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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4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4 ✦
“다윗에게 주신 언약”
(사무엘하 7장 1~17절)
[들어가는 말]
어느 나라든지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정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나라의 경제와 국민의 삶도 좋아지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요즘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크게 두 파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렇게 정국이 불안하니까 국민의 마음도 불안하고, 그러다 보니까 경제까지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때로는 아주 심한 말까지 해가며 싸울 수 있다는 자체가 뭘 의미합니까? 일종의 정치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전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그런 것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정권을 향해 비판을 가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 시대였는데, 지금은 정당한 비판을 한다고 잡혀가거나 위협을 받지는 않으니까 좋아진 게 분명합니다.
요즘도 편이 갈라져서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이전보다 나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한 가지 예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한국 국회를 배경으로 하는 광고가 나오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지난 2001년에 뉴질랜드에서 한국 국회의원들끼리 말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옷을 붙들고 물리적으로 충돌하며 막 싸우는 장면이 티브이에 나왔는데, 그것이 뉴스에 나온 게 아니라 광고에 나왔습니다. 막 치고받고 싸우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저렇게 해도 우리 셔츠는 절대로 찢어지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국 정부에서 소송까지 걸었습니다. 한국 국회의 모습을 광고에 쓰지 못하도록 금지해달라고 했는데 패소했습니다. 일반 국민의 모습이 아니라 국회에서 그런 예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해도 괜찮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창피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그런 모습이 안 나오는 걸 보니까 확실히 좋아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는 국회의원들이 하나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자기들의 월급을 올릴 때입니다. 그때는 당과 상관없이 만장일치입니다.
그래도 역시 한국 사회 전체가 완전히 하나 되었던 때가 뉴질랜드 광고가 나온 바로 그 다음 해인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였습니다. 그때는 좌파와 우파가 없었고, 세대 간 갈등이나 남녀 간 갈등이 없었습니다. 월드컵 축구 경기를 통하여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외치며 응원하는 것이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렇게 전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눈으로 나타나게 보여주는 성전입니다. 사실 다윗은 정치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던 다윗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의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서 전체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다윗 언약이 이전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나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과 연결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새 언약’(렘 31장)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 성전을 짓기 원하는 다윗 (1~7절)
1) 다윗의 소원 (1-3)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1절)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게 해주시니까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평안하고 여유가 생길 때 참 이상하게도 바른 방향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만히 두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잡초가 무성한 잡초밭이 됩니다. 땅을 가만히 놓아두면 저절로 아름다운 화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잡초밭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편안하게 가만히 놓아두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잡초밭이 됩니다.
저쪽 뒤에 몇 년 전 공사하면서 농구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회사들도 동원하고 많은 분들이 서로 협력해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놓아두니까 지금은 숲이 되었습니다. 씨들이 날아와서 그것이 땅에 떨어져 자라서, 잡초가 숲처럼 무성하게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놓아두면 사람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잡초밭이 됩니다. 그렇게 잡초밭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와 목장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봉사하고, 삶 공부를 하고, 매일 스스로 성경을 읽고, 큐티하고, 기도하는 것 등이 내 마음이 잡초밭이 되지 않도록 막고 아름다운 화원이 되도록 가꾸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이러한 주일예배입니다. 예배에 나올 이유가 많이 있지만 잡초밭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원이 되도록 기초를 닦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힘들어야지 긴장하고 궤도를 이탈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과 돈이 남아돌고 여유가 생길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착하고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집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이민을 왔다면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사나?’ 유학을 왔다면 ‘내가 과연 영어로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라는 등 걱정이 많았을 겁니다. 특히 어린 자녀를 데리고 왔다면 ‘사랑하는 내 아이를 이 외국에서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혹시 잘못된 길로 나가지는 않을까?’ 굉장히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여 먹고살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니까, 또 그런 중에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해보려고 노력하니까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고 생활이 안정되셨죠? 아주 편안하게 잘 살고 계시는 분도 있고, 약간은 어려워도 처음에 비하면 얼마나 편해졌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잘 적응하며 일을 잘하게 되었을 때, 사업이 안정되었을 때, 학위를 땄을 때, 원하던 길로 나가게 되었을 때, 자녀도 잘 자라서 괜찮은 학교에 보냈을 때, 바로 그때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다 된 게 아닙니다. 그때가 시작입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목표를 잃고 방황하며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이제 먹고살 만하고 등 따시고 배부를 만하면 이상하게 쾌락의 길로 갑니다. 진짜 이상한(?) 방향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에 와서 ‘내가 작은 집이라도 있으면 참 좋겠다.’라고 했는데, 돈을 벌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집을 장만합니다. 그런데 먹고살 만하니까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큰 집, 더 좋은 집을 찾습니다. 차도 웬만하면 되는데, 처음에는 중고차를 몰고 다니며 ‘새 차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최고급 차를 원합니다.
