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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3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5 ✦
“뭘 해도 잘되는 사람”
(사무엘하 8장 1~18절)
[들어가는 말]
요즘 많이 하는 말 가운데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된다.”라는 게 있습니다.
될 사람은 뭘 해도 일이 잘 풀려서 잘되고, 안 될 사람은 뭘 해도 일이 꼬여서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될 사람은 뭘 해도 어차피 자동으로 잘될 운명인 게 아니고, 또 안 될 사람은 뭘 해도 어차피 자동으로 안 될 운명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운명론에 기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바뀌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을 보면 단순히 운만 좋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 일이 안 풀리는 사람도 단순히 운이 나쁜 이유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되려면 분명히 운이 따라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되는 사람을 보십시오. 엄청난 노력파입니다. 노력을 안 하는데 저절로 잘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노력을 하더라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지만, 잘 안 되는 사람을 보면 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잘되는 것입니다. 또 일이 잘 안 될 때도 그냥 일이 안 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일이 안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 일이 잘 안 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좋고 더 좋은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이 안 되도록 하나님이 막으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될 사람은 된다.’라고 하는 말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뭘 해도 잘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전쟁을 벌일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고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아무리 훌륭한 군대라도 어떻게 매번 다 이깁니까? 그런데 그는 매번 이깁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다윗의 전쟁과 승리 (1~14절)
오늘 본문을 둘로 나누어보면, 앞부분에는 다윗의 전쟁과 승리에 대해 나옵니다.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는데 그 첫 번째가 블레셋입니다.
1) 블레셋 정복 (1)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1절)
오늘 본문이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성전 건축의 필요를 느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후손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난 후를 말합니다.
다윗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그 계획을 아는 사람답게 더욱더 적극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이스라엘을 위해 그 원수들을 정복하여 그 무릎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꿇게 만듭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 삼아서 게으르게 살지 않았고 또 교만해지지 않았고, 더욱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힘을 다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진짜로 아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자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러한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넘치는 구원을 체험한 다음에 궁 안에서 편하게 먹고 노는 사람이 아닙니다.
11장에 가면 다윗이 아주 끔찍한 죄를 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유명한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입니다. 그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다윗이 전쟁에 안 나가고 편하게 쉬면서 놀고 있다가 유혹에 넘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 다 됐다.’ 하며 자기가 알아서 살며 잘 먹고 잘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그때부터 매일 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때가 입학식입니다.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구원 또는 ‘받을 구원’, 즉 완전히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매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윗이 처음으로 공격한 곳은 블레셋의 ‘메덱암마’라는 곳입니다. 가지신 성경에 다 주(note)가 달려 있을 겁니다. 제 성경의 주에는 ‘모성의 굴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메덱암마는 모성의 굴레야.’라고 하면, 그래서 그게 뭐라는 겁니까?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또는 이것이 ‘어미의 지배’라는 뜻도 있는데, 그러니까 다른 모든 도시 중 으뜸 가는 도시라는 겁니다.
역대상 18:1을 보면, 이것이 ‘가드와 그 고을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나옵니다. 가드는 당시 다른 블레셋 도시들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우두머리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윗이 이제 블레셋 중심 도시 가드와 그 부속 도시들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실 다윗은 도망자 시절에 이 가드로 피해서 가드 왕 아기스의 보호를 받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 후 왕이 되어서 그곳을 점령하게 됩니다.
