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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L-ddAiWuRQc?t=284

 

 

202271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3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때 일어난 일

(사무엘하 61~23)

 

[들어가는 말]

 

옛날 역사를 읽어 보면 왕들이 자기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수도를 옮기거나 왕궁을 짓는 일을 한 적이 많습니다. 한국도 조선말에 귀족들 때문에 왕권이 많이 약해졌을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했습니다. 그것은 궁을 짓는 일을 통해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우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국도 지난 2004년 행정 수도를 서울에서 충청권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었습니다. 그때 국회에서도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그해 가을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이 나와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수도 이전 계획이 없어졌는데, 그 대신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안으로 변경되어 세종시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행정 수도를 이전하겠다고 한 의도는, 지금까지의 기득권층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층을 구성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왕궁을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법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 나라의 한가운데 들어와야 하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거기에는 다윗의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되면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데 큰 힘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법궤가 있는 곳으로 순례를 가서 제사드려야 했는데,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법궤가 있어서 그리로 순례를 오게 되면 그만큼 통치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궤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윗은 이제 그것을 자기가 있는 다윗성(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 합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 후 다윗은 법궤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시도를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 다시 옮겨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해 보면, 다윗이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길들이며 움직이려고 하다가, 반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길들여지고 움직여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앞부분(1-11)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한 1차 시도가 있고 거기에 그로 인한 재앙적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리고 뒷부분(12-23)에서는 법궤 운반을 위한 2차 시도가 있고, 또 그로 인한 재앙적 결과가 따라옵니다.

 

 

1.   하나님의 궤 운반을 위한 1차 시도 (1~11)

 

1)  법궤 운반 시작 (1-5)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1)

 

블레셋 정벌(5)을 무사히 마친 다윗은 이제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나라를 새롭게 할 선한 목적을 가지고 3만 명의 사람들을 모아서 보냅니다. 사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데 있어서 이렇게 3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동원할 필요는 없는데, 이것은 궤를 옮기는 것을 전 국가적 행사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어서 처음에는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7년 반 동안 헤브론에서 다스렸습니다. 그러다 그 후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국에서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법궤를 옮기는 일에 참여시킴으로써 이 기회를 통해 통일 왕국의 왕으로서 전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결속시키는 목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궤를 옮겨온다는 것이 아주 영적인 일이고 훌륭한 일인데, 사실은 이것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2)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무엘이 어릴 때 제사장이 엘리였는데, 그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궤를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가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그대로 패하고 빼앗겼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궤를 보관하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성에 재앙을 내리시니까, 그들이 두려워하며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약 20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습니다(삼상 7:1-2).

 

여기 바알레유다라는 곳은 아비나답의 집이 있는 기럇여아림의 옛날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블레셋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궤를 돌려받아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가리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고 지극히 거룩한 것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법궤를 예루살렘(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앞의 5장에서는 정치, 군사, 외교, 집안 등 모든 분야에서 다윗이 번성했다고 보여주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종교적인 번영의 증거로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눈으로도 보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윗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자기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줍니까? 사람에게.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번영의 상징으로 보여주고, 영적 상징을 통해서 오히려 정치적으로 온 이스라엘을 자기 밑에서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궤를 옮겨오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이 아직 열한 지파에게는 약하니까 이것을 통해 온 이스라엘을 확 잡으려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거룩한 궤를 모셔 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서의 최선인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3-5)

 

다윗은 궤 하나를 옮기는 데 있어 3만 명이나 되는 신실한 사람들을 이스라엘에서 뽑아서 엄선하여 동원했습니다. 그것을 옮길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게 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지키라고 했다고 되어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아비나답이 웃사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시대를 계산해볼 때 웃사와 아효가 아들이 아니라 아비나답의 손자라고도 봅니다. 어쨌든 그 집안사람인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도록 한 겁니다.

 

또한 여기 보면 악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악기들을 동원하여 궤 앞에서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 있고, 그 외에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즉 요즘 말로는 엄청난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고, 또 찬양대가 있습니다. 엄청난 모습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도 웅장한 장면입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의 율법을 통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만 채로 어깨에 메서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레위 후손들 중에도 고핫 자손들만이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도록 정하셨습니다(4:15).