재정에 여유가 생길 때 그만큼 좋은 일에 사용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먹을까? 어떻게 하면 잘 쉴까? 어떻게 하면 좋은 데를 다녀볼까?’ 하며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서 주로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정도 즐거움도 있고 행복도 있겠지만, 진정한 기쁨이 거기에 없습니다. 오히려 허무함, 불안, 염려만 남습니다. 여행도 정말 좋은 데 간 것은 좋은데 또 와야 합니다. 돌아올 때 생각하면 갑갑해집니다. 휴가도 갈 때는 좋은데 올 때는 답답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쉬는 것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좋은 것도 먹고 좋은 데도 다니고 여가를 즐기는 게 필요합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먹고살 만하고 여유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나만 잘 먹고 잘 살까’에만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허무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여유가 생길 때 자기만족만 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나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존경할 만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삶을 내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유가 더 충분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를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적으로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 때가 아니라 잘 풀리고 여유가 생길 때 잘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기를 원하던 바를 이루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때 오히려 위기의식을 느끼며, ‘하나님이 내게 이런 풍성함을 주신 것은 나만 잘 먹고 잘살라고 하신 게 아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동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거기에 다 쏟아부으라는 게 아니라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위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2절)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나단을 아니까 그냥 넘기지만, 여기가 나단이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그냥 ‘선지자’라고만 되어 있지만, 이 사람은 궁중 선지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궁에 거하면서 왕을 위해 돕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을 위해 국가에서 큰 신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이 국가의 운명과 번영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전을 지어서 신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크게 지을수록 좋은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의 복을 많이 경험한 때입니다. 이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미 나라가 안정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안정과 번영을 구하려고 지금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 그럼 왜 그런 마음을 품습니까?
지난번에 본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다 놓은 다음에 주님을 향한 자발적이고도 큰 헌신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고달프고 힘들었던 세월을 지나고, 7년 반 동안 유다 지파만의 왕이었던 것도 청산하고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떵떵거리며 군림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이 미천한 자를 이 자리에까지 올려주신 것은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을 가졌고 ‘무엇보다 이 나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 집은 두로 왕 히람이 최고의 목재인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가 있는 장막은 너무 초라하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의 화려함 여부에 분노하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기는 이토록 좋은 곳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저 초라한 장막에 있다는 것이 다윗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불편함입니다. ‘나만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아서 되겠는가? 하나님의 궤는 저 초라한 곳에 있는데.’
물론 하나님의 궤가 거기 있고 화려하게 건물을 지어놓으면 하나님의 궤에 더 좋은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화려한 성전에 있어야 한다는 화려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자기에게 하나님이 이토록 큰 복을 내려주셨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나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까?’ 하는 마음에서 성전 건축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믿음의 사람은 자기가 지금 누리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 부른 찬양곡 <은혜>의 가사를 생각해보십시오. 목장에서도 그렇고 지난주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면 주로 없다고 하거나, 똑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짜내서 ‘평안히 지내서 감사하다.’라는 정도로 합니다. 그런데 이 가사를 쓰신 분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감사할 생각했을까 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합니다. 내가 태어나 사는 것도 감사하고, 어린아이 시절도 감사하고, 숨 쉬며 사는 것도 감사하고, 이런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이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코로나에 걸려서 호흡 곤란이 오면 숨 쉬는 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숨을 못 쉽니다. 그래서 인도 선교사님도 젊은 분이 코로나로 호흡 곤란이 와서 순교하지 않으셨습니까? 숨 쉬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닙니다. 여름에 더워서 땀이 나고 짜증 나십니까? 땀이 나오는 게 감사한 일입니다. 땀이 안 나와 보십시오. 큰일 납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얼마나 감사의 제목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감사할 게 없고, 만 날 똑같고, 불평불만만 있다면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한 일입니까?