다윗 왕국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제일 먼저 정복한 곳이 블레셋인데, 그중에도 메덱암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블레셋은 진작부터 이스라엘 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호수아 정복 전쟁 때 지중해 쪽을 끼고 있던 가드,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등 블레셋의 다섯 개 성읍을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남겨두었더니 거기서 어떤 사람들이 나왔습니까? 가드에서는 거인 골리앗이 나왔고, 가사에서는 삼손을 유혹하게 되는 들릴라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 놓으니까 그것이 화근이 되어 여러 죄악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블레셋 민족이 강해지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고난과 어려움을 안겨 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을 다윗 왕국이 정복한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사울 때도 그랬고, 블레셋이 가장 강한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블레셋과 싸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블레셋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완전히 블레셋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 것을 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공격을 먼저 받으면 수비를 하는 전쟁을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먼저 적을 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국이 제자리를 잡는 사무엘하 8장부터는 다윗의 전쟁이 선제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인 것을 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전쟁 그 자체보다 영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윗이 주변 나라를 공격하고 이기는 것은 단순히 잔인한 살육을 하고 다 죽여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의 세력과 싸워서 정복하는 문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단순히 주변 나라 민족들을 다 죽이는 전쟁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시다. 왜 이런 사람들을 다 죽이는가? 왜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고한 생명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말로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악한 민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징계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였다’, ‘멸절시켰다’라고 하지 않고, ‘항복시켰다’, ‘정복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은 블레셋의 메덱암마인데, 이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블레셋은 가드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는 가사, 아스돗, 에그론, 아스글론 등 다섯 성이 연합한 나라인데, 제일 큰 성인 가드를 어머니 성(모성)으로 삼고 나머지 성은 모성 주변에서 띠를 형성하여 굴레 같이 되었다고 해서 메덱암마라고 부른 겁니다. 이 성들은 구성 자체가 정복이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벌일 때도 언덕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이 지역을 정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합 왕으로 제일 먼저 죄의 근본적인 요새에 해당하는 대적의 핵심 부위를 공격한 것입니다. 다윗은 가드에도 있었고, 조금 떨어진 시글락이라는 곳을 가드 왕 아기스가 주어서 거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가드를 비롯해서 블레셋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블레셋 심장부에 들어가서 살아보았고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그 민족이 얼마나 악한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들을 많이 행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증한 것들을 없애기 위해 공격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곳이 적의 요새 중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이곳만 무너뜨리면 나머지는 다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메덱암마는 블레셋 지명이었지만, 메덱암마라는 것이 우리 삶 속에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끊어내지 못하는 죄악, 버리지 못하는 악습,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덮어두고 놓아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표현으로 하면 바로 ‘견고한 진’입니다. 고린도후서에도 나옵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이 우리 마음속에 딱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견고한 진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사탄의 지배와 영향 속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사탄이 장난칠 수 있는 놀이터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견고한 진’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메덱암마’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것을 쳐서 항복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기 밖에 모릅니다. 배우자도 모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러나 사탄이 그것을 통로로 삼아 나를 유혹하고 넘어뜨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돈에 대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명예욕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것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놓지 못하는 것,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붙들고 있는 것,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냥 놓아두는 것입니다. 두려움일 수도 있고, 공포심, 불안, 걱정, 염려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통해 사탄이 역사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덮어두고 그냥 살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한번 해결했다고 다 끝난 게 아닙니다. 그 후에 또 다른 유혹을 받아 다른 것이 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계속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졸업이나 휴가가 없는 것입니다.
2) 모압 정복 (2)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드리니라” (2절)
모압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적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했는데,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에돔, 모압, 암몬 순서입니다. 모압은 이전에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 딸 사이에서 태어난 족속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을 모세가 이끌고 나왔을 때 거짓 선지자 발람을 시켜 이스라엘의 저주를 시도한 나라입니다. 또 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원수로 계속 대적하고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다윗은 모압 사람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들의 키를 줄로 재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군대에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을 다 죽이기 위함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두 줄 길이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 사람은 살렸다’고 되어 있는데, 키가 작은 소년들과 노약자들은 남겨 둔 겁니다.
여기에도 주가 달려 있는데, 2/3는 죽이고 1/3은 살려 두었다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죽인 사람들은 주로 모압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악을 자행하던 자들입니다. 끔찍하게 남들을 습격하여 아주 못된 짓들을 하던 악한 군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차별 살인이 아니라, 모압 군대를 징계하고 그들을 해산시킨 조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잔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전쟁과 달리 다윗이 잔인한 방법으로 포로들을 죽인 것에 대해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유대 전승에는 이런 것이 나옵니다. 모압 왕이 다윗의 부모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입니다. 그 룻이 바로 모압 여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도망자 시절에 자기 부모를 모압 왕에게 모시고 가서 신변 보호를 해달라고 부탁하며 맡기고 왔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이 자기 부모를 죽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수를 갚는 차원에서 징계를 한 것이라고 유대 전승이 전해줍니다.