 

하나님의 궤는 오래 전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블레셋을 재앙을 내리시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게 되었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이 오랫동안 지켜왔습니다. 웃사와 아효는 아비나답의 아들들(혹은 손자들)인데, 이들은 레위인이었지만 수레를 메고 가도록 정해진 고핫 자손은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다윗과 신하들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서 새 수레를 사용합니다. 굉장한 노력을 한 것입니다. 새로 만들어 온 겁니다.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습니까?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찬양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법대로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훌륭했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하지 않은 겁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도 감동하시겠지.’라고 생각한 겁니다. 항상 이런 자기 나름대로의 최선’,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의 최선이 항상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순종하려면 철저히 순종해야지, 내 생각에 이럴 것이라고 할 때 항상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또 이렇게 아무리 엄청난 찬양밴드가 찬양집회를 인도하거나, 장비가 엄청나게 비싼 것을 사용하거나, 몇 백 명이나 되는 성가대와 엄청난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어서 찬양을 부르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벌써 7년 전인데 제가 한국에 안식월로 갔을 때 제가 잘 아는 선배가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였습니다. 사실 가장 큰 초대형교회 중 하나였는데, 그때 저에게 낮에 드리는 수요예배에 와서 설교하라고 해서 갔습니다. 그 전에 다른 대형교회에서도 인턴을 했었지만, 그런 교회들을 보면 예배 코디네이터가 있습니다. 분 단위로 예배 시간을 잘라서 관리합니다. 몇 분부터 몇 분까지는 뭘 한다는 게 정해져서, 그 시간이 넘어가면 사인을 줍니다. 저도 30분 정도 설교하라고 했는데 그게 넘어가니까 사인을 보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다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다 보면 자칫 잘못될 때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고 시간 따지는 것과 자기들이 하는 일로 맞춰질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하는데, 몇 분에 끝나야 하고 몇 분부터 몇 분까지 뭘 해야 하고 그다음 팀이 준비하고 있다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 등에 신경을 쓰다 보면 어떻게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가 하나의 쇼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 데 대해 안타까움이 있는데,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겉으로는 굉장히 은혜롭습니다. 찬양팀이 얼마나 수준이 높습니까? 찬양대나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얼마나 높습니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이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위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큰 교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겉으로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설교 듣고 다 하는데, 그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데에 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해야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영적이라고 하는 일에 있어서, 내 눈에 아름다운가,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가를 항상 잘 기억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 눈에 잘 보일 것인지,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재앙적 결과: 웃사의 죽음 (6-11)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6-7)

 

소들이 뛰어서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무의식적으로 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궤를 보거나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율법)을 어긴 것입니다(4:15).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만진 웃사를 치시니까 그가 바로 죽습니다. 웃사는 자신의 잘못으로 죽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절대적인 주권이 있음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생하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면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궤를 만졌다고 웃사라는 사람을 거기서 그냥 죽이냐? 하나님이 너무 하시다. 아니, 사실 다윗이 하라고 해서 그랬으니 그가 잘못한 것인데, 왜 다윗은 멀쩡하고 웃사가 죽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랬는지 우리는 정확히 100%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웃사가 잘못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왜 이러시나?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게 아닌가?’가 아니라 나는 왜 안 죽나?’입니다.

 

솔직히 웃사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얼마나 형편없이 신앙생활을 하며 예배를 드립니까? 그런데도 멀쩡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해야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다윗을 향한 경고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사용하는 방법은 놀랍게도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에 궤를 실어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사용한 방법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래전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취급했던 방법을,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따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방인의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올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선한 목적을 이루려면 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방법은 우리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큰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도 이것은 좋은 일이니까 하자고 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고 이웃과의 관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기업들도 몇 년 전까지는 일을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른 일을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어떤 일을 바르고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8)

 

베레스웃사웃사를 치다라는 뜻인데,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분이 났습니다. 다윗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겁니까? 법궤를 괜히 잡았다가 죽은 웃사에게 화가 났습니까? 아니면 웃사를 치신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까? 이것은 웃사를 치신 하나님께 화가 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분노입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데서 온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면서 무엇을 원했습니까?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이제 내가 이렇게 영적으로도 훌륭한 왕이며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하시며 함께하시는 왕이다.’ 하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좌절된 겁니다. 그러니까 화가 난 겁니다. 자기 계획이 좌절되니까 화가 난 겁니다. 종교적 성공의 증거를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화가 난 적이 있으십니까? 마구 분노한 것은 아니더라도 서운한 것, 섭섭한 것, 실망한 것 등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실망하면 일단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도 안 읽습니다. 읽고 싶지도 않고 또 기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왜 화가 나나? 왜 서운한가? 왜 실망이 되나? 그것이 정당한 분노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으셨다.’라고 실망할 때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정말로 옳은 기도 제목이었는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이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아닌가?’ 그게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가끔 대학 입학시험에 만점 받았다거나 1등을 한 학생들이 인터뷰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잠을 충분히 자고 학교공부만 충실히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교회에 다니는 학생이 그렇게 일등을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엄청 띄워 줍니다. ‘신앙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OOO 학생!’ 그러면서 간증집회에 불려 다닙니다.