다윗은 그러한 마음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모든 축복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은 결코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베푸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 자기가 한 것이고 다 자기 것인데 어떻게 나누고 베풀겠습니까? 또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일이 잘되어 갈 때 이렇게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나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자꾸 드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하며 살고 있는가?’ 여러분, 좋은 말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축복의 말도 할 수 있고, 민주화나 세계 평화도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뭘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라고 할 때 말은 좋은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특히 잘될 때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늘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얘 때문에 내가 너무 기쁘다.’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3절)
다윗과 함께 있던 선지자 나단도 역시 다윗의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며 다윗에게 동의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가능하며 그 결과로 인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단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이 다윗과 나단의 생각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기특한 생각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는 효자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믿음의 사람이 가진 이런 아름답고 기특한 생각이 하나님의 계획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름답고 기특한 생각을 하는 것이 우선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 의에 몰입될 수가 있습니다. ‘내가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고 나는 정말 믿음이 좋다.’ 하고 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게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과 나단의 생각은 참 귀한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궤는 저렇게 초라한 장막에 있고 나는 이렇게 좋은 궁전에 살고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여쭤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의와 열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생각이지만 하나님이 이때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나쁘다.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응답하실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이런 데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내가 추진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우리가 추진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일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회도 하고 연석회의도 하며 마음을 모아서 함께 추진해 나갑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 먼저 여쭤보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생각에 좋으니까 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으니까 하라고 하셔서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 두 가지가 일치되도록 우리가 매일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2) 나단을 통해 주신 말씀 (4-7)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다윗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4-5절)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그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한 다윗을 제어하시고 바른길로 돌리시기 위해서 나단에게 그 뜻을 급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다윗이 지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6-7절)
‘너는 내가 살 집을 지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성전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는 직접적으로 안 나오지만, 이 장면을 이야기해주는 역대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수많은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려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대상 22:8).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다윗이 전쟁을 많이 해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전쟁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쟁을 해야 합니다. 다윗 때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평안을 누리기는 했지만, 압살롬의 반역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의 때는 지을 때가 아니다. 네가 할 일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게 너의 사명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인 네 아들 솔로몬이 지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진실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 건축을 계획하셨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 자체가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전은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에 의해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요 2:19).
평화의 시기에 성전을 짓는 것이지, 아무 때나 짓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다른 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도 그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가 있었던 성막을 말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출애굽 한 이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 둘 회막(장막)을 만들었습니다(출 33:7). 영어로는 Tent of Meeting 또는 Tabernacle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로 수백 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궤는 계속해서 장막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건축을 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의미만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어디나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그렇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성전 모형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최근에 제임스 웹(James Webb) 우주 망원경으로 전달된 사진들을 보면 우주가 정말 경이롭습니다. 저 멀리 우리가 도달할 수도 없는 곳의 사진이 전달되어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미국에서만도 여기서 저기 가는 데에 몇 시간씩 걸리고 얼마나 넓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거리라고 칠 수도 없을 정도로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온 우주가 하나님의 성전 모형으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진 성막의 모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 작은 성막에 함께해주겠다고 하시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주셨습니다. 이후에 그 성전의 모형은 솔로몬 성전으로 이어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성전 안에 가두어지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솔로몬도 성전을 다 짓고 헌당할 때 바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지은 건물 안에 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와서 기도하면 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상징으로서의 건물인 것이지, 그 안에 사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당시 그 주변 민족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 민족들은 무엇을 합니까? 주로 신전을 지어놓고 자기 신들의 우상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놓고는 거기 가서 빕니다. 자기 소원을 빌며 제사를 드립니다.