3) 아람 나라들 정복 (3-8)
다음은 아람 나라들을 칩니다.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3-4절)
이스라엘 북쪽의 아람(시리아)은 통일 왕국을 이루기 전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람은 여러 작은 나라들로 구성되었다가 나중에 통일된 것인데, 그래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람은 통일왕국입니다. 그전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여기 나오는 소바가 아람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습니다.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이 여기 나오는데 그곳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로 약속하신 곳이지만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그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로 갈 때 다윗이 공격한 겁니다. 하맛 왕 도이를 치려고 갈 때 다윗이 기습공격을 한 겁니다.
다윗이 빼앗은 병거와 보병의 수(마병 1700명과 보병 2만 명)는 다윗의 승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사실 다윗의 군대는 병거가 없었습니다. 요즘의 탱크 같은 엄청난 무기인데, 그런 병거를 이끌고 공격해 온 소바 군대와 싸워 큰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의 발 힘줄을 끊은 것은, ‘왕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신 17:16)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병거를 끌 말 100마리만 남겨 두고 나머지 말들에게는 발의 힘줄을 끊어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분명히 율법대로 한다고 했지만 사실 100마리는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엄청나게 신앙적인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맞는) 사람이고, 지금까지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여겨지며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완전히 율법을 지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봅니다.
다윗도 현실과 타협을 합니다. 병거를 획득하니까 그것을 끌 수 있는 말 100마리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발의 힘줄을 끊어서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도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고 우리와 똑같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5-8절)
다메섹(다마스커스)는 소바 남쪽에 위치한 아람의 도시로, 나중에 통일왕국의 수도가 됩니다.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자기들이 있는 북쪽까지 미치게 되자 서로 도와 다윗과 싸웁니다.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돕기 위해 먼저 쳐들어왔고, 다윗은 그들을 물리칩니다.
다메섹은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큰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군대를 다메섹에 두어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비대를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믿음의 사람이고, 늘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시를 쓰고, 노래하고, 예배하는 사람이었던 동시에, 철저한 행정가였고 장군이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팔방미인으로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8장에 기록된 블레셋과 모압과 소바와 아람은 이스라엘의 서쪽과 동쪽과 북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적대국들입니다. 다윗은 이들과의 전쟁 외에도 다른 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다윗의 용맹이나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방패와 놋을 보면 다윗이 전투에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금방패와 놋을 굳이 기록한 이유는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이 재료들이 다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4) 조공을 바치는 하맛 (9-10)
그다음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이러한 치열한 싸움 중에 다윗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보인 나라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무찔렀다 함을 듣고, 도이가 그의 아들 요람을 보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와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무찌름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9-10절)
하맛은 소바 위쪽에 있던 아람의 작은 나라였습니다. 이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전투를 벌였습니다. 다윗이 소바를 물리쳐서 이긴 사건은 소바와 싸우고 있던 하맛에게는 경쟁 상대가 제거된 일이 됩니다. 따라서 하맛 왕 도이는 자기 아들 요람을 보내서 다윗에게 문안하고 축복하여 화친을 맺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화친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잘 봐주십시오.’ 하고 조공을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명성이 이스라엘 북쪽 멀리까지 퍼져 나갔음을 보여줍니다.
5) 주님께 예물을 바치는 다윗 (11-12)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얻은 다윗은 무엇을 합니까?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11-12절)
여기 암몬과 아말렉도 나오지만 그들과 했던 전쟁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이 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세워질 때 사용됩니다. 실제로 성전을 만든 것은 솔로몬이었지만, 사실은 다윗이 일을 미리 다 해놓은 겁니다. 아버지가 다 준비해놓은 것을 가지고 아들이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6) 에돔 정복 (13-14)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마지막 대적은 에돔입니다.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3-14절)
에돔마저 정복한 뒤 다윗은 그곳에 수비대를 두어 다스립니다. 다메섹에도 수비대를 두었는데 여기 에돔에도 둡니다. 에돔은 지금의 요르단 쪽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한 번도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사 시대를 지내면서 계속 적들이 쳐들어와서 하나님이 사사들을 보내주셔서 해결하게 해주셨는데, 계속 다른 민족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사울이 왕일 때도 계속 전쟁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와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계속했지만,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사방의 적들로 거의 멸망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또 사무엘과 사울 시대를 지나면서는 주적이 블레셋이었습니다. 블레셋 때문에 계속해서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처했습니다.