 

그런데 일등을 하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높아지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높아져서 타락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일이 잘 풀리니까 그냥 타락해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버린 사람이 대다수라는 겁니다. 그럼 그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을까?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안 해주셔도 실망할 것도 없고 화가 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 잘 아시니까 더 좋은 것을 주실 게 분명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것을 해달라고 구해놓고는 안 주시니까 화가 난다면 그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 제목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잘못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다른 기도로 바꿔주십니다. 그런데 내가 고집하는 것을 계속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의 기도 제목은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부모님과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까? 조금 젊은 분들도 질병이 생기면 회복을 위해서 같이 기도합니다.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괜찮지만, 왜 건강하려고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정말 회복되었는데, 그 후에 이상한 짓을 하며 돌아다닌다면 그 건강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왜 원하는지 잘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9)

 

여기에 다윗의 위대한 점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로 경배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때까지는 무서워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직접 경험하게 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있을 때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참 좋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0-11)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으로 궤를 옮겨오기를 중단하고 일단 법궤를 오밷에돔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잘못 해석한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하면 안 되나 보다.’ 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궤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올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할 때 올바른 방법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궤는 축복의 상징이지 벌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런데 웃사의 죽음 때문에 두려워서 잘못 이해하여 궤를 다른 곳에 두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5장에서 다윗은 정치, 외교, 가문,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궤만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면 종교적으로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뜻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실 것이다.’ 하고 간주해 버렸고, 그래서 무엇이 빠져 버렸습니까? 5장만 해도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이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항상 여쭤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쭤봤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들이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지.’라고 자기 짐작으로 추진했습니다. 율법도 소홀히 하며 자기 생각대로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건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동원해서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잘못을 범합니다. 하나님을 그저 내가 필요할 때 불러서 부리는 종과 같은 분, 아니면 산타클로스처럼 선물 꾸러미를 들고 와서 내가 원하는 선물을 척척 내주시는 분, 또는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척척 해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진짜 아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궤 운반을 위한 2차 시도 (12~23)

 

1)  법궤 운반 재개 (12-19)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2)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푸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용기를 얻고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옮기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윗과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준비하고 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합니다(대상 15:2-3). 율법에 나온 그대로 합니다. 그전에도 알았을 텐데 괜찮겠지하고 흥분해서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율법에 나온 대로 합니다.

 

오늘 사무엘하 6장 본문에는 레위 사람들이 메고 갔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상 15장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영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자기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3-15)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먼저 여섯 걸음을 시험적으로 걷게 합니다. 여섯 걸음을 걸은 다음 제사를 드리는데, 그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웃사가 궤를 만지다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봤는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혹시 오늘도 잘못되어 누가 죽는 게 아닌가?’ 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여섯 걸음 걷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면서 소와 숫양을 각각 일곱 마리씩 제물로 드리는데(대상 15:26), 하나님이 법궤를 옮길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시 하나님 말씀 그대로 하니까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한 다윗은, 그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를 가까이 누리게 된 사실 때문에 너무나 기뻐합니다. 이렇게 한 결과는 환호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이뤄졌을 때 기뻐하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6)

 

온 이스라엘 백성, 특히 예루살렘 백성이 다 나와서 환호하고 찬양하고 나팔 불고 즐겁게 뛰놀고 있는데, 미갈은 그것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다들 기뻐할 때 전혀 기뻐하지 않는 한 사람, 그게 바로 미갈입니다. 미갈은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에 업신여깁니다. 미갈의 이러한 반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6절에서 미갈을 뭐라고 부릅니까?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합니다. 미갈이 다윗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그녀가 사울 집안을 대표하고 사울의 관점에서 이 일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믿음의 눈이 아니라 불순종의 눈으로, 세속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도 생전에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법궤를 자신의 수도 기브아로 옮겨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럇여아림에 그대로 방치해 둔 겁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궤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될까, 어떻게 하면 왕권을 유지할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미갈이 바로 그러한 자기 아버지 사울의 시각으로 보니까 다윗이 못마땅하게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있는 다윗을 볼 때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꼭 저렇게 해야 되나?’