그게 바로 우상 숭배인데, 우상 숭배의 특징이 딱 그겁니다. 어디 한 군데에 신을 모셔 놓고, 평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자기가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신전으로 가서 신전 안에 있는 신에게 자기 원하는 바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 숭배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한 군데 계셔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가서 산타 클로즈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면 척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가르쳐주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좀 더 두시고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우상 숭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만 계십니까? 교회는 성전이 아닌데 ‘성전 건축’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거룩한 건물’이라는 의미로 성전은 맞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면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교회당 안에서 주일에 모일 때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아멘, 아멘’ 하며 은혜 받고, 돌아가서 내 삶 속에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우상 숭배 신앙입니다. 여기만 하나님이 계시고 내 삶 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 신앙을 갖지 않도록 조심시키시기 위하여 지금은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사흘 만에 세우겠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몸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요 2:21).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3:16).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모신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령을 통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거기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오면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하나님의 성전이 진짜로 완성될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고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새 성전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어 그의 백성과 함께 영원히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계 21:1-4). 그게 하나님의 진짜 성전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그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그의 백성과 함께하심을 성전의 모델을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건물에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신 당신의 백성과 늘 함께하시며, 그들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높임을 받으시고 또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갈 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또 동시에 교회를 같이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또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를 사랑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2. 다윗 언약 (8~17절)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실 다윗을 보실 때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래서 성전 건축을 지금은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네가 나의 집을 짓겠다고? 아니다. 내가 너의 집을 지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다윗은 진짜 집, 즉 건물을 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집, 즉 그의 가문을 영원하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로,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8-9절)
실제로 그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해졌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국기를 보면 별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그 별이 무슨 별입니까? 그 별의 이름이 바로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왕, 이상적인 왕으로 꼽히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열왕기를 읽어 보면 특히 유다 왕들을 누구와 비교합니까? 다윗입니다. ‘다윗과 같지 않았다.’ 또는 ‘다윗의 길을 걸었다.’라고 하며 항상 다윗과 비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을 위해 한 곳을 정하여 심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0절)
이 ‘한 곳’은 이제 예루살렘이 분명합니다. 모세 때는 어디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도 옮겨오고 성전도 앞으로 지을 텐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와서 예배하는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임이 드러납니다. 이제 방황과 환란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사 시대의 혼란과 같은 때는 오지 않을 것이며, 평안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실제로 다윗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 고대 근동의 정세가 굉장히 조용했습니다. 여호수아 때 주신 말씀이 뭡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좌 즉 서쪽에는 이집트가 있습니다. 또 우 즉 동쪽에는 메소포타미아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집트 나일강 문명과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끼여서 영향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는데, 다윗 때는 두 쪽이 다 조용했습니다. 이집트는 26대 왕조가 쇠퇴해 가고 있었고, 메소포타미아는 앗시리아가 아직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는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우연하게 보입니다. 역사를 볼 때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것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셋째로,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1절)
네 번째로, 다윗의 죽음 이후 그 씨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2절)
당장은 이것이 솔로몬을 의미하고, 계속해서 그의 후손들, 특히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섯째로,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3절)
바로 ‘그’가 당장은 솔로몬을 의미하는데,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는 말씀을 보면 이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4-15절)
이러한 모든 복은 결국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6절)
바로 이 말씀이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은 솔로몬에게 일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마 1:1)이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자(요 2:19-22)였으며, 영원한 왕국이 그에게 속했고(엡 5:5), 하나님의 아들(막 1:1)이었다.
그렇다면 이 다윗 언약이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때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10).
둘째로, 왕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엡 1:3). 다윗에게 주신 이 모든 복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곳에 거하는 자들은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왕 같은 지위와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9).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가거나 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넷째로, 어떤 위협과 공격이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 때문에 곤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를 늘 돌아보면서, 바로 이런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이런 믿음으로 매일 담대하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