국가가 힘이 없어 사방의 적국들에 시달릴 때 누가 가장 고통을 받습니까? 왕이 아닙니다. 관리들이 아닙니다.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평화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고, 늘 침략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물론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도움도 받지만, 그래도 평생 살아온 자기 집을 떠나 몇 달 동안 외지에서 피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또 언제 포탄이 떨어져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니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회는 그 정도는 저리 가라입니다. 언제 적이 쳐들어와서 자기를 죽일지 늘 불안과 공포에 떨던 삶이었습니다. 평화 시대이면 몰라도 항상 전쟁이 있는 시대라 언제 어떤 민족이 어디서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평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다 누르고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를 거둔 비결이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다윗이 강해서? 아닙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b).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14b). 똑같은 말이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다윗의 싸움을 통해 나타났다는 겁니다. 분명히 승리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다윗이 아무 데도 안 가고 왕궁에서 잘 먹고 잘살고 흥청망청 거리며 있는데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갔습니다. 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다윗의 싸움을 통해 나타났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분명히 역사하셔서 승리를 주시지만, 인간의 노력을 통해 결과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력만 합니다. 기도는 안 하고 노력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얻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노력은 안 하고 기도만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하며 기도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노력만 해도 안 되고 기도만 해도 안 되고,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께 여쭤보면서 하나님의 힘을 얻고 나가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필요 없으십니다. 굳이 우리 같은 연약한 죄인들을 통해서 뭘 이루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냥 혼자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도 굳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자녀로 만드시고, 그뿐 아니라 사명을 주시며 ‘이것 좀 해라.’라고 해주시는 것이 사실 기적입니다.
초자연적인 일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통 기적이라고 하지만, 진짜 기적은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 그것이 기적이라는 겁니다. 내 도움이 전혀 필요가 없으신 분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사실 내가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면 하나님이 더 귀찮으실 겁니다. ‘그냥 나 혼자 하면 되는데 얘는 자기가 뭘 하겠다고 나오지?’라고 하셔야 하는데도, ‘그래, 네가 이것 좀 해줄래?’라고 하시는 것이 은혜라는 겁니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묵묵히 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빤질빤질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데도 ‘저는 못 해요. 안 해요. 바빠요.’라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 기회는 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은 매일 열심히 싸우는 겁니다. 매일 열심히 기도하고 그 힘으로 나가서 매일 열심히 사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주실 것이다.
2. 다윗의 통치와 정부 관리들 (15~18절)
1) 다윗의 정부 관리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들이 되니라” (15-18절)
여기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두 가지만 짚습니다.
첫 번째로 기억할 것은, 다윗이 관리들을 둘 때 항상 두 명씩 두었다는 겁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하겠다는 다윗의 의지가 보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좌파와 우파 각 한 명씩 두 명을 두고 균형을 맞추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좋은 쪽만 쓴 게 아니라 이쪽저쪽을 다 등용했습니다. 소위 탕평책입니다.
두 번째는, 사독이라는 제사장이 있고 또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이 제사장이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아히멜렉이 아버지이고 아비아달이 아들입니다. 그래서 다윗 때 활동한 제사장은 아비아달입니다. 왜냐하면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골리앗 칼을 주는 등 그를 도와주었다고 해서 사울에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의 손을 통해 제사장들을 다 죽일 때 죽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들 아비아달이 유일하게 도망쳐 와서 다윗의 제사장이 되었는데, 그러다 나중에 솔로몬 때 고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성경이 틀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본을 기록할 때 사람들이 이름을 잘못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15절에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유다 지파만을 위한 왕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왕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평’을 베풀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7년 반 동안이나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다스릴 때, 유다 지파가 그를 왕으로 추대해서 그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를 왕으로 세우고 도왔던 유다 지파를 생각하면 마음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자기를 대적해서 열한 지파는 이스보셋 밑에 있는데 유다 지파는 자기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에 유다 지파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 실제로 유다 지파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더 잘하게 마련이고, 특히 어려운 시절에 자기를 도왔던 사람에게는 고마워서라도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치적으로 갈 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새 정부 들어서도 그런 문제가 있지만, 이전 대통령들도 비슷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특히 이전 독재 정권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같이했던 동지들, 온갖 고난을 자기와 함께 겪었던 동지들, 또 자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대통령이 된 다음에 대통령 권한으로 남들보다 더 잘해주거나 특혜를 주거나 정부 고위직에 임명하는 예가 많았습니다. 어느 정권이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누구보다 유능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기업들도 낙하산 인사가 있는데, 회장의 가족이나 친척인 경우 낙하산으로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능하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러니까 능력이 아니라 친분 위주로 그렇게 하는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유다 지파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은 그렇게 해서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모든 지파, 모든 사람들에게 정의와 공평을 행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했습니다.