 

혹시 그런 마음이 든 적 있으십니까?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그런 마음이 들었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진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어야지 자기 기분에 취해서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정말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경배하고 뜨겁게 기도하는데 믿어도 꼭 저렇게 믿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게 곧 미갈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을 향해서 꼭 저렇게 해야 되나?’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미갈의 이러한 업신여김을 알지 못하는 다윗은 자신이 정성을 다해 마련한 여호와의 장막 안, 지성소에 그 궤를 넣어두고 여호와를 향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7-19)

 

이것은 다윗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하나님이시며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으로서, 손을 들어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그들에게 은혜로운 선물까지 나눠줍니다.

 

 

2)  재앙적 결과: 미갈의 불임 (20-23)

 

이렇게 다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리, 무리가 남녀를 막론하고 전부 모여 기뻐하는 이 자리에 빠진 한 사람이 미갈입니다. 재앙적 결과가 그런 그녀에게 임합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0)

 

구약성경은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쓰는 적이 없습니다. 신약도 그렇지만 특히 구약은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왜 반복해서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의미를 주는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백성을 축복하는 것만 책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가정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축복하려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쁨과 기대함으로 돌아온 그 가정은,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갈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사랑했던 아내 미갈은 큰 기쁨은커녕 다윗을 향한 조롱을 퍼붓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라고 한 말은 다윗이 춤을 춘 행동이 아주 영광스러우셨습니다!’라고 반어적으로 비꼬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꼴 보기 싫은 행동을 하면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하는데, 정말 그러는 게 아니라 비꼬는 말입니다.

 

미갈은 다윗이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방탕한 자 같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자 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미천한 자들 앞에서 그렇게 했다고 비난하는 겁니다. 체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미갈이 신경 쓰는 건 뭡니까? 왕으로서의 명성(reputation)과 체통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왕답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명성이 흉잡힐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기쁨의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다 같이 기뻐하는 것은 안중에 없고, 그냥 다윗이 잘못했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갈의 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1-22)

 

미갈의 말에 대한 다윗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미갈의 동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기쁨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이것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미갈의 아비 사울을 버리시고 자신을 택하시고 높이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인한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다윗과 미갈 사이의 개인적 대화가 아니라, 이 대화를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 때문에 사울의 집안은 망하고 무엇 때문에 다윗의 집안은 흥할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 천하게 낮아져야 하지만, 자신의 그 같은 낮아짐에 대해 그래도 네가 걱정하는 계집종에게서는 높임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며 더 높아질 것을 언급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뛰놀면 하나님이 알아서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계속 사람의 눈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23)

 

이것 때문에 다윗이 미갈과 관계가 나빠져서 다시는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아 자식이 없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여자에게 자녀는 하나님의 복으로 약속된 것이었기 때문에(28:1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 다윗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미갈이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법에 따라 저주를 받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갈은 이스라엘의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사울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다른 부인들보다 얼마나 더 높은 여자입니까? 게다가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과 제일 처음 결혼했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갈보다 더 높고 화려한 지위를 가진 여자는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다윗의 아내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다윗의 사랑도 빼앗기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첫째로는, 미갈이 우상 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9장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니까 미갈이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도망가게 하고 침상에 사람 모양의 우상을 취해서 눕혀 놓고 그것이 다윗인 것처럼 꾸미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 크기나 되는 우상을 집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아니고 우상 숭배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미갈은 하나님의 임재가 다윗과 예루살렘에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몰랐습니다만일 미갈이 그 중요성을 알았더라면 백성들과 함께 궤가 들어올 때 나가서 함께 참여해서 찬양하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만 빠졌습니다. ‘나는 저런 거 싫다.’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셋째로, 미갈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춤춘 다윗을 비난하며 업신여겼는데, 그것은 사람의 시선만 중요하게 여겼지 하나님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높아져야 자기도 높아지는데 사람들이 다윗을 이상하다고 보면 자기도 이상하게 되는 거니까, 사람들의 눈만을 너무 의식했고 하나님의 눈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미갈처럼 좋은 환경과 조건 가운데 태어나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졌더라도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면 저주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갈이나 다윗이나 사실은 다 죄인입니다. 다 실수를 범했습니다. 다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가 죄를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이켰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실패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궤를 옮길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결코 완벽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실수하고 죄를 짓고 끔찍한 일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즉시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바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실수하고, 죄도 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시지 않는 것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갈과 같은 길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길로 갈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다윗처럼 즉시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목적은 결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목적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에 있었다면, 구원받고 바로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 땅에서 주님이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살 때 그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으면 그 인생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면서도 내 생각을 좇아 이익만 따라 살고 있다면, 실제로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는 악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깨닫고 늘 주님 앞에 계속 돌아오며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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