약간 오실 텐데,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안 드셔보셨으면 ‘악어 꼬리 튀김, 그거 별로다. 벌써 이름부터 안 좋다. 별로 먹을 필요도 없고, 안 좋다.’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거 너무 맛있는 거다. 나도 먹고 싶다.’라고 아무리 의견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안 먹어봤으니까. 그래서 그런 유행어도 있지 않았습니까? “안 해봤으면 말을 마세요.” 먹어본 제가 ‘맛있었습니다.’라고 하면, 안 먹어본 사람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말을 듣겠습니까, 먹어본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판하고 거부해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삶과 메시지를 보면, 또한 그들의 삶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이상한 사람이며 귀신 들렸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도전을 주었습니다. 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삶을 봤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며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이든 100% 틀린 사람, 100% 옳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잘못된 점이 다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말할 때도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고, 그 사람이 한 어떤 행동이나 말이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과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과 전혀 다른 이단적인 교훈과 사상을 가르친다면 그런 잘못을 잘 지적하면서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달라도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비판하면서 못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격려해 주고 함께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타일 문제 때문에 틀렸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인데 자꾸 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면 틀렸다고 하는데,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것입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은 다른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그다음 날인 주일 설교를 맡아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청년이 와서 막 시끄럽게 기타를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어권 청년이었는데, 기타를 잘 치면 몰라도 잘 치지 못하는 겁니다. 저도 기타를 칠 줄 아니까, 딱 들어봐도 이건 좀 아닙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시끄럽게 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옆에 있는 넓은 홀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굉장히 방해가 됐습니다. 제 사무실에서 가까워서 그 음악이 상당히 거슬렀습니다. 찬양을 굉장히 좋아하고 기타도 좋아하지만 그렇게 시끄럽고 도발적인 스타일은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친구가 왜 저렇게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날 저녁 모임 때 찬양 시간이 있는데 그것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몇 시간을 먼저 일찍 와서 혼자 연습을 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지나가다가 화장실에 가기에 ‘잘 지내냐? 무엇을 연습하냐?’라고 했더니, 너무 시끄럽지 않았느냐고 하며 죄송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사실은 기타를 친 지가 너무 오래됐는데도 찬양을 맡았기에, 손이 잘 안 돌아가서 미리 시간을 내어 와서 연습한 것이니 양해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간 찔렸습니다.
그 음악이 좀 시끄럽고 스타일이 제가 좋아하는 게 아니며 제 귀에 거슬렸다고 해서 그게 틀린 것입니까? 영어권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돕는 데 사용되는 것이니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를 뿐입니다. 예, 옳은 것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적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억울하게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고, 결국 그것은 제대로 풀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길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행동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다 느끼게 됩니다. 정말로 옳다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막 변명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다 판단해 주십니다. 그리고 선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애통할 때 가슴을 치고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삶,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삶을 통해 삶의 열매를 맺고, 그러한 열매를 통해 옳다 인정함을 받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