다윗은 싸움에 능한 장군이었을 뿐 아니라, 정부 조직도 굉장히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한 사람입니다. 그는 밖으로 용맹을 발휘하는 대단한 장수이면서도, 안으로는 그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함으로써 모든 백성에게 원수 정복으로 인한 탈취물의 축복을 고르게 나눠준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좋아하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렸습니다. 이게 다윗의 대단한 점입니다. 이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 나라를 혼자 통치하려는 교만함을 보이지 않고, 적임자들에게 직무를 맡겨 나라를 돌보게 합니다. 자기가 혼자 한 게 아니라 뛰어난 인물을 등용했는데, 그것도 두 명씩 소위 배수로 공천하여 둘이 같이 하게 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 장관, 여호사밧은 다윗 옆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사관, 아히멜렉(사실은 아비아달)은 영적 책임을 맡은 제사장, 스라야는 국가 문서를 담당하는 서기관, 그리고 브나야는 블레셋 일부 민족을 말하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게 합니다.
다윗의 아들들은 국가 행정을 돌보는 대신들이 되게 합니다. 물론 ‘대신들’이라는 말에 주가 달려 있어서 ‘제사장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번역으로 보고,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보는 게 더 맞는다고 보입니다.
2) 다윗의 통치 방식인 정의와 공의
그런데 다윗은 기능적으로만 관리들을 잘 써서 다스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15)라고 하는데, 보통 정의든 공의든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어로도 justice와 righteousness인데 거의 똑같은 말이지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어로 보면 다릅니다. ‘정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생활적 정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체데카’인데, ‘공평’으로도 번역되며 법적 정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미슈파트’는 종종 ‘관습’으로 번역되면서 생활 속에서의 평화(샬롬)를 일으키는 판단을 의미합니다, 반면, ‘공의’라고 번역된 ‘체데카’는 ‘공평’, 즉 법 집행의 공정함(공평함)을 가리킵니다.
감이 잘 안 오실 테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난주 Facebook을 보다가 어떤 분이 기가 막힌 시를 올린 것을 보고 ‘바로 이거구나!’ 하며 이것과 연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경민이라는 시인의 <가는 귀>라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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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한 중늙은이 사내가 큰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지금, 버스예요오.
지그음,
지그음,
지금 삼남에서 출발해요.
엄마아,
엄마아,
엄마는 지금 어디예요?”
일제히 사내를 쏘아보던 승객들이 조용히 눈빛을 거두고
버스는 좀 더 속력을 낸다.
“지금 버스예요!”라고 하니까 승객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 거 시끄러! 조용히 해, 조용히!”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공의’입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타고 가는 버스이니까 시끄럽게 하면 안 되고 조용해야 합니다. 시끄러워서 방해가 되니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 공의(공평)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니까 귀가 잘 안 들리는 노모에게 전화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 소리로 전화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알게 되니까, 뭐라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고, 운전기사도 더 속력을 내서 빨리 가려고 애쓰며 배려해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는 주로 뭡니까? 범죄자들을 잡아넣고 때려잡으며,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여기서 말하는 ‘공의’(체데카)에 가깝고, 진짜 하나님의 ‘정의’(미슈파트)는 평화를 일으키는 정의입니다. 평화(샬롬)와 사랑을 일으키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또 우리 삶에 왜 문제가 많이 일어납니까? ‘공의’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기의 공의입니다. 내가 불편하다 이겁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과 평화를 일으키는 정의보다는 자기의 공의만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일으키는 정의를 추구한다면 우리의 삶이 정말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신실합니다. 편애가 없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또 각자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열정대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역도 목회자나 직분자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정말로 아름다운 우리 자신과 가정과 